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김은영
환갑을 맞아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나를 포함해 세 명의 친구들이 친정동네에서 모여 하룻밤 수다를 떨기로 했다. 친정 동네 지킴이로 사는 나와 포항에 사는 친구는 서울서 내려오는 친구를 마중하기 위해 역으로 갔다. 작은 소읍의 역이라 그다지 달라질 것이 많지는 않지만 아주 오랜만에 역에 와본다는 그녀와 나는 그동안 변해버린 역전의 모습에서 옛 기억들을 불러오고 역 대합실에 앉아 도둑맞은 세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느 단체에서 야유회를 가는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다가 플랫폼으로 나가고 오전 시간이라 그런지 꽤 많은 젊은이들이 바삐 대합실을 지나 열차를 타러 나갔다. 친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 그런지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에 관심이 많다. 꽃분홍빛 깃털 같은 하이힐을 신은 여인의 구두를 “ 아이구, 저런 신발은 어디서 사노?” 한다. 계절이 더워지는 계절이다 보니 가볍고 환한 옷차림이 많다. 그러다 깨달은 것인데 2,30대 쯤 되어 보이는 젊은이들의 옷차림은 하나같이 검은 색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검정 일색이다. 아무리 블랙이 멋쟁이 색이라지만 재기발랄한 젊은이들의 검정복색은 왠지 짠한 마음을 불러온다.
우리 집 둘째는 초등학교 ,중학교 한 번씩 친구들과의 문제가 있었다. 짧은 직장생활에서도 상사의 괴롭힘으로 힘든 일이 있었다. 가족들의 힘으로 잘 버텨내긴 했으나 자존감은 많이 상처를 입었고 어딘지 모르게 우울함이 내재해 있었다. 그 당시 그 아이의 옷차림은 늘 무채색이었다. 검은색 티셔츠에 검은색 스키니 바지. 나 또한 경제적으로 힘든 시절이 있었다. 그 때 우연히 옷장 문을 열고 깜짝 놀랐다. 어쩌면 옷장이 그렇게 짙은 회색 아니면 카키, 검은색으로 가득 차 있는지.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은 힘들다. ‘힘내라!’는 격려마저도 그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지옥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대학입시, 바늘구멍보다 좁은 취업문, 열정만을 요구하고 보상은 없는 사회생활, 그 팍팍한 삶이 그들의 색을 검게 칠해 버린 건 아닐까. 내 자식들의 삶도 녹록치 않으니 동병상련이랄까. 그들의 ‘블랙’에 마음이 아파지는 것이다.
다른 지역 다른 삶들을 사는 셋이 모여 두런두런 밤새워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 날 점심을 먹고 카페에 앉아 나눈 이야기는 자식들 이야기였다. 2,30대 그들의 삶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보니 부모의 역할이 무언지, 어디까지인지 답답하지만 그래도 그들을 믿고 정신적으로 뒷받침이 되어 주어야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오갔다. 역시 그들에게 밝은 빛을 주고자 하는 바람이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
우리 둘째는 일본에 공부 하러 가서부터 자존감을 채우며 조금씩 색을 찾아갔다. 밝은 색을 옷을 사고 하늘거리는 원피스도, 칵테일 파티에 어울릴 법한 옷도 사서 입는다. 지금은 웬 만큼 힘 드는 일도 긍정적으로 잘 이겨내고 있다.
얼마 전, 15세 소년 화가의 전시회를 가서 영혼의 치유를 받았다. 환하고 밝은 색감이 주는 위안이 지친 영혼에 환한 빛을 비추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젊은 세대에게 그 소년화가가 빚어내는 색들을 전해 주고 싶다. 그 색들이 주는 빛에 조금이나마 휴식을 얻고 치유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빛나는 젊음이 마음껏 뿜어 나오는 빨주노초파남보 순수의 차림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