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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대사 참고 1
황로사상(黃老思想)
중국 도가(道家)사상의 한 파로서, 신화며 전설상의 제왕 황제(黃帝)와 도가사상의 개조로 일컬어지는 노자(老子)를 연계시킨 명칭이다.
한(漢)나라 초기(BC 2세기)에 정술(政術)사상으로서 위정자(爲政者) 사이에 유행했다.
재상 조삼(曹參)이 무위청정(無爲淸靜)의 정술로 제(齊)나라에 전했으며, 진(秦)나라의 가혹한 법치에 고통 받던 인심을 해방시켜 주는 것으로 환영받았다.
기본적인 법에 따라 행하는 단순하고 간소한 정치를 위주로 삼으며, 노자와 ‘황제서’를 존중했다.
거의 50년에 걸쳐 한(漢)나라 통치 지도이념이 되었지만, 무제(武帝, 재위 141∼BC 87년)의 유교 존중으로 말미암아 쇠퇴했다.
황로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사기(史記)에 따르면 전국시대 중기의 신불해(申不害), 한비(韓非) 등의 법가(法家)사상도 이에 근거한 것으로 되어 있어, 대략 전국시대 말기 제나라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무제 끝 무렵에는 이미 정술로서의 성격을 잃었지만, 후한(後漢)에서는 황로부도(黃老浮圖)라 불리며 즉, 불타(佛陀)와 병행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제사 지내졌고, 그 뒤의 도교신앙에 이어진 양상을 보인다.
음양오행(陰陽五行)
음양오행설은 음양(陰陽)설과 오행(五行)설을 함께 묶어 부르는 말이다.
음양설은 우주나 인간의 모든 나누어진 현상이 음(陰)과 양(陽)의 쌍으로 나타난다(위-아래, 높고-낮음, 남자-여자).
이들은 대립적이지만 서로 상보적으로, 음(陰)과 양(陽)이 확장하고 소멸함에 따라 우주의 운행이 결정된다는 것이며, 음과 양이 4가지 기운 (생, 노, 병, 사)에 따라 확장 소멸함으로써,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다섯 가지가 나타나 음양의 원리에 따라 행함으로써 우주의 만물이 생성하고 소멸하게 되는 것이 오행설이다.
음(陰)이라는 글자는 언덕(丘)과 구름(雲)의 상형(象形)을 포함하고 있으며, 양(陽)이라는 글자는 모든 빛의 원천인 하늘을 상징하고 있듯이 음양은 원래 산의 그림자(음)와 햇볕(양)으로 구별되어 집안으로 들어와 마침내 한ㆍ난의 뜻으로 이용되며 기(氣)의 자연철학과 결부되어서 1년 기후의 추이를 지배하는 것으로서 음양의 2기가 고려되었다. 이어서 음양은 기(氣)의 주요한 것으로서, 만물을 생성케 하는 2대 요소라고 보고, ‘역’의 십익(十翼)에 이르러서 음양철학으로 지양되었다.
이후 일기(一氣)의 2상으로서의 음양은 모든 대립하고 순환하는 것의 이원적 원리가 되며, 동양인의 사고법으로 형성되었다.
오행이라는 것은 목·화·토·금·수의 오원소를 말하는데, 문헌상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상서(尙書)’, ‘홍범(洪範)’이다. 여기서 오행은 수·화·목·금·토 순으로 열거되며, 각각의 성질이나 맛이 기억되고 있다.
홍범에는 오행 또한 정지하고 있는데, 전국시대의 음양가 추연은 이를 역사의 장에 적용해서 왕조의 교체에 대한 이론을 세웠으며, 모든 오덕(오행의 힘) 시종(순화의 뜻)설이다.
그에 의하면 각 왕조는 각각 오행중 하나가 부여되며, 명운이 다 되면 신왕조로 바뀌는데, 그 교대는 필연적인 이법에 따라서 순서가 정해지는데, 이 순환은 불에 이기는 것은 물, 물에 이기는 것은 흙의 순서이므로, 이를 오행상극이라고 한다.
성씨 (姓氏)
고대 중국에서는 성(姓)과 씨(氏)가 다른 개념으로, 성은 혈연으로 정해지고, 씨는 지연으로 정해졌다.
즉, 고대 중국의 씨는 한국의 본관과 같은 역할을 했다.
강상을 여상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다. 그러다가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성과 씨의 개념이 희미해져 결국에는 성과 씨의 개념이 합쳐지게 되었다.
오랑캐 (동이, 서융, 남만, 북적)
중국 역사에서 일컫는 오랑캐는 일반적으로 동서남북의 각 방위에 따라, 구분하여서 동이(東夷)· 서융(戎狄)·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불렀다.
서융(西戎)은 '융적(戎狄)'이라는 표현으로 북방 및 서방의 오랑캐를 통틀어 호칭하지만, 서융은 주로 간쑤 성 일대에 거주하던 오랑캐를 부르는 말이다.
귀방(鬼方), 험윤(獫狁), 견융(犬戎) 등이 은나라 및 주나라 시대에 걸쳐 나타났으며, 특히 주나라와 오랜 기간 적대 상태에 있었다. 또한 산시 성 및 허베이 성 북부 일대에 거주하던 민족들을 산융(山戎)이라 불렀으며, 춘추전국 시대에 연(燕)이나 제(齊)를 자주 침범하였다.
견융은 BC 8세기에 주나라의 수도 호경을 함락하여 서주(西周)를 몰락시키고, 춘추전국 시대를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
이후 진(秦)이 견융을 정벌하여 서서히 정복· 흡수되었다.
한나라 이후는 저족(氐族), 강족(羌族)이 서융으로 일컬어졌다. 또한 서역(西域)을 경영하면서 서역 일대를 통괄하는 서융교위(西戎校尉)와 같은 직책도 생겨났다.
후한(後漢) 말에서 서진(西晉)시대에 걸쳐 저족과 강족들이 산시 성(陝西省) 지역으로 이주해 살게 되었으며, 이를 걱정한 서진의 강통(江統)은 융인(戎人)과 적인(狄人)을 색출해서 몰아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사융론(徙戎論)’을 지어 올렸다. 저족과 강족은 오호십육국 시대에 화북을 점령하고, 성한(成漢), 전진(前秦), 후진(後秦), 후량(後凉) 등의 왕조를 건국하였다.
일반적으로 고대 서융에 해당하는 간쑤 성 지역은 한나라 이래로 중국에 거의 복속되어 이후로는 서역 지역의 국가들이 서융에 해당하게 되었으며, 중국 정사에는 ‘서역전’으로 편제되었다.
당나라는 서역의 여러 국가들을 ‘서융전’에 편성하였다. 이후 중국의 역대 정사들은 주변 국가를 오랑캐로 취급하는 인식에서 벗어나 주변 국가를 외국(外國)으로서 열전에 편성하였다.
동이(東夷)는 중국 역사에서 동쪽에 사는 이민족을 일컬어 부르는 말로서, 특정 민족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중국의 동쪽에 존재한 여러 이민족들을 '동쪽 오랑캐'라고 얕잡아 부르는 말이었다.
'사이(四夷 동이·서융·남만·북적)'와 같이 이(夷)는 오랑캐 전체를 일컫는 대명사로도 사용되었다.
동이가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은 은(殷)시대의 갑골문자로, 이(夷)에 해당하는 갑골문자는 尸(주검 시)와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이(夷)의 어원을 '큰 활을 가진 사람'이라 해석하였으며, '이(夷)'라는 글자가 '대(大)'와 '궁(弓)'이 합쳐서 만들어졌다는 추측이 전통적인 관점이었으나, 갑골문자의 발굴 결과와 다르기 때문에 현재는 인정되지 않는다.
은(殷)시기 및 그 이전 시대를 기록하고 있는 문헌에 등장하는 동이는 주로 산둥 성, 허베이 성, 장시 성 일대에 거주하는 종족이었다.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여러 제왕들을 비롯하여 은나라까지 동이 출신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당시의 동이를 9개의 종족으로 구분하여 구이(九夷)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후한서’, ‘동이전’에는 이들 구이를 견이(畎夷)·우이(于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陽夷)로 구분하고 있으나, 그 외에도 다양한 구분법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九라는 글자가 단순히 많다는 의미를 가져 구이는 동이의 수많은 종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은 용법이다.
주나라 이후 동이는 중국에 정복되고 흡수되기 시작하여, 춘추전국 시대에는 산둥반도의 래이(萊夷)나 장시 성의 회이(淮夷) 등의 작은 세력으로 축소되었다.
한나라가 이후 동이는 모두 중국에 흡수되어 소멸되었으며, 이후의 동이는 만주·한반도·일본 열도의 종족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한나라 이후의 동이는 이전의 동이와 문화적·혈연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나라 이후의 동이는 특별한 문화적·혈연적인 관계를 구분하지 않고 방위의 개념으로써 동쪽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오랑캐들을 한꺼번에 서술하였다. 그로 인해 문화적·혈연적인 계통상 차이가 큰 예맥족·한족(韓)·말갈족·왜족(倭) 등이 모두 동이로 서술되었다. 또한 말갈을 당나라 이후 동이에서 북적으로 바꿔 부르는 등, 방위를 제외하면 해당 종족들을 특별하게 구분하여 부르는 기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나라 이후의 중국 역사서에서는 대체로 한민족의 기록은 ‘동이전(東夷傳)’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동이가 한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고 있다.
당나라 이후 중국의 역대 정사들은 주변 국가를 오랑캐로 취급하는 인식에서 발전하여 주변 국가들을 외국(外國)으로서 열전에 편성하였다.
동이는 동쪽 오랑캐를 가리키는 일반명사로도 사용되었으며, 한국의 옛 나라들은 자국의 동쪽에 위치한 국가나 부족을 동이라 불렀던 흔적이 남아 전해진다. 중원고구려비에는 신라를 동이라 칭하고 있으며, 조선 시대에는 일본을 동이라 칭하기도 했다.
일본 역시 헤이안 시대부터 아이누 민족을 이(夷) 또는 에조(蝦夷)라 칭하며 오랑캐로 취급하였다.
헤이안 시대에 아이누 족을 공격하는 직책을 맡은 대장은 세이이타이쇼군 (정이대장군, 征夷大将軍)에 임명되기도 했다.
남만(南蠻)은 중국 역사에서 남쪽에 사는 오랑캐(이민족)를 일컬어 부르는 말이며, 만이(蠻夷)라는 표현으로 오랑캐를 통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남만은 주로 창 강 유역 및 그 남쪽에 살던 이민족을 부르는 말이었다.
삼황오제 시기에는 삼묘(三苗)가 상당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역대 제왕 및 왕조들은 삼묘와의 전쟁을 중요한 업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강국이었던 초(楚), 오(吳), 월(越) 등은 황허 유역의 주요 국가들에 의해 남만으로 분류되기도 하였다.
진시황이 통일한 후 초, 오, 월 지방은 완전히 흡수·동화되었으며, 남만은 이보다 더 남쪽의 민족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한나라 시기에는 지금의 푸젠 성, 광둥 성, 광시 좡족 자치구, 구이저우 성, 윈난 성 일대에 거주하는 이민족을 남만 또는 서남이(西南夷)로 호칭하였으며, 동남아시아 일대의 임읍, 부남 등의 국가도 남만으로 분류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윈난 성 일대의 남만족이 촉한과 대립·협력한 기록이 전해지며, 푸젠 성 일대의 산월(山越)은 오(吳)와 오랜 기간 대립하였다.
윈난 성 지역은 오랜 기간 중국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독립을 유지하였으며, 8세기 초, 남조(南詔)가 이 지역을 통일하고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였다.
938년에는 남조의 뒤를 이어 대리국이 성립되어 13세기까지 존속하다가 원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남만으로 분류되었던 중국 내부의 이민족들은 오랜 기간 중국의 간섭과 통치를 받으며 점차 동화되고 소멸되었으며, 현재 중국 남부에 남아 있는 소수민족들은 대부분 고대·중세에 남만으로 불리던 이민족의 일부이다.
남만은 남쪽의 오랑캐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한족을 정복하고 정복왕조를 세운 북방민족들은 피정복민인 한족을 남만으로 멸칭하기도 하였다.
원나라는 남송을 정복한 이후 남송의 한족들을 남만으로 차별대우하였다.
중국 문명권에 속해있던 한국과 일본도 사이와 같은 호칭을 받아들여 사용하였다. 일본은 규슈 남부 및 오키나와 지역을 만(蠻)이라 호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 한국은 류큐 왕국 및 동남아시아의 국가들과 조공 무역을 하였는데, 이들을 남만이라 불렀고 선박은 남만선, 상품은 남만물산이라 하였다.
16세기 이후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을 위시한 서양 세력이 동남아시아 일대를 장악하고 일본·중국 등지에 무역을 요구하기 시작하자 이들 서양인에게도 남만이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다.
일본은 이들과의 무역을 남만무역이라 부르며 적극적인 접촉을 시도하였으며, 이로 인해 화승총이 일본에 도입되고 기독교를 비롯한 서양 문물이 일본에 전해졌는데, 일본은 이들 문물에 남만이라는 접두어를 사용하여 구분하였다.
북적(北狄)은 원래 고대 중국의 민족인 적(狄)을 의미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만리장성 너머의 중국 북부, 몽골에 사는 흉노(匈奴), 선비(鮮卑), 거란(契丹), 몽골(蒙古) 등의 비한족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로 주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가끔 중원에 침입해 약탈을 행하여 한족의 관점에서 장성 이북의 민족들은 야만족으로 여겨졌다.
북적(北狄)은 적적(赤狄), 백적(白狄), 장적(長狄) 등, 여러 집단으로 나뉘었다. 이 집단은 다시 여러 개의 부족으로 나뉜다. 백적(白狄)에 속하였던 ‘선우부(鮮虞部)’가 중산국을 세웠다.
중국 일부에선 요임금을 북적사람, 순임금을 동이 사람, 하나라의 우임금을 남이(남만)사람, 은나라의 탕왕을 동이사람, 주나라의 무왕을 서이(서융)사람이라 하였다.
금문(今文)과 고문(古文) 논쟁
금문학파와 고문학파의 논쟁으로 사서삼경의 하나인 서경(書經)의 진위에 관한 논쟁을 말한다.
삼경은 대학, 논어, 맹자, 중용 등 사서(四書)와 함께 유교의 중요한 경전(經典)을 구성했다.
그런데 이 유교경전들은 중간에 여러 가지 사건으로 많이 유실되고 실전되어 그 원래의 모습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분서갱유(焚書坑儒)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그 지도이념을 법가에 기초로 두었고 중국의 사상을 하나로 통일하고자 제자백가의 학설들을 탄압했다. 또 여기에 자신의 통치를 비판하는 유가의 학자들에 대한 진시황의 증오가 더해져 분서갱유라는 초유의 사상탄압 정책이 시행되었다.
진시황은 전국적으로 유학을 중심으로 한 제자백가의 서적들을 모두 거둬들여 불태웠으며 의(醫), 약(藥), 복서(卜筮), 농업 관련 이외의 서적을 민간이 소장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것도 모자라 진시황은 그 이듬해 무려 460여 명의 유학자를 붙잡아 들여 땅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고 했다.
분서갱유 당시 유학에 대한 탄압이 특히 혹심했는데, 이로 인해 많은 유가의 경전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서경도 실전되어 후세에 그 내용이 전해지지 않았다.
한(漢)나라 시대에 들어와서 유학이 중시되기 시작하면서 유가의 경전들에 대한 복원이 시도되었다.
이 때 복원된 경전들은 그 당시의 문자체인 금문(今文 지금 현재의 문자체)으로 적었기 때문에 금문상서라고 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서경 진본이 발견되었다.
공자의 옛 집을 수리하기 위해 벽을 헐었는데 그 속에서 과두문자(蝌蚪文字)로 쓰인 서경, 예기, 논어, 효경 등의 고대 전적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과두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공자의 11세손인 공안국(孔安國)이 금문상서와 대조해 가며 해석해 주석을 붙였는데, 이는 원래 고문(古文)으로 쓰였으므로 고문상서라 불렀다. 또 공안국이 고문상서뿐만 아니라 함께 발견된 예기, 논어, 효경 등에 대해서도 주해를 붙였으므로 여기에서 소위 고문학(古文學)이 시작되었다.
금문상서가 진짜냐 고문상서가 진짜냐 하는 금고문 논쟁(今古文論爭)이 시작된 것은 전한말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유흠(劉歆)이 고문상서를 진본으로 인정해 학관(學官)에 고문상서를 전문으로 하는 박사(博士)를 설치하고자 시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당시까지 주류였던 금문학파의 학관 박사들이 이를 저지하고자 함에 따라 유흠과 이들과의 사이에 큰 논쟁이 일어났다.
결국 유흠이 패배해 하내태수(河內太守)로 밀려나고 말았는데, 그 당시 금고문논쟁이 얼마나 치열했었던지 유흠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왕망(王莽)의 신나라 정권에 협조하기까지 했다.
후한(後漢) 시대에 들어와 동중서 등의 노력으로 유학이 한나라의 국학이 되었는데, 이때의 학풍은 주로 옛 전적을 해석하고 주석을 붙이는 훈고학(訓詁學 가르치고 훈계함)이 주류를 이루었다.
후한시대의 주류적 견해는 고문상서를 진본으로 보았다.
마융과 정현이 대표적인 고문학자들이었으며, 이들의 주해서도 고문상서에 주석을 붙인 것들이었다.
사마휘와 송충은 정현, 진기(陳紀) 등과 더불어 당대의 명유였으며 이들이 다 고문학파였다는 것을 볼 때 당시에는 금문상서보다 고문상서가 더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까지 전해진 58편의 상서는 동진(東晉)의 매색(梅賾)이라는 유학자가 조정에 바쳤다는 매씨상서로서, 매씨상서에는 금문상서와 고문상서가 다 수록되어 있다.
금문상서는 원래 29편이었으나 매색이 편을 나누어 33편으로 편집했고, 고문상서는 16편으로 구성되었으나 여기에 9편을 더하여 25편으로 구성되었다.
매색의 매씨상서는 그 당시 유행하기 시작하던 정통론의 영향을 받아 정사를 구분하는 명분론적 경향이 강했다. 따라서 동진과 비슷한 정치적 환경에 처해 있던 남송 시절에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그의 고문상서가 진본으로 인정되었었다.
그러나 그의 매씨상서 58편 중 25편의 고서에 대해서는 위작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를 최초로 고증한 것은 청나라 초기의 대표적인 고증학자의 하나인 염약거이다.
그는 상서고문소증(尙書古文疏證)이라는 논문을 통해 동진(東晉)의 매색(梅賾)이 조정에 진상한 상서 58편 중 고문상서 25편은 마융(馬融), 정현(鄭玄) 등이 주석을 단 공벽고문상서(孔壁古文尙書)와 편수(編數)나 편명(編名)에서 일치하지 않고, 또 그 내용 상 위작으로 볼 근거가 많다는 것을 조목조목 실증적으로 비판했다.
현재 전해져오는 금문상서와 고문상서가 위작인지 아닌지는 명확하게 밝히기 어렵다. 원전이 그대로 전해오는 것이 아닌 만큼 둘 다 위작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후한대의 학문적 성과로 보면 공안국의 고문상서는 진본일 가능성이 높다. 복생의 금문상서는 그가 암기한 내용에 기초했다고는 하나 구술하는 과정에서 그의 주관이 가미되었을 수도 있다. 또 현존하는 금문상서 역시 복생의 것이라고 주장할 명확한 근거도 없다.
금문상서 역시 실전되었다가 동진의 매색이 공안국의 고문상서와 함께 조정에 바친 것이기 때문이다.
고문상서 역시 원래의 공벽고문상서는 소전되었으나, 매색이 바친 내용이 완전히 날조라고 볼 수만도 없다. 이미 개인의 주관적 견해가 가미되었거나 없던 내용이 창작되어 추가되었을 수는 있어도 완전히 없는 내용을 만들어내었을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과거 학문하는 기본 방법이 경전의 내용을 철저히 암송하는 것이었던 만큼 복승이나 매색이 암기했던 내용을 다소의 주관을 넣고 그 당시의 사정에 맞게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용어를 바꾼 것이지 날조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금문이든 고문이든 원래의 상서 그대로의 형태는 아니다.
그 후의 연구결과들과 개인들의 신조, 기억들이 어느 정도 혼재되어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원래 서경은 3000편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니 지금 전해져 내려오는 내용은 그야말로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상서가 그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논쟁이 거듭되어 왔고 또 실제로 그 유래가 불분명한 점도 많으나 오랜 세월 동안 유교의 최고 경전으로 권위를 지녀왔고, 또 중국인들과 동양의 정신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는 점에서 그 사상사(思想史)적 의미는 크다.
금문 경학은 공자를 숭상하며, 공자가 비록 제왕의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하늘의 명을 받은 사실상의 제왕, 즉 소왕(素王)이라고 본다. 공자를 정치가이자 교육가로 여기는 셈이다. 또한 공자가 옛 것에 의탁하여 제도를 개혁한(托古改制) 인물이라고 간주한다. 이에 비해 고문 경학은 주공(周公)을 숭상하며, 공자를 위대한 스승이자 사학가라고 본다. 또한 공자는 옛 것을 믿고 존중하여 그것을 풀어서 설명했을 뿐(信而好古, 述而不作), 스스로 짓지는 않았다고 간주한다.
금문 경학은 6경을 모두 공자가 손수 정리했으며, 경학 및 경서가 공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에 비해 고문 경학은 6경이 기본적으로 고대의 사료에 불과하며, 6경이 공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경서의 배열에서 고문 경학은 6경을 사료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것이 출현한 시대의 선후에 따라 배열하여 역, 서, 시, 예, 악, 춘추를 차례로 놓는다. 이에 비해 금문 경학은 6경의 내용적 깊이에 따라 배열하여 시, 서, 예, 악, 역, 춘추의 차례로 놓는다. 또한 금문 경학이 ‘춘추공양전’을 위주로 하고 경전의 전수과정을 중시하는데 비해, 고문 경학은 ‘주례’를 위주로 한고 경전의 전수과정을 중시하지 않는다.
고문 경학과 금문 경학의 대립은 단지 학문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전한 말기 고문 경학파의 대표자 유흠은 당시의 실권자 왕망(王莽 BC 45~ AD 23년)에 협조하였다.
AD 8년 제위를 찬탈하여 신(新) 왕조를 세운 왕망은 새로운 국가 운영 원리와 이념이 필요했고, 그것을 전한 시대에 유행한 금문 경학이 아닌 고문 경학에서 찾고자 했다.
유흠은 왕망의 후원 아래 고문 경서인 ‘주례’에 바탕을 두어 전장제도를 새롭게 정했다.
신나라가 왕망의 일대에서 끝나고 말자, 광무제가 후한을 세운 후 전한 부흥의 목표를 내건 광무제는 금문 경학을 부흥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오경박사의 자리를 모두 금문학파가 차지했고 고문학파는 배척되었다.
그러나 고문 경학은 학문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녔기 때문에, 정치적인 부침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 성과가 비교적 착실하게 축적되었고, 결국 후한을 대표하는 경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화씨벽옥 (華氏壁玉)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에 변화씨(卞和氏)란 사람이 산에서 옥(玉)의 원석을 발견하여 왕(여왕)에게 바치자, 왕이 보석 세공인에게 감정시켜 보니 보통 돌이라 하여, 이에 화가 난 왕은 변화씨를 월형(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에 처했다.
여왕이 죽은 뒤 변화씨는 그 옥돌을 다시 무왕(武王)에게 바쳤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여서, 이번에는 왼쪽 발뒤꿈치를 잘리고 말았다.
무왕에 이어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변화씨는 그 옥돌을 끓어 안고 궁궐문 앞에서 사흘 낮 사흘 밤을 울었다. 문왕이 그 까닭을 묻고 옥돌을 세공인에게 맡겨 갈고 닦아 본 결과, 천하에 둘도 없는 명옥이 영롱한 모습을 드러냈다.
문왕은 변화씨의 정성에 감동하여 큰 상을 내려 대부에 준하는 봉록을 하사하여 여생을 편히 살 게 해주고, 변화씨의 이름을 따 '화씨지벽'이라 했다. 하지만 초여왕과 초문왕 사이의 기간은 약 100년이다. 즉, 화씨지벽이 등장한 시기는 초문왕 때로 보는 게 맞으나, 위의 이야기는 왕이 바뀔 때마다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겠다며 대대로 찾아가 월형을 받은 게 아닐까 싶으며, 또한 한비자의 저자 한비가 스스로를 화씨지벽으로 비유하며 세상에 쓰이기를 바랬다는 설도 있다.
이후 조나라 혜문왕(惠文王)이 화씨지벽을 손에 넣었는데, 이 소문을 들은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이 15개의 성(城)과 교환하자는 바람에 한때 양국간에는 긴장이 조성되기도 했다. 이에 연유하여 화씨지벽은 '연성지벽(連城之壁)'이라고도 불린다. 이에 조 혜문왕은 이 위기를 넘길 인재를 찾다가 인상여(藺相如)가 나서서 화씨지벽을 가지고 진나라에 갔다가, 그냥 뺏길 뻔한 것을 기지(機智)로 흠집 하나 없이 온전히 가지고 돌아왔다고 해서 완벽(完璧)이라는 성어가 생겨났는데, '완벽'이란 이렇듯 흠 하나 없이 완전무결한 옥이란 뜻이다.
참고로 옥의 티를 뜻하는 하자(瑕疵)라는 단어는 인상여가 진왕에게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또한 전설에 따르면 화씨지벽은 일종의 야광주(夜光珠)로서 밤이면 스스로 빛을 내고, 구슬이 있는 백보 안에는 파리와 벌레가 들어오지 못하고, 여름엔 부채가 필요 없을 정도라 한다.
진시황은 진(秦) 26년 초(楚)를 멸망시키고 이 옥을 얻어서 옥공(玉工)으로 하여금 도장을 깎게 하고, 재상 이사(李斯)에게 아래의 여덟 자를 전서(篆書)로 쓰게 해서 처음 옥새로 사용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전국옥새(傳國玉璽)다.
受命於天(수명어천) 명을 하늘로부터 받았으니
旣壽永昌(기수영창) 오래 가고 크게 뻗으리라
화씨지벽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여 옥새로 만든 후, 진 말기에 한 고조 유방이 관중으로 쳐들어갔을 때 항복한 진시황의 손자 자영이 유방에게 바침으로서 한(漢)의 역대 황제에게로 계승되었다. 이후 후한 말 혼란기에 환관들이 척살될 때 종적을 감추었는데,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손견이 우물에서 전국새를 찾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손견의 아들 손책이 병력을 얻는 조건으로 원술에게 이것을 넘겼고, 원술은 이 전국새를 갖고 황제를 참칭하다 몰락하여 결국 조조의 손에 들어가 조조의 아들 조비의 위나라와 사마염의 서진을 거쳐, 오호 십육국의 전란기에 여러 차례 주인이 바꾸었다가 마지막으로 전진의 황제 부견이 죽임을 당할 때, 후진의 황제 요견이 전국새의 행방을 묻자, 이미 동진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로는 전국새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는데, 아마 거듭된 전란기에 분실된 것으로 추측되며, 이후로 몇 차례 전국옥새를 찾았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모두 진품이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오늘날 이 화씨지벽을 찾는다면 아마 서양의 법궤처럼, 벽옥 자체의 가치에 역사적 상징성으로 값을 매길 수도 없는 진귀한 보물인 무가지보(無價之寶)가 될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동양에서 ‘화시지벽’은 값을 따질 수 없는 보물인 무가지보(無價之寶)의 대명사로도 쓰인다.
오자서(伍子胥, ? ~ BC 485년)와 굴묘편시, 일모도원, 심복지환, 와신상담
오자서는 초나라 사람으로 아버지 ‘오사’는 초나라 ‘평왕’의 태자 ‘건’의 스승이었는데 ‘비무기’라는 신하가 평왕에게 참언하여, 평왕이 태자와 오사를 죽이려 하여 감옥에 가두고 오사의 아들 ‘오상’과 ‘오자서’를 함께 죽이려 불렀으나 오상은 함정인줄 알면서도 가서 죽었고 오자서는 도망하여 송나라, 정나라를 거쳐서 오나라의 왕 ‘합려’에게 들어가 BC 506년 초나라를 함락시킨 뒤 평왕의 아들 소왕을 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자 평왕의 무덤을 헤쳐서 시신을 꺼내어 300번의 채찍질을 하여 굴묘편시(掘墓鞭屍) 라는 고사성어가 유래 되었다.
그 때 친구 신포서가 그의 혹독한 행동을 나무라자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어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할 수 밖에 었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그 후 ‘오자서’와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무’가 섬기는 오나라의 왕 ‘합려’가 월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월왕에게 패하여 오왕 ‘합려’가 죽고 그의 아들 ‘부차’가 왕이 되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땔나무 위에서 잠을 자는 와신(臥新)의 생활을 하다가 월나라를 다시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는데, 월나라 왕 ‘구천’은 오나라 왕 ‘부차’와 그 대신들에게 많은 재물과 보물을 주며 강화를 요청하였는데 그 때 오자서는 오나라왕 ‘부차’에게 월나라는 오나라에게 치료하기 어려운 뱃속의 질병과 같으므로 지금 멸망시키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심복지환(心服之患)’ 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그러나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화친하였고 그 후로 오자서를 점차 멀리하자 후환을 생각한 오자서는 그의 아들을 제나라에 맡겼는데 그와 사이가 나쁜 백비가 모함하여 오왕 ‘부차’가 자결하라고 준 보검 촉루(蜀鏤)로 자결하면서 자신이 죽으면 자기 눈알을 도려내어 멸망하는 월나라를 볼 수 있게 동문 위에 걸어 달라 하자, 그 말을 전해들은 부차가 진노하여 그의 시체를 말가죽에 담아 강물에 던져버렸다. 한편 월나라의 왕 ‘구천’은 복수를 위하여 쓸개를 씹으며(상담 : 嘗膽) 9년간이나 전쟁을 준비한 후에 오나라를 쳐서 함락하자 오나라 왕 ‘부차’는 자결했다.
합종연횡 (合縱連橫 BC 300년대 초반)
주나라 소진은 강국인 진나라를 대하여 약소국인 6개국이 연합하는 ‘합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장의는 현실적으로 약소국은 진나라 밑에 들어가야 살 수 있다는 속국론인 ‘연횡’을 주장했다.
전국시대 중반(BC 300년대 초반) 전국칠웅이 자리를 잡으며 패권을 다퉜는데, 이 과정에서 상앙의 변법을 통해 강국으로 부상한 진나라 혜문왕이 각 제후국에 땅을 요구하며 동진을 추진해 독보적으로 나선다. 이때 주나라에 귀곡선생의 수제자중 소진과 장의 두 희대의 유세가가 나왔는데, 먼저 소진은 자신의 유세술을 펼치기 위해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각국을 돌아다녔다.
처음엔 주나라 현왕을 알현하고 진혜문왕에게는 아버지 효공 때 상앙 같은 유세가의 무소불위를 봤기에 무시당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귀곡선생이 준 '태공음부편(太公陰符篇)'을 절차탁마해 유세술에 눈을 뜨고는 조나라 숙후를 찾아갔으나 정승 봉양군에게 퇴자 맞고, 다시 연나라 문공에게 의탁하여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다. 이후 조나라 숙후를 다시 찾아가 6국이 연합해서 진(秦)에 맞서야 한다는 합종책을 내놓으며 각국을 돌아다니며 연합시켰다. 그때 그의 권세는 6국의 재상을 지낼 만큼 주나라의 왕권을 능가했다. 아뭏든 합종책이 진을 견제하며 빛을 보는가 했는데, 이때 소진과 동문수학했던 장의도 출사해서 유세술을 펼치려고 위나라 혜왕을 찾아갔다가 퇴자 맞고 초나라 위왕에게 의탁하다가 영윤 소양에게서 화씨벽을 훔친 주범으로 오해받아 치도곤을 맞았다. 하지만 입만은 살아서 다행이라며 부인에게 자랑을 했다한다.
이후 조나라에 있던 친구 소진을 찾아가서 도움을 받으려다 겉으로는 문전박대를 당했으나, 소진의 숨은 배려로 진(秦)혜문왕이 장의를 알아보고 능력을 인정받아 재상으로 올랐다.
진(秦)혜문왕에게 인정받은 능력은 6국을 이간질시켜 띄어 놓아 진나라에 속국으로 붙게 하는 것으로, 그래서 그는 소진이 제시한 합종책을 깨기 위해 첫 번째로 위나라와 연나라를 포섭(연나라 세자와 결혼)해서 진나라를 받는 것이 유리하다고 꾀어 위나라에서도 재상직을 하여 진나라와 겸직한다. 이때부터 합종의 6국은 와해되기 시작되고 소진은 장의의 꾀로 진나라에 붙은 연나라를 책망하러 갔다가 도리어 연나라 왕에게 그러면 제나라가 우릴 침범한 일은 어쩌겠냐며 책망 받는다. 이에 소진은 연역왕의 어머니 문부인과 사통해 일부러 죄를 짓고 제나라로 도망가서 제선왕을 보필하며 눌러 지낸다. 이때부터 소진은 장의의 연횡책에 위기감을 느껴 위, 조, 한, 초, 연 5개국 합종을 추진해 초회왕이 맹주로 추대되어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다들 동상이몽인지라 함곡관에서 대패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여기서 제나라가 빠졌는데 그 이유는 선왕에 뒤를 이은 제나라 민왕은 맹상군의 언질로 일부러 늦게 합류해 합종 대열에서 한발자국 빼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제나라는 안정감을 찾게 되고 제선왕 시절 잘나가던 소진의 세력은 꺾이며 제민왕이 맹상군을 더욱더 중용하니, 합종의 실의 없음과 무용함을 들어 소진을 궁지로 내몰아 대부들이 자객을 시켜 암살시켰다. 이렇게 소진은 연나라를 위해 제나라를 출분했다가 최후의 말로를 맞은 것이다.
한편 위나라 정승으로 있던 장의는 육국이 진나라를 치는데 성공하지 못한 것을 보면서 소진까지 죽자 더욱더 의기양양해 위 애왕을 설파해 진나라와 우호관계를 맺게 하고 다시 진나라로 복귀한다. 이때 연나라는 공자 자지(子之)의 반란이 있었는데 이것을 제민왕이 평정하며 위세를 떨치자 종묘사직이 거들 나버린 연나라는 연소왕이 권좌에 올라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며 인재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여기서 악의가 등장한다.
한편 합종이 사라진 종국에는 초, 제, 진 삼국이 강국으로 부상되며 서로 암중모색했다. 여기서 장의가 또다시 나서서 제나라와 두터운 친교를 맺었던 초나라 회왕을 두 번이나 속여서 제나라와 절교하면 진나라의 땅을 떼어주겠다는 장의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 분통해하고 장의를 잡았다가 다시 풀어줬다.
장의는 진나라를 위해서 두 나라를 이간질 시켜 초와 진이 통혼관계(회왕과 혜문왕이 서로의 딸을 시집보냄)를 맺어 동맹을 하게한다. 하지만 이때 제민왕이 그 사이 회왕이 진과 붙었다고 화가나서 회왕을 치니 그는 겁을 먹고 세자 횡(초경양왕)을 제나라에 볼모로 보내어 화친했다.
이에 이번에는 진소양왕이 분통해하며 초나라 군대를 대패시키고, 초회왕을 사로잡기 위해서 빼앗은 땅을 돌려준다고 꼬여 대장 백기와 몽오를 출전시켜 진나라 함양 땅으로 오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초나라 대신 굴원과 소저는 극구 만류했지만 가야된다는 근상과 공자 난을 데리고 적지로 들어가 함양 땅에서 볼모로 잡히게 되었다. 이때 초나라에서는 왕위가 비었다 해서 곧바로 제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는 세자횡을 데려와 앉히니 그가 바로 초경양왕이다.
초회왕은 이렇게 제와 진에 굴욕을 당하며 볼모생활 중 도망치다 다시 잡혀와 분통해하며 피를 한말이나 쏟고 죽었는데, 이는 예전의 춘추말 진(晉)과 초가 동맹하던 시기에 두 곳에 붙으려던 정나라의 정간공과 같은 형세다. 이렇게 초회왕이 죽게 되자 제와 동맹해서 강국인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파였던 충신인 대부 굴원(屈原)은 진나라의 장의와 내통한 초경양왕의 근신이던 정적 공자 난과, 간신 근상과, 왕의 애첩 때문에 삭탈관직 당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종묘사직을 달래다, 초나라의 국세가 기울고 조정에는 간신들만 득세하는 상황을 한탄하고 슬퍼하다가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그가 바로 초나라의 대신이자 애국시인으로 이름난 굴평(屈平)으로 '시경(詩經'과 함께 중국 고대의 2대 시가집이라고 하는 '초사(楚辭)'의 저자다.
이런 그의 충절을 기려 후세에 5월 5일 멱라수에서는 경도희(競渡戱 :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경주, 누가 굴원의 시체를 빨리 건져오나 내기하는 의미)는 행사와 제사를 지낸다.
‘사당은 강가에 우뚝 섰는데 충렬왕에게 바치는 향불이 그칠 때가 없더라. 그 후 간신들의 뼈는 어디서 썩었는지 모르지만 백성들은 해마다 그날이 되면 배를 타고 충신을 조상하는도다’
이렇게 장의의 세치 혀는 얼빠진 초회왕을 갖고 놀고 충신까지 죽이며 초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다. 합종의 소진보다 더 간교하고 뛰어나서 진나라를 중심으로 6국이 때에 따라 동맹관계를 맺게 해서, 지난날 소진이 이루었던 육국의 합종을 분리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후에 연횡정책의 중심에 서 있던 진혜문왕이 죽고 세자 탕이 계승하니 그가 바로 진무왕으로 이 왕은 용사 임비와 맹분을 데리고 주나라에 가서 용력을 자랑하려고 구룡신정을 드는 차력시범을 보이다가 놓쳐서 발목이 찍혀 병사했다.
진무왕이 그렇게 죽기 전 권세와 대신들의 반발의 위협을 느낀 장의는 스스로 실각함을 비치며, 때 마침 제민왕 침입의 눈을 돌린다며 위나라 애왕에게 출분해 정승으로 지내다 1년 뒤 병사하여, 소진의 최후와는 비교된다.
종국엔 장의의 연횡책은 실질적인 힘을 가진 진을 중심으로 했기에, 합종보다 더 현실적이며 안정성과 효율성을 지녀서 후에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는데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굴원(屈原, BC 340~278년)
굴원(屈原)은 중국 전국 시대 초나라의 시인이며 정치가다. 성은 미(羋), 씨는 굴(屈), 이름은 평(平)이다. 초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나 초나라의 회왕 때에 좌도(보좌관)에 임명되었다.
학식이 높고 정치적 식견도 뛰어난 정치가였으며, 회왕의 상담역으로 국사를 도모하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으나, 다른 이의 모함을 받아 신임을 잃고 끝내 자살하였다.
그는 이러한 아픔을 시 이소(離騷)에 담았는데, 이소란 '우수에 부딪힌다.'는 뜻이다.
진나라의 소왕은 초 회왕의 진나라 방문을 요청하자, 굴원은 극구 반대하였으나, 회왕은 막내 아들 자란의 권유에 따라 진나라에 방문하였다가 억류당한 채 병사하였다.
큰 아들 경이 경양왕으로써 왕위에 올랐고, 회왕의 막내 아들은 영윤으로 임명되었다.
굴원은 자신의 뜻이 반영되지 않고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되자 낙담하였다. 마침내 양왕은 자란과 상관대부의 중상모략에 불구하고 굴원을 강남으로 추방하였다.
다음은 회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이소의 한 부분이다.
‘일월은 홀연하여 멈추지 않고, 봄과 가을은 어김 없이 바뀐다
초목이 영락하는 것을 생각하고, 미인이 늙어감을 두려워 한다.’
굴원은 멱라강(汨羅江)에 돌덩이를 품에 안고 몸을 던져 죽었다.
굴원의 시 회사부를 통해 굴원이 투신한 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초나라는 이후 나날이 영토를 진나라에 빼앗기다 50여년 뒤 결국 진나라에 멸망당했다. 멱라(汨羅)는 후난 성 상수(湘水)의 지류로 동정호로 흘러들어간다.
그의 작품은 대개 울분의 정이 넘쳐나지만 고대 문학 중 드문 서정성을 띠고 있다.
대부분의 시는 ‘초사’에 실렸는데 ‘이소’라는 시가 특히 유명하다. 그 밖에 어부사(漁父辭), 천문, 구장 등이 남아 있다.
한나라 시절 가생이 장사왕의 태부가 되어 상수(湘水 동정호의 수원)를 지날 때, 시를 지어 물속에 던져 굴원의 넋을 달랬다. 단오절이 굴원을 기념하기 위하여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중국 음식 쫑즈도 굴원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음식이다.
악의(樂毅, 생몰미상 ; 악의가 제(齊)나라 수도 임치 함락 BC 284)
악의(樂毅,)는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의 명장으로 소왕(昭王)을 도와 조나라(趙) · 초나라(楚) · 한나라(韓) · 위나라(魏) 연합군을 이끌고 제나라(齊)를 징벌하여 제나라의 70여성을 함락시켜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은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거와 즉묵 성을 공격하던 중에 제나라 첩자가 "악의가 왕이 되려한다"고 이간해서 실각하여 본국인 조나라로 망명했으나, 혜왕의 부름에 그 유명한 보연왕서(報燕王書)를 지었다.
제갈량의 출사표도 여기서 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단(田單 생몰미상 BC 265년 전단이 중양 공략)
전단은 제나라 왕족의 친족이다.
악의가 제나라로 쳐들어가자 전단은 수레바퀴에 쇠를 씌어 피난하면서 수레바퀴가 부딪혀 부서지지 않게 하였다. 그리하여 전단과 집안사람들은 즉묵까지 가서 성을 수비할 수 있었다.
연나라는 거와 즉묵을 제외하고 모든 성들을 함락시켰다.
거는 초나라 장수 요치가 구원을 와서 오히려 제나라의 민왕을 죽인 후에 거 성을 지켰고, 즉묵은 전단이 지켰다. 이때 즉묵 성에서 백성들의 추대로 장군이 된 전단은 마침 연나라에서 악의와 사이가 좋지 않은 태자가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첩자를 보내어 악의에 대한 소문을 퍼뜨려 기겁과 악의를 교대시켰다.
제나라 전단의 간계에 의해 해임된 악의는 조나라로 도망갔다.
전단은 군사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믿게 하려고 일부러 끼니 때 마다 제사를 지내어 새들이 오게 하였다(새들이 오는 까닭은 관습에 따라 제사음식을 먹은 후 주변에 던져줘서 먹기 위해서다.). 그리고는 이를 신이 자신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신이 나의 스승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한 병사가 자신도 스승이 될 수 있냐고 하자, 전단은 그를 스승으로 받들며 늘 신이 시킨 것이라고 했다.
전단은 연나라가 제나라 포로의 코를 베어 그들을 앞세워 전투하여 우리가 패할 것이 겁난다고 하자, 제나라 군사들은 자신들도 포로가 되어 코가 베일 것이 두려워서 성을 더욱 굳게 지켰다. 또한 전단은 분묘를 파헤치고 조상을 욕보이는 것이 두렵다고 하자, 제나라 군사들은 분노가 증폭하게 되었다. 이때 전단은 군졸과 함께 일하고, 노약자와 부녀자를 섬기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등의 행동을 하면서 연나라에게 항복할거라고 하면서 연나라 편에 소문을 내게 했다. 그리고는 군사들을 숨겨두었다. 또한 전단은 연나라에 돈을 보내어 방심하게 만들었다. 이때를 틈타 소 1000마리에게 오색 용 그림을 그린 옷을 입히고 쇠뿔에 칼을 매달고 쇠꼬리에 갈대를 묶어서 기름을 부은 후 불을 붙였다.
성 밖으로 내보 낸 소떼는 50명의 장사와 함께 야간에 연나라의 진지를 급습하여 연나라는 급히 퇴각하였다. 이에 연나라를 몰아내고 제나라의 성을 다시 되찾았다.
대산들은 제의 양왕을 맞고, 전단은 안평군이 되었다.
조나라 평원군은 연나라와 싸우기 위해 제나라의 전단을 기용하였으나, 제 나라의 전단은 제나라를 위해 조나라와 연나라군이 소모전을 하도록 조장하였다.
무안군 백기(? ~ BC 257년)
백기는 전국시대 진나라의 명장으로 소양왕을 받들어 조나라, 위나라, 초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BC 294년에 좌서장(左庶長)에 임명되어 한나라의 신성(新城)을 공격했으며, 이듬해엔 한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하여 이궐 전투에서 승리하고 24만 명을 잡아 죽였으며, 한나라 장수 공손희를 포로로 잡고, 5개성을 함락시켰다.
BC 292년 위나라를 공격하여 크고 작은 성 61개를 함락시켰다.
BC 278년 초나라를 공격하여 수도인 영성(郢)을 함락시켜 초나라의 수도를 옮기게 했다. 같은 해 무안군(武安君)의 작위를 받았다.
BC 275년 한나라·위나라·조나라 연합군과 싸워 13만 명을 죽이고, 조나라 장수 가언(賈偃)과 싸워 그 휘하 병졸 2만 명을 황하에 빠뜨려 죽였다.
BC 265년 한나라 형성(陘城)을 공격해 5개성을 함락시키고 5만 명을 죽였다.
BC 260년 장평 대전에서 조나라와 정면충돌하여 조괄이 이끄는 조나라 군대를 대파하여, 40만 명이나 되는 포로를 잡았으나 먹여 살릴 식량이 없어 소년병 240명을 제외한 나머지를 생매장해 죽였다. 하지만 ‘사기’의 장평 대전 포로 40만 학살사건은 오랫동안 고대사의 과장으로 여겨졌으나, 1995년 산서성에서 해골더미가 대량으로 출토되어 실증되었다.
백기의 장평대전 승리 때에 진나라 본국의 재상 범수는 백기의 활약으로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하여, 조나라의 수도 한단까지 쳐들어가려는 백기를 소환했다.
그리고 그 후 BC 259년 진나라는 왕릉(王陵)과 왕흘(王齕)을 시켜 한단을 포위하지만, 조나라를 구원하러 온 위나라 신릉군과 초나라의 춘신군에게 대패를 당했다.
그러자 진나라는 다시 백기를 출동시키려 했으나, 백기는 재상 범수를 싫어하여 병을 핑계 삼아 거부했다. 이로 인해 입지가 더욱 좁아진 백기는 BC 257년 소양왕의 명령으로 두우(杜邮)에서 자살했다.
백기는 죽기 직전 “장평에서 40만 포로를 하룻밤 사이에 파묻어 죽여서 하늘에 죄를 짓고 죽는다.”며 한탄하고 죽었다. 하지만 진나라 백성들은 백기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 각지에서 제사를 지냈다.
사기 ‘백기왕전열전’에 “백기는 적의 능력을 잘 파악했으며, 이에 따라 전략을 능란히 바꾸어 무한한 전술로 천하를 진동시켰다.”라고 격찬했다. 그러나 재상인 범수와의 사이가 틀어져 최후를 맞기까지의 과정을 지적하며, 왕전과 함께 유능한 군인이지만 인간적 결점이 존재했다고 평하였다.
‘삼국지 위서’의 ‘등애전’에서 등애가 누명을 쓰고 죽기 전에 스스로를 백기에 비유해 한탄했다는 대목도 있다.
손무(孫武, BC 545~470년)
손무는 중국 춘추시대의 전략가로, 자는 장경(長卿)이다.
손자(孫子)는 경칭이며, 한국에서는 이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으며, ‘손자병법’을 지었다.
손무가 기록된 사서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외에 오나라와 월나라의 흥망사를 기술한 오월춘추(吳越春秋), 손무의 선조와 그의 자손에 대하여 기록한 신당서(新唐書)의 중요한 기록이 있다.
이러한 문헌에 기록한 손무의 생애에 관해서는 논쟁의 대상이다.
손무는 제나라의 명문인 전씨(田氏)집안 출신으로, 전완(田完)의 5대손인 손무의 조부가 군공(軍功)을 얻어서 손씨(孫氏)를 하사 받아 손씨의 선조가 되었다.
손무는 초년부터 병서를 즐기고, 황제(黃帝)와 사제(四帝)의 전투나 고대의 이윤(伊尹), 강상(姜尙), 관중(管仲)등의 용병술을 연구했다.
BC 517년 가문에 내분이 일어나 손무는 일족을 따라 강남 지방 오나라(吳)로 피하여 오나라의 재상 오자서(伍子胥)를 알게 되었다.
그후 손무는 오나라의 수도 근처의 산간에 칩거하여 손자병법 13편을 저작 했다.
BC 515년 오자서의 추천으로 오나라 왕 합려의 초빙을 받아 오나라의 군사(軍師)가 되었다.
합려가 손무의 용병술을 시험하려고 "선생(손무)의 병법 13편을 모두 읽었지만, 궁녀들 만으로도 조금이라도 군의 지휘를 따르는 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하자, 손무는 이것을 승낙했다.
이에 합려는 궁녀 180명을 내어 주며 훈련시키게 하자, 손무는 합려가 가장 아끼는 궁녀 둘을 대장으로 세워 훈련을 시켰으나, 궁녀들은 훈련에 따르지 않고 장난처럼 여겼다.
그러자 손무는 군령을 세우기 위해 궁녀 둘을 처형하려 하였고, 합려가 용서해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손무는 군령은 왕명보다 중요하다며 사형을 집행하였다. 그리고 다시 궁녀를 뽑아 대장으로 삼고 훈련을 시키자, 모든 궁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합려는 기분이 상했고 손무는 그런 합려를 낮게 평가했으나, 이후 합려가 손무를 중용하여 상장군을 삼았다.
손무는 오나라의 군대를 훈련시켜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고, 초나라와 대항할 수 있는 국력을 키울 때까지 무리한 군사 행동을 자제하였다.
BC 506년 합려는 손무와 오자서를 대장으로 초나라 원정을 개시하였다.
손무의 전략에 따라 오군은 연전연승하여 초나라의 수도 영(郢)을 함락하고 초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이후 진나라의 개입으로 오나라는 철군하였으나, 그 후로도 오나라는 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패자의 위세를 떨쳤다.
BC 496년 손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합려는 월나라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고, 합려도 부상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손무와 오자서는 합려의 후계자 부차를 보좌하여 국력을 키운 뒤 월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부차가 패자가 될 무렵 손무는 은퇴하여 이후의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손무의 저서인 손자병법은 오랫동안 동양의 중요한 병서로 취급되었다.
손무의 손자인 손빈 역시 ‘손빈병법’이라는 병서를 제작하였다.
손빈과 손무는 둘 다 손자로 존칭되어 후일 오랫동안 둘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삼국지의 무장이자 오나라의 시조인 손견의 조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손빈(孫臏)
손빈(孫臏)은 중국 전국시대의 전략가로서 병가(兵家)의 대표적 인물 중에 한 명으로, 손무(孫武)의 5대손이며 손무와 같이 손자(孫子)로 불린다. 아(阿, 현 산둥성 양의현), 견(鄄 현 산둥성 복현)의 경계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본명은 알 수 없다.
손빈병법(孫臏兵法)은 손빈이 저작한 병법이다.
빈(臏)이란 이름은 무릎뼈(슬개골)를 도려내는 형벌을 받아서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젊은 시절 방연(龐涓)과 함께 병법을 배워 방연은 위나라(魏)에 관직에 오르고 혜왕(惠王)의 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방연은 손빈에 대해 열등감이 있어 손빈을 속이고 손빈을 위나라로 초대하여, 손빈을 모함하여 죄를 짓게 하여 무릎뼈를 도려내는 형과 얼굴에 먹칠을 하는 형을 당하게 하였다.
그 후 제나라의 사신이 위나라로 왔을 때에 손빈이 은밀하게 제나라 사신과 만나 사신의 도움으로 위나라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제나라에서 온 손빈은 장군 전기(田忌)의 빈객(賓客)이 되었는데, 어느 날 제 위왕(齊威王)과 공자(公子)들과 전기가 말을 3쌍씩으로 하여 승부를 겨루는 경마를 개최하였다.
이 때 손빈은 전기에게, 상등(上等)의 말이 나오는 경주에 전기의 소유한 하등의 말을, 중등의 말이 나오는 경주에는 상등의 말을, 하등의 말이 나오는 경주에는 중등의 말을 내게 하여, 전기를 2승 1패케 하여 천금의 돈을 따게 하였다.
이 경주를 통해 손빈의 능력을 알아본 전기는 왕에게 손빈을 추천하자, 왕은 손빈을 병법의 스승으로 받들었다.
그 후 위나라가 조나라(趙)를 공격하여 조나라의 수도를 포위했다.
조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제나라 왕은 전기를 장군으로 삼아 손빈과 함께 파견했지만, 손빈은 조나라로 향하려고 하는 전기를 설득하여 도중에 위나라 본국을 공격케 했다.
이 때 위나라 본국에는 약소한 노병이 남아 있을 뿐이었으므로, 조나라를 포위하고 있던 위나라의 주력군은 당황해서 포위를 풀고 서둘러 되돌렸지만, 강행군으로 피로가 쌓여 제나라군에 공격받아 대패하였다.(계릉 전투(桂陵戰鬪)) 이렇게 하여 손빈은 조나라를 구했다.
13년의 세월이 흘러 위나라가 방연을 장군으로 삼아 한나라(韓)를 공격하자, 다시 제나라의 전기가 장군으로 손빈이 참모가 되어 한나라의 구원군으로 파견되었다.
제나라군은 전번처럼 위나라의 수도를 공격하려 했지만, 방연도 이에 대비하여 본국에도 정예병을 남기고 방어하여 제나라군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잡는 한편, 방연이 지휘하던 한나라 공략 부대를 철수하게 하여 제나라군을 양쪽에서 협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안 제나라군은 철수하지만 방연을 타격하기 위하여 유인책을 사용하였는데, 일반적인 철수의 경우 추격군이 훨씬 우위에 있게 되는 것을 감안하여, 손빈은 감조지계(減竈之計)를 사용하여 방연이 추격하도록 덪을 놓았다.
군사들이 밥을 해 먹는 아궁이의 수를 첫 날에는 10만 명이 밥을 먹을 정도로 하고, 다음 날에는 그의 절반, 그 다음 날에는 또 그의 절반으로 아궁이의 수를 줄여나가자, 이를 본 방연은 "위나라의 군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군사지만, 제나라의 군사는 겁쟁이다."라며 많은 적군이 후퇴하면서 군을 이탈하여 도망간 것으로 판단하게 만들었다. 이에 방연은 힘이 나서 발 빠른 기병 위주의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군을 맹추격하게 하였다.
한편 손빈은 그 앞의 도로인 마릉(馬陵)에서 계책을 시행하여, 주위의 나무들을 모두 베어 방책을 만든 후 한 그루의 나무만 남겨두고는 그 나무의 한쪽 껍질을 벗겨낸 후, 거기에 "龐涓死于此樹之下(방연이 이 나무 밑에서 죽다.)"라고 적어두었고, 길 양측에 궁수 일만을 매복시켰다.
과연 계산대로 한 밤중이 되자 이 장소에 방연이 도착하였고, 껍질이 벗겨진 나무=를 보고 호기심이 발동한 방연은 글을 읽기 위해 불을 피웠는데, 이것이 신호가 되어 복병은 그곳을 향해 일제히 화살을 발사하여 수많은 위나라 군사들이 순식간에 전사하였다.
이 때 스스로가 진 것을 깨달은 방연은 "기어코 그 녀석의 이름을 떨치게 만들었구나(遂成豎子之名)"라고 탄식한 후 자결하였고, 위나라의 태자 신(太子 申)은 포로가 되었다.
사령관을 잃은 위나라 군은 제나라군에 패배하였으며, 이 마릉전투의 승리로 병가 손빈(兵家孫臏)의 이름은 천하에 알려졌다. 손빈의 말년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손빈은 손무와 같이 병법서를 저술했지만, 그의 병법은 손무의 오손자(吳孫子)와 구별하여 제손자(齊孫子)등으로 불리고 있다. 그렇지만 후에 손빈 병법이 유실되어 현존 하는 손자병법 자체가 손빈의 저작이 아닐까 추정하였지만, 1972년 산둥성에서 손빈이 저술한 죽간(竹簡)으로 된 손빈병법이 발견되어 손자 병법의 저자는 아닌 것이 밝혀졌다.
사마양저(司馬穰苴, ? ~ ?)
사마양저는 춘추시대 제나라의 장군으로, 성은 규(嬀), 씨는 전(田), 이름은 양저(穰苴)이다.
재상 안영(晏嬰)의 추천으로 등용된 후 제나라의 번영에 공적을 올리자, 경공(景公)에 의해 대사마로 임명되었으며, 이때 사마(司馬)를 씨로 칭하여 사마양저라 불리었다.
사마씨를 칭하기 전의 씨인 전(田)을 붙여 전양저로 불리기도 하며, 병법서 ‘사마법’의 저자이자, 전완(田完)의 후예다.
당시 제나라는 긴 내란이 끝나고 경공(景公)이 즉위하였고, 유명한 신하 안영이 경공을 보좌하고 있었다. 또 진나라(陳)의 망명 귀족인 전씨의 세력이 급격하게 확대되어, 전씨의 대두에 기존의 귀족으로부터 질시와 경계가 심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제나라는 진나라(晉)와 연나라(燕)에 의해 공격을 받아 영토를 빼앗기자 경공은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싶었다.
이때 재상 안영이 경공에게 사마양저를 추천했다. "양저는 전씨 집안의 서자이지만, 그의 문덕(文德)은 병사를 일으키고, 그의 무덕(武德)은 적을 위압합니다. 주공께서 사마양저를 시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고, 제 경공은 사마양저와 병법에 대해 말하고는 드디어 사마양저가 믿어도 될 것 같다고 여겨 장군에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사마양저는 "저는 원래 천한 신분으로서, 장군으로 임명해 주셔도 아랫사람들은 저를 경시합시다. 그럼으로 주공의 총애하는 신하를 부관으로 삼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고, 경공은 그 청을 허락하여 장고(莊賈)를 임명하게 되었다.
사마양저와 장고는 "내일, 정오에 군문에서 모이시오"라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장고는 "군대를 통솔하는 것이 자신이다"라고 믿고, 친척이나 고관과 송별회를 마련하여 다음날 정오에 모이지 않았다.
사마양저는 장고가 오지 않는 동안에 군을 정돈하여 군율을 전군에 보였다. 날이 저물어서 겨우 장고가 도착하였는데, 사마양저는 어째서 늦었는지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장고는 "친척과 고관들이 송별회를 열어 주었기 때문에 늦어졌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사마양저는 "장군은, 일단 출격을 명령받으면 가족을 잊고 군중에 있어도 친척을 잊고 전장에 있어서 스스로의 안전을 잊는다.’라고 하는 군율을 모르는가? 지금 적군은 조용히 침범하여, 국내를 시끄럽게 하고, 군사는 바람과 비에 몸을 노출하여 싸우고, 자신도 걱정하여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밤에도 잘 수 없는 데, 송별회 때문에 출진이 늦는 것이 무슨 일인가?"라고 격노하여, 군법에 따라서 장고를 처형하려 했다.
무서워한 장고는 경공에 사자를 보내 살려달라고 했지만, 그 사자가 돌아오기 전에 사마양저는 장고를 처형했다.
이 사건으로 병사들은 긴장되어, 군대의 규율은 엄숙하게 되었다. 그 후 사자가 돌아와서 경공이 장고를 용서해라고 말했지만, "장군이 군중에 있을 때는 비록 주공의 명령이라도 받지 않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사자를 쫓아버렸다.
사마양저는 군중에 있으면서 항상 병사와 행동하고, 식사도 같이 하였고, 약한 자에게도 상냥하게 대했다. 그 결과 사마양저는 병사에게 신뢰 받아 부상병도 출진하고 싶어 신청했다.
이 사건을 들은 진, 연나라 연합군은 퇴각하였고, 사마양저는 추격하여 잃어버린 영토를 모두 회복하여, 제 경공은 사마양저를 대사마에 임명했다.
얼마 뒤 귀족 포씨(鮑氏), 고씨(高氏), 국씨(國氏)는 사마양저를 헐뜯었다.
경공은 사마양저를 관직에서 해임하였고 그 후 사마양저는 병이 들어 사망했다.
이 일로 전기와 전표는 고씨와 국씨 일족을 원망하다가, 그 후 전상이 간공을 죽였을 때 고씨와 국씨 일족을 모두 죽였다. 또한 전상의 손자 전화는 결국 강씨(姜氏)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여 제나라 위왕이 되었다. 그리고 제 위왕은 사마양저의 병법을 존경하고 그의 병법을 흠모하였다.
위왕은 학자에게 명하여 사마양저의 병법을 연구하여 ‘사마양저병법’이라는 병법서를 편찬하였는데, 이것이 후에 ‘사마법’이라는 병법서다.
사마양저의 병법을 모은 '사마법'은 전 55편 있었지만, 현존하는 것은 인본. 천자지의, 정작, 엄위, 용중의 5편 뿐이다.
오기(吳起, BC 440~381년)
전국시대 초기 오기를 발탁한 위문후(魏文侯)는 문무를 겸비한 당대의 명군이었다.
악양(樂羊) 및 서문표(西門豹), 척황(翟璜) 등 뛰어난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중원을 호령했다.
위문후가 가장 경계한 나라는 서쪽의 진나라로 대비책 마련에 부심했다.
하루는 위문후가 척황과 대책을 상의하던 가운데 이같이 말했다. “과인은 그대의 지시를 따라 악양으로 하여금 중산을 치게 했고, 서문표로 하여금 업(鄴) 땅을 다스리게 해 모두 성공했소. 그런데 우리나라 서하(西河) 땅은 서쪽 국경지대에 있소. 진나라가 우리 위나라를 침공하려면 반드시 서하 땅부터 칠 것이오. 뛰어난 장수가 아니면 이를 지켜내기가 쉽지 않소. 과인을 위해 장수 한 사람을 천거하시오.”
척황이 말했다. “뛰어난 장수로 오기가 있는데, 전에 노나라에 있다가 지금은 우리 위나라에 와 있습니다. 속히 그를 등용하시기 바랍니다. 혹여 다른 나라로 가버릴까 우려됩니다.”
위문후가 말했다. “오기는 지난날 노나라의 장수가 되기 위해 아내를 죽인 자가 아니오? 내가 듣건대 그는 재물을 좋아하고 여색을 탐하고 성격 또한 잔인하다고 하오. 그런 사람에게 어찌 중임을 맡길 수 있겠소?”
이에 척황이 말했다. “신은 다만 오기의 뛰어난 능력만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의 성품과 행동에 대해서는 따질 바가 아닙니다.”
그러자 위문후가 말했다. “좀 더 알아보고 기용토록 하겠소!”
그러고는 이극을 불러 묻자, 이극이 “오기는 욕심이 많고 색을 밝힙니다. 그러나 용병만큼은 사마양저일지라도 그를 당해내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사마양저는 춘추시대 말기 뛰어난 병법으로 제경공의 패업을 도왔던 인물인데, 이극이 사마양저 보다 낮다는 말에 위문후는 오기를 발탁했다.
오기는 위(衛)나라 산동성 정도현(定陶縣)의 좌씨(左氏) 마을 출신으로, 젊었을 때부터 용병을 좋아했고, 중도에 공자의 제자인 증자를 스승으로 학문을 배웠다고도 하고, 증자가 아니라 그의 아들인 증신(曾申) 밑에서 학문을 배웠다는 주장도 있다.
오기가 학문을 배우던 중에 제나라 대부가 노나라에 왔다가 오기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기의 높은 식견에 탄복한 나머지 자기의 딸을 오기에게 시집보내어 제나라 여인을 아내로 맞았다.
하루는 증자가 오기에게 물었다. “그대가 학문을 배운 지도 이미 6년이 지났는데, 한 번도 어머니를 만나러 고국에 가지 않으니 자식된 도리로 마음이 편안한가?”
이에 오기가 대답했다. “저는 어머니 슬하를 떠날 때 일국의 정승이 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증자가 오기에게 다시 물었다. “다른 사람과는 맹세할 수 있으나 어찌 어머니 앞에서 맹세할 수 있단 말인가?”
몇 개월 후 위나라에서 오기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오기는 크게 통곡한 뒤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화가 난 증자가 오기를 불러 말했다. “나는 너 같은 사람을 제자로 둔 적이 없다. 다시는 나를 볼 생각을 하지 마라”
이에 오기가 증자의 문하를 떠나 다른 곳에서 병법을 익혀 마침내 3년 만에 일가를 이루었다. 이는 오기가 증삼 이외에도 여러 사람 밑에서 두루 공부했음을 시사한다.
오기는 자신의 기량을 펼치기 위해 노나라로 갔다.
노나라가 그를 등용하자 그는 그간 갈고닦아온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로 제나라의 노나라 침공을 막은 것을 들 수 있다.
당시 제나라의 재상 전화(田和)는 장차 반역으로 강씨(姜氏) 왕조의 제나라를 차지할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제나라 왕실과 수대에 걸쳐 혼인해온 노나라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먼저 노나라를 제압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자, 노목공이 크게 우려함으로 대부들이 오기를 천거했다. “제나라 군사를 물리치려면 반드시 오기를 대장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지만 노목공은 자기의 염려를 말했다. “오기의 아내는 제나라 출신이오. 무릇 사람이란 부부 간의 애정이 으뜸인데, 오기가 과연 아내의 친정 나라를 맞이해 힘껏 싸워줄지 모르겠소.”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오기는 곧 집으로 와 아내에게 물었다. “이 세상에서 아내가 소중하다는 이유를 아시오?”
그러자 오기의 아내가 말했다. “남편과 아내가 있어야 비로소 집안이 이루어집니다. 아내가 소중한 이유는 가정을 이루어주기 때문입니다.”
오기가 다시 말했다. “남편이 높은 지위에 올라 1만 석의 국록을 받고 적군과 싸워 대공을 세우고, 이름을 천추만세에 남긴다면 이 또한 집안을 크게 일으키게 되는 것이오. 부인은 내가 그리되기를 바라지 않소?”
오기의 아내가 답했다. “남편이 그리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오기가 말했다. “지금 제나라 군사가 이곳 노나라를 치고 있소. 노나라 군주는 나에게 대장을 시킬 생각이지만 내가 제나라 전씨 집안에 장가를 들었다는 이유로 머뭇거리고 있소.”
그러고는 이내 칼을 뽑아 아내의 목을 치고는 즉시 비단으로 아내의 머리를 싼 뒤 노목공을 찾아갔다. “신은 나라를 위해 싸우려는 일념뿐입니다. 이제 아내의 목을 끊어왔습니다.”
오기가 돌아가자 대부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오기는 자기 아내보다 공명을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를 장수로 삼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나라로 가버릴 것입니다.”
노목공은 부득불 오기를 대장으로 삼았다.
여기서 ‘아내를 죽여 장수가 되다.’라는 살처구장(殺妻求將)의 성어가 생겼다.
오기는 노나라의 대장이 되자마자 사졸과 똑같이 움직였다. 먹고 자는 것은 물론 행군할 때도 말을 타지 않고, 사졸이 무거운 무기나 군량을 지고 가는 것을 보면 친히 분담했다. 당시 제나라 재상 전화는 정탐꾼으로부터 오기의 동정을 보고받고 크게 웃었다.
“무릇 장수는 위엄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군사들이 두려워한다. 군사가 장수를 두려워해야만 목숨을 걸고 싸우는 법이다. 오기의 몸가짐으로는 많은 군사를 부릴 수 없다.”
그러고는 장수 장추(張丑)를 불러 이같이 분부했다. “장군은 노나라 진영으로 가 오기의 의향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오도록 하시오.”
오기는 장추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늙고 병약한 군사만을 앞에 내세웠다.
장추가 오기에게 물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장군은 대장이 되기 위해 아내를 죽였다고 하는데 사실이오?”
이 말에 오기가 답했다. “내가 비록 불초하지만 증자 문하에서 성현의 길을 배운 일이 있소. 어찌 그런 몰인정한 짓을 할 리 있겠소? 아내가 병으로 죽었을 때 나라에서 나에게 대장을 맡긴 까닭에 그런 소문이 난 듯하오.”
장추가 다시 물었다. “장군이 우리 제나라와 맺은 인연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와 함께 서로 동맹하고 우호를 맺는 것이 어떻겠소?”
오기가 대답했다. “나는 일개 서생에 불과하오. 어찌 감히 제나라 전씨를 상대로 싸울 수 있겠소? 우호만 맺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소.”
오기는 장추를 군중에 머물게 하면서 사흘 동안 함께 술을 마시며 즐겼다. 그리고 싸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장추가 제나라 군진으로 돌아가려 하자 오기가 거듭 부탁했다. “부디 나를 위해 힘써주기 바라오. 그 은혜는 잊지 않을 것이오.”
장추가 떠나자 오기는 즉시 군사를 3로(路)로 나누어 몰래 따라갔다.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장추가 전화에게 이같이 보고했다. “노나라 군사는 매우 약합니다. 오기는 우리와 강화를 갈망할 뿐 전혀 싸울 뜻이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때 원문(轅門) 밖에서 난데없는 북소리가 진동하며 노나라 군사가 3면에서 일시에 제나라 영채를 엄습했다.
제나라 군사가 크게 놀라 사방으로 도주하자, 노나라 군사가 제나라 군사를 순식간에 국경 밖으로 몰아냈다.
노목공이 크게 기뻐하며 즉시 오기에게 상경 벼슬을 내렸다. 이때 오기에게 패해 간신히 제나라로 돌아온 전화는 오기를 두려워한 나머지 장추에게 이같이 분부했다. “오기가 노나라에 있는 한 우리 제나라는 불안해 견딜 수가 없다. 내가 장차 사람을 노나라에 보내 그를 매수할 작정이다. 그대가 능히 노나라에 갔다 오겠는가?”
장추가 대답했다. “목숨을 걸고 갔다 와서 이번에 패한 죄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장추가 장사꾼으로 가장해 노나라로 들어간 뒤 오기의 부중을 찾아가 2명의 미희와 황금을 바쳤다. 이에 오기가 사례했다. “그대는 돌아가 나의 감사하는 뜻을 전하도록 하시오. 장차 제나라가 노나라를 치지 않는 한 노나라도 결코 제나라를 치는 일이 없을 것이오.”
장추가 노나라를 떠나면서 길 가는 행인들에게 외쳤다. “오기가 제나라 밀사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았다.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제나라를 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이 말이 삽시간에 퍼지자 대부들이 오기를 탄핵했다. “오기는 모친이 죽었는데도 분상(奔喪)을 하지 않고, 자신의 처를 죽이면서 장수가 되고자 했던 각박한 자입니다. 게다가 제나라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은 탐욕스러운 자입니다. 이제 노나라와 같이 작은 나라가 오기로 인해 대국을 이겼다는 명성을 얻게 되었으니, 장차 다른 대국들이 노나라를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오기가 이 이야기를 듣고 화가 미칠까 우려해 인재를 아낀다는 위문후가 다스리는 위나라로 달아났다. 그는 척황의 집에 머물며 때를 기다리다 마침내 척황의 천거를 받았다.
오기는 서하 땅의 태수로 임명되자 곧바로 성루를 높이 수축하고, 성지(城池)를 깊이 파고, 군사를 조련하며 사졸과 숙식을 같이했다. 잠잘 때도 잠자리를 펴지 않고, 나다닐 때도 말을 타지 않고, 자신이 먹을 양식도 직접 짊어지고 다니며 병사들과 고락을 같이했다. 모든 것이 노나라에 있을 때와 같았다.
한번은 한 병사가 종기로 고생하자 오기가 직접 입으로 그 종기를 빨아 치료했다. 그러자 그 병사의 모친이 이 이야기를 듣고 통곡했다. 이에 어떤 사람이 의아해하며 여자에게 물었다. “그대의 아들은 병사에 불과한데도 장군이 직접 그대 아들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치료해주었는데 어찌해 운단 말이오?”
병사의 모친이 울면서 대답했다. “그렇지 않소. 옛날 오공이 내 남편의 종기를 빨아준 적이 있었소. 이에 내 남편은 감복한 나머지 후퇴할 줄도 모르고 분전하다가 마침내 적에게 죽고 말았소. 오공이 이제 또 다시 내 아들의 종기를 빨아주었으니 나는 내 아들이 어느 곳에서 죽을지 모르게 되었소. 그래서 통곡하는 것이오.”
마침내 오기가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의 5개 성읍을 취했다. 이후 진나라는 오기가 서하 땅을 지키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감히 침범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일화에서 연저지인(吮疽之仁)이라는 성어가 생겼는데, 남의 종기를 빤다는 뜻으로, 이후 장수가 병사를 잘 보살핀다는 의미로 전용되었다.
오기는 위문후 사후 이내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적이 너무 많았던 탓이다.
하루는 위문후의 뒤를 이은 위무후가 여러 대부와 함께 서하(西河)에서 뱃놀이를 즐기다가 위무후가 말했다. “산하의 험고한(險固)한 형세가 이 어찌 공고하지 않다고 하겠는가!”
그러자 옆에 있던 대부 왕조(王錯)가 아부했다. “이것이 바로 위나라가 강할 수 있는 연고입니다. 만일 천혜의 험고한 지형을 잘 활용하면 가히 패왕의 대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에 오기가 반박했다. “이 말은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길로서, 왕조의 아부하는 말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러자 위무후가 노기 띤 어조로 물었다. “그대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겠소?”
오기가 대답했다. “산하의 험고한 형세는 실로 나라를 지키기에 부족합니다. 패왕의 대업은 천혜의 험고한 지형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옛날 삼묘(三苗)는 험고한 지형만 믿고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다가 하나라 우왕에게 추방당했습니다. 하나라 걸(桀)도 지형만 믿고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탓에 상나라 탕왕에게 정복당했습니다. 은나라 주(紂)도 지형만 믿다가 주나라 무왕에게 패망했습니다. 지금 군주는 친히 저와 함께 적들과 싸워 많은 성을 공략했습니다. 적의 성이 높지 않은 것도 아니고, 적의 백성이 많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군주가 이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적국의 정사가 나빴기 때문입니다. 험고한 지형 따위가 패왕의 대업을 이루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는 오기가 단순한 병법가가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위무후가 이 이야기를 듣고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 말이 참으로 옳소. 오늘에야 나는 성인의 말을 듣게 되었소. 금후 서하 땅을 그대에게 맡기도록 하겠소.”
서하는 서쪽 진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역이다. 용병의 귀재로 소문 난 오기가 태수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들은 서하의 병사들이 환호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오기는 평범한 용모에 대장군의 위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새로 부임했는데도 군대사열을 생략한 채 이따금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자 휘하장수가 찾아와 불평했다. “장군은 왜 저희에게 아무런 영도 내리지 않습니까? 모두가 장군께서 부대를 사열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기가 말했다. “사열은 이미 했다. 이곳에 도착하던 날 원문(轅門)을 지키는 병사를 유심히 살펴보니 눈빛이 살아 있고, 동작도 민첩하고, 무기도 예리했다. 병사를 보면 그 군대를 알 수 있는 법이다. 내가 이곳의 사열 대신 군수물자와 지형을 살펴본 이유다.”
하루는 대낮에 갑자기 진나라 군사의 침공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성안이 발칵 뒤집혔다. 오기가 바라보니 적의 규모도 크지 않았고 행군 속도도 느렸다. 공격할 의도가 없는 것이 분명한 걸 알게 된 오기가 말했다. “이는 우리를 떠보기 위한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 대낮에 소규모의 부대가 저토록 느린 속도로 공격해올 수 있겠는가?”
과연 진나라 군사는 이내 돌아갔다. 오기가 휘하에 장수를 소집했다. “장수는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 장수가 불안해하면 병사의 사기가 떨어진다. 장수는 늘 침착해야 한다. 상황판단을 그르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오늘 그대들은 이 2가지 면에서 장수답지 못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얼마 후 진나라가 진혜공 사후 후사문제로 시끄러웠다. 그러자 오기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기습공격을 가해 진나라의 5개성을 손에 넣었다. 당시 열국의 침공을 받아본 적이 없던 진나라의 조야가 경악했다.
이후 진나라는 여러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탈환작업에 나섰으나 모두 실패했다. 당시 위나라는 이극이 죽은 이후 재상의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그 자리를 계속 비워놓을 수 없었다.
고향을 떠날 때 어머니에게 피로 맹세했던 오기는 재상의 자리에 남다른 집착이 있었다. 스스로 판단컨대 위나라를 위해 헌신한 공 등을 따져볼 때 자신이 그 자리에 앉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숙고 끝에 적극 나설 생각으로 도성을 향했다. 도착해보니 이미 전문(田文)이 재상으로 발탁된 뒤였다.
전문은 전국시대 말기 천하를 풍미한 제나라의 맹상군과 동명이인이다. 당시에 재상은 중신들과 논의해서 임명하는 것이 관례인데, 일부 중신에게 물어보니 위무후가 단독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오기의 명성이 높아지자 이를 크게 꺼려 전문을 재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에 언짢아진 오기가 다짜고짜 전문을 찾아갔다.
“당신과 공로를 비교해보고 싶은데 어떻소?”
전문이 “좋소”라고 하자, “삼군을 지휘하는 장수가 되어 병사에게 기꺼이 목숨을 바쳐 싸우게 하고, 적국으로 하여금 감히 우리를 넘보지 못하게 한 점에서 누가 더 낫소?”
전문이 말했다. “내가 당신만 못하오.”
이에 오기가 말했다. “백관을 다스리고 온 국민을 화합하며 나라의 창고를 가득 채운 점에서 누가 더 낫소?”
전문이 답했다. “내가 당신만 못하오.”
오기가 물었다. “서하를 지켜 진나라 군사들이 감히 동쪽으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한나라와 조나라를 복종시킨 점에서 누가 더 낫소?”
전문이 답했다. “내가 당신만 못하오.”
오기가 다시 물었다. “이 3가지 점에서 당신은 모두 나보다 못한데, 나보다 윗자리에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전문이 대답했다. “왕의 나이가 어려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고, 신하들은 왕의 말을 듣지 않고, 백성은 왕을 믿지 못하고 있소. 이런 시기에 재상의 자리를 당신이 맡는 것이 좋겠소, 아니면 내가 맡는 것이 좋겠소?”
오기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맡는 것이 낫소!”
그러자 전문이 말했다. “그게 바로 내가 당신보다 윗자리에 있는 까닭이오.”
당시 오기가 위나라 재상의 자리를 노린 것은 지나친 욕심이었다. 예로부터 타국 출신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기려지신(羇旅之臣)은 늘 해당국 출신 관원들의 질시를 받게 마련이다. 오기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전문은 뛰어난 인물이었다.
실제로 전문은 오기를 적극 후원하는 역할을 수행했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재임 중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오기에게 치명타였다. 위무후는 위문후와 달리 의심이 많고 그릇이 작았다.
전문이 죽은 뒤 위무후의 딸을 얻어 부마가 된 공숙좌(公叔痤)가 전문의 뒤를 이은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공숙좌는 소인배였다. 대부 왕조와 함께 오기를 무함해 초나라로 망명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다.
그는 자신의 가신으로 있던 상앙까지 마침내 서쪽 진나라로 달아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상앙은 진효공의 신임으로 대대적인 변법을 시행함으로써 훗날 진시황이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는 발판을 마련했던 인물이다. 결과적으로 당대 최고의 병가인 오기와 뛰어난 법가인 상앙을 모두 내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셈이다.
전국시대 초기 위문후 때 천하를 호령하던 위나라가 위무후와 그의 뒤를 이은 위혜왕 때 약소국이 된 근본 배경이 여기에 있다.
당시 공숙좌는 평소 미워하던 오기를 차제에 멀리 내치고자 했는데, 그의 속셈을 알아챈 시종이 이같이 건의했다. “오기는 늘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까닭에 쉽게 제거할 수 있습니다. 공은 군주에게 말하기를, ‘오기는 현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군주의 나라는 작기 때문에 오기가 오래 머물 생각이 없을까 걱정입니다. 그러니 시험 삼아 궁주(宮主) 1명을 그에게 시집보내도록 하십시오. 오기가 머물 생각이 없다면 반드시 이를 사양할 것입니다’라고 하십시오. 그러고는 오기를 집으로 데리고 온 뒤 궁주를 시켜 그대를 욕하도록 만드십시오. 오기는 궁주가 공을 얕보는 모습을 보고는 틀림없이 궁주의 하가(下嫁)를 거절할 것입니다. 곧 그대의 계략에 빠지는 셈입니다.”
공숙좌가 이를 좇자, 과연 오기는 궁주가 시집오는 것을 사양했다.
내심 경계심을 늦추지 않던 위무후는 공숙좌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오기는 위무후가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하자 후환을 두려워하여 초나라로 달아났다.
초도왕은 평소 오기가 비범한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오기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기뻐했다. 이내 오기의 뛰어난 논변에 감탄한 그는 곧바로 오기를 상국으로 삼았다.
오기는 상국이 되면 어떤 나라든지 부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루는 오기가 초도왕에게 이같이 건의했다.
“원래 초나라는 수천리의 넓은 땅을 지녔고, 10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초나라는 양병(養兵)하는 법을 모릅니다. 무릇 양병은 먼저 군수물자를 비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지금 초나라 조정은 필요치도 않은 관원으로 꽉 차 있습니다. 대왕의 먼 친척들은 왕실 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놀면서 국록을 축내고 있는데, 병사들은 겨우 몇 되의 양식을 배급받고 있습니다. 병사가 어찌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려 하겠습니까? 대왕이 저를 신임하면 먼저 법령을 펴고, 필요치 않은 관원을 쫓아내고, 거리가 먼 왕실 일족의 작록을 없애고, 세치 혀로 유세하는 자들을 쫓아낸 뒤 장병의 봉록을 넉넉히 주십시오. 이같이 하고도 국위를 떨치지 못하면 신을 가차 없이 처벌하십시오.”
이 말에 초도왕이 개혁을 단행했다.
오기는 용사를 선발해 체계적으로 훈련을 시키면서 수시로 무기를 점검했다. 장병의 급료를 대폭 인상하고 실력이 뛰어난 자는 급료를 몇 배씩 올려주었다. 이런 방법으로 정예병을 대거 육성한 뒤 남쪽으로 장강 중하류에 살던 백월(百越)을 치고, 북쪽으로 3진을 물리치고, 서쪽으로 진나라를 쳐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당시 기려지신 오기의 개혁조치에 반발하는 자가 너무 많았다. 모두 권세와 봉록을 잃은 자들로. 이들은 오기에게 이를 갈았으나, 초도왕이 있는 한 함부로 불만을 드러낼 수 없었다. 예로부터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 했다. 기득권 세력의 집요한 반발 때문이다. 오기처럼 뛰어난 병법가가 이런 간단한 이치를 몰랐을 리 없다. 그렇다면 그의 비참한 최후는 어떻게 설명해야만 하는 것일까? 자신이 이룬 업적에 도취해 초도왕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계산에 넣지 못했던 탓이다.
오기가 정예병을 이끌고 사방을 공략했던 것은 초나라로 들어간 지 3년 만의 일이다. 이듬해 여름 갑자기 초도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것이 뒤틀리고 말았다.
반대파들은 초도왕이 죽자마자 그간 오기로 인해 가슴속 깊이 쌓아두었던 울분을 일시에 폭발시켰다.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들은 곧바로 가병을 이끌고 궁 안으로 난입했다.
마침 태자는 지방순시 중이라 초도왕의 시신을 지킬 사람은 오기밖에 없었다. 오기가 즉시 사람을 태자에게 보내 부음을 전하면서 휘하 군영에 알려 신속히 도성으로 들어오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반대파의 입궁이 빨랐다. 손에 칼과 창을 들고 난입한 이들은 사방으로 오기를 찾아 나섰다.
오기가 재빨리 초도왕의 시신을 안치한 빈전(殯殿)으로 피신했다. 그라지 오기를 쫓던 무리들이 일제히 오기를 향해 화살을 난사하자 오기가 이내 초도왕의 시신을 끌어안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죽는 것은 족히 아까울 것이 없다. 그러나 옛 신하들이 원한을 품고 대왕의 시신을 범했으니 이런 대역죄를 범하고도 살아남기를 바랄 수 있는가!”
비처럼 쏟아진 화살이 곧 오기의 입을 막아버렸으나, 이들은 모두 오기가 예언한 대로 주륙(誅戮)을 당했다. 오기를 죽이는 데 연루된 자가 무려 70여 호에 이르고, 죽은 사람은 3,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오기의 비참한 최후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원래 초나라는 중원의 다른 제후국과 달리 공족을 비롯한 세족들의 권력이 막강했다. 이 세족들은 중원의 제후국과 같이 초왕의 보위를 위협하지는 않았으나,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초왕은 이들 세족과 제휴해 군권(君權)을 행사했다.
오기의 개혁은 기본적으로 법가적인 부국강병책인 까닭에 군권의 강화와 세족 세력의 약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음으로, 세족들이 강하게 반발한 것은 필연지사였다.
당시 초나라는 천하대세에 역행하는 퇴영적인 봉건질서에 얽매여 있었다. 만일 초나라가 오기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갔으면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오기의 최후는 전국시대 중엽 상앙이 진효공의 신임을 배경으로 진나라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음에도 진효공 사후 횡사한 것과 닮았다. 당대 최고의 병가인 오기와 당대 최고의 법가인 상앙이 하나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변법의 실시 과정에서 많은 사람의 원망을 샀기 때문이다.
손무의 ‘손자병법’과 오기의 ‘오자병법’은 병가의 성전으로 간주된다.
회음후 한신 (漢信, ? ~ BC 196년)
한신은 유방의 부하로서 한(漢)나라의 개국공신 장수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유방의 패권을 결정지었다. 한나라 3걸 중 1인으로 대원수, 초왕, 회음후에 올랐으며, 소하가 천거하여 ‘국사무쌍’이라 불렸다.
한신은 초(楚)나라 회음(淮陰)의 평민으로 백정 출신이다.
외모가 출중치 못하고 출신이 비천해 무뢰배에게 얻어맞고는 무뢰한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 과하지욕(袴下之辱)이라는 굴욕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이후 항량의 휘하에 들어갔으며, 항량이 죽고 나서는 항우의 밑에서 집극랑(경호원)을 하였지만, 항우는 무뢰배의 가랑이를 기어간 소인이라 생각하고 푸대접하였다.
한신은 자신의 능력을 몰라주는데 실망하여 장량의 권유에 따라, 항우에게서 도주하여 유방에게 임관을 청해 그의 재능을 높이 산 유방과 당시 승상 소하의 신뢰를 얻어 대원수(사령관) 직책을 얻었다.
대원수에 임명된 후 별동대를 이끌고 항우의 아군인 위, 은, 초, 대, 연, 제를 평정했고, 해하전투에서 항우를 격파하는 대업적을 남겼으며, 한신은 훌륭한 지략으로 사마흔, 동예를 항복시키고, 옹왕 장한을 자살하게 한 뒤, 서위왕 위표, 하남왕 신양, 은왕 사마앙을 항복시켰다.
초한전 최후의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제압하면서 세운 큰 공을 인정받아 제왕(齊王)에 이어 초왕(楚王)이 되었으나, 한(漢)의 권력이 확립되자 유씨 외의 다른 제왕과 함께 차차 밀려나 공신서열 21번째에 불과한 회음후(淮陰侯)로 격하되었다.
유방이 자리를 비운 사이 여태후에게 진희의 난에 통모했다고 모함 받아 요참형에 처해졌다.
이 때 한신은 아래의 말을 남기고 죽었다.
“果若人言 狡兎死良狗烹 飛鳥盡良弓藏 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
"교활한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좋은 사냥개는 삶아 먹히고, 하늘 높이 나는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은 곳간에 쳐박히며, 적국을 쳐부수고 나면, 지혜 있는 신하는 버림을 받는다고 하더니 한(漢)을 세우고자 분골쇄신한 내가, 금번에는 고조에게 버림받는구나."
하지만 토사구팽은 한신 덕분에 유명해졌으나, 한신이 태어나기 이전인 춘추전국시대 월(越) 왕 구천의 신하인 범려(范蠡)가 오(吳)를 멸하고서 구천의 심중을 꿰뚫어보고 관직을 내놓으면서 문종(文種)에게 함께 물러나자고 권하면서 처음 사용한 표현이다.
범려는 초야에 숨어 화를 면하였으나, 문종은 구천에게 충성을 다하다 트집을 잡혀 자결하였는데, 한신은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이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한신 (韓信 한왕 신 韓王 信 ? ~ BC 196년)
회음후 한신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동명이인으로 본명이 똑같은 한신(韓信)이다.
구분하기 위해 보통 '한왕 신'이나, '희신(姬信)'으로 쓴다.
희신이라 쓰는 이유는 주나라 왕족의 성은 희며, 한나라 왕실의 조상은 주나라의 동성 제후국인 진(晉)나라에서 갈라져 나온 방계 공족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은 성과 씨(족명)의 차이가 남아 있던 시절이다. 굳이 말하자면 한나라 왕실은 희성 한씨다.
사기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한신 열전은 ‘회음후열전’이고 이 한신의 열전 제목은 ‘한신노관열전’으로 유방의 개국공신인 노관과의 합전으로 묶여 있다.
한(韓)나라 왕족 출신으로 양왕의 서손으로, 본래 한왕 신의 숙부 한왕 성(成)은 장량의 추천을 받아 항량에게 한왕(韓王)으로 봉해져 있었지만, 범증은 장량을 경계해 한왕 성(成)을 감금하고 봉국(封國)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결국 한왕 성은 살해당하였으며, 대신 항우의 부하 정창이 한왕으로 봉해졌다.
장량은 나중에 신을 유방에게 추천하여 태위(太尉)로 삼았으며, 결국 한신은 한왕에 봉해졌다.
참고로 신은 유방이 최초로 봉한 제후왕으로 어느 정도 한의 유민들을 배려한 정치적 결정으로 보인다.
묘하게 장량은 나중에 육국의 후예를 나눠 봉하자는 역이기의 계책에는 반대했었지만, 한신은 예외적으로 육국의 후예임에도 왕위를 받았다. 이는 한신이 육국의 후예라는 것 이외에도 유방 휘하에서 군공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듯하다.
초,한전쟁이 종결된 다음에는 태원군(太原郡)을 한국(韓國)으로 이름을 바꾸고, 한왕 신은 이곳으로 봉지가 정해지면서 실질적으로 흉노를 정면으로 막는 북방의 번국(蕃國)이 된 셈이다. 하지만 BC 201년 마읍에서 흉노에게 포위되었고, 이 때 한신은 자주 사자를 보내 화해를 요청했으며 한나라에서 이를 구원했지만, 한신이 자주 사자를 보낸 것으로 인해 의심을 받아 책망받자, 토사구팽을 우려해 9월에 흉노로 투항했고 나중에 잡혀 죽었다. 이는 장량이 말년에 은둔하는 이유 중 하나로 추정되기도 한다.
한왕 한신은 회음후 한신과 동명이인이며, 이 때문에 초한전쟁을 다룬 작품에서 많은 혼란을 주는 인물이다. 따라서 몇몇 초한지에서는 한왕 신과 혼동한 탓인지, 회음후 한신을 한나라 왕족으로 만들어버리고 장량과도 많이 얽히게 만든다. 한왕 신은 회음후 한신 만은 못해도 꽤 공적을 많이 세운 장군인데, 초한지에서는 회음후 한신에게 묻히는 경향이 강하다.
작가의 지식 부족으로 혼동당하는 그렇다 해도, 구분을 제대로 하는 작품에서도 동명이인이 반복되면 공적이 화려한 자 아래 묻히는 경향이 있다.
사기(史記)
중국사서의 대명사로 불리는 통사인 사기(史記)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중국인들은 역사기록을 남겼고, 역사 기록자인 사관은 객관성을 귀중하게 여겼다.
‘춘추좌씨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제나라 대부 최저라는 사람이 군주를 살해하고 그 아우를 임금으로 세웠다. 제나라 태사(太史)가 이를 기록하자 격분한 최저는 그를 살해했다. 죽은 태사의 뒤를 이은 아우가 역시 똑같은 사실을 기록했다. 최저는 다시 그를 죽였다. 그러나 또 하나 남은 동생이 태사가 되어 다시 이를 기록했다. 이에 이르러서는 최저도 어쩔 수 없어 기록의 말살을 단념하게 되었는데, 그 동안 지방에 있던 다른 사관이 태사가 차례로 살해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기록판을 들고 달려왔다. 그는 기록이 지켜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지방으로 돌아갔다.
사마천 필생의 업적인 사기'라는 명칭은 삼국시대 이후 붙여진 이름이고, 사마천 자신은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불렀다.
세계 최초의 통사 ‘사기’는 황제로부터 한무제에 이르는 3,000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사기’의 사료로서의 가치는 1,000년 전의 은대 계보가 갑골문자와 정확히 일치함으로써 입증되었다.
무엇보다 ‘사기’가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며 각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애독되고 있는 까닭은, 유려하고 생동감 있는 문장 속에 무수한 인간 군상의 인생 역정이 깊이 있게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왕에서 서민까지, 성자에서 악인까지, 역사의 주연에서 조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을 편견 없이 등장시켰다.
그는 이 책에 빠져드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이들 개성적 인물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에 주목함으로써 역사란 어떻게 창조되는가, 인간이란 어떠한 존재인가를 깊이 성찰하게 만든다.
‘사기’는 본기(本紀), 표(表), 서(書), 세가(世家), 열전(列傳)의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130권 중 열전이 70권을 차지하여 높은 비중을 보이고 있다.
기전체란 본기와 열전을 줄여서 부르는 말로서, 사마천에 의해 새로이 창안된 이 새로운 역사 서술 체제인 기전체는 이후 중국 정사 서술의 모범이 되었다.
본기(本紀)는 황제 이후 역대 제왕의 일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고, 세가(世家)는 제후나 그에 준하는 인물들의 전기이며, 열전(列傳)은 그 외의 주목할 만한 인간 군상에 대한 전기나 주변 민족들의 역사를 담았다.
표(表)는 유동하는 역사적 사실을 상호 연관시켜 일람하기 위한 바둑판식의 연표이며, 서(書)는 정치사에서 다루지 못한 사회 문화의 기초가 되는 역법, 천문, 법, 예법, 경제, 치수 등에 대한 제도사다. 또한 각 편의 말미에 '태사공왈'로 시작하는 사마천 자신의 주관적인 짧은 평론이 본문과 구별되어 실려 있다.
한무제 때의 사람 사마천은 탁월한 재능과 엄정한 객관성으로 ‘사기’를 저술하여 후세에 귀감이 되었는데, 사마천은 전한 경제 때 섬서성 한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주의 사관을 지낸 사마 가문의 후손으로 아버지 사마담은 천체를 관측하여 역을 만들고 문헌이나 기록을 관리하는 태사령 직에 있었다. 사마담은 사관의 지위가 점차 기술직으로 천시되고 옛 기록이 사라져가는 것에 깊은 비애를 느끼고 사서편찬을 계획하고 있었다.
사마천은 어릴 적부터 역사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으며, 그의 아버지에 의해 의도적으로 역사가로서의 소양을 키워갔다. 그는 이미 10대에 고문서에 통달했으며, 20대에는 전국 각지의 주요 사적지를 직접 현장 답사하여 각지의 전승과 풍속, 중요 인물들의 체험담을 채록하는 등 귀중한 체험을 했다. 그 후 낭중(郎中)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고 사자로서 출장을 거듭하게 되어, 전국 각지에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BC 110년 아버지 사마담이 죽고 사마천이 태사령의 직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역사서의 집필을 결심하고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까지 남아 있던 시, 서, 춘추, 전국책 등과 궁중에 비장되어 있는 각종 서적, 상소문, 국가의 포고문 등을 섭렵하여 사기의 집필을 시작했다. 사마천은 공양학파인 동중서에게 수학하여 일관되게 춘추(春秋)를 역사서의 모범으로 삼았다. 그러던 중에 예기치 않은 재난이 닥쳐왔다. 흉노에게 패퇴한 명장 이릉을 단죄하는 무제 앞에서 모든 중신들이 침묵을 지키는데, 사마천이 홀로 이릉을 변호하고 나선 것이다.
이릉은 5,000의 병사로 10만의 흉노 기병과 대적하여 흉노 1만을 살상하는 등 분투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포로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화가 난 무제는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천하의 사마천은 이릉의 변호에 진노한 왕명에 의해 옥에 갇혀, 옥리만 보면 공포감에 죄어드는 비참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는 '용감하고 비겁하고 강하고 약한 것은 상황에 따라 좌우된다.'는 손자의 말에 깊은 공감을 느끼고 옥중의 경험을 통해 인간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다.
이 때 사형을 면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50만 전의 막대한 벌금을 내거나, 아니면 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인 궁형을 받는 것이었다.
살아가는 것도 넉넉지 못했던 사마천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견디며 스스로 궁형을 선택하여 환관이 되었다.
2년여의 옥중생활을 마치고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또 다시 예기치 않은 일이 닥쳤는데, 이번엔 무제의 신임을 회복하여 환관의 최고직인 중서령에 오른 것이다.
중서령은 황제의 곁에서 문서를 다루는 직책으로, 그것은 그가 환관이 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그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깊은 의문을 품게 되었으며, 이를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로 승화시켜 나갔다.
BC 91년 무려 10여 년간의 산고 끝에 ‘사기’가 완성되었다.
탁월한 재능과 예리한 관찰력, 거기에 인생의 가혹한 체험을 겪은 사마천에 의해 ‘사기’는 불멸의 역사서로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마천은 운명적으로 ‘사기’를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
사람들은 그를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 부른다.
중국 역대 국가별 도읍
조대 |
진 |
전한 |
후한 |
위 |
진 |
남북조 |
오대 |
북송 |
남송 |
원 |
명 |
청 |
중국 | ||||||||
후위 |
북제 |
북주 |
수 |
당 |
후량 |
후당 |
후진 |
후한 |
후주 | ||||||||||||
도읍 |
咸陽 함양 |
長安 장안 |
洛陽 낙양 |
洛陽 낙양 |
洛陽 낙양 |
洛陽 낙양 |
鄴 업 |
長安 장안 |
長安 장안 |
長安 장안 |
開封 개봉 |
洛陽 낙양 |
開封 개봉 |
開封 개봉 |
開封 개봉 |
開封 개봉 |
臨安 임안 |
燕京 연경 |
北京 북경 |
北京 북경 |
北京 북경 |
현재 |
시안 |
시안 |
뤄양 |
뤄양 |
뤄양 |
뤄양 |
린짱 |
시안 |
시안 |
시안 |
카이펑 |
뤄양 |
카이펑 |
카이펑 |
카이펑 |
카이펑 |
항저우 |
베이징 |
베이징 |
베이징 |
베이징 |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도는 나라를 상징하는 중요한 도시로서, 새로 건국한 후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수도를 정하는 일이다.
수도를 어디로 하는가에 따라 국가의 앞날이 많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수도를 정하는 것에는 국가가 처한 현실이나 추구하는 정책적 지향성이 나타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수도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고 여겨졌던 조건을 보면, 교통이 편리한 곳인가? 외부의 공격에 대해 방어하기가 유리한가? 경제성이 있는가? 신이 보호해 줄 수 있는 종교적 성지인가? 등이다.
중국에서는 신정(神政)일치시대 이후 유교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종교는 중요한 역할이 되지 못하여, 교통과 국방, 경제의 세 가지 요소가 수도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 중국의 역대 왕조의 도읍지
중국의 역대 수도 중에서 3회 이상의 수도였던 곳은 시안(西安),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베이징, 난징(南京)이다.
지도를 보면 가장 오랫동안 수도였던 시안(서안)과 뤄양(낙양), 카이펑(개봉)은 위도상으로 황허를 따라 북위 35도 선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위도상으로는 같지만 시안은 관중(關中) 지역에, 뤄양과 카이펑은 중원(中原) 지역에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각국이 관중과 중원에서 수도를 정했다는 것과 황허를 따라 동과 서를 오갔다는 것이다.
또한 위의 표를 보면 시안→뤄양, 시안→카이펑, 뤄양→카이펑, 카이펑→항저우로 이동하고 있는데, 이는 시대가 지날수록 점차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육조와 명나라, 중화민국은 양쯔장(장강) 유역인 난징을 수도로 삼았고, 남송은 항저우에 도읍했다.
베이징에는 춘추전국시대 연나라가 최초로 도읍한 이후, 요, 금, 원, 명, 청 등이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명나라는 난징을 수도로 삼았다가 이후 베이징으로 옮겼다. 또한 중화민국의 국민당 정부는 난징을 수도로 삼았지만, 중화인민공확국은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겼다. 이러한 수도의 변천은 송나라 이후 중국의 수도가 남에서 북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중국의 역대 국가들의 수도가 북동쪽인 베이징, 서쪽인 시안, 동남쪽인 난징과 항저우에 치우쳐 있는데, 이는 당나라까지 외세의 침입은 대부분 서북방 이민족에 의해 발생되었으며, 그 후 외세의 침입은 대부분 동북지방 이민족에 의해 야기하여, 당나라까지의 국가들은 서북방 방어가 중요했고, 그 이후의 국가들에게는 동북방 방어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시안이 서쪽으로, 베이징이 북쪽으로 편향되었음에도 수도가 된 까닭이 이 때문이다.
작위(爵位)
작위(爵位)는 왕족이나 공적이 뛰어난 귀족에게 수여하던 명예의 칭호 또는 계급을 가리킨다.
작위는 관작(서양의 관직)과 위계(서양의 작위)를 함께 이르는 말이며, 또한 작위를 봉해주는 일을 봉작이라 하며, 대부분의 작위 계승은 장남에게만 되었다.
제후(작위)에는 다섯 등급이 있어 오등작이라 부르는데, 공, 후, 백, 자, 남작이다.
공작(公爵, duke)은 중국에서는 대체로 황제의 본처의 아들들에게 주며, 오등작의 첫째로 라틴어로는 지도자를 뜻한다.
후작(侯爵, marquis)은 오등작의 둘째로 프랑스어 marquis에서 온 말이며, 변경(marche)에서 파생하였다.
백작(伯爵, count)은 오등작의 셋째로 라틴어에서 온 말이며, 황제의 동료, 황제의 대리자를 뜻한다.
자작(子爵, viscount)은 오등작의 넷째로 라틴어에서 온 말이며, 백작의 대리자를 뜻한다.
남작(男爵, baron)은 오등작의 다섯째로 고대 게르만어 baro에서 온 말이며, 자유인을 뜻한다.
그밖에 서양에는 대공과 준 남작이 있다.
중국의 작위는 하나라 때에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5등 작이 있고, 은나라는 공, 후, 백의 3등 작이 되었다가 주나라 때 다시 5등 작이 되었다.
진나라는 상앙의1차 변법에 의해 군공 포상제와 작위제가 설치되어 20등작제로 군공에 의해 작위를 주었으며, 작위에 의해 토지의 보유나 노비 수 등이 정해졌다.
전한은 군 공 작제를 고쳐 군공에 한정하지 않고 신분에 따라 작위를 주었다. 더욱 20등작 외에 왕작을 마련했지만, 이것은 황족에게 한정되게 되었다. 또, 작위를 가지는 사람은 토지의 보유가 허가되었다.
무제의 때는 군사비 조달을 위해서 매작을 하여 작위의 가치가 낮아졌기 때문에, 군공에 의한 작위로 설정되었다.
후한 대에 작위의 가치는 더 하락하여 열후, 관내후 만이 작으로 여겨졌다. 이후 위나라에서부터 청나라 까지 많은 변천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고려 초기에 시작되었으며 일제시대 때는 친일세력에게 일본 천황이 준 작위가 있으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후 작위제가 신설되었다.
경대부 (卿大夫)
대부(大夫)는 고대 중국에서 사용했던 신분 호칭으로 한국과 일본, 베트남 왕조에도 사용되었다.
중국 주대(周代)부터 춘추전국시대에 걸쳐 신분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는데, 자신의 영지(領地)를 소유한 귀족을 뜻했다.
신분상 대부(大夫)는 경(卿)의 아래이며 사(士)의 위에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대부(大夫) 안에 상대부, 중대부, 하대부가 있고, 경(卿) 안에 상경, 중경, 하경으로 나뉘어졌다.
주 왕실과 그 아래 제후(諸侯)를 섬기는 소규모 영주를 대부라 부르고, 대부들 가운데 가장 높은 자를 경이라고 부르며, 국정에 참여하게 했으며 횡포를 부리는 제후를 대부들이 모여 추방하기도 하는 등, 주군을 위협하기도 했다.
후대에는 대부(大夫)나 사(士) 가운데 쇠퇴하는 자들이 나타나면서 유력 농민층이 새로이 '사(士)' 계급을 형성하고 지위를 얻었다.
사기(史記)의 ‘염파 인상여 열전’에 "상여를 상대부로 임명하였다."는 기술이 있다.
초(楚)의 문인이었던 굴원(屈原)은 일찍이 초나라의 삼려대부(三閭大夫)에 임명되었는데, 삼려(三閭)란 초나라의 왕족이던 소(昭), 굴(屈), 경(景)의 세 성씨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을 관장하는 것이 삼려대부다.
조(趙)의 재상(宰相) 임고(林皋)는 아홉 아들이 모두 대부의 관직을 가져서 조나라의 국인(國人)으로부터 구룡(九龍)으로, 자신은 구룡지부(九龍之父)로 불렸다.
진(秦)이 여섯 나라를 통일한 뒤, 대부는 황제의 근신(近臣)의 지위가 되었는데, 진에는 중대부(中大夫)라는 직책이 있어 낭중령(郎中令)에 속한 관직이었다.
한대(漢代) 초에는 중대부와 함께 태중대부(太中大夫)와 간대부(諫大夫)가 있었다.
무제(武帝) 때 중대부를 광록대부(光祿大夫)로 고쳐서 질(秩)을 비이천석(比二千石)으로 하고 의론(議論)을 맡게 했다.
진(晋)에서부터 지방에 설치한 현(縣)의 장관을 대부라고 부르게 되어 이것을 다른 국가도 답습하게 되면서, 중국은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로 이행하게 되었다.
수(隋)의 양제는 9대부(九大夫)와 8위(八尉)의 17품계로 관직체계를 구성하였는데, 당대(唐代)에도 답습하여 종2품에서 종5품하(下)의 통칭을 대부로 하였다.
현대 중국어에서는 의사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
기록상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인용된 ‘위략’에서 고조선이 연(燕)을 공격하려 할 때 고조선의 '대부' 예(禮)가 말렸다고 기록된 것에서, 고조선 시대도 대부라는 호칭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초기의 관직으로 중외대부(中畏大夫)라는 관직이 있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선 기록상으로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그리고 조선(朝鮮)에서는 정1품도 대부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일본은 일본서기(日本書紀) 스진 천황(崇神天皇) 때에 대부(大夫)라는 글이 보이지만, 대부라는 것은 율령제도가 도입된 뒤의 관위 호칭으로 율령제가 확립되기 전의 대부라는 호칭도 관직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단지 일본서기 편찬자가 수정한 문장으로 단순히 ‘대부 신분에 해당하는 자’ 라는 뜻 정도로 본다.
일본의 율령인 ‘공식령(公式令)’의 규정에서는 태정관(太政官) 3위 이상, 료(寮)의 4위 이상, 주고쿠(中國) 이하의 구니에 파견되는 고쿠시(國司)를 대부로 불렀다.
즉, 5위 이상의 남자 관리를 가리키는 칭호였으며, 관직으로서 대부는 ‘도구다이부(東宮大夫)’와 같이 ‘다이부(だいぶ)’로 읽지만, 단순히 5위의 관위를 가진 자를 가리킬 경우에만 ‘다이후(たいふ)’로 읽었다.
시대를 내려오면 대부는 5위 관위를 가진 자의 통칭, 나아가 신분이 높은 자에 대한 호칭 또는 인명의 일부로 쓰였다. 그리고 5위라는 관위는 귀족으로는 최하위지만, 지방의 다이묘와 사무라이, 평범한 서민이 이에 봉해진다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었기에 일종의 명예적인 칭호로서 대부(또는 태부)를 칭하게 된 것이다.
봉건제도(封建制度)
봉건제도는 정부가 지방을 직접 행정관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중앙집권적인 군현제와 달리 중앙 정부는 수도와 일부 요충지만 직접 통치하고 다른 지방에는 제후나 영주를 임명하여 세습하여 다스리게 하는 제도다.
그리고 봉건제도에서 제후(諸 여러 제, 侯 후작 후)국이라는 것은 중국의 작위 중에 후작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형성된 단어다.
고대 중국 및 중세 유럽 등에서 시행된 지방 행정 제도이자 정치·사회체제로서, 중국과 유럽의 봉건제도는 일부 공통성이 있지만 서로 상이한 제도이나, 한자문화권에서는 유럽에서 시행되었던 Feudalism을 중국의 봉건 제도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중국의 봉건제는 주나라 때 시행된 것으로, 왕족과 공신들을 요충지에 제후로 봉하여 주나라 왕실을 지키는 번병(藩屛)으로 삼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주나라 왕족 및 공신으로 이루어진 50여 제후국들이 임명되어 중국 각지에 남아 있던 기존의 800여 제후들을 아우르게 한 것이다.
주나라 이전부터 존재했던 800여 제후에서 볼 수 있듯이, 기존에도 봉건제도와 유사한 형태의 체제는 있었지만, 주나라 때 정치·사회 제도로서 본격적으로 정비되어 실시되었다.
봉건제(封建制)의 봉(封)의 어원은 옛날 부족국가 시대 때, 평야지지대에서 옆에 있던 다른 부족국가와의 경계의 구분을 짓기 위해 흙을 쌓아 길게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나무를 심었는데, 이것을 봉(封)이라 했으며, 그 후 봉(封)은 천자가 제후를 임명하고 토지를 하사하는 제도를 가리키는 한자어가 되었다.
따라서 봉건제도는 토지를 하사(封)하여 나라를 세운다(建)는 의미로, 제후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제후국을 삼는 것을 분봉(分封)이라 하고, 제후들에게 땅과 함께 작위를 내리는 것을 봉작(封爵)이라 하였다.
대부분의 제후는 주나라 왕족이 임명되었으며, 제후들은 다시 혈족을 중심으로 경대부(卿大夫)를 임명하고 채읍(采邑)을 나누어 줌으로써 계층적인 통치 체제가 나타났다.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혈연을 바탕으로 한 종법(宗法) 질서를 통해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유지하였다. 그러므로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올리고 종법 질서를 확인하는 일이 크게 중시되었으며, 제후들에게는 제사에 참여하고 제사에 쓸 공물을 공급하는 책무가 부여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제후들의 세력이 점차 강화되고 여러 세대가 흘러 제후와 주나라 왕실간의 혈연관계도 약화되면서 종법 질서를 중심으로 한 통제 체제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주나라 왕실이 이민족의 침략으로 수도를 상실하고 낙읍(洛邑)으로 옮겨오면서 실질적인 국력 우위마저 사라지게 되자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완전히 소멸되고 혼란기가 찾아왔다. 이 혼란기를 춘추 전국 시대라고 하며, 전반기인 춘추 시대에는 주나라 왕실의 권위를 존중하여 제후들이 패자를 중심으로 왕실을 보호하는 양상이었으나 후반기인 전국 시대가 되면 제후들이 모두 왕을 자칭하고 주나라 왕실과 동등한 독립국으로 행세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주나라의 제도로서의 봉건제도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한나라 이후 중국의 여러 왕조는 황족들을 제후왕으로 책봉하는 봉건 전통은 형식적으로 부활하여 유지되었으나, 실질적인 제도는 주나라의 봉건제도와 달랐다.
분봉된 제후왕들은 실권을 가지지 못했으며, 제후왕들의 영지를 포함한 모든 지역은 황제가 임명한 행정관이 일정한 임기 동안 다스리는 군현제로 통치되었다.
제후왕들의 제후국은 이름만 국(國)이고 행정관의 직명만 달랐을 뿐 실질적으로 군(郡)과 차이가 없었다.
유럽의 봉건 제도는 중세 유럽에서 형성된 지방 행정 제도이자 정치·사회 체제이다.
영주와 농노로 이루어진 장원(莊園)을 기초 단위로 하여 각 장원의 통치자인 영주(기사)는 쌍무적 계약을 통해 상위 영주(대영주)의 가신(家臣)이 되고 대영주 또한 더 상위의 영주로 이어져 궁극적으로 국왕 또는 황제와 쌍무적 계약 관계를 맺어 계층적인 가신 관계가 형성된 체제이다.
국왕을 포함한 모든 계층의 지배자들은 모두 장원을 다스리는 영주이며, 국왕 등의 대영주는 소유 하에 있는 다수의 장원을 영주에게 분봉하여 다스리게 하거나, 한 단계 낮은 중소영주의 충성을 얻음으로써 광대한 영토를 유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영국의 국왕은 영국이라는 나라를 구성하는 모든 대영주들의 수장이면서 동시에 국왕령에 속하는 영주들의 수장인 대영주였으며, 또한 수도 런던을 포함한 국왕 직할령을 다스리는 영주였다.
이러한 누층적인 관계는 영주가 가지는 작위에서도 드러나는데, 영국의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공식 작위를 예시로 보면 영국 및 영연방 국가의 국왕 이외에도 노르망디 공작, 랭커스터 공작, 맨 섬의 영주, 에든버러 공작(女), 메리오네스 백작(女), 그리니치 남작(女) 등 다양한 작위가 있다.
이렇게 계층적인 관계는 휘하 영주 및 기사들의 봉건법 상의 충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휘하 대영주를 실질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대영주를 능가하는 직할령의 존재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카페 왕조 초기의 상황이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국왕으로 영주들에 의해 선출된 위그 카페는 일드프랑스 지역의 영주로 다른 대영주를 압도할 수 있는 권력이 부족하였고 사실상 일드프랑스와 오를레앙 지역만 다스릴 수 있었다.
반대로 영국 노르만 왕조는 정복을 통해 형성된 강력한 권력과 함께 본거지인 노르망디 지역의 힘을 바탕으로 휘하 대영주를 압도할 수 있었다.
혈연에 기초한 종법 질서를 중심으로 통제력을 유지했던 중국의 봉건제와 달리 유럽의 봉건제는 혈연이 아닌 쌍무적 계약 관계로 통제력을 확보했다.
주군은 보호를 제공하고 가신은 충성을 제공한다는 상호간의 의무를 기초로 계약을 맺는 것으로 농노와 영주 사이의 관계가 이에 해당했다.
영주와 상위 영주 간에도 기본적으로는 같은 계약이지만 세부적으로 영주는 세금과 일정 기간의 군사적 봉사를 제공하고 상위 영주는 토지(봉토)를 제공하는 관계였다.
봉토의 소유권과 충성 계약은 세습되었으며, 혼인과 상속을 통해 이전될 수 있었다. 또한 쌍무적 계약이었으므로 의무가 지켜지는 한 영주의 거취는 자유로웠으며, 이를 통해 여러 명의 상위 영주를 섬기고 다수의 봉토를 받는, 혹은 혼인과 상속을 통해 다수의 봉토를 획득함으로써 여러 명의 상위 영주를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국왕조차도 이러한 혼인과 상속을 통해 직할령 혹은 직속 영주를 확대하는 정책을 취했다. 충성을 맹세한 상위 영주가 다수이다보니 군사적 봉사를 제공할 때 어느 영주를 우선으로 두는지에 대한 계약 관계가 따로 존재하기도 했다.
일본의 봉건 제도는 일본 에도 시대에 존재한 다이묘와 이들이 다스렸던 번 등의 제도를 봉건 제도라 불렀다. 이는 당대 일본 유학자들이 자국의 정치·사회 상황이 중국의 봉건 제도와 유사했다고 보고 같은 호칭으로 불렀던 것이다. 당시 일본의 봉건 제도는 유럽과 유사한 형태였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