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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들에게 맞서 싸웠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불러 도움을 요청했을 수도 있습니다.
위험하다고 판단해 피했을 수도 있습니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강도들이 떠난 뒤 구조했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어느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용자의 묵상에서 중요한 부분은 다른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사용자는 오늘 경험을 통해,
"상처 입은 사람을 돕는 것"과
"상처 입게 만드는 사람과 직접 마주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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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실제로 현실에서도 그렇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것
폭행 피해자를 치료하는 것
사고 피해자를 구조하는 것
은 매우 고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폭행을 가하는 사람을 제지하는 것
범죄 현장에 개입하는 것
폭력적인 사람과 대치하는 것
은 전혀 다른 종류의 용기와 위험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사용자가 말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 것은 비용과 시간이 들지만,
강도와 맞서는 것은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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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관찰은 현실적으로 맞는 면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오늘 사용자의 경험 때문에 이 비유를 새롭게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왜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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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람과 충돌하는 경험을 하고 나니,
"위험한 상황에 개입하는 것이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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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것을 체감하게 된 것이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유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사마리아인을 본보기로 제시하셨으니까요.
하지만 사용자의 질문은 제사장과 레위인을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마리아인도 인간인데,
위험이 더 커지면 어디까지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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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인간의 한계를 묻는 질문에 가깝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종종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초점은 "사마리아인이 얼마나 용감했는가"보다,
"누가 내 이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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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아니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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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습니다.
즉 비유는 영웅담이라기보다 방향 제시입니다.
사용자의 오늘 경험을 이 비유와 연결해 보면, 아마 사용자가 발견한 것은 사마리아인의 한계라기보다 자신의 한계일 수 있습니다.
"불편한 사람을 돕는 것"은 할 수 있었지만,
"적대적인 사람과 마주했을 때도 같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훨씬 어려웠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 점에서 오늘의 경험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이전보다 더 현실적으로 읽게 만든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사마리아인의 선행만 보였다면, 지금은 "선을 행하는 사람도 위험과 분노, 두려움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라는 인간적인 질문이 함께 보이기 시작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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