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주항쟁 의문사 고 유치준씨 국가기록 첫 발굴
공개된 창원지검 검시사건부에 기록
기념사업회 “사실과 달라 조작” 주장
2015-11-18 수요일
부마항쟁 당시 창원(옛 마산)지역에서 사망한 고(故) 유치준씨의 관련 국가기록이 처음으로 발굴, 공개됐다. 17일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이번에 공개된 자료는 1979년 생산돼 1996년 창원지방검찰청이 작성,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한 ‘검시사건부’다.
검시사건부에는 1979년 10월 19일 마산시 산호동 새한자동차 앞에서 사망한 45세가량의 남성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남성의 신원에 대해서는 본적, 주거, 성명을 전혀 알 수 없으며, 지주막하출혈이 원인이 돼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뿐만 아니라 타살 혐의가 없어 다음 날인 20일 유족에게 인도했다고 적혀 있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정부는 부산·마산에서 사망자가 없다고 발표했지만 지난 2011년 9월 ‘부마민주항쟁특별법 제정을 위한 경남연대’는 유족 증언과 관련 자료, 관련자 진술 등을 근거로 기자회견을 열어 유치준씨가 부마항쟁 사망자라는 사실을 공개했다. 부마항쟁 당시 ‘사망자 3인 의혹’도 제기됐고 관련 보도도 있었지만 구체적인 사망자 명단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본지(당시 경남매일)의 남부희(당시 사회부장)씨와 김현태(기자)씨의 취재자료에 사망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은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10주년 자료집에 실려 있다. 이 기록과 고인의 제적등본 등 각종 자료들과 목격자 진술 등을 토대로 볼 때 이번에 공개된 검시사건부는 유치준씨에 대한 내용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유족과 관계기관은 검시사건부에 기록된 내용들이 실제 사실과는 다르다며 당시에도 이미 사건을 조작·은폐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검시사건부에 기재된 내용과는 달리 유씨의 시신이 유족에게 인도된 것은 11월 2일이었으며, 당시 정부가 유족 몰래 남양외과에서 부검한 결과 사망의 직접적인 사인은 ‘후두부 함몰’이었다. 또 본적과 주거, 성명이 불상인 행려자의 신원을 곧바로 파악해 변사 후 하루 만에 검시와 부검, 사인 규명을 마치고 유족에게 인도할 수 있었는지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더욱 철저한 진상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