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법칙 쉽게 말하면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우리는 인과의 법칙을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théorie de la production conditionnée'
'théorie(이론) la production(발생) conditionnée(조건지어진) '
(불어로 연기론은 조건화되어 일어나는 일로 번역한다.)
dependency arising
영어로 보면 즉 일어나는 모든일들에는 서로 의존하고 있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뜻이다.
불교는 연기론을 말한다. 석가모니의 최초 깨달음은 연기였다.
연기라는 것은 아주 쉽게 말해서 일어나는 모든일들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주에는 혼자 일어나는 일은 없으면 그것은 무수한 원인에 의한 결과라는 것이다.
나는 왜 아플까? 신의 형벌인가? 고대인들부터 교회에 다니는 신도까지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 편하기 때문이다.
석가모님의 깨달음은 초능력을 쓰는 깨달음이 아니다. 무슨 대단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상식적이다. 그래서 위대한 것이다.
예전에 부처를 인가해준다는 무슨 단체인가에 대해 누군가 물었다. 자기 아버지 중풍을 나을수있냐고
나는 침묵했다. 그 후 그는 사기를 당했다며 나에게 하소연을 했다. 나는 침묵했다.
한심한 일이다. 병은 병원에서 치료하면 되는 것이다. 그들이 병을 그렇게 잘 고치면 병원을
세우면 될일이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모든것은 원인과 결과가 있기 때문에 그 원인을 바로 알면 결과를 이해하고 다시는
나쁜업을 짓지 않는다는 것이 깨달음이다. 뭐이런 것이 깨달음이냐고 우습게 생각할수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본다면 엄청난 깨달음인것이다.
이 깨달음의 중심에 연기론이 있다.
힌두교에 따르면 우주는 생성, 발전, 소멸을 반복한다. 브라흐마신이 우주를 생성하고 비슈누신이 우주를 유지, 발전시키며 시바신이 우주를 소멸시킨다. 마치 계절이 바뀌듯 우주의 시간도 바뀌어 결국에는 낡은 우주가 소멸되고 새로운 우주가 만들어진다.
비슈누신의 화신을 석가모니라고도 한다.
힌두교의 윤회윤회(산스크리트어: संसार,Samsara)는 돌아간다는 뜻이다. 흔히 수레바퀴로 상징된다. 수레바퀴가 한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가듯 인간 역시 이 번 생애에서 다음 생애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힌두교의 교의에 의하면 인간 역시 우주 안에서 끊임없이 낳고 죽기를 반복하며 윤회한다. 인간이라 하더라도 다음 생애에는 짐승으로 태어 나기도 하며 천신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수없이 많은 윤회의 과정에서 사람은 한 인생을 살면서 쌓은 업(산스크리트어: Karma)에 의해 다음 생애가 결정된다. 다르마에 따른 삶을 살다 죽으면 다음 생애에는 보다 고귀한 존재로 태어난다. 다르마에 어긋나는 삶을 살면 고귀한 존재라 할지라도 다음 생애에는 비천한 존재로 태어난다.
아트만힌두교에서 생명은 숨과 같은 의미로 쓰였으며 아트만의 원래 뜻은 숨쉰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생명을 목숨으로 표현하는 것과 유사하다. 숨쉬는 생명 아트만(산스크리트어: आत्मञ्,Atman)은 '나'를 말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윤회하는 삶에서 지금의 나는 '참된 나'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윤회를 거치는 동안 내가 쌓은 업(산스크리트어: Karma, 業)에 의한 것이다. '참된 나'는 윤회의 과정에서 계속하여 존재하여 없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 '나라는 생명의 본질'을 뜻한다.
카르마카르마(산스크리트어: Karma)는 업(業)으로 한역(漢譯)된다.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업에는 다르마(산스크리트어: Dharma)에 마땅한 업과 다르마를 거스르는 업이 있다. 선업(善業)으로 한역(漢譯)되는 '선한' 카르마는 다르마에 마땅한 업을 쌓는 것을 의미하며 선업을 쌓으면 다음 윤회에 보다 존귀한 존재가 된다. 다르마를 거스르는 악업(惡業)을 쌓으면 다음 윤회에 보다 미천한 존재가 된다.
윤회라는 것의 비과학성은 바로 이점에 있다. 내가 어떤 물리적 과정을 가쳐 다른 생명체로 태어나느냐 이다.
관념적으로는 이해가 가도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점은 믿음으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불교의 거의 유일한 비과학성이 윤회이다. 그러나 윤회는 연기론적인 세계관을 띠고 있다.
우리가 다시 태어나던지 안하던지를 떠나서 우리가 한 행동이나 우리의 말은 무의식적으로 이 세계에 영향을 준다.
그 영향이 에너지로 인간의 기억이 아닌 무의식으로 잠재해서 세상을 변화할수도 있는 것이다.
'즉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행동을 누군가의 영향에 의해 지배받을수 있는 것이다'
연기론은 프로이드의 세계관과 일치하는 지점을 우리는 발견한다.
나가르주나(నాగార్జున, nagarjuna)인도인다. 용수(龍樹, 150년(?) - 250년(?))라고도 하는데 중관(中觀)을 주창한 인도의 불교 승려이다.
용수는 인도 남부의 안드라 주 나가르주나코다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용수는 구마라집과 같이 브라만 출신이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용수는 당시 불경 기록의 주된 언어였던 팔리어 대신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용수는 불교의 초기경전을 연구하여 중관(中觀, Madhyamaka)을 주창하였으며 자신의 사상을 담아 《중론(中論)》을 저술하였다. 중론은 불교의 핵심 사상 중의 하나인 공에 대해 그것이 절대적인 무(無,없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는 연기론의 관계에서 파악 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다 절대 무는 존재할수 없다. 그것은 관념과 상상인것이다.
우리세계는 비어있어도 비어있지 않다. 다만 알지 못하고 보지 못했을 뿐이다.
무수한 원인이 왜 특정한 결과를 낳게 되는가? 과학의 문제이다.
과학은 확률을 제시한다.
그러나 확률은 무엇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통계적인 어떤 근거치로..
기란 연기인것이다. 기란 어떤 원인이 어떤 결과를 가지게 되는지를 혼돈스럽게 이끄는 에너지이다.
'리'理 란 최종적이며 해석적인 요소이다. 리란 이치이다. 이치는 당연과 필요이다.
우연과 필연이며 필연은 우연속에서 변화하는 것이다.
기 와 리는 서로 의존하여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첫댓글 一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