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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학민의 술 이야기>
∘ 산업혁명과 알코올중독
• 피에르 푸케의 <술의 역사>에 의하면, ‘알코올중독’(alcoholism)이란 용어
는 1849년 스웨덴의 의사 마뉴스 후스가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후스는
당시 스톡홀름의 세라핀 병원에서 간, 심장, 신경 질환을 앓고 있던 환자들을
진찰하면서, 그들이 앓고 있는 여러 질병들이 스웨덴의 감자로 만든 브랜디
‘아콰비트’를 지나치게 마시는 것과 관계가 있음을 확인하게 됐다.
스웨덴에서는 15세기 중반 이후부터 증류기가 본격적으로 이용됐는데, 17세기에 이르러서는 큰 농장주들이 각기 단풍나무즙이나 감자를 발효시켜 나온
액을 2,3차 증류해 높은 도수의 브랜디를 생산해냈다. 그리하여 19세기 초쯤
스웨덴은 유럽에서 ‘주정뱅이’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는데, 이 주정뱅이들이 나중에 후스에 의해 ‘알코올중독자’로 규정된 것이다.
그러나 술을 지나치게 마심으로써 일어나는 각각의 임상적 증상들을 하나로
통합해 후스가 붙인 새로운 병명 알코올중독은, 의사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술꾼들의 무관심과 묵계로 이후에도 상당 기간 ‘약간의 낭만적인
술주정’으로 치부됐다. 이 새로운 병이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파괴하는
치명적 증상임을 인식하고 본격적으로 치료법을 개발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에 들어와서였으니, 이 100년 동안 ‘낭만’ 때문에 숱한 술꾼들이
스러져간 것이다.
왜 19세기 초를 경계로 ‘술주정’과 ‘알코올중독’이 분화 됐을까?
19세기 이전에는 알코올중독이 없었던 것일까? 또 역으로 19세기 초부터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됐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19세기 초 유럽과 미 대륙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인간의 생활환경 전반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그 중에서도 술은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70년이
지나지 않아 성인 한명당 연간 소비량이 15L서 35L로 2배 이상 증가했다. 물론 이즈음에 술의 생산, 저장, 유통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도 술 소비증대에 한몫했지만, 더 큰 이유는 산업혁명의 그늘에서 술로 고통을 삭이려던 노동자들의 ‘가난과 슬픔’ 때문이었다.
산업사회로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일어난 경제적 변화는 노동의 기계화였다.
도시에 세워진 공장들이 많은 노동력을 흡수했고, 도시들은 이내 폭발적으로
팽창해 주변 농촌에까지 공장들이 뻗어나갔다. 이에 따라 점점 더 많은 빈민과 부녀자, 어린이들이 일자리를 구하러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계급, 프롤레타리아가 생겨난 것이다.
노동자들의 삶은 열악했다. 그리고 이들은 처참한 삶을 잊으려고 더욱더
술에 젖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엥겔스의 <영국 노동계급의 현황>이란
책에 잘 묘사돼 있으며, 그 밖에 에밀 졸라, 플로베르, 아나톨 프랑스,
로맹 롤랑, 다윈, 버나드 쇼, 잭 런던 등도 당시 노동 사회의 비참함을
글로 표현하고 있다.
곧 술 생산의 급증, 판매 및 유통망의 발전 그리고 사회, 경제, 인구
차원에서 일어난 극심한 사회환경의 변화가 수천년 동안 이어오던
음주문화를 몇십년 만에 뒤흔들어 알코올중독자를 양산케 하였으니,
자유가 피를 먹고 자라는 것처럼 문명은 술을 먹고 자라는가!
∘ 약주엔 약이 없다
• 붕어빵 속에 붕어가 들어 있지 않듯이, 약주(藥酒)속에도 약이 들어 있지
않다. 원래 약주는 약효가 있다고 인정되는 종류의 술이거나 처음부터 특이 한 맛과 향을 내기 위해 약재를 넣고 빚은 술을 뜻한다. 그러나 이는 좁은 의미에서의 약주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술밑을 여과해 만든 맑은 술을 약주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 의미가 다시 변천해 약주는 술의 높임말로도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왜 약이 들어 있지 않은데도 약주일까? 우선 약주는 귀하다. 옛날 약주는
막걸리 독에 용수를 박아 고인 맑은 술을 따로 떠낸 것이니, 막걸리 한
독에서 약주 서너되밖에 나오지 않는다. 적당한 음주는 원기를 왕성하게
하고 몸에 활기를 넣어주니 술을 약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고, 희귀한
먹을거리일수록 몸을 보하는 약으로 여기니 귀한 맑은 술도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가뭄이 들면 자주 금주령을 내렸다. 일반 백성들은
가뭄이 들면 술을 빚기는커녕 삼시세끼 보리죽으로 연명하기도 어려우니
아예 금주령을 어길 일이 없겠지만 양반층은 어떤 핑계이든 금주령을
어기고 술을 마셨다. 이들은 자기가 마셔오던 맑은 술을, 술로 마시는 게
아니라 약 인양 사칭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조차 지체 높은 이가 마시는
술을 모두 약주라 부르게 되었고, 더 나아가 좋은 술인 맑은 술을
약주라 해버렸다는 것이다.
약주에 대해서는 선조 때의 문신 서성(徐賂)에 얽힌 일화도 전해온다.
서성의 집에서 빚은 술이 서울 장안에서 아주 유명했는데, 그의 호가
약봉(藥峰)이었고, 그가 사는 곳이 약현(藥峴, 지금의 중림동)이어서
좋은 맑은 술의 통칭이 약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지은 <임원경제지>에도 “서충숙공이 좋은 청주를 빚었는데,
그의 집이 약현에 있었기 때문에 그 집 술을 약산춘이라 한다“고 했다.
이 약산춘이 약주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또 일설에는 중종 때 약현에
살았던 이씨 부인 (서성의 어머니)이 남편을 잃고 술장사에 나섰는데,
그 솜씨가 뛰어나 ‘약현술집’의 술이 소문난 데서 약주가 유래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중종 시대는 1544년에 끝났고, 서성은 1588년에 태어났다.
곧 아버지가 죽은 뒤 아들이 태어났다는 것이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어찌되었든 약주라는 명칭은 아들이거나 어머니거나 서성 일가가
관련돼 있는 듯하다.
약주는 일제 초기까지 주로 서울 부근 중류 이상의 계층에서 마셨다.
보통 멥쌀과 누룩으로 밑술을 담그고 그 위에 찹쌀을 쪄서 덧술을 해
만드는데, 각 가정에서는 그들대로의 비법이 있었을 뿐 아니라 인삼이나
그 밖의 약재를 넣어 빚어 자기 집 술을 자랑했다. 막걸리, 소주 이외에는
술이 별로 없었던 1960년대까지 약주는 고급 술로 여겨져 제법 대접을
받았다. 약주 양조장이 서울에 6개, 경기도에 20여개 있으면서 큰 호황을
누렸으나, 점차 양주, 맥주, 소주 등에 밀려 이제는 경기도에만 2개 남아
있을 뿐이다. 옛날의 영화는 모두 잃었지만, 조선시대 백일주의 명맥을
이어온 김포약주가 지금도 그윽한 맛과 향으로 ‘꾼’들의 목젖을 변함없이
적셔주니 그나마 다행이다.
∘ 구기자주, 300년 장수의 비밀
• 65살 이상 비율이 전체 인구의 7%이상을 차지하는 사회를 고령화사회라고
한다. 또 65살 이상 인구 비율이 14% 이상이면 고령사회, 21%이상이면
초고령사회로 구분하고 있다. 한국은 2000년을 기점으로 65살 인구가 7.1%
를 차지해 고령화사회에 진입했으며, 2019년경이면 65살 이상의 비율이
14.9%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고령사회로 접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고령화사회는 의학이 발달하고 생활환경이 개선되면서 수명이 늘어나 생기는 선진국형 현상이지만, 이로 인해 많은 문제점도 야기된다. 노인들의 빈곤,
질병, 고독감 등이 심화될 수 있으며, 젊은 자녀에 의한 부양 체계가 한계에
부닥침으로써 국가 경제에 엄청난 부담을 준다는 것이다. 특히 고령화사회에서 고령사회로 가는데 일본 24년, 미국 71년, 스웨덴 85년, 프랑스 115년 걸린 데 비해 한국은 19년으로 예측되는 바, 우리 사회는 이러한 급격한
변화에 따른 해결책 마련에 큰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참여정부는 고령화 및 미래사회위원회를 구성해 가속도적으로 밀어닥칠 고령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대책을 세우고 있다. 그런데 정부의 이러한
노력을 일거에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는 ‘책략’이 있다. 이수광의 <지붕유설>
식물부(食物部)에 나오는 이야기다.
“옛날 중국 땅 하서(河西)로 가던 사신이 길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나이는 십육칠세가량이었다. 그 여인은 흰머리가 난 팔구십세 되어 보이는 늙은이를 마구 때리고 있었다. 사신이 묻기를 ‘너는 어린 여자로서 어찌해서 늙은이를 때리는가?’ 이에 그 여인이 대답하기를 ‘이 아이는 내 셋째 자식인데 약을
먹을 줄을 몰라서 나보다 먼저 머리가 희어졌소’ 사신이 여인의 나이를
물었더니 395살이라는 것이다. 사신은 말에서 내려 그 여인에게 절한 다음 오래 살고 늙지 않는 약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여인은 구기자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고, 사신이 돌아와서 그 법대로 만들어 먹었더니 300년을 살아도 늙지 않았다 한다.”
정부의 국가발전 전략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우리나라를 ‘노인국가’로 변하게 할지도 모를 중요한 ‘국가기밀’로 간주되어야 하지만, <한겨레21>독자들의 알 권리 충족을 위해 이 여인이 전한 ‘300살 살기 구기자주 프로젝트’를
공개한다.
“정월 보름 전 첫째 안일(寅日)에 구기자나무 뿌리를 캐어 한 되쯤 될 만큼
그늘에서 말린다. 여기에 2월의 첫째 묘일(卯日)에 맑은 술 한 말을 부어서
만 7일이 된 다음에 찌꺼기는 버리고 이것을 새벽에 마신다. 밥 먹은 뒤에는
마시지 말라. 또 4월 첫째 사일(巳日)에 구기자나무 잎을 따서 한 되 될 만큼
가늘게 썰어서 그늘에 말린다. 5월 첫째 오일(午日)에 여기에 술 한 말을
붓는다. 또 7월 첫째 신일(申日)에 꽃을 따서 한 되 될 만큼 그늘에 말려서
8월 첫째 유일(酉日)에 술을 한 말 붓는다. 또 10월 첫째 해일(亥日)에
열매를 따서 한 되 될 만큼 가늘게 썰어서 그늘에 말린 다음 11월 첫째
자일(子日)에 술 한 말을 붓는다. 위에서 말한 법대로 만들어서 13일 동안만
먹으면 몸이 가벼워지고 기운이 왕성해진다. 다시 100일을 마시면 얼굴이
고와지고 흰 머리털이 다시 검게 되고, 빠졌던 이가 다시 나서 신선처럼
되는 것이다.”
∘ 특주, 호산춘
• ‘산사춘’(山寺春)이라는 술이 있다. 한자대로 풀이하자면 ‘산사의 봄’이라는
뜻이니, 고요하고 평화로우면서도 만물이 기지개를 켜고 생동 하려는 산뜻한
느낌을 준다. 산사춘을 만든 술 회사가 그러한 이미지를 술에서 뿜어져나오 게 하기 위해 그 이름을 지었을 것이나, 사실 춘(春)은 춘주(春酒)라 하여
중국에서 아주 좋은 술을 가리키는 글자이다.
한글로 ‘술’이라 함은 ‘알코올이 함유되어 마시면 취기를 느끼게 하는 모든
음료의 총칭’이다. 또 그 제조기법으로 정리하면 ‘곡류나 과일. 식물의 열매,
잎, 줄기, 뿌리 등을 발효시켜 뽑아낸 알코올 함유 액체’가 진정한 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자에서는 우리가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주(酒)만이
술의 총칭이 아니었다.
주(酒)는 발효시켜 1차로 걸러낸 술을 말하며, 주(酒)를 한번 더 덧술해 순후 한 맛을 내게 한 술을 두(酘)라고 불렀다. 그리고 두(酘)를 한번 더 덧술해
맑고 그윽한 맛을 내개 한 술을 주(酎)라고 했던 것인데, 이 주(酎)를 고상한 표현으로 춘주(春酒)라 한 데서 춘(春)이 술의 특품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 소동파의 시문집 <동파지림>에 의하면, 중국 당나라 때에 이화춘(梨花春), 토굴춘(土窟春), 석동춘(夕凍春)등의 술이 유명해 웬만 한 술에는 모두 춘(春)자를 붙이게 되었다고 하며, 여기에서 유래해 우리나라 에서도 서울의 약산춘, 평양의 벽향춘, 여산의 호사춘 등 춘(春)자 붙은 술들 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중에서 호산춘(壺山春)은 전라북도 여산(지금의 익산)에서 나오던 특주인
데, 여산이 옛날에는 호산(壺春)으로 불렸기 때문에 ‘호산춘’이 된 것이다.
조선조 숙종 시대의 실학자 홍만선이 지은 <산림경제>는 호산춘의 주조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백미 한말 닷되를 가루내어 죽을 만들어 식힌 후, 누룩가루 두되와 밀가루
두되를 넣어서 항아리에 담아 우선 술밑을 빚는다. 13일이 지나서 백미 두말
닷되의 죽과 누룩가루를 넣어 잘 저어줌으로써 첫째 덧술을 한다. 그리고
13일이 지나서 다시 백미 다섯말의 밥 또는 백설기와 누룩가루 두되, 밀가루 한되로 두 번째 덧술을 한다. 이렇게 하면 두세달 동안 술맛이 전혀 변하지
않는다.”
호산춘은 17세기 말엽에 저작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방문>에도 소개돼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300년 이전부터 주조되어 특주로 이름을 날렸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호산춘은 민간에서 사사로이 술을 빚지
못하도록 엄히 단속했던 일제하에서도 약간은 묵인됐으나 근래에 그 명맥이 끊겼다.
익산 출신으로 국문학자이자 시조시인인 가람 이병기 선생도 즐겨 마셨다고
하는 명주 호산춘이 새로이 탄생했다. 화곡주가에서 옛날의 세 차례
덧술법을 고집하며, 여기에 효모와 기능성 보강 차원에서 능금나무과에
속하는 산사(山査)열매와 오미자, 당귀 등의 약재를 넣어 단맛, 쓴맛, 신맛이 어우러지는 21세기판 ‘호산춘’을 개발한 것이니, 술꾼을 위해서나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면에서나 참으로 호쾌한 일이다.
∘ 장보고와 유자술
• 얼마 전 인기리에 막을 내린 <해신>의 주인공 장보고의 삶은 말 그대로
드라마틱하다. 철저하게 신분제 사회를 유지한 신라 땅에서 한미한 평민
출신인 장보고가 제 뜻을 펴고 살아가기는 너무나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나라에 건너가 생활하다 당나라 군대의 장교가 되고, 자연스레
당나라 지방군벌들의 속성과 군대양성법을 배우게 된다.
이 무렵 당나라나 신라 모두 중앙권력이 쇠퇴해, 흉년과 기근이 들면서 각지
에서 도적이 횡행했다. 바다에서도 해적이 신라 해안에 출몰해 많은 주민들 을 붙잡아가 중국에 노예로 팔았으며, 부근을 왕래하던 무역선도 자주 해적 의 습격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보고는 신라인에 대한 해적의 노략질 에 분노했고, 스스로 해상권을 통괄해 국제무역을 장악함으로써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볼 야망을 가지게 된다.
마침내 장보고는 당나라 군대의 별 볼일 없는 벼슬을 버리고 신라로 돌아와
지금의 완도에서 지방민을 규합, 1만여명의 군대를 거느리게 된다. 완도에
건설된 청해진은 장보고를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세력의 거점이었다. 흥덕왕 이 그에게 내려준 ‘청해진대사’라는 벼슬도 신라의 관직 체계에는 없는 별도 의 직함이었다는 점에서, 비록 말기이기는 하지만 우리 역사의 보통국가에서
존재한 최초의 군벌이 장보고인 것이다.
이후 장보고는 당나라, 일본과의 국제무역으로 막강한 부를 쌓고, 또 이 부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증대해 신라의 왕위계승 분쟁에도 적극 관여하는 등
중앙정치까지 좌지우지하게 된다. 그러나 장보고가 중앙정부를 위협하자
귀족들은 장보고의 부장을 매수, 암살하게 된다. 장보고의 피살 뒤 청해진
세력은 얼마간 더 유지됐으나 곧 중앙군의 토벌을 받아 완전 궤멸되고
말았으니, 이로써 동북아의 해상을 주름잡았던 장보고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청해진은 지금으로 보면 중계무역항이었다. 구리거울, 비단, 금은세공품,
모직물 등의 신라 물품과 향료, 염료, 안료 등 당나라를 통해 들어온
동남아시아, 서아시아 방면의 물품, 피혁제품, 문방구류 등이 당나라, 신라, 일본 사이에서 거래되고 있었다. 이때 장보고가 중국에서 가져온 물품 중에 유자나무가 있었다. 장보고는 이 유자나무를 자기의 거점 지역인 지금의
경남, 전남 해안에 널리 심게 했는데, 이로써 오늘날 남해, 거제, 통영, 고흥, 완도, 진도, 장흥 등지가 유자의 특산지가 된 것이다.
일찍이 남해에서는 토산품으로 유자술을 개발했다. 1924년에 발간된 <조선 무쌍식요리제법>에 의하면 “유자를 술에 넣으면 맛이 시기 쉬우니 껍질만
벗겨 주머니에 넣어 독 속에 손가락 높이만큼 달면 향취가 기이하다. 만일
껍질을 술에 넣으면 얼마 못 되어 술이 시어서 못 먹는다”하였다. 술독에
유자껍질을 매달아 그 향기를 술에 배게 하는 조상들의 풍류가 참으로 멋져
보인다. 6월초 몇몇 분들과 함께 남해에 간 길에 유자술 ‘술익는 유자마을’을
마셔봤는데, 그 달콤새콤한 맛이 꼭 주스나 칼피스 같았다. 맛이 좋아 몇병
사가지고 와 냉장고에 넣어두고 뻔질나게 꺼내 마시니 시원하면서도 적당한 취기에 기분이 짱이다. 독주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좋은 술이다.
∘ 얼마나 마시면 취하나
• 큰딸애가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어느 날 아침 밥상에서 나에게 물었다.
“아빠, 술을 몇잔 마셔야 취하는 거에요?” 신입생 환영회다, 고등학교
동문회다, 연일 친구들과 어울리며 난생처음으로 소주잔을 입에 댄 모양인데, 술 좋아하는 아빠를 닮아서인지 소주 한병 이상을 마셨는데도 정신이 말짱하 다는 것이다.
“음, 그건 취할 때까지 마셔봐야 아는 거다” 동문서답 같은 내 대답에 아내
와 딸 모두 박장대소했지만, 모르시는 말씀. 이것은 우문에 대한 현답이다. 곧 취하기 직전까지 마신 술의 총량을 자기 주량이라고 한다면, 주량은
체질과 체격, 나이와 성별에 따라 각각 다를 수밖에 없으니, 내가 딸애가
취할 때까지 마신 술잔을 옆에서 세어보지 않는 이상 딸애의 주량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주량에 대해 <사기> 골계열전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순우곤은 제나라
위왕의 신하였는데, 어느 날 초나라가 제나라를 침공해왔다. 위왕은 다급한
나머지 순우곤을 시켜 조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조나라 왕이 정병 10만명을
보내자 초나라가 군사를 이끌고 물러가버렸다. 위왕이 크게 기뻐하며 순우곤 을 불러서 술을 내렸다.
“경은 얼마나 술을 마셔야 취하오?”
“신은 한 말을 마셔도 취하고, 한 섬을 마셔도 취합니다”
“경이 한 말을 마시고 취한다면 어찌 한 섬을 마실 수 있소?”
“대왕이 계신 앞에서 술을 내려주신다면 법을 집행하는 관원이 곁에 있고
사관이 뒤에 있어서 신이 두려워하여 엎드려서 마시게 되니, 한 말을 넘지
않아서 곧 취하게 됩니다. 만약 어버이에게 귀한 손님이 있어 신이 옷깃을
바르게 하고 꿇어앉아 앞에 모시고 술을 대접하면서, 때로 나머지 술을 받고 술잔을 받들어 손님의 장수를 빌어 자주 몸을 일으키게 되면 두 말이 지나지 아니 하여 곧 취하게 됩니다. 만약 사귀며 놀던 벗과 오래 서로 보지 못하다 가 졸지에 만나게 되면 즐거워서 지난날의 일들을 말하고 사사로운 정회를 펴게 되니 대여섯 말을 마시면 곧 취합니다. 만약 마을의 모임에서 남녀가 섞여 앉아 서로 상대방을 머물러서 술을 돌리고, 쌍륙과 투호를 벌여서 상대 를 구하고, 남녀가 손을 잡아도 벌이 없고, 눈이 뚫어져라 바라보아도 금함이 없으며, 앞에서는 귀고리가 떨어지고 뒤에서는 비녀가 어지러이 흩어지는
경우면, 신은 이런 것을 좋아하여 여덟 말 정도를 마실 수 있으며, 두세번
취기가 돌 것입니다. 날이 저물어 술자리가 파하게 됩니다. 술병을 모으고
자리를 좁혀서 남녀가 동석하고 신발이 서로 뒤섞이며, 술잔과 그릇이 어지 럽게 흩어지고 마루 위의 촛불이 꺼집니다. 주인이 신만을 머물게 하고 다른 손님은 배웅합니다. 엷은 비단 속옷에 손이 닿으면 가볍게 향기가 움직입니 다. 이런 때를 당하면 신의 마음이 가장 기뻐지며, 한 섬은 마실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러므로 ‘술이 극도에 이르면 어지럽고, 즐거움이 극도에 이르면 슬 퍼진다’고 하는데, 모든 일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곧 사물이란 극에 이르면 안 되며, 극에 이르면 반드시 쇠한다는 것을 들어 서 주색을 좋아한 위왕을 넌지시 경계한 것인데, 이로부터 위왕이 밤새워 술
마시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 수작 부리지 말자
• 고려조의 문신 윤관(尹瓘)은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개척한 사람이다. 윤관 은 여진과의 첫 전투에서 패하여 저자세의 강화를 맺고 돌아온 뒤, 그 패인 을 정확히 분석, 보병 중심의 고려군에 비해 기병 중심의 여진군이 월등히
우세함을 파악하고, 기병인 신기군과 보병인 신보군, 기타 특수군을 조직했 다. 그리하여 1107년 스스로 원수가 되어 정벌에 나서 일거에 여진을 쫓아내 고 우리 민족의 영역을 청천강 이북까지 넓혔다.
그러나 고려의 정벌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여진은 항쟁을 계속하는 한편,
9성을 돌려주고 생업을 편안히 해주면 대대로 조공을 바치겠다면서 애걸했 다. 고려는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지키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무리한 군사 동원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나서 조정에서도 화평론이 대세를 이루 게 되었다. 이에 9성을 여진에 돌려주기로 결정하고 철수했다. 이렇게 정세가 바뀌자 윤관은 패전의 죄를 뒤집어쓰고 관직과 공신호를 박탈당했으니, 민족 영웅에 대한 대접이 매양 이 모양이다.
벼슬에서 물러난 윤관은 여진 정벌의 동지이자 사돈인 오연총과 작은 시내를
두고 살면서 종종 만나 술을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어느 날도 두사람은
제각기 집에서 담근 술을 들고 집을 나왔는데, 마침 소나기로 냇물이 넘쳐
흘러 건널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냇가 나무 등걸에 앉아 이편에서
“한잔 드시오”하고 머리를 숙이면, 저편에서도 한잔 마시고는 “한잔 드시오”
하고 머리를 숙이고 하여 가지고 간 술병이 다 비도록 권커니 작커니 했다는 이야기가 <고려사>열전에 나온다. 두 사람이 벌인 ‘수작’이 참으로 풍류스럽 다.
일본 정치인들이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며 망언을 내뱉고 있을 때, 이에 대해
북한은 “일제는 우리 조국의 영토를 넘보려는 개수작을 하지 말라”로 논평했 다. ‘수작’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른 사람의 언행을 업신여겨 일컫는 말’로
풀이된다. 또 ‘개수작’은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을 마구 지껄이는 언동’으로
풀이되니, 북한의 논평은 정말로 정확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윤관과 오연총이
어느 비 온 날 오후에 벌였던 수작은? ‘수작’은 한자로 수작(酬酌)이고, 그 뜻 은 ‘서로 술잔을 주고받음’으로 풀이된다. 이 풀이가 진화하여 ‘서로 말을 주 고받음, 또는 그 말’로 되고, 여기에서 다시 발전하여 ‘개수작’에서와 같은 수 작의 뜻을 갖게 됐다.
음주문화의 유형은 대개 세 가지다. 첫째, 자작(自酌)은 제 술잔에 술을 마시 고 싶은 만큼 따라 마시는 음주문화로, 개인주의가 일찍부터 발달한 서양인 들이 즐겨 사용하는 음주법이다. 둘째, 대작(對酌)은 중국이나 러시아, 동구제 국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음주법으로, 잔을 맞대고 건배를 외치며 마신다. 절대 잔을 돌리지 않는다. 셋째, 수작(酬酌)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음주문화다.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마시는 것이다. 신숙주의 손자 신용개처럼 술 마실 상대가 없자 국화 화분을 앞에 놓고 수작을 벌였다든가, 앞의 윤관처럼 냇가 를 가운데 두고 수작을 했듯이, 수작은 우리 선현들의 멋진 풍류였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냥 상대가 취해 나가떨어지게 하는 공격법으로 수작이 변질 됐으 니 술꾼들이여, 그런 수작은 이제 그만 부리자
∘ 건배를 조심해
• 건배를 영어로는 ‘토스트'(toast)라고 한다. 토스트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위하여!’처럼 음주자들이 술을 마시기 전에 잔을 높이 들고 외치는 건배사이 기도 하다. 왜 구운 빵을 뜻하는 토스트가 건배를 의미하게 되었을까? 지금
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옛날 유럽에서는 포도주 맛을 좋게 하기 위해 포도주 잔에 갓 구운 토스트 한 조각을 넣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유래해
그것이 건배 또는 건배사가 되었다고 한다.
음주 의식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것이 건배다. 음주자들은 건배에서
서로의 우정과 좋은 관계를 확인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확인을 통해 위협 적인 상황이 종료된 것으로 간주한다. 여기에서 술은 건배에 의해서 결속되 는 사람들의 공동체, 우정, 형제애를 보장하는 상징이 되고, 그 확인과 보장 의 매개체로서 신성시된다. 곧 고대 사회의 제의에서 술잔을 높이 들고 신과 소통하는 제사장의 신성한 행위의 속화된 형태가 이후에 건배로 남게 된 것 이다.
그러나 건배로 상징되는 공동체적 음주 의식은 기묘한 양면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건배는 음주자들의 형제애적 결속을 다지려는
목적을 가지지만, 이 관계에는 인간들 사이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통제,
의무 그리고 경쟁의 특성도 개입된다. 곧 이 결속의 의도와 주된 규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전혀 다른 돌발적인 상황을 만들기도 하는바, 건배하며
잔을 권했는데 거부하게 되면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지면서 의도했던
형제애의 결속은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배의 목적과 의도를 정확히 관철하기 위해서는 음주자들이
공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강을 위한 기원, 술을 시원하게 마시라는 촉 구, 특정한 집단이나 일이 잘되라는 염원 등 음주자들의 최대공약수적 함의 가 건배사로 무난한 것이다. 영∙미 계통의 ‘Good health!'(건강을 위하여),
‘Cheer up!'(기분을 내라), 프랑스인들의 ‘아보트르 상테!’(A Votre Sante, 당 신의 건강을 위해), 이탈리아인들의 ‘알라 살루테!’(Alla Salute),
스페인들의 ‘살루드 아모르 이페세스타스!’(Salud Amor Ypesestas, 당신의
건강과 사랑과 돈을 위해서), 북유럽인들의 ‘스콜!’(건강)이 건강을 위한 건배 사고, 잔을 비워 시원하게 마시라는 건배사로는 한국, 중국, 일본의 ‘건배!’(乾 杯, 중국말로는 간베이), 미국인들의 ‘보텀스 업!’(Bottoms up)이 있다. 또 제 식구 제 집단만 잘되기를 바라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위하여!’류 건배사도
유별나다.
건배한 뒤 술잔을 가볍게 입술에 대고 한 모금 마시는 이유는 혹시 술에
독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는 불신에서 비롯된 습속으로 보기도 한다. 일찍이 서양 사회는 유목과 교역이 빈번해 항상 낯선 사람과 공존해야 하는 문화이 기 때문에 상대방이 마시는 술과 똑같이 독이 없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건 배한 뒤 동시에 술을 마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술잔에 독이 들어 있지 않을 까만 의심하다가는 또 다른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7월 21일, 어느 자리에 서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은 건배하라고 따라준 맥주를 느닷없이 주빈에게
끼얹고는 잔을 던져 다른 참석자를 부상케 하였으니, 건배 때는 술잔뿐
아니라 상대방의 손놀림도 유심히 감시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