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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릉 답사기(踏査記)
홍ㆍ유릉은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자, 대한제국을 세운 고종 황제(비 명성황후), 그리고 대한제국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임금, 순종 황제(비 순명효황후, 계비 순정효황후)의 릉(陵)이다.
몇 해 전, 남서울 도심에 있는 선ㆍ정릉을 돌아보고 난 후 서울 경기 쪽에 일이 잡히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의 왕릉들을 차례로 돌아보자는 마음 속 계획이 있었다.
2021년 6월 25일, 남양주 출장길이 생겼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나니 아직 점심 무렵이었다. 남양주 시청 제2청사에서 남양주 구도심으로 가는 시내버스는 금방 도착하였다. 남양주 신도시에서 홍ㆍ유릉이 있는 남양주 구도심 금곡동까지 꽤 먼 거리였다. 다행히 날씨는 덥지 않았다. 이 즈음이 원래 우기인데, 조금 흐렸을 뿐이다. 살구가 익는 계절이다.
매표소를 지나니 반듯하고 넓은 길이 나타났다. 홍릉 입구에는 큰 자귀나무가 붉은 꽃등을 가득 매달고 있었다. 자귀나무 꽃이 피면 여름이 시작된다.
릉역에 들어서면 먼저 아름드리 침엽수가 탐방객을 맞이한다. 다만, 조선의 소나무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삼나무인가, 하였다가 일본이 연상되는 <히노끼> 일리는 없다는 생각에 다시 보니 늘어진 바늘 나뭇잎으로 보아 아마 <가문비나무>일 것으로 판단되었다.
둥글고 큰 연못이 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홍릉 연지(蓮池), 둥글게 조성된 연못에 둥근 섬이 덩그렇게 놓여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전통적 연못 조성과는 다른 구조였다. 언뜻 본 누군가는 웬 능침을 물 위에다 두었을까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연못 위 등근 섬은 잔디로 잘 다듬어져 있었다. 연지(蓮池)의 수련꽃은 아직 절정에 이르지 못하고 몇 송이만 피고 있었다. 여름이 절정에 이르면 희고 붉은 꽃들이 만발할 것이다.
연지(蓮池)를 지나면 넓고 큰 고택 분위기의 건물이 나타나는데, 홍릉의 재실이었다. 재실을 지나 조금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멀리 거대한 전각이 보였다. 왕릉에 왜 전각이 나타날까? 의문은 조금 후 저절로 풀렸다. 그 거대한 전각의 정체는 침전(寢殿)이었다. 홍살문이 보이면서 전각의 우람함이 뚜렷해졌다. 나는 터져 나오는 탄성을 속으로 삼킬 수 밖에 없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에서 이에 대한 설명을 해 놓았다.
“홍릉과 유릉은 조선의 국명을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황제라 칭한 고종과 순종의 능이다. 황제릉으로 조선 왕릉과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첫째는 향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어로가 설치되어 향·어로가 3개의 단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둘째는 조선 왕릉의 정자각에서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정자각의 좌우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 달리 정자각을 대신하는 침전(寢殿)의 정면에도 설치되어 있어 홍살문과 직선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능침구역의 봉분 앞에 위치하던 석물이 향·어로에서 침전 사이로 배치되어 있으며 이것은 중국 황제릉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능원의 기본 석물인 문무석인과 동물상이 침전 앞 향·어로로 내려오면서 석호와 석양이 사라졌고 대신에 명 황제릉에 보이는 다양한 동물상이 등장한다. 우선 문석인과 무석인이 차례로 마주보고 서고, 그 뒤로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이 순서대로 향·어로의 양쪽으로 정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홍릉과 유릉에서는 <정(丁)자각>이 <일(一)자각>으로 바뀐 것이고, 그 이름 또한 <침전>으로 변경된 것이다. 침전은 궁궐 건축 용어로 임금의 숙소라는 뜻이며, 그리하여 침전 안에는 경복궁의 사정전, 창덕궁의 선정전처럼 어좌(御座)가 놓여 있었다. 침전 입구에 향상(香床)이 놓여 있고, 제수진설도 표식이 있었다. 찬품(饌品)은 선ㆍ정릉과 대동소이 하였다. 백산자, 홍산자, 전다식, 백다식, 중박계, 절병, 유병, 당고병, 상화병, 두단병, 경단병, 자박병. 온갖 격식 있는 다식과 증병(蒸餠)들이 홍릉 제례의 찬탁에 올려 질 것이다.
몇 해 전, 나는 소설 준경묘설(濬慶墓說)을 쓰면서 고종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고종이 영건청(營建廳)을 세워 전주 건지산의 시조 사공공 묘소와 삼척 활기동의 목조 황고(皇考)의 묘소를 추봉하면서 적통 왕손임을 내 세웠지만, 누군가 말했듯 방계 승통의 극치인 것은 사실이다.
효명세자의 세자빈 풍양조씨 조대비는 순조의 대리청정을 하던 남편이 20세에 요절하자 절망 하였다. 4년 후 순조가 승하하자 어린 아들 헌종이 즉위하지만 조대비는 세자빈 신분이라 수렴청정을 할 수 없었다. 수렴청정은 안동 김씨 출신의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맡았다.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정치가 시작 되었다. 효명세자가 익종(翼宗)으로 추숭되자 자연스럽게 왕대비로 존숭되었지만 신정왕후 조씨는 몸을 낮추고 인고의 나날을 보낸다.
철종 사후 조대비는 흥선군 이하응과 연합하여, 흥선군 차남 이재황을 양자로 들이면서 익성군(翼成君) 작호를 내리고 철종의 왕위 계승 절차를 밟아 나간다. 흥선대원군의 부친 남연군 집안은 몰락한 왕족이었다. 남연군은 실제 인조의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이다. 증조부 안흥군까지만 왕족의 대우를 받았고, 생부 이병원, 조부 이진익은 평민으로 내려왔다. 그러다가 사도세자의 서자 은신군의 후사를 잇기 위하여 인평대군 6대손 이채중이 은신군 양자로 입적하면서, 남연군으로 봉해 지고, 이름도 ‘구’로 개명한다. 그래서 족보 상 영조의 후손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손자 이원범이 철종으로 등극하자 흥선군 이하응과 철종은 족보 상 6촌 지간, 흥선군 집안의 왕위 승계 서열은 높아졌다. 그러나, 혈연 상 인평대군 7대손으로 필자가 계산해 보니 고종은 철종의 15촌(17촌으로 나오는 데도 있음) 조카가 되었다. 영조 – 정조 적손 승계는 종지부를 찍었다.
철종에게 “이 나라가 이씨의 나랍니까? 김씨의 나랍니까?”라고 직언을 하면서 유력한 왕위 계승자로 부상한 경원군 이하전은 안동김씨 세력의 견제로 축출, 사 사(賜死)되었다. 풍양조씨 조대비와 흥선군 이하응의 연합 전선은 성공 하였고,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정치는 막을 내렸다. 고종은 조대비의 양자가 되어 형식적으로 효명세자(익종)의 대통을 이은 셈이다. 고종은 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효명세자를 문조익황제, 조대비를 신정익황후로 추존 하였다.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10년 철권 통치에 숨을 쉬지도 못 하였다. 1873년(고종 10년)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왕정의 험로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이후에 이어진 을미사변, 건청궁이 불타고 민비가 시해되자 넋을 놓은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사실상 망명을 하였다. 친러 내각이 들어서고 친일 내각 영의정 총리 집정대신 김홍집은 길거리 내쳐져 성난 군중에 맞아 죽었다.
아관파천 1년 후 고종은 환궁하지만 피로 얼룩진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석어당이 있는 경운궁을 정궁으로 삼았다. 순종이 즉위하고 경복궁으로 들어가면서 부왕의 장수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궁의 이름을 덕수(德壽)라 지어 올린 곳, 바로 지금의 덕수궁이다. 환어한 고종은 환구단를 지어 하늘에 제사 지내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을미사변으로 민비는 폐서인되어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다가 아관파천으로 복위 되면서 동구릉 내에 숙릉(肅陵)이라는 능호로 산릉공사를 하였다. 고종이 환궁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명성황후로 추존하여 홍릉(洪陵)이라는 능호로 현재의 동대문 근방 청량리에 능역을 조성하기 시작 하였다. 그러나 능역이 불길하다고 하여 중단 되었다. 이때 지금의 홍릉 자리가 점지 되었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지금의 남양주 금곡의 홍릉자리를 다시 공사하여 고종을 모시게 되었다. 그러니 결국 고종은 황후의 묘호를 빌려 쓰게 된 것이다. 명성황후는 동구릉 숙릉, 동대문 홍릉 어디에도 안착을 하지 못하다가 1919년 남편 황제의 승하로 금곡의 홍릉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한 것이다.
홍릉의 침전만 우뚝할 뿐 침전 앞에 도열한 석물은 조금 생경스러웠다. 일본인 조각가를 불러 만들어 놓았다고 해서 그런가 정교한 조각물로 보이지는 않았다. 전설의 동물 기린석은 전혀 신비스럽지 않았다.
大韓 高宗太皇帝洪陵 明成太皇后祔左 대한 고종태황제홍릉 명성태황후부좌
나는 홍릉 비각 안 비문을 눈으로 어루만지며 홍릉 능역을 천천히 돌아 나왔다.
홍릉 터를 돌아 나오면 작은 고갯길로 영원ㆍ회인원 능역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큰길 가 너머 무논에는 모내기 를 끝낸 벼 포기들이 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큰길을 두고 능역과 사유지가 나뉘는 모양이었다.
영원(英園)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영친왕)와 의민황태자비(이방자)의 묘소이다. 묘소를 조선왕릉의 형식으로 조성하였다. 입구 재실은 아담 하였다.
몇몇 탐방객들이 재실 마루에 걸터앉아 초여름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원내로 들어서면, 다른 조선 왕릉처럼 홍살문과 정자각으로 차례로 보인다. 능침은 조금 먼 곳, 구릉 위 능선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만, 규모가 작고 홍ㆍ유릉에 비하여 관리가 덜 되어 조금 초라한 모습이었다. 비운의 황태자, 영친왕 이은(李垠).
중학교 때 국어시간에 처음 이은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어떤 수필 내용 - 화자가 일본에서 어떤 공연을 보았는데,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인사를 하면서 ‘이은씨’라고 소개를 하였다. 아주 오래되어 그 수필가가 누구인지 기억조차 없다. 다만 애틋한 느낌이 들었다. 이은이라는 분이 누구일까 매우 궁금하였다.
영친왕 이은은 1987. 10. 10. 덕수궁 숙옹재에서 고종의 7남, 귀비 엄씨 소생으로 태어났다. 의친왕 이강은 영친왕보다 20세 위이다. 일본이 유약한 영친왕 이은을 황태자로 삼았다고 하지만, 모후의 신분 상 황위계승 서열이 다른 형제들 보다 우선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영친왕과 의친왕은 1900년 함께 친왕으로 봉해졌다. 그런데, 황태자로 봉해 진 것이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고, 정미 7조약으로 사실상 국권을 뺏긴 때라 강직한 의친왕 보다는 어린 영친왕이 일본 입맛에 더 맞았다고 할 수는 있다.
영친왕은 1910년 한일합병으로 이왕세자(李王世子)로 강등되었고, 1926년에 순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명목상으로 이왕(李王)의 지위를 받았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교수부장ㆍ육군 중장으로 부일 하였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 아니었던가. 1945년에 해방을 맞이하여 귀국하려 하였으나 무산되었다. 노 수필가의 안타까움이 묻어 난 글의 의미를 나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해방 후 평민으로 강등된 영친왕 부부는 곤궁한 일본 생활을 이어가다가 1963년이 되어서야 대한민국 국적을 얻어 귀국하였다. 귀국을 허한 것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장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주이씨 양영대군파 후손으로 영친왕, 덕혜옹주의 귀국을 애써 막았다. 그 이유는 우리가 상상하는 바 그대로이다.
우리 역사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은 1970년 5월 1일 73세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세상과 이별 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곳 홍릉 동쪽에 영원을 조성하면서 영면에 들었다. 함께 귀국한 의민황태자비 이방자 여사는 장애자 재활협회 부회장, 영친왕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나름대로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989년 4월 89세로 졸(卒)하여 이곳 영원에 합장되었다.
능침이 자리 잡고 있고 있는 언덕길 구릉을 올라 가 보았다. 저 편 영친왕 능침의 석물이 보이는 곳 아래 8부 능선 자리 즈음에서 단아한 봉분 1기가 먼저 눈에 띄었다. 잔디가 파르라니 깎인 꽤 넓은 묘원에 놓인 아담한 봉분은 고아한 모습이지만, 왕족의 무덤답지 않게 아무런 석물도 없었다. 망주석, 장명등은 물론 상석조차 없었다.
표식을 확인하니 황세손 이구의 묘소였다. 마지막 황세손을 예우하여 무덤 터를 부왕 능침 아래 조성하고 회인원(懷仁園)이라고 하였다.
2005년 7월, 이른 더위가 시작될 때 대한제국 황세손 이구의 영결식 소식은 비중이 큰 뉴스였다. 양반이자 선비를 자칭하는 지인이 분향을 하러 상경하겠다는 말을 하기에, 뭘 그렇게 까지야,라고 답한 기억이 났다. 당시 뉴스에서 본 현수막에 <이구 전하>라고 씌어 진 모습을 보았기에 나는 ‘과공비례’를 떠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막상 석물 하나 없는 단출한 묘소를 보니, 마지막 황세손 이구 저하의 쓸쓸한 죽음을 애도하는 심정에 가슴이 적막해 졌다. 이구 저하라고 하는 것은, 내 기억의 정정이다. 다시 확인해 보니 장례식 때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은 <대한제국 황세손 이구 저하(大韓帝國 皇世孫 李玖 底下)>로 격에 맞추어 표기하였다.
영원 능침과 회인원 봉분 주인들에게 마음 속 향을 사르며 언덕길을 내려 왔다.
홍릉 참배를 마친 답사객들이 홍ㆍ유릉 동남쪽으로 난 마지막 묘역 참배길을 서두르는 모습을 보고 나도 따라 나섰다. 덕혜옹주, 의친왕 묘역으로 난 길이었다. 길 가에 핀 하얀 개망초꽃 군락이 흰 구름 물결을 이루었다. 덕혜옹주, 의친왕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가 있을 것이다. 막 잔디를 갈아입고 있던 덕혜옹주의 묘 봉분은 붉은 황토빛이었다.
"나는 낙선재 오래 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가 보고 싶어요.... 대한민국 우리나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정신이 온전치 않은 덕혜옹주가 말년에 삐뚤빼뚤 쓴 글씨가 올랐다. 가슴이 시려 오는 글이다.
오던 길을 되돌아서면, 다시 홍릉 터다. 능역 중심에 있는 연지(蓮池)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유릉(裕陵)이 나타난다. 숲 속에서 장끼가 요란한 울음을 울었다.
순종 이적(李坧)은 1874년 2월 고종의 민비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원손이 이미 사망 하였으므로 다음 해인 1875년 바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퇴위하면서 제2대 황제로 즉위 하지만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부왕은 덕수궁에 남고 순종은 경복궁으로 다시 들어갔다.
두 명의 황후를 두었지만 황손을 생산하기에는 이미 병으로 무망한 모양이었다. 바로 이복 동생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립되었다. 1907년 정미7조약, 1909년 기유각서로 황제는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군대가 해산 당하고, 사법권마저 강탈 당하였다. 이른바 차관정치로 일본인 차관들이 국정 전반을 행사하였고, 황제에게는 관료 임명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황제는 한일합방 후 왕으로 강등 당하였다.
순종의 첫 황후 순명효황후 민씨가 1904년 먼저 세상을 떠나자, 양주 용마산에 유강원(裕康園)을 조성하였다. 순종이 등극한 후 유강원은 유릉으로 추봉되었으며, 순종이 1926년에 서거하자 용마산에 있던 유릉을 홍릉 옆 언덕으로 천장하는 결정이 났고 이곳에 산릉공사가 시작 되었다. 이후 순명효황후를 먼저 모시고 나서 순종을 합장으로 모셨다고 한다.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 윤씨는 1966년에 졸(卒) 하는데, 이때 유릉에 합장으로 모셔서, 유릉(裕陵)은 한 봉분 안에 세 분을 같이 모신 동봉삼실 합장릉의 형태가 되었다.
유릉의 침전은 홍릉 보다는 규모가 조금 작았다. 다만 침전 뜰에 도열한 석물들이 홍릉보다 우람하였다. 문ㆍ무관 석상은 거대 하였으나, 인상을 보면 조선인이라고 할 수 없다. 경주 처용이 회회인(回回人)이라고 하는데 무관(武官)상이 마치 그렇다. 일본인 장인의 농간인가, 일본 장인마저 조선 왕가를 능멸한 것으로 느껴져서 마음이 착잡하였다. 일본 남작(男爵)이 된 이왕직장관 민영기가 장례원 총책이었다. 황국협회를 조직하여 독립군을 탄압한 국적(國賊) 매국노에게서 더 바랄 순 없었을 것이다.
“구차히 산 지 17년, 2천만 생민(生民)의 죄인이 되었으니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다. 지금의 병이 위중하니 한 마디 말을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백성들이 분명히 알게 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백성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어둠 속에서 여러분을 도우리라.”
1926년 4월 26일, 순종이 붕어하기 전 남긴 말이라고 하지만, 솔직히 진위는 알 수 없다.
다만, 6월 10일 발인 날 순종의 발인 행렬이 유릉을 향하여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단성사 앞을 지날 때였다. 황제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러 나온 수많은 군중 속에서 수천 장의 격문이 날아오르며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 황제의 인산일을 기하여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순종의 마지막 유언을 백성들이 알 리 어렵겠지만, 마지막 왕의 죽음은 백성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활화산처럼 터트리게 하였다.
조선의 망명정부는 이미 제국을 버리고 민국을 택했다. 민국(民國)의 광복은 멀지 않았다.
大韓 純宗孝皇帝 裕陵 純明孝皇后祔左 純貞孝皇后祔右
대한 순종효황제 유릉 순명효황후부좌 순정효황후부우
순종 황제 비각의 비문이다.
금곡릉 언덕 위에 초여름 맑은 햇살이 머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