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스포츠계의 학교폭력
2.메디치 효과
3.아즈위 (Azwi)
4.신기한 솜씨들
5. '그냥'의 미덕
1.스포츠계의 학교폭력
인간사, 경우 불문하고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의사전달 방식이 완력(腕力)으로 표출된다면 지성이니 이성이니 하는 인간의 정체성은 의미를 잃게 된다.
몸의 움직임을 근간으로 하는 스포츠계는 타 분야에 비해 폭력이 동원될 소지가 큰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폭력이 일반인과는 동떨어진 문제도 아니다. 중등학교의 '호랑이 학생주임'은 옛 얘기로서 기피보직이 되고 있다지 않은가?
세상사 난제(難題)를 해결하는 방법은 원인을 제거해 나가는 예방적 조처와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식 대응이 있다.
스포츠계는 우선 초ㆍ중교의 학교 간 대항경기를 클럽경기로 전면 개편해야 한다. 의무교육에서 학생에게 학습권을 박탈하는 건 범법이며, 이는 고교와 대학에서도 다르지 않다. 학습권을 도외시 한 경기성적 만연주의가 폭력양산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학교 스포츠지도자에 대한 소양교육도 병행해야 할 과제다. 업무의 특성상 경쟁에서의 승리가 주 목적이더라도 선수상호 간 배려와 이타심의 배양은 지도자의 몫이다. 학교 스포츠지도자는 운동부 감독이기 이전에 교육자라는 긍지와 사명감이 전제되어야 한다.
윤평중*은 스포츠계 폭력의 미연 방지책으로서 국가주의적 '스포츠민족주의'를 넘어 운동 자체가 주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스포츠민주주의'를 요청하고 있다.
여하튼 스포츠계의 폭력을 일벌백계(一罰百戒)로써 치유하려는 근시안적 대처는 실효성에 한계가 있다. 무분별한 온정주의도 문제지만 일시적인 호들갑도 온당치 않다. 폭력의 내면화는 평소 예방을 간과하여 초래된 부산물이다.
2021년 2월 19일
* 윤평중 : 한신대학교 교수, 정치철학
2. 메디치 효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고귀한 신분'과 '책임이 있다'는 프랑스 합성어로서 사회지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책무를 뜻한다.
아이러니한 건 사회지도층 인사가 나눔에 인색할 때 이를 비판하는 의미로 이 구절이 자주 인용된다는 점
통념상 부유층, 고위층에게 나눔을 강요할 순 없다. 허나, 제대로 된 사회는 나눔 문화에 익숙해 있다.
나눔에는 '금품'이 우선적 필요요건이다. 의식주와 관련된 생존의 기틀로서 가진 자의 나눔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듯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게 세상사다.
역사적으로 나눔 문화의 선두는 15세기 전후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이다. 수장이었던 메디치*는 막대한 부(富)를 학문과 예술에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었다. 메디치 효과(Medici effect)**는 그렇게 해서 탄생되었다.
지식과 소질을 공유하는 '재능'의 나눔도 같은 맥락이다. 이의 전수는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값진 도구이며, 나누어도 소진되지 않는 특성이 있다.
'온정(溫情)'의 나눔이 인간 간 교분과 소통의 근간이 됨은 물론이다. 나눔은 정을 기반으로 하며 결과는 정으로 발현된다. 나눔 문화는 '나의 너는 나다'라는 깨우침을 필요로 한다.
"교수님! 나눔의 실천에 동참하고 계십니까?" "노력하고 있다. 아니 더욱 애를 써야 할 것 같다." 나눔의 미덕은 자신의 삶을 반추함으로써 시작된다.
2021년 2월 24일
* 로렌초 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Lorenzo di Giovanni di bicci de' Medici, 이탈리아, 1395~1440)
** 메디치 효과(Medici effect) : 서로 다른 분야의 요소들이 결합할 때 각 요소들이 갖는 에너지의 합보다 더 큰 에너지를 분출하게 되는 효과
3. 아즈위 (Azwi)
1964년, 종신형을 선고 받고 절해의 고도 루벤섬 감옥으로 투옥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감옥은 다리 뻗고 제대로 누울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좁았으며 변기로 찌그러진 양동이 하나를 감방 구석에 던저 넣어 주었습니다.
면회와 편지는 6개월에 한번 정도만 허락 되었으며 간수들은 걸핏하면 그를 끌어다가 고문하고 짓밟고 폭력을 가했습니다.
이미 사람으로서의 품격과 지위는 상실되었고 견딜 수 없는 모욕과 고통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감옥에 끌려간 후,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살던 집을 빼앗기고 흑인들이 모여사는 변두리 땅으로 쫓겨났습니다.
감옥살이 4년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이듬해 큰 아들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장례식에도 참석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감옥살이 14년이 되던 해에 큰 딸이 결혼을 해서 아기를 데리고
할아버지에게 면회를 왔습니다.
그리고 큰 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아버지는 말없이 땟물이 찌들은 윗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꾸겨진 종이 조각 하나를 꺼내어 딸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딸은 그 종이 조각에 쓰여진 글자를 보는 순간 눈물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글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아즈위(Azwie', 희망)
그는 그 후로 온갖 치욕을 다 당하면서 13년 간이나 옥살이를 더 하고 나서야 마침내 풀려났습니다.
1964년 부터 1990년 까지 무려 27년 간이나 감옥살이를 했는데, 44세에 억울한 감옥살이를 시작해서 71세에 풀려난 것입니다.
그는 남아공 흑백 분리 정책을 철폐하고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당선 되었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되어서
자기를 박해하고 고통과 치욕을 주었던 정적들을 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인간의 고고한 삶의 방식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세계 언론은 이를 가리켜 인간의 품격을 한 계단 올려 놓은 사람이라고 존경을 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넬슨 만델라' 입니다.
그 오랜 세월 어떻게 절망의 세월을 견디어 낼 수 있었을까요?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위대한 변화가 반드시 일어나리라는
아즈위(희망)를 한 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사람은 희망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 갑니다.
- 옮겨 온 글 -
4.신기한 솜씨들
눈여겨보면 세상에 기가 막힌 솜씨를 지닌 이들이 있다. 우선 음률로써 감성을 표현하는 작곡가들이 으뜸으로 보인다. 범인(凡人)으론 상상 못할 천재들의 솜씨가 극치를 이룬다.
이를 음성 혹은 악기로 연주하는 이들의 솜씨도 만만찮다. 악보 없는 장시간의 연주는 솜씨 못잖게 기억력이 놀랍다.
형상을 캔버스에 담아내는 화가들의 솜씨도 경이롭다. 사실화에서 추상화, 전위미술에 이르기까지 물감 혹은 몸짓으로 세상을 다양하게 묘사함이 신기롭기만 하다.
자연과 인간의 삶을 글로써 묘사하는 작가들의 솜씨도 놀랍고 경탄스럽다. 시, 수필, 소설 등이 인간을 희로애락의 장으로 초대한다.
스포츠의 기교(技巧) 또한 새로운 경지에 도전하는 솜씨다. 경기규칙과 규정을 기반으로 몸동작으로써 참가자와 관람객에게 성취감과 희열감을 선사하고 있다.
반면에, 극심한 몸놀림, 즉 기예(技藝)는 차원을 달리한다. 사상과 감정 혹은 경기기술을 몸의 움직임으로 표출하는 무용이나 스포츠와는 달리 몸 학대로 이어질 위험성이 내재해 있다.
인간의 솜씨들이 문화예술분야의 전유물일 듯하나, 실은 시시각각의 변신과 말 바꾸기에 능란한 정계 인사들의 기괴한 솜씨도 한 몫을 한다.
이렇듯 인간의 솜씨는 참가자는 물론 만인을 아늑한 낙원으로 인도하거나, 악취나는 늪으로 유인하는 양면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2021년 3월 6일
5. '그냥'의 미덕
동일한 형태나 상황이 이어지길 원할 때 '그냥'이라고들 한다.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니 맹목적인 듯하나, 그 동기를 유심히 살펴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그냥'은 '인위를 가하지 않고 자연에 따라 행한다'는 노장(老莊)의 무위(無爲)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세태에 대한 긍정적 관점에서 순리(順理)를 귀하게 여기며, 개입보다는 자연의 흐름에 순종하는 미덕을 택한다.
인간 간 만남에서도 뚜렷한 목적이나 의도에 앞서 만남 그 자체로써 의미를 찾고, 이성 간 교제도 조건보다는 '그냥' 좋아서 사랑에 빠진다.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무책임한 방임형의 '그냥'이 있다. 규범에 근거하지 않은 의지나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쉽게 뱉은 '그냥' 한 마디가 화근(禍根)이 되곤 한다.
인간사에서 '그냥'을 아예 찾아 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위하여'와 '때문에'로 길들여진 경직된 문화가 '그냥'을 신중치 못한 위태로운 것으로 여겨고 있다. '그냥'을 체념이나 방관주의의 모태로 보고 있는 것이다.
각박한 세상, '스스로 그러한 존재', '꾸밈없는 저절로'라고 하는 순수한 맛과 멋이 절실하지 않은가? '그냥'에는 목적편향에 예속되지 않는 유연한 속성이 내재해 있다.
2021년 3월 12일
아버지의 강(가수 주병선)
https://youtu.be/PStQlx_Oh0U
강문경
https://youtu.be/pK8hEpMOYrk
김태년
https://youtu.be/hTKpEd-hCS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