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관상으로, 아주 옛날에 지구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단지 대지, 바위와 물이 있었다. 태양이 비쳤고 비가 내렸다. 생명체가 외관상으로 진화함에 따라 동물, 물고기 그리고 식물이 생겨났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과 식물들을 먹었다. 물고기는 다른 물고기와 식물을 먹었다. 식물은 그저 자라고 먹히고 죽었다. 그리고 대지와 바위는 대지와 바위였다.
모든 일들은 특별한 이유가 없이 그저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뇌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주 단순하고 원시적인 뇌를 가지고 있었다. 단지 고통, 기쁨, 응답과 반응이 있었다.
이원성의 느낌, 옳음과 그름, 목적 또는 의미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구의 스토리 속에서, 또 다른 동물이 출현해서 좀 더 복잡하고 정교한 두뇌를 발전시켰다. 뇌의 일부분이 육체 밖의 세계는 분리된 주체-객체의 현실이라고 추정한 그러한 방식으로 인간의 뇌가 발전했다는 것을 최근의 연구는 확증한 것 같다. 그 결과 뇌의 일부분은, 자기의 생존과 이 추정된 분리된 현실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한 좀 더 많은 투자로서, 중심 또는 자기의식의 정체성을 고안했다. 고안된 자아, “나”는 이러한 주체-객체 이원적 현실 안에서만 존재했고 작용했다.
“자아”, “나”, “에고”에 의해 경험되는 모든 것(생각, 감정, 조건화된 반응 등)은 모두 뇌로부터 외관상으로 만들어지고 조직화되었다. 그리하여 (나중에)추가된 인위적인 자아는 필연적으로 뇌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그렇지만 외관상의 스토리 속에서 개인은 또한 자기가 자기 자율적이며, 매우 실질적인 세계에서 매우 실재하는 스토리라고 자기가 보고 있는 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뇌와 자아 연합이 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또는 그렇게 보인다. 그렇지만 반드시 위의 내용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기의 스토리를 좀 더 낫게 만들려는 모든 노력과는 상관없이, 이러한 분리된 현실 속에서 “자아”, “나”는 완전히 그리고 늘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다. 부, 권력 기타 등등의 측면에서 아무리 많이 획득한 것 같더라도, 그것의 어느 것도 결코 완전히 충분한 것 같지 않았다.
분리된 자아의 굶주림은 채울 수 없다. 끊임없이 잃어버린 무언가가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욕망의 만족과 충족조차도 언제나 일시적이고 지나가는 경험이다. 뇌와 자아의 진화적인 결합이 뇌에게는 외관상의 지배의 측면에서 성공적이었지만, 성취의 측면에서 자아에게는 실패였다. 그러나 진화는 예지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시간의 측면에서 지구에서 개인성의 존속기간은 짧다. 그러나 개인성의 창조하고 파괴하는 능력은 놀라웠다. 그 능력은 좀 더 최근에는 외관상의 자기 파괴의 능력을 포함한다.
출처 : "This Freedom", Tony Par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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