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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베트남 밀월 속 불행한 유산
최호림 한국동남아연구소 전임연구위원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33년이 지났다. 한국은 미국에 이어 베트남전 최대 파병국이었다. 한국군 파병은 1964년 4월 발표된 미국의 ‘More Flags Campaign’의 선상에서 추진되었다. 최초의 파병은 1964년 10월, 130명의 의무병으로 구성된 이동외과병원과 10명의 태권도 교관단이 붕따우(VungTau)에 도착한 것이었다. 1965년 2월, 비전투부대인 공병 및 건설지원단 약 2,000명으로 구성된 비둘기부대가 보내지면서 파병이 본격화되었다. 1965년 10월, 해병 청룡부대와 육군 맹호부대 약 2만 명이 뀌넌(Qui Nhon)에 상륙하여 미국으로부터 전술 책임 지역을 인수받았다. 1966년 4월에는 혜산진부대가 전투사단을 편성하여 파견되었고 1966년 8월에 백마부대가 깜란(Cam Ranh)만에 상륙하였다. 1966년 4월 맹호부대 추가 파병에 이어 1967년 6월 병력 보충을 위해 3,000명 추가 파병 등이 이루어졌다. 1971년11월 한국과 남베트남 정부 간 단계적인 한국군 철수에 합의한 후 철수를 시작하여, 1973년 3월에 완전 철수하였다. 이로써 베트남 파견 한국군은 연인원 32만5,517명이었으며, 베트남 주재 병력은 최다 5만 명에 이르렀다. 그들 가운데 약 5,000명은 주검으로, 약 1만6,000명은 부상을 입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베트남전은 한국-베트남 관계와 양국 국민에 무엇을 남겼는가?
베트남 내 한류, 대중들의 한국 인식 통로
2003년 9월 방한하였던 판 반 카이(Phan Van Khai) 베트남 총리는 베트남의 역사를 통틀어 한국과의 관계처럼 빠르게 대외 관계가 발전했던 적은 없다고 평가하였다. 2001년 8월에는 쩐득르엉(Tran DucLuong) 국가주석이 방한하여 ‘21세기 포괄적 동반자 관계’ 구축에 합의한 바 있다. 2000년 이후에만 양국 정상회담이 5번 개최되었고, 장관급 인사 교류가 70회 이상에 이른다. 특히 단기간 내 고도성장을 이룩한 한국의 경제발전상을 베트남 경제개발 모델로 선정하고 개발 경험 전수를 적극 희망하고 있다. 양국은 1992년 12월 22일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한 이후 현재까지 정치, 외교, 경제, 문화교류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밀월(蜜月)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1992년 수교 당시 4억9,000만 달러에 불과하던 양국 간 교역량은 15년 만에 13배 이상 증가하여 2007년에는 65억8,000만 달러에 달하게 되었다. 한국은 베트남의 제6위 교역대상국이다. 2007년 9월까지 한국의 대(對)베트남 투자는 110억 달러로 한국은 베트남에서 제1위의 투자국이다. 현재 베트남에 약 1,500개의 한국 기업이 진출하여 약 30만 명의 베트남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다. 베트남은 한국의 대외 원조 규모의 11.4%를 점유하여 1위 이라크에 이어 제2위 수원국이다.
2007년 9월 현재 베트남에 체류하고 있는 한국인은 공식 통계에 따르면 약 3만7,000명이지만, 비공식 집계로는 5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베트남의 웬만한 소수민족보다 많은 한국인이 베트남에 살고 있다. 2007년에 42만여 명의 한국인이 베트남을 여행하여 중국 다음으로 많은 관광객이 베트남을 찾았다. 한편,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여 한국으로 이주한 베트남 여성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2000년 95명으로 시작하였으나 2003년 1,403명, 2005년 5,822명, 2006년 1만131명 등으로 증가해 왔다. 베트남은 이제 한국 남성의 ‘처가’ 국가로서 양국은 사돈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한국에서 일하는 베트남 이주노동자의 경우,소위 ‘미등록 불법 체류’ 이주자를 포함할 때, 현재 5만 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은 말레이시아와 대만 다음으로 많은 베트남 이주노동자의 수용국이다.
베트남 내 ‘한류’는 베트남 대중들이 한국에 대해 인식하는 주요한 통로가 되고 있다. 베트남 국영TV와 지방의 방송국을 통해 한국 드라마를 거의 매일 한두 편씩 방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대장금>, <주몽> 등이 큰 인기를 얻었다. 극장에서도 한국 영화가 다수 상영되고 있다. 한국의 인기 연예인 관련 잡지도 다수 발행되고, 드라마 출연진의 의상과 소품들을 모방한 제품도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여러 매체를 통해 한국의 연예가 소식도 한국과 큰 시차 없이 전파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정부나 투자업체들은 베트남 소비 시장에서 한국 상품을 고급 제품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가령, LG가 가전제품과 화장품 시장에서 수년간 판매율 1위를 고수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삼성 애니콜 휴대폰이 고가품으로 인식되어 특히, 청년층, 신흥 부자들과 고위 공무원들에게 인기가 높다.
한국은 베트남에 대하여 무상원조를 비롯한 경제지원도 다각적으로 확대해 왔다. 이 중에 특히 병원과 학교를 무상으로 건립하는 사업은 주로 한국군 참전 지역에 집중되어 왔다. 2001~2004년에 40개 초등학교 건립 및 병원 건설에 500만 달러를 지원하고, 과거사 화해와 관련된 지원사업을 추진해 왔다. 현재, 꽝남(Quang Nam)성에 종합병원을 건립하고 (3,500만 달러), 다 낭(Da Nang) 시에 한-베 친선 IT대학을 설립하는(1,000만 달러) 등 최대 규모의 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정부는 이러한 무상지원사업이 지역에 잠재해 있던 ‘반한 감정’을 순화하는 데에 기여해 왔다고 평가하고 있다. 2008년에도 900만 달러 이상의 무상원조계획을 시행하고 있다. 시민단체나 민간인의 지원사업도 지속되고 있는데, ‘월남전참전 전우복지회’는 2000년 4월 베트남전 당시 격전지인 중부 디엔즈엉(Dien Duong) 촌에 위령비를 건립하였다.
한국 정부나 외교부, 그리고 베트남과 관련된 자료를 다루는 공식 기관에서는 베트남 국민의 대한(對韓) 인식에 대해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다.
먼저, 과거 한국의 베트남전 참여에 대한인식과 관련하여, “베트남 민족은 불교의 영향으로 과거 문제에 집착치 않고 매우 현실적”이어서 현재 베트남전 참전과 관련한 감정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거의 없는 것으로 관찰된다고 표현하고 있다. 베트남은 1945년 프랑스와의 전쟁 후 바로 프랑스와 수교하였고, 1975년 베트남 공산화와 통일 직후 미국에게 수교를 제의한 바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에 대해서도 미래지향적인 발전을 위해 협력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 정부의 공식 입장은 베트남 국민 대부분도 한국의 경제발전 기적, 한국의 대(對)베트남 지원사업 추진, ‘한류’ 등의 영향으로 오히려 우호적 또는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치유되지 않는 전쟁의 상처
이와 같이 두 국가 간의 공식 관계나 민간교류의 많은 부분이 개선되고 급속도로 발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으 로 인한 불행한 과거의 유산을 안고 있다. 민간인 학살 의혹, 참전 군인들의 신체적, 정신적 상해와 실종자 문제, 베트남 내 한인 2세 문제를 비롯하여 양국 모두에는 아직도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현재 1만5,000여 명의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 환자를 비롯하여 10만여 명의 고엽제 피해자와 1만6,000여 명의 전쟁 부상자는 지금도 참전의 상처를 안고 살고 있으며, 그 상처가 대물림될까 하는 두려움에 가슴을 조이는 사람도 많다.
국방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한국군 사망자는 5,066명, 실종자는 8명, 포로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32만여 명이나 파병하였는 데도 포로가 없고 실종자가 극소수라는 점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필자가 만난 참전용사들 대부분은 국방부의 공식 발표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였다. 월남전참전전우회, 베트남전참전유공전우회, 고엽제전우회 등 참전용사 단체에서 운영하는 웹 사이트에는 어떻게 포로가 없을 수 있냐고 되묻는 의견이 간혹 올라오기도 하였다. 전투병으로 참가한 어떤 사람은, 누군가 방송에서 포로는 없었고 탈영병들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는 정말로 분노가 치밀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소위 ‘라이따이한(lai dai han)’은 베트남 전쟁 기간 중 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를 말한다. 혼혈이라는 용어는 비하적인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어서, ‘한인2세’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현재 베트남에 거주하는 한인2세는 약 3000명에서 3만 명까지로 추산되고 있다. 오랫동안 한국인 아버지가 자녀를 돌볼 수 없었고, 한국 정부도 이들에 대한 후원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990년대 들어 일부 자선단체와 종교계에서 기술학교를 세워 이들의 교육을 지원하고 있으며, 2006년부터는 인터넷 사이트를 활용하여 한인2세 부모 찾기 자원봉사활동을 하는 참전용사도 일부 있다.
이와 같은 전쟁의 상처 중에서 양국 국민과 민간교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는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의혹일 것이다.
미국군에 의한 미라이(My Lai) 학살이 공식적으로 확인되고 세계적으로 알려졌지만,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한국군에 의한 학살 의혹은 미국인에 의해 일찌감치 제기 된 바 있다. 1976년 마이클 존스 부부가 청룡부대 주둔 지역에서 42건에 걸쳐 약 3,800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1999년 5월, <한겨레21>의 베트남 주재 통신원이었던 구수정 씨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 문제를 보도하면서 큰 관심을 불러모으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폭로는 과 베트남 현지보도를 인용한 것으로서, 1969년 10월 14일, 판랑(Phan Rang) 지역 링썬(Linh Son)사 스님들을 향해 총기를 휘둘러 4명이 사망하였다는 것이었다. <한겨레21>은 이어서 1966년 1월 23일부터 2월 26일까지 맹호부대에 의해 빈딩(BinhDinh)성 떠이썬(Tay Son) 현 떠이빙(Tay Binh) 마을에서 1,200명의 주 민이 학살당했다고 보도하였다. 이후 “베트남의 원혼을 기억하라”, “미군보다 잔인했던 용병” 등의 베트남전 참전과 학살에 관한 특집기사가 연재되었고, 일부 참전 군인들의 회고담과 참회록도 실렸다.
베트남 문화통신부는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자 수는 약 5,000명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구수정 씨를 비롯한 일부 급진적인 연 구자와 시민단체는 실사를 통해, 지역에 따라 현지 주민들이 주장하는 희생자 수는 베트남 정부가 공인한 수의 두 배가 넘는 경우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당시 주월한국군 총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장군은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것이 한국군의 기본 전략방침이었기 때문에 민간인 학살 주장에 동의할 수 없으며, 베트남인들의 일방적 주장이므로 죽은 자들이 민간인인지 아닌지 입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민간인 학살 주장이 한국인과 월남간의 이간책으로서, 당시 북한에서 파견한 심리전 요원에 의해 기획되었다고 하였다.
이 문제는 1999~2000년 내내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대단한 문제였다. 베트남전 양민학살 진상규명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약 2년 에 걸쳐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인도적인 보상과 지원을 요구하는 캠페인도 벌어졌다. 이에 많은 시민단체와 시민들이 호응하였다. 2000년 벽두에는 850명의 진보계 인사들은 “베트남 민중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합니다”라는 제하의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반발한 참전 군인들은 한겨레신문사에 난입하기에 이르렀고, 두 진영은첨예하게 대립하였다. 2000년 12월 베트남전 진실위원회는 군사평론가 협회와 공동으로 대토론회를 개최하였으나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불행한 과거에 대한 새로운 ‘기억 만들기’
민간인 학살 의혹과 관련한 논쟁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베트남전 참전의 성격과 사회경제적 영향에 관한 좌우의 논쟁도 재개되기 시작하였다.
이한우 박사가 2006년 발표한 <한국이 보는 베트남 전쟁: 쟁점과 논의>이라는 논문에서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듯이,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전의 성격, 참전 요인과 결과 및 사회적 영향 등에 관하여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어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여 왔다. 베트남전이 자유수호 전쟁인가 아니면 민족해방 전쟁인가, 한국군은 자유수호 용사인가 아니면 베트남 민족해방과 통일을 가로막은 용병인가 등에 관한 논쟁이 뜨거워졌다. 파 병으로 인한 한국 사회의 안보적, 외교적 효과에 대한 평가도 극명하게 나뉘고 있다.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의 경제적 효과는 직접적인 외화 수입과 간접적 이익을 포함하여 20억 달러 정도로 추산된다. 그러나 경제적 이득의 의미에 대해서는, ‘조국 근대화’의 기반이 되었음을 강 조하는 입장과, 이에 동원된 한국 젊은이들의 희생에 주목하는 입장으로 크게 대별된다. 자유수호론자들은 베트남전 특수가 ‘한강의 기 적’을 만들어낸 유일무이한 에너지였다고까지 평가하기도 하였다. 민족해방론자들은 도덕적 문제를 미루어두고 실리만을 계산하더라도 그 피의 대가가 오히려 부족하였다고 평가한다.
참전군인들은 대부분 ‘양민학살’, ‘미국의 용병’ 등 비판적 역사 이해는 자신들의 명예를 짓밟는 잘못된 역사인식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자의든 타의든 관계없이 참전이 명예로운 것만은 아니며, 특히 인권의 측면에서 부끄러운 전쟁이라는 점을 수긍하기도 한다. 주로 전투에 직접 참가한 일반 사병으로 구성된 월남전참전전우회는 이라크전 파병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한국과 베트남이 1992년 수교한 이후 16년 동안 양국 간의 관계는 다양한 측면에서 급속하게 발전해 왔다. 그러나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으로 인한 과거의 상처가 양국 관계의 어둠의 요소로 잠재해 있다. “과거를 덮어두고 미래를 향한다”는 베트남의 속담처럼 미래의 행복한 밀월을 꿈꾸면서 과거의 불행한 회우를 덮어둘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1990년대 후반 들어 한국 정부의 입장도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1998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은 베트남을 방문한 자리에서 “양국 간의 불행했던 과거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하였고, 2001년 8월 방한한 쩐득르엉(Tran Duc Luong) 주석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우회적으로 공식 사과하였다. 이에 국내 보수적 언론과 인사들은 반(反)대한민국적 역사관의 표출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이처럼 근래에 와서도 베트남 전쟁이 자유수호 전쟁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인사들은 정부의 입장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고,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이 전통적 시각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베트남 전쟁 참전과 관련한 미해결의 과제를 안고 있다. 베트남전의 성격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뿐만 아니라 민간인 학살 과 관련된 의혹과 진상규명, 인권 차원의 논쟁은 참전군인의 명예와 보상 문제와 뒤엉켜 있지만 영원히 덮을 수는 없는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1999년부터 본격화된 민간인 학살 진실규명의 노력 결과 현장을 찾는 작업이 계속되기도 하였지만, 양국의 당사자 사이에는 커다란 인식의 벽이 여전하다. 과거의 과오가 있다면 덮어두기만 하기보다, 후세에게 역사의 교훈을 전하고 반성적 극복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망각할 수 없는 상처와 기억을 가진 개인들이 아직도 많이 생존해 있으며 이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과거의 역사와 경험을 사람들이 기억하는 데, 공식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은 특정의 기억 방식을 인정하거나 억압한다. 어느 사회에서나 이 러한 현상은 있다. 베트남의 경우에도 위대한 민족정신으로 외세를 물리친 고난의 역사, 승리의 역사와 관련된 기억을 공식 기억으로서 인정하고자 한다. “조국이 그의 공을 기억한다(To quoc ghi cong)”는 표현에 압축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비해 베트남에서는 인적인 회고록 등을 통해 개인적이고 대안적인 기억 방식도 비교적 많이 표현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상호 주관적으로 형성되며, 동일한 사건에 대한 주관적 의미는 개인에 따라 상이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상이함이 특정의 정치적, 사회적인 상황에서는 억압된다는 점이다. 개인의 경험과 인식에 의해 형성된 개인사는 ‘공식 역사’의 음모와 포섭에 의해 종종 굴절된 모습으로 투영되기도 하지만, 그것에 대한 부정과 반작용의 측면 또한 무한히 잠재되어 있다. 베트남 전쟁 또한 체험한 개인과 그 시대를 산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혹은 잊어야 하는 기억으로 각인되어 왔다. 같은 시대를 살았더라도 개개인의 구체적인 삶의 굴곡과 경험의 지평들은 의심할 바 없이 엄청난 다양성과 편린을 지니고 있었을 터이지만, 적어도 그들의 경험과 기억이 국가 주도의 이념과 관련된 사안이라면 그것의 다양성과 차이는 무 시되거나 억압되어 왔다. 전쟁에 관한 기억들에는 한편으로는 ‘역사’로서 제도화되는 기억이 있는가 하면, 회상되지도 못하고 망각된 채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지배집단들이 소수집단들의 기억들을 억압하는 것을 설명하고자 ‘organized forgetting’이라는 개념을 사용하 기도 한다. 어떤 전쟁의 기억들은 조직적으로 회피되고 망각되며, 다른 기억들은 과장되고 조작되어 거대 담론의 정면에 정치적으로 부각 되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서 적어도 1990년대 초까지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가장 지배적인 기억 방식은 망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의 인구가 3,000만에 못 미쳤으니 인구 100명 중 한 명 이상 꼴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1980 년대까지 베트남전의 실상에 대해 배운 바가 없었다. 후세들에게 공식적인 역사로서 상세한 과정을 알려주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망각 이 지배적인 기억 방식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최근에 베트남 전적지 답사 관광을 통해 스스로 기억 재현 작업을 하는 참전군인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참전전우들이 자발적으로 운영하고 참여하는 블로그나 인터넷 사이트도 활성화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참전용사들의 ‘기억 만들기’라는 대안적인 정치적 실천으로 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것이 지배적인 기억 방식, 혹은 집단망각의 헤게모니를 극복하고 대안적 역사를 만들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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