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학문은 그 대상과 방법을 통해 고유한 윤곽을 드러낸다. 물리학은 물질을 탐구하며, 수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을 일반법칙에 따라 양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에 의존한다. 일부의 전공학과들에서는 해당 학문의 통일성이 과학적인 훈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취업 준비중에 있는 직업 분야의 실무경험에서 얻어지기도 한다. 예컨대 의학은 임상경험이 인간의 신체를 고유한 과학적 대상으로 만들기 때문에, 생물학과 화학에서 자기 지분을 떼어내서 이들을 결합한다.
과학이 성공의 대가로 얻은 것은 상당한 명성이다. 이런 이유로 점점 더 많은 전공학과가 과학의 옷을 입었고, 실제로 대학에서 인기 있는 실용학과가 되었다. 과학의 성공적인 결과를 통해 과학의 역사도 그 윤곽이 그려졌다. 사람들은 이것을 더 많은 진리의 끊임없는 축적이라고 소개했다. 과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토머스 쿤이 등장할 때까지는 그러했다. 그에 따르면, 과학은 허튼 소리도 상당히 양산해냈고, 허튼 소리의 반박 역시 과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과학은 진리의 축적이라고 할 수도 있고, 허튼 소리의 축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쿤이 이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어 갔을 때, 그는 과학의 발전이 여태까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다르게 진행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과학의 발전이란 더 많은 진리의 끊임없는 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난폭한 선거전과 정권교체를 동반하는, 임기가 있는 일련의 정부들로 이루어진다. 쿤은 어떤 과학에서나 하나의 지배적인 학설이 있으며, 이 학설은 서로 보완하는 핵심 개념들과 배후의 가설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쿤은 이를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 지배적인 패러다임을 확증하는 데 몰두한다.
그러나, 언제나 소수의 비추종자들이 있다. 그들은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설명될 수 없는 문제에 매력을 느낀다. 그들은 주류로부터 불신임을 당하고 반대의 길로 나아간다. 때때로 이들이 더 많은 추종자를 모아 마침내 지배적 패러다임을 총공격하고 새로운 학설을 창설하며, 과학의 새로운 언어를 널리 보급한다. 쿤은 이러한 과정이 진행될 때 과학혁명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기존의 과학자들의 업적은 평가절하 되고, 또 폐물로 간주되어 더 이상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숨이 넘어갈 때까지 옛 패러다임을 방어하는 것이다.
(나)
1. 현대의 우주론은 1930년경 비로소 시작되었다. 프리드만은 아인슈타인 방정식으로부터 빅뱅 이론을 발견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무한대에 가까운 초고압 상태에서 격렬한 폭발의 여파로 계속 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이 우주의 모습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지는 않는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프리드만의 연구 결과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는 짤막한 기사를 모 잡지에 기고하였다. 그러나 8개월 뒤에 프리드만은 자신의 논리에 전혀 오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여 아인슈타인을 납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뒤 허블의 관측자료에 의하면 우주는 정말로 팽창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빅뱅 이론은 우주론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2. 우주가 특이한 초고밀도 상태로부터 폭발하면서 시작되었다는 이론에는 결함이 있다. 만유 인력의 법칙을 수정하지 않더라도 우주가 팽창하고 있는 사실에서 우주가 폭발한 시초를 추측하는 것은 반드시 옳다고만 할 수 없다. 이러한 추측은 현재 존재하는 모든 물질이 과거에도 역시 존재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에 현존하는 많은 원자가 과거에는 없었고 또 미래의 우주에 있게 될 원자들이 현재 아직도 태어나지 않고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이러한 생각은 모든 원자가 과거의 어느 특정한 시기에 한꺼번에 폭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보는 셈이다.
3. 천문학자들은 얻은 관측자료들로부터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빅뱅이론의 진위 여부를 검증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얻어진 결과는 한결같이 긍정적이다. 그 결과 중 하나가 ‘우주 배경 복사’ 이다. 1965년 벨 연구소의 펜지아스와 윌슨은 시그널을 분석하던 중에 이 시대의 최고의 발견인 빅뱅의 잔광을 발견하였다. 1990년대에는 NASA에서 COBE 위성을 이용하여 우주공간이 절대온도 2.7도의 마이크로 복사파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는 빅뱅이론이 예견한 값과 정확하게 일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