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천민은 성씨없이 돌쇠,떡쇠, 끝세, 개똥이, 향단이 등 이름으로만 불리웠는데 조선후기 족보를 위조하거나, 1909년 일제가 민적법 시행시 성씨가 없던 상,천민들에게 원하는 성씨의 호적을 다 주었는데, 그 때 가장 인기 있던 성씨가 흔하면서도 유명한 "김이박 등등"이였습니다. 그래서 유명성씨가 더욱 흔해지게 된 것입니다.
일제가 성이 없던 밑바닥 천민(노비)계층에게 그들이 신청하는 대로 유명성씨의 호적을 준것은 조선의 양반성씨들이 씨족별로 단결하는 것을 방해하고, 노비를 양민화 시켜서 수탈의 대상을 늘이기 위한 식민통치정책의 일환이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현재 품성과 생김새가 천한데~ 성씨로 양반입네 떠드는 사람들은 양반집의 돌쇠이였거나, 그 마을 개똥이"였을 확률이 높으니, 그 사람의 품행으로 양천을 판단해야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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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지축마골피가 천민성씨라는 것은
일제의 1909년 민적법이란은 민족분열정책에 편승하여 흔한성씨로 위장할 수 있던 종놈들이 입지보전책으로 퍼트린 유언비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성씨 千方池秋馬高皮는 소수이지만 고려때부터 있던 귀한 양반성씨일 뿐입니다....조선말과 일제시대에 대다수 성씨도 없던 상,천민층들이 숨어도 들키지 않을만한 흔한 양반성씨로 호적을 신청해 가지면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양반들이 되었는데....혹 양반으로 숨어든 것이 들키기도 할까봐 비교적 숫자가 적은 양반가문이 천민이였다라는 역사왜곡의 유언비어를 퍼트린 것으로 보여집니다.
일례로 연못지(池)자를 쓰는 충주지씨는 고려때부터 역사서에 기록된 명문가로써 36명 문화평장사, 전공판서 상원수 지용수장군, 충의군 지용기 장군,조선조는 병조참판 지여해, 충정절제사 지정, 도승지 지덕해, 광복군총사령관 지청천장군 등 천년을 이어온 무반 명문세족으로 유명하구요. 태조대왕의 첫째사돈(진안대군 장인)은 찬성사 지윤, 인조대왕의 사돈(여동생 남편)은 한성판윤 지계최 로 충주지씨 였군요. 왕의 사돈이 천민이였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또한 이순신 장군의 처가 방씨이고요. 장인은 방진으로 당시의 현감. 그리고 천씨의 중시조는 천만리 장군으로 화산군 책봉을 받았군요...((((이들의 공통점은 전부 일본에서 우리나라를 지킨 호국충신들이지요))) 왜 이런 말이 일제시대에 생겼는지 잘 생각해 보시지요. ^^
* 상기성씨 주요인물
천만리 :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도운 명나라 장수, 화산군 책봉
방현령 : 조선후기 대사헌
지용수 : 고려의 일등공신, 충무공 시호
마천목 : 조선의 개국공신 영의정
피득창 : 조선의 개국공신 병조판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시대 성관별 과거급제자 찾아보세요.
천민은 과거에 응시조차 할수 없었으나 상기성씨들은 벼슬아치 및 고위관료들이 있는 귀한성씨일뿐이군요.
재미있는 점은 연못지(池)자를 쓰는 충주지씨의 경우는 무반계열에서는 조선의 유명명문가문들(전주이씨, 안동권씨, 파평윤씨 등등) 보다도 인구비례대비 2~3배나 급제자가 많습니다. 놀라운 사실이지요.. 아마도 충주지씨의 무과급제자가 많은 사유는 천년간 이어온 호국충신의 전통 때문으로 판단됩니다...
천방지축마골피는 일제강점기 노비 후손들이 퍼트린 루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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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지축(추)마골피 란? 일제강점기 "일제의 민족분열정책과 성씨도 없던 대다수 상천민들의 입지보전책, 한글만 알고 한자을 모르는 무식함에서 퍼진 속설입니다".....
원래 天方地丑馬骨皮는 조선조 천대받던 직업을 지칭하는 말이였고, 성씨 千方池秋馬葛(高)皮는 고려때부터 있던 귀한 양반성씨입니다..
즉, 조선시대 천시받던 직업은 하늘천-天(무당업), (본뜰방)-方(목수업), (따지)-地(지관업), (소축/추할추)丑(소백정업), (말마)-馬(말백정업), (뼈골)-骨(뼈백정업), (가죽피)-皮(가죽백정업)이란 뜻이며,
이들 업종에 종사하던 천민은 자신 직업의 한자를 자신의 호칭으로 쓰기도 하다가 1909년 일제의 민적법 시행시 주로 유명성이나 주인성을 호적으로 만들어 가졌답니다..
일제가 성이 없던 밑바닥 천민(노비)계층에게 그들이 신청하는 대로 양반성씨의 호적을 준것은 조선의 양반들이 씨족별로 단결하는 것을 방해하고, 노비를 양민화 시켜서 수탈의 대상을 늘이기 위한 식민통치정책의 일환이였다고 합니다.
이런 속설이 퍼지게 된 이유는 1)일제강점기 민족분열정책, 2)이에 편승한 대다수 성씨도 없던 노비, 백정들이 숨어도 들키지 않을 흔한 유명대성에 편입되면서 입지보전책. 3)그당시의 대다수 한자를 구분 못하는 문맹의 국민수준이 이런 웃끼는 역사왜곡의 속설이 퍼지게 된 것이라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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