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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공례 스크랩 반곡 김소양 부산종친회장님 / 신라45대 신무왕릉 참봉 도임행공례
종무 추천 0 조회 85 14.08.20 22: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촬영일자 : 2010년 12월 19일

    촬영장소 : 경주 숭혜전(崇惠殿)

    사진사 : 촌장셈 (陽村齋/김진수) 

    사진설명 : 신라 45대 신무왕릉, 38대 원성왕릉 참봉 도임 행공례

 

신라 45대 신무왕릉 참봉으로 제수받은 반곡(般谷) 김소양 

 참봉 망첩 전달을 위하여 대기중인 前 참봉들

 

숭혜전 신문

 

 

광씨 부산종친회 임원일동

원성왕릉, 신무왕릉  신임참봉

 

신,구참봉(參奉) 상견례 및 망첨 전달식

 

 

 

참봉 제수 망첩

 

 

 

 

 

 

신무왕릉 참봉 망(望)

석학(碩學) 김소양

 

 

 

 

경주 숭혜전에 고유하기 위하여 관복으로 갈아입고 있다

 

 

 

 

 

 

 

경주 숭혜전은
신라 최초의 김씨 임금인 13대 미추왕과 삼국을 통일한 30대 문무왕,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처음에는 월성에 사당을 짓고 경순왕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그 뒤 위패만 모시고 제사를 지내다가 인조 5년(1627)에 관찰사 김시양이 동천촌에 새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모셨다.

정조 18년(1794)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으며 고종 24년(1887)부터 미추왕의 위패를, 그 이듬해에는 문무왕의 위패도 모시게 되었다.

고종 때 숭혜전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이곳에는 경순왕 유허비와 석조물들도 함께 전한다.

 

 

 

숭혜전(崇惠殿)의 창시(創始)와 연혁(沿革)


라 경순왕이 나라를 양국한 후에 옛 도읍의 유민들이 왕께서 백성에게 배푼 덕의를 사모 하여 월성(月城)에 사당을 세워 영정(影幀)을 모시고

매양 명절에는 고을의 아전이 삼반관속(三班官屬)을 이끌고 제향을 올렸으니, 이는 초(楚)나라 사람들이 일간모옥(띠로 지붕을 이은집)에서

초나라 소왕(昭王)에게 제사지낸 의에서 나온 것이다.

불행히 임진왜란에 묘우(墓宇)가 불탔으며 그 후부터는 제향을 올리는 의식을 화상(畵像)으로서 하지 아니하고 나무로 만든 위패로서 봉행 하였다.

 

천계(天啓) 7년(인조5년, 1672년) 정묘(丁卯)에 후손 김시양이 경주부윤 으로서 본부에 이르러 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인하여 중건하기를

계청(임금에게 아뢰어 청함)하였으며 본부의 유생 김성원 등으로 더불어 경주부의 동쪽 5리쯤 되는 금학산 아래 동천촌에 터를 잡고

사당을 옮겨 일신하게 중건 하였다.

 

그리고 참봉 1인을 두어 제향을 받들게 하였고(예조에서 차출하였음) 또 노비의 전지를 설치했으며, 제전(祭奠)은 관에서 담당하여

변, 두(대와 나무로 만든 제기) 각 7기로 한정 하였다.

 

그 후 97년째 되는 경종 3년(1723년) 계묘(癸卯)에 본도감사 조태억(趙泰億)이 순행 하다가 본부에 이르러 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인하여

장계(임금에게 올리는 글)로서 청원하여 특히 경순왕 전호(殿號)의 선액(임금이 내린 선호)을 받았으며 요미(料米)와 말먹이는 콩도 모두

일정한 수량이 있었고 유생 51인과 수호군 20인과 전졸 6명을 두었다.

 

정조 18년(1794년) 갑인(甲寅)에 정전 후면에 사태가 떨어지는 환난으로서 참봉 김건항(金健恒)이 궐문에 호소하였고 도신(道臣)이 장계를

올림으로서 특히 이건(移建)하라는 분부를 받들어 본도 감사 조진택(趙鎭宅)으로 하여금 터를 잡아 계문(啓聞: 임금에게 아룀)하게 하였으며

(곧 황남성) 본부윤 송전은 기일에 어긋날까 두려워하였다.

 

또 장수승(長水丞) 이명기(李命基)에게 분부를 내려 왕의 화상을 다시 본뜨게 하였다,

왕이 일찍이 영천 불당의 후면 감실(위패나 영정을 모시는 방)에 간직했다가 본전으로 옮겨 봉안 하였다.

 

그 후 17년 만에 본전을 이건 하였고 화상도 연구세심(年久歲深)하여 빛깔이 변했으므로 이 분부가 있게 되었다.

5월 18일 역사를 재시작하여 3개월 만에 낙성하여〔묘우(廟宇)가 오가삼간(五架三間)이요 내외 신문(神門)이 각 3칸이며 동 서재(東西齋)가

각 4칸이요 가관방(假官房)이 3칸이며 제기고(祭器庫)와 주장고(酒醬庫)가 각 1칸이요 좌우내문(左右內門)이 2칸이며 마구(馬廐)가 2칸이었다〕

준공을 고하매 임금께서 친히 축문을 짓고 향을 내렸으며 8월초 10일 황남전에 봉안하였다.

(위판은 정당의 당중에 모시고 영정은 정당의 후벽 감실에 모셨음)

 

다시 예조에 분부를 내려 규식(規式)을 정하게 했으니,

유생과 전졸은 각각 90여인이요 수호군 100여명과 양정(良丁) 20명과 하전(下典) 60명을 두었으며 호세는 오결(1결은10묶음)을 면제하게 하였고

참봉은 이조로부터 직첩을 내렸다. (또 가관 1인을 두어 참봉이 유고할 때에는 분향을 대행하게 하였음) 요미는 날마다 1석14두요 마태(馬太)는

10두이며 또 백미262석을 하사하여 공장의 식량 및 공역의 용도에 충당하게 하였고(공장의 식량이 43석이요 공역의 용도가 219석이었음) 무릇

공비(公費)가 10만8천6전 남짓하였다.(성손이 4만3천6백전을 기증 하였고 참봉 김성휴가 만전을 희사하여 공역을 준공하였음)

정조 4년(1780년) 경자(庚子)에 부윤 김효대(金孝大)가 동천전에 비석을 세우는 일로서 소청(疏請)하여 곧 윤허(임금이 허락하심)는 얻었으나

공역을 갖추지 못한 때문에 분부가 내린 후 35년째 되는 갑술(甲戌)년(순조14년 1814년)에 이르러 황남전 정문밖에 신도비를 세우게 되었다.

 

순조 3년(1887년) 계해(癸亥)년에 계림에 유허비를 세웠다.

신도 비각은 1동 8면으로 되어 심히 치려하고 웅장했으며, 유허비각도 또한 이 제도를 모방 했으나 규모가 작았다.

 

고종 24년(1887년) 정해(丁亥)년 정언 김만제가 미추왕(味鄒王)경순왕(敬順王)을 병향(幷享)하는 일과 전호를 소청하였고,

판부사 김홍집이 경연(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에서 문무왕(文武王)을 병향(幷享)하는 일로서 진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이에 특히 본부윤 김철희에게 분부하여 묘우를 중건했으니, 오가오간(五架五間)이요(동 서재와 방과 곳간은 모두 잉구하였고 별달리

향축실 1칸을 사당 좌편에 건조하였음)

 숭혜전의 선액(宣額)을 내렸으며 3왕의 위패를 만들고 경순왕의 영정을 다시 본떠서 무자(戊子)년 8월초 10일을 택하여 변 8기와 두(豆) 8기를

갖추고 향과 축문과 폐백을 내려 보내어 고유하고 봉안 하였다.

(영정의 감실은 본묘내 동벽 아래에 별달리 마련하였음)

참봉은 전조(이조를 말함)로부터 별달리 지벌(地閥)과 문식이 있는 자를 택하여 차정하고 임기(50삭)가 차면 6품에 승진 하였다.

 

전우(殿宇)의 수즙비(修葺費)는 규례에 의하여 마련하였고 호세 80결을 면제하기로 획정했으며 삭 능소에 비석을 세웠고 병오(丙午)년에 장예원

으로부터 분부를 받들고 예관 김영래(金永來)를 보내어 전(殿) 능(陵)의 경계를 사방 백보(百步)로 정하였다.

 

아 ! 경술(庚戌)년(융희4년 1910년) 이후에 제향의 경비를 춘추에 걸쳐 90원씩 관부로부터 의례 지출하였고,

병인(丙寅)년(1926년)에 비로소 축현릉 참봉을 두어 춘분과 추분에 석채례(釋菜禮)로 거행하고 제향의 경비 120원씩 의례 지출했으며

각 능마다 수호인을 두었다.


  숭혜전에 봉안(奉安)된 삼왕(三王)


 

◆미추왕(味鄒王/ ?~284)

라의 제13대 왕(김씨 제1대)(재위262~284) 성 김씨(金氏) 이름 미조(未照). 미소(未召) 구도(仇道)의 아들. 김알지(金閼智)의 7세손(七世孫)

어머니는 갈문왕(葛文王) 이칠(伊柒)의딸 박씨(朴氏), 비(妃)는 조분왕(助賁王)의 딸 광명부인(光明夫人) 석씨(昔氏), 조분왕의 사위로 왕위에 올랐다,

267년과 283년 백제가 봉산성(烽山城) 괴곡성(槐谷城)을 각각 공격해왔으나 모두 격퇴하였다.

한편 농업을 장려하는 등 내치(內治)에도 힘썼다. 대릉(大陵.竹長陵)에 장사 지냈다.


◆문무왕(文武王/ ?~681년)

라의 제30대 왕(김씨 제15대)(재위661~681) 성 김씨(金氏) 이름 법민(法敏),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문명왕후(文明王后)의 맏아들, 비(妃)는

파진찬(波珍?) 선품(善品)의 딸 자의왕후(慈儀王后) 외모가 뛰어나고 머리가 총명하며 지략(智略)이 많았다. 서기650년(진덕여왕 4년) 왕명으로

당(唐)나라에 가서 대부경(大府卿)을 받았고, 654년(태종무열왕 1년) 파진찬으로서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 655년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660년

나. 당(羅.唐) 여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5만 군대를 거느리고 분전, 백제를 격멸하였다.

 

서기661년 태종무열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고, 이듬해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쳤으나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그 뒤 복신(福信). 도침(道琛)등의 백제 부흥운동을 저지 하였다. 668년 다시 나.당 연합군을 형성하여 고구려를 쳤는데, 왕제(王弟) 인문(仁問)은

당나라의 이적(李勣)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고구려는 멸망하였으나, 당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은 물론 백제의 옛 땅까지도 자국 영토로 삼으려(都護府設置)하자,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명하여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게 하였다.

고구려 유민(遺民)의 부흥운동을 원조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나라에 대항하여, 677년 그 세력을 몰아내고 대동강. 원산만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삼국통일(三國統一)의 대업을 완수 하였다. 이때부터 한반도에 단일국가가 등장하였다.

 

문무왕은 당나라 문화를 수입하는데 힘을 기울여 664년 부인들의 의복을 당제(唐制)에 따르게 하였고, 또 당악(唐樂)을 수입하였다.

674년 당나라의 역술(曆術)을 본떠 신력(新曆)을 제정하여 사용하였으며, 675년 동인(銅印)을 만들어 중앙 백관(百官)과 지방의 주. 군(州郡)에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676년 의상(義湘)으로 하여금 경북 영주시 부석면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게 하였다.

681년 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화장한 뒤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 대왕암(大王岩)(감은사(感恩寺)동쪽)에 안장(安葬) 하였다.


◆경순왕(敬順王/ ?~978년)  

라의 제56대 왕(김씨 제38대)(재위927~935) 성 김씨(金氏) 이름 부(傅), 문성왕(文聖王)의 6대손, 아버지는 이찬 효종(孝宗)이며 어머니는

헌강왕(憲康王)의 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927년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공으로 경애왕(景哀王)이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

 재위 때는 각처에서 군웅(群雄)이 할거하여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지자 군신회의(君臣會議)를 소집, 고려에 귀부(歸附)하기로 결정하고, 935년 고려 태조에게

항복(양국(讓國)) 하였다. 고려 태조로부터 유화궁(柳花宮)을 하사 받았으며,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고 정승공(政丞公)에 봉해졌으며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한편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능(陵)은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성거산(京畿道 連川郡 長南面. 高浪浦里 聖居山)(산18번지)에 있다.

 

출처 :慶州金氏 中央宗親會 靑年會 (경청회)

 

 

 

신무왕릉 참봉실

 

 

 

 

 

 

 

 

 

 

 

 

 

 

 

 

 

 

 

 

 

 

 

 

 

 

 

 

 

 

 

 

신(臣) 감히 신무왕릉의 참봉(參奉)을 제수받고 선왕폐하께 고(告)하나이다.

 

 

 

신,구 릉(陵)참봉들이 서로 바라보고 있다

 

 

 

 

 

 

 

 

 

 

 

 

 

 

 

 

 

 

 

 

 

 

 

숭혜전에서 고유를 마친 후 숭혜전을 한바퀴 돌고있다

 

 

 

 

 계림세묘(鷄林世廟)

 

 계림세묘로 향하고 있는 참봉들과 제관들

 

 

 

 

 

 

 

 

 

 

 계림세묘에서 김씨의 비조(鼻祖)이신 대보공께 고유하고 있는 신임 신무왕릉 참봉

 

 

 계림세묘에서 대보공께 고유를 드리고 난 후, 미추왕릉으로 향하고 있다.

 

 

 미추왕릉[味鄒王陵]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신라 제13대 왕 미추이사금의 능.

 

사적 제175호. 원형봉토분 중에서 규모가 큰 왕릉으로서 경주황남동고분군 가운데 하나이며, 대릉원(大陵苑)으로 잘 정비되어 있다.

봉분 외에는 다른 표식물이 없었으나 근래에 석상 등 약간의 시설물이 첨가되었다. 미추왕릉은 대릉(大陵)·죽장릉(竹長陵) 등으로도 불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다음 왕인 유례이사금 14년에 이서고국(伊西古國)이 금성을 공격하므로 크게 군사를 들어 막아도 능히 물리치지 못했다.

이때 홀연히 이상한 군사가 오는데 그 수효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그들은 모두 귀에 댓잎을 꽂고 아군과 더불어 함께 적을 쳐 깨뜨렸다.

그후 그들이 간 곳을 알지 못했는데 누군가 죽장릉에서 죽엽 수만이 쌓여 있음을 발견했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미추이사금이 음병으로써 싸움을 도와준 것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미추왕께 고유를 드리기 위하여 들어서고 있는 참봉들

 

 

 

 

 

 

미추왕릉 [味鄒王 ?~284]  사적 제175호   경북 경주시 황남동 대릉원내
     

신라 최초의 김씨 왕으로 백제의 여러차례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한 신라 제13대 왕인 미추이사금(味鄒尼師金)(재위 262∼284)의 무덤이다.

일명 미조이사금(味照尼師今)이며 성은 김(金)씨이고, 김알지(金閼智)의 7대손으로 갈문왕 구도(葛文王 仇道)의 아들이다.

 

신라 최초의 김씨 왕(金氏 王)이고 왕비는 광명부인(光明夫人)이다. 경주시내 평지고분군에 있으며 현재 신라(新羅) 사적공원(史蹟公園)인 대릉원(大陵園) 안에

위치하여 있다. 주변에 대형분(大形墳)이 밀집하여 있으며,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皇南大塚)은 그 북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다.

지름 56.7m, 높이 12.4m로 경주시내 평지고분 가운데에서도 대형분에 속한다. 『삼국사기』에는 미추왕릉과 관련된 죽엽군(竹葉軍)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유례왕(儒禮王) 14년(297) 이서고국(伊西古國) 사람이 수도인 금성을 공격하여 위급한 상황에 처하자 대나무잎을 귀에 꽂은 군사가 나타나 적을 물리치고

사라졌다. 누군가 미추왕릉에 댓잎을 수북이 쌓인 것을 보고 미추왕이 죽어서도 신라를 도와주었다하여 미추왕릉을 죽장릉(竹長陵), 죽현릉(竹現陵)이라 부른다고

한다. 경주 황남동 무덤들 중 가장 잘 정비된 대릉원 내에 높이 12.4m, 지름 56.7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앞에는 혼이 머무는 자리인 혼유석이 있고, 담장을 돌려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다. 무덤 앞쪽에는 숭혜전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794년 다시

세운 것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이다. 내부는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왕이 재위 23년에 돌아가니 대릉(大陵)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미추왕릉(味鄒王陵)이 흥륜사(興輪寺) 쪽에 있다고 하여 경주시내 평지고분군 가운데 있음을 전하고 있다.

 

 

시내에 위치한 대릉원은 경주에 있는 고분 중 가장 큰 규모로 13대왕 미추왕릉을 비롯한 23기의 고분이 모여 있는 곳이다.
신라의 제13대 미추왕(재위 262∼284)은 김알지의 6대손으로 조분왕의 사위로 왕위에 올랐다.  

경주 황남동 무덤들 중 가장 잘 정비된 대릉원 내에 높이 12.4m, 지름 56.7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앞에는 혼이 머무는 자리인 혼유석(魂遊石) 이 있고, 담장을 돌려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다.

무덤 앞 대를원 담장밖에는 숭혜전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794년 다시 세운 것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이다.


★나라를 지킨 미추왕(未鄒王)과 죽엽군(竹葉軍)

신라 제13대 임금인 미추왕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유례왕 때의 일이었다.

그때 이웃에 ‘이서국’이라는 조그만 나라가 있었다.

경상북도 청도군 부근에 있었던 이서국의 군사들은 신라의 도성인 금성(경주)을 치려고 몰려왔다.

이서국의 기세가 강성하여 신라에서는 많은 군대를 동원해 막아보았지만 그들과 겨루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황송하오나 그만 항복하고 성을 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니 될 말씀이오.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적과 싸워야 하오.”

신라의 장군들이 그렇게 옥신각신 서로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기이한 군사들이 몰려와서 신라 군사들을 돕기 시작했다.

 

“대체 당신들은 어느 나라 군사들이오? 왜 우리를 돕습니까?”

신라 군사가 물었으나,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계속 신라의 편에서 이서국과 싸웠다.

그 기이한 군사들은 모두 한 결 같이 귀에 대나무 잎을 하나씩 꽂고 있었다.

그래서 신라 군사들은 그들을 대나무 잎 군사라고 불렀다.

신라는 대나무 잎 군사들의 도움으로 이서국 군사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 대나무 잎 군사들은 처음 나타날 때처럼 연기와 같이 사라져버렸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신라 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대나무 잎 군사들을 찾았으나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경주 흥륜사 동쪽에 있는 미추왕의 능에 이르러보니,

능 앞에 대나무 잎 군사들이 귀에 꽂고 있던 대나무 잎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이제야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았도다.”

대나무 잎 군사들을 찾으러 갔던 신라 군사들은 다 같이 미추왕의 능에 꿇어 엎드려 큰 절로 감사를 드렸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부터 미추왕릉은 죽현릉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것은 대나무가 나타난 묘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하여 신라는 오랜 세월을 평화롭게 지낼 수가 있었다.


세월이 흘러 제37대 임금인 혜공왕 14년이 되었다.

서기 779년  4월,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김유신의 무덤으로부터 일어났다.
그 속에 어떤 사람 하나가 준마를 탔는데 장군의 차림과 같았다.

또한 갑옷차림에 병장기를 가진 자 40여 명이 뒤를 따라오더니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왕릉 속에서 흡사 진동하는 울음 같은 소기가 나는데 혹은 하소연 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사람들이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니 그것은 바로 김유신의 호소였다.

 

“저는 평생을 왕을 도와 환란을 구제하고 나라에 공로를 세웠습니다.
지금은 혼백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재앙을 물리치며 환란을 구제하고자 하는 마음에 잠시도 변함이 없사옵니다.”

“어찌 모르겠소. 잘 알고 있소이다.”

“그런데 요즈음 저의 자손들이 죄 없이 죽음을 당하였고 지금의 임금이나 신하들은 저의 공적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는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 다시는 애써 고생하지 않을 것이니 원하건대 왕께서는 허락하소서.”


김유신의 하소연을 듣고 난 후, 이에 응답하는 미추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장군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많은 백성들은 어떻게 할 것이오?

그러니 그대는 이전과 다름없이 힘을 써 주시오.”
“아니옵니다. 제발 부탁이오니 제가 떠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허락할 수 없소. 나와 함께 나라를 위해 계속 힘을 써주시오.”
“제발 허락해주십시오.”

“그대는 그만 노여움을 푸시구려. 행여 잘못된 생각으로 이 나라를 떠날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시오.”

잠시 후, 아까와 같은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어나더니 김유신과 그 뒤를 따르는 군사들이 다시 능속으로 사라졌다.

이러한 소문은 순식간에 온 나라에 퍼졌다.
혜공왕은 이 말을 듣고 겁이 나서 즉시로 대신인 김경신을 보내어 김유신의 무덤에 가서 사과하도록 했다.

혜공왕은 매년 올릴 김유신의 제사를 위해 취선사에 기름진 논 서른 마지기를 주어 그의 명복을 빌었다.
미추왕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크게 노한 김유신의 노여움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 때문에, 백성들은 그의 덕을 사모하여 미추왕의 제사를 더욱더 성대하고 정성스럽게 지냈다.    

 

출처:『삼국유사』권 제1「기이 제1 / 미추왕(未鄒王)과 죽엽군(竹葉軍)

 

 

미추왕에 대해 간략히 써 보면..

신라 제 13대 미추왕(味鄒王) 261년 12월 ~ 284년 10월  22년 10개월 즉위

미추왕은 신라왕조의 최초의 김씨 성씨의 왕이었다. 김알지의 5대손 김구도의 아들이고 갈문왕 딸 박씨 소생이다. 즉 김알지의 6대손이다.
삼국사기에 나온 미추의 계보를 보면 “알지가 세한을 낳고, 세한이 아도를 낳고, 아도가 수류를 낳고, 수류가 욱보를 낳고, 욱보가 구도를 낳았으니,

구도가 곧 미추의 아버지이다"

신라는 4대 석탈해왕을 제외하고 1대(박혁거세)부터 8대 아달라왕까지 박씨가 왕위에 올랐고 그 후 9대 벌휴왕, 10대 내해왕, 11대 조분왕, 12대 첨해왕까지

석씨가 왕위에 오르다가 13대 미추왕에 이르러서는 김알지의 후손인 미추가 왕위에 오른다. 12대 조분왕이 기록엔 후손이 남아있지 않기에 11대 첨해왕의

둘째 사위로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 후 다시 14대 유례왕, 15대 기림왕, 16대 흘해왕을 거쳐 17대 내물왕부터는 김씨 왕실이 독점하게 된다. 

미추왕대에 백제와 국경지역에서 잦은 충돌(주로 백제가 시비를 걸었음)을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큰 사건은 없었다. 그 외 당시엔 백성들에 대한 귀족과 관리들의

노동력 착취(부역)가 심했는데 ‘농사에 해가 되는 일은 모두 없애라’는 칙령을 내릴 정도로 농업에 치중을 하였다.

 

 

 

 

 

 

 

 

미추왕릉에서 고유를 마친 후 왈을을 한바퀴 돌고 있는 참봉들과 재관들

 

 

 

 

 미추왕릉에서 참봉(參奉) 도임 행공례를 마친 후 릉(陵) 시참봉 12명 기념촬영

 

 

 

 

 

 

 광산김씨 부산종친회 일가들과 함께 기념촬영

 빈곡 김소양 참봉 지인들과 함께 기념촬영

 [신라 제45대 신무왕릉]

사적 제185호. 무덤의 지름 15m, 높이 3.4m.

산기슭 약간 경사진 지점을 이용하여 분묘를 축조했는데 아무런 부대시설이 없는 원형봉토분이다.

죽어서 제형산(弟兄山) 서북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 기록에 따라 이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 인근에서도 예로부터 이 분묘를 신무왕릉이라고 전해왔다.

 

 

신무왕릉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정작 왕릉을 찾는 이는 드물다.  신라 45대 신무왕릉은 신문왕릉에서 7호 국도를 따라 2킬로미터쯤 남쪽으로 가다 만나는

LPG주유소 부근에서 좌회전하여 철로를 지나 500미터쯤 올라가면 최근 개발붐이 일고 있는 도동택지구획정리지구가 나오는데, 차를 세우고 북쪽을 바라보면

남북으로 길게 일렬로 늘어선 마을 한복판에 소나무가 울창하고 그 속에 신라 45대 신무왕릉이 있다.

 

우징(훗날 신무왕)은 흥덕왕의 신임으로 시중벼슬을 두 번이나 맡았지만, 자신의 아버지 김균정이 상대등에 임명되자 부자가 함께 벼슬에 있을 수가 없다고

흥덕왕께 해직을 청원하였고, 대아찬 김명이 시중 자리를 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스스로 시중에서 물러난 김우징과 그 덕분에 시중 자리에 오른 김명과의 인연은 후에 큰 악연으로 돌변된다. 흥덕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왕위 자리를 두고 김균정과 조카인 김제륭간의 권력싸움이 벌어졌을 때, 우징은 김양과 함께 아버지 균정을 왕으로 추대했으나, 자신이 자진 사퇴한 시중자리를

이은 김명의 지지를 받은 사촌 제륭일파에 밀려 작전상 후퇴를 했고 아버지 균정이 살해되는 비극을 맞는다. 제륭(희강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김명(민애왕)에게

살해되었고, 아버지의 한을 품었던 우징은 청해진 장보고 장군의 지원을 받아 김양의 도움으로 부모의 원수인 민애왕을 죽이고 정월달에 왕위(신무왕)에 오르지만

그 해 7월에 병으로 붕어하셨다.

그렇게 오르고 싶었던 왕좌인데 불과 6개월 만에 병으로 붕어하신 신무왕의 이야기에서 신라 후대 왕족들의 비극적인 삶의 한 단면을 보게 된다.

흥덕왕 사후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간에 벌어지는 왕권다툼과 거기에 등장하는 균정,제륭,명,우징,양,배훤백,장보고,정년 등 인물들의 이야기 또한 사극과

역사소설의 소재로 부족함이 없는 흥미진진한 것들이 많다.

그러나 그 시기 중국의 역사를 비교해보면 결코 신라왕조만의 흔들림은 아니었다. 당나라와 통일신라는 밀접한 교류를 했었고, 흥망의 길 또한 함께 걸었음을

 알게 된다.


 신라 42대 흥덕왕이 왕위에 오른 826년부터 희강왕, 민애왕을 거쳐 신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붕어하신 다음해인 840년까지 중국의 황제는 문종이었다.

연호는 ‘태화’와 ‘개성’을 사용했는데, 태화는 흥덕왕 재임시절과 일치하고 희강왕과 민애왕 신무왕의 권력다툼 기간은 ‘개성’연호기간이다.

당나라 문종황제 재임시절 그 유명한 ‘감로의 변’이 일어났다.


  중국 역사에 귀족간의 당쟁과 아울러 환제의 외척과 환관의 횡포 또한 당이 멸망한 이유 중에 하나이다.

측천무후 때 점차 세력을 얻어 현종시기에 3,000명 이상이 된 환관들은 중국황제에 밀착하여 권세를 휘둘렀는데, 당나라 12대 목종(재위 820-824)때부터 당왕조

 멸망 직전인 제19대 소종(재위 889-904)까지 여덟명의 황제 가운데 환관이 옹립하지 않은 황제는 13대 경종 뿐이었다. 이러한 환관의 횡포를 막으려고 문종은

봉상번진의 절도사 정주와 함께 중앙환관을 몰살할려고, 궁궐 정원의 석류나무에 거짓으로 감로가 내렸다고 하고 이를 보려고 환관들이 모이면 한꺼번에 죽일

계획이었으나 바람에 불어 복병들이 숨은 천막이 벗겨져 탄로나서 환관의 금군에게 정주등이 죽임을 당하고 문종은 “짐은 가노(환관)에게 눌려 어떻게

할 수도 없다”라고 옷깃을 적시며 울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태화’연호를 사용하던 문종황제는 ‘감로의 변’이후 ‘개성’으로 연호를 바꾸었고 환관들에게 물려 허수아비 황제노릇을 하였는데, 이 ‘개성’연호 기간동안에

신라에서는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간에 드라마틱한 권력투쟁이 벌어졌으니 어쩌면 중국황실보다는 역동적인 역사였는지 모른다.

 - 자료출처 : 이진락의 문화산책(신문기고문정리) 중에서 일부발췌 -

 고유를 드리기 위하여 간단한 제물을 진설하고 있다.

 제45대 신무왕릉 신임 참봉 반곡 김소양

 

 

 

 직전 릉참봉과 시 릉참봉

 

 

 

 

 

 

 

 

 

 

 

 

 

 

 

 

 

 

 

 

 

 

 

 

 

 

 

 

 

 

 

 

 

 

 

 

 경주대릉원 뫼(山)와 릉

 

 

 

  신라 제38대왕 원성왕(元聖王)

 

 

원성왕(元聖王, ? ~ 798년, 재위: 785년 ~ 798년)은 신라의 제38대 이다. 성은 김, 휘는 경신(敬信)이다. 삼국사기에는 원성왕은 선덕왕과 마찬가지로 내물왕의

10세손으로 되어 있다.

 

생애

김경신은 혜공왕 때 선대 경덕왕의 관제개혁을 원상복귀 시키는 일에 참여 하였다.

선덕왕 1년(780년) 이찬(伊飡)으로 상대등(上大等) 김양상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평정하고 상대등에 올랐다. 선덕왕이 죽고 대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당과

통교하였다. 원성왕 4년(788년)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했고, 이어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여 농사를 장려했다.

김경신은 경덕왕성덕왕(김양상 외조부), 개성왕(추존, 김양상 아버지)의 사당을 허물고 자신의 부, 조부, 증조부의 사당을 세웠다.

또한 내물왕, 무열왕, 문무왕 및 조부인 흥평대왕(추존)과 부친인 명덕대왕(추존)을 국가 5묘로 지정하여, 자신의 조부와 아버지를 무열왕, 문무왕와 동등하게

만들었다.  원성왕은 자신의 고조부인 법선을 현성대왕, 증조부인 의관을 신영대왕, 할아버지 위문을 흥평대왕, 아버지 효양을 명덕대왕, 어머니를 소문태후로

추봉하였다.

신라 하대는 원성왕 시대가 기점이다. 김경신은 무열왕계 경덕왕과 자신의 동료였던 김양상의 아버지 개성왕, 외조부 성덕왕의 사당을 허물었다. 불국사을 만들어

자신의 부, 조부을 모셨다.  원성왕이 불국사을 만든 목적은 새로운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미가 포함되었다.

 

 

가계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경신의 가계는 복호-습보-지증-진종-흠운-마차-법선-의관-위문-효양이다.

기록이 정확하다면 무열왕과 "지증"까지는 같은 혈통이다.

  • 아버지 : 김효양
  • 어머니 : 계오부인 박씨
  • 왕후 : 숙정부인 김씨(淑貞夫人) - 각간 김신술(神述)의 딸
    • 아들 : 인겸(仁謙) - 785년 태자 책봉, 791년 음력 1월 사망, 혜충태자(惠忠太子)에 추증되었다가 소성왕 즉위 후 혜충대왕으로 추존
      • 손자 : 준옹(俊邕) - 인겸의 아들로 794년 음력 4월 태자 책봉, 798년소성왕 즉위
        • 증손 : 청명(淸明) - 800년에 13세의 나이로 애장왕 즉위
        • 증손 : 체명(禮明) - 준옹의 아들, 살해됨
      • 손자 : 언승(彦昇) - 인겸의 아들로 809년헌덕왕 즉위
      • 손자 : 수종(秀宗) - 인겸의 아들로 826년흥덕왕 즉위
      • 손자 : 충공(忠恭) - 인겸의 아들로 혜충대왕(惠忠大王)으로 추봉되었다.
      • 손자 : 제옹(悌邕)
    • 아들 : 예영(禮英) - 혜강태자(惠康太子)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혜강대왕(惠康大王)에 추봉, 부인은 혜강태후
      • 손자 : 헌정(憲貞) - 익성대왕(翌成大王)에 추봉, 부인은 성목태후(聖穆太后)
      • 손자 : 균정(均貞) : 성덕대왕(成德大王)에 추봉, 부인은 헌목태후(憲穆太后)
      • 손녀 : 귀승부인(貴勝夫人) : 헌덕왕(憲德王)의 부인
    • 딸 : 대룡부인(大龍夫人)
    • 딸 : 소룡부인(小龍夫人)

[편집] 참고

전 대
선덕왕
제38대 신라 국왕
785년 - 798년
후 대
소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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