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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권 두 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총회 산하 8,300교회와 성도들에게 함께하시길 바랍니
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변치 않는 복음을 전하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닙니
다. 복음의 본질을 지키며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고민과 수고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누군가 복음을 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생
명을 낳는 것처럼 복음은 사람을 통해 전해집니다. 복음 증거를 위해 필요한 것은
복음의 열정으로 불타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입니다. 고린도전서 9:22에서 바
울은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
자 함”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다가간 것은 사도 바울에게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이해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들과
같아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
랑입니다. 우리 총회는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제98회 총회주제를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막 10:45)로 정하였습니다. 이 주제가 형식
적인 구호에 그치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실천되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주제연구위원회는 전 세대를 아우르며 사회의 각 영역을 포괄하도록 실천영역
4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을 구분하고 구체적인 실천목표도 정했습니다. 대표적인 주제 실천영역은 ‘하나님
사랑’,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 ‘섬김과 나눔으로 사랑’, ‘나라 사랑·자연 사랑’, ‘세계를 향한 사랑’, ‘다음 세대 사랑’ 등입니다. 각 영역에는 세부 실천목표가 제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실천목표 가운데는 교회가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심도 있게 고민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감당할 것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시작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절전운동이 그렇습니다. 3백만 성도가 가정과 일터에서 사용하지 않
는 제품의 플러그를 뽑으면 엄청난 양의 전기를 아낄 수 있습니다. 3백만 명이 합
심하면 단순히 전기를 아끼는 차원을 뛰어넘어 환경을 지키고 지구를 지키는 일이
됩니다. 이외에도 노인복지, 입양운동, 호스피스, 장기기증운동, 근검절약운동 등
의 실천목표도 제안했습니다.
주제연구위원회는 총회주제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주제해설서」와 함께 「주
제적용지침서」를 별도로 출판합니다. 이 지침서는 목회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작은 씨앗이 커다란 나무가 되는 것처럼 총회
주제에 따라서 여러 씨앗을 뿌리면 정한 시간이 되었을 때에 귀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이 「주제해설서」를 편찬하기 위해 수고하신 총회 주제위원회 황승룡 위
원장님과 여러 위원들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실무적인 차원에서 도와준
총회 직원들과 해설서 출판에 도움을 주신 한국장로교출판사 관계자들에게도 감사
를 드립니다.
2013년 9월 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김동엽 목사
발행사 5
발 행 사
제96회 총회는 향후 5년 동안 총회주제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역점을 두기
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제96회 총회는 “그리스도인, 세상의 소금과 빛”,
제97회 총회는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이라는 주제를, 그리고 제98회 총회는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막 10:45)로 주제를 정하였다. 총회주제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으로 결정한 것은 갈수록 다원화, 세속화, 사유화되어 가는
현대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 됨의 참 의미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이며,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깨닫고 삶 속에서 실천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다. 이렇게 할 때에 그리스도인 됨의 존재가치와 아름다운 삶이 성취될 수 있다.
제98회 총회주제인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을 사랑과 나눔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아가페의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이 사랑을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응답해야 한다. “누구든지 하나님
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
20). 이웃사랑의구체적표현은바로나눔이다. 사랑을나누는것은교회와그리스
도인의 본질적 사명이며 책임이다. 진정한 나눔은 의무나 책임감 때문이 아니라 하
6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나님이 베풀어 주신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과 기쁨으로 나누는 것이다.
우리 총회가 지향하고 있는 “치유와 화해의 생명공동체운동 10년(2012-2022년)”
역시 사랑 나눔 실천운동이다. 생명은 21세기 화두이고, 생명살림과 생명사랑은
복음과 하나님의 교회와 21세기의 인류 보편적 과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운동을
교회와 목회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사랑과 나눔이라는 주제에는 제98회 총회장으로 총회를 이끌어 가실 김동엽 목
사님의 삶과 뜻이 담겨 있다. 또한 연구위원들과 전문위원들의 헌신적 수고가 있었
다. 이 자리를 통하여 주제연구위원으로 수고하신 모든 분들과 원고를 집필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출판을 위해서 애쓴 한국장로교출판사 사장 채형
욱 목사와 모든 편의를 힘써 제공한 변창배 국장을 비롯한 총회 실무자 여러분들에
게도 감사를 드린다.
2013년 9월 일
총회주제연구위원장 황승룡 목사
차 례 7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제98회 총회주제해설서
C ‧ O ‧ N ‧ T ‧ E ‧ N ‧ T ‧ S
권두언 _ 3
발행사 _ 5
제1장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황승룡 / 8
제2장 주제의 성경적 이해 민경진 / 17
제3장 주제의 신학적 이해 김우철 / 23
제4장 주제의 교회사적 이해 안교성 / 30
제5장 우리가 사는 세상 이해 임성빈 / 38
:가속화되는 세계화 시대의 사랑 나눔을 위하여
제6장 오늘의 사회와 나눔의 생명선교 노영상 / 44
제7장 총회주제의 목회적 적용 홍성호 / 53
:목회 현장에서의 성경 읽기와 그 적용을 중심으로
제8장 주제와 목회 - 이 시대의 목회와 실천 조재호 / 64
제9장 주제와 교육 - 교회에서의 나눔 교육 박봉수 / 71
주제설교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김동엽 / 78
주 석 _ 84
역대 총회주제 _ 87
8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제1장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1. 들어가는 글
제96회 총회에서 향후 5년간 총회주제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관련하여 정
하기로 결의한 바 있다. 이 결의에 준하여 제98회 총회주제를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로 정하고, 주제성구로는 마가복음 10:45의 말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로 결정하였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
고 그 사랑을 나눔과 섬김으로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
이 가장 근본적인 과제라고 인식하여 본 주제를 선정하였다.
2. 한국교회의 진정한 문제
최근 들어 한국교회가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말들을 많이 하고 있다. 많은 이
들이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하는 중요한 척도 중 하나는 교세의 양적 감소이다. 한
국교회는 해방 이후 전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을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
다. 그러나 1970~80년대 교회 성장의 황금기가 지난 후, 교세가 정체국면으로 접
황승룡 목사
제1장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9
어들더니 최근 교인들의 수가 감소세로 돌아섰고, 교회들의 재정수입 역시 줄어들
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교세의 양적 감소가 한국교회에 위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심각한 위기라 볼 수 없다. 구약의 남은 자의 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는 강할 때보다 약할 때, 형통할 때보다 고난당할 때, 높아질 때보다는 낮아질
때 그 능력을 발휘해 왔다. 예로서 약 100년 전 그리스도인은 전체 인구의 1.5%
정도에 불과했지만, 누구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많은 일들을 행하였다. 일제시
대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16명이 그리스도인이었고, 3·1운동으
로 감옥에 투옥된 사람의 22%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기록을 통해, 우리는 양적 정체
나 감소만으로 교회의 진정한 위기를 말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척도는 최근 극성을 부리는 이단,
사이비들의 거센 공격이다. 최근 우리 교단을 비롯한 많은 개신교단들이 여러 이단
들의 거센 공격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단의 증가와 위협을 한국교회
의 진정한 위기라 말할 수 있을까? 이단, 사이비들이 성행하는 것으로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할 수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로 지난 2,000년
동안 교회는 항상 여러 이단들의 위협을 받아 왔다. 물론 이단들의 위협으로부터
교회를 지켜 내는 것이 무척이나 긴급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단지 이것만으로 한국
교회의 진정한 위기를 말할 수 없다.
그보다 우리가 깊이 걱정해야 할 한국교회의 진정한 문제는 교회에 대한 신뢰도
가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최근 실시한 조사에서
교회에 대한 신뢰도는 18.9%로 다른 종교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준을 보였다. 교
회에 대한 신뢰도가 이처럼 낮아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 원인은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교회가 영적공동체로서 귀감이 되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의 본질에 충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세상이 그리스
도인에게 기대하는 사랑과 섬김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까닭이다. 다시 말하여,
교회가 기초한 본질,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인 십자가의 신앙이 약화되고
그 의미가 퇴색되었기 때문이라 단언할 수 있다.
3.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교는 무엇보다도 사랑의 종교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그리스도교의 가
장 중심된 상징인 십자가에 잘 드러나 있다.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로 요약될 수
10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있다. 성육신하신 순간부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순간까지 예수님의 삶은 십자
가를 향한 여정이었다. 십자가의 의미는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계시적 측면이요, 다른 하나는 그 하나님의 사랑
에 응답하는 응답적 측면이다.
계시적측면에서십자가는바이스(Johannes Weiss)나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같은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실패나 패배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
없다. 주님의 십자가는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데 첫째는 형벌의 대속적
인 의미(atonement)에서이고, 둘째는 형제애(brotherhood)의 의미에서이다.
먼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은 죄의 형벌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 예수
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들이 져야 할 죄의 형벌을 대
신 지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해방의 선언이며, 사형 언도를 받은 자들에 대한 사면
이다. 마가복음 10:45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
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
려 함이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으로써 영적인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인
간은 이제 주님께서 ‘중보자’(the Mediator)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
심으로 다시금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성경은 십자가를 하나님
의 사랑의 계시요, 상징이라고 말한다. 요한1서 4:10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계시적인 측면에서 십자가는 둘째로 형제애적인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완
전한 신성과 더불어 완전한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형제를 위해 죽음을
택한 형제애의 상징이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5:7~8에서 이렇게 말한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의인도 아니고, 선인도
아닌,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다. 연약하고, 경건하지 못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웃을 위해 자
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은 형제애를 보여 줌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깊이 있게 묵
상하고 있는가? 얼마나 그 사랑에 감격하고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얻
제1장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11
은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
장 우선적으로 회복해야 할 것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감동을 회복하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삶
응답의 측면에서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깊이 경험한 그리
스도인의 결단과 헌신을 의미한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그의 책 「나를
따르라」에서 ‘값싼 은혜’(cheap grace)와 ‘값진 은혜’(costly grace)를 비교하였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이 죄의 사면이 가능하다는 설교이며, 죄의 고백 없이 베푸는
성만찬이요, 순종이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 계신 성육신 예수 그리스
도 없는 은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이유로 스스로
위로를 받고 만족하는 데서 그치는 은혜이다. 이와는 다르게 ‘값진 은혜’는 하나님
이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며, 세상을 위하여 일하는 은혜이며, 십자가를 가슴에 품
고 제자의 길을 걸어가게 하는 은혜인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이 베푸시는 아가페의 사랑이며, 그분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와 동시에 이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며, 그리고 행동하게 하는 생명력 있는 은혜이다. 이 은혜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에게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결단하고 헌신하게 만든다.
사도 요한 역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해야 함을 분명하게 말한다. “사랑하
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
하도다”(요일 4:11). 이 구절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음 부분은 그 사랑을 받은 우리
가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메시지는 하나님
의 사랑을 보고, 느끼고, 깨닫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이제 자신의 삶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에 대한 응답은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한 율법교사의 대화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떤 율법교사
가 예수님께 묻는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율법교사
에게 스스로 대답하도록 유도하셨고, 율법교사는 주저 없이 이렇게 대답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12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주님께서는 그의 대답이 옳다
고 인정하신다.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굳이 논쟁의 여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칼
뱅의 「기독교강요」에 따르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무엇보다도 거
듭난 자로서의 거룩한 삶을 사는 것,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 우리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구하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 주님이 주
시는 복을 의지하는 것 등을 말한다. 비록 정의하는 이들 각각의 강조점과 정의가
다를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율법교사도, 예수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논쟁의
여지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있었다. 그래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는다. “그러
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5.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강조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는 것은 죄라는 사실이다. 나의 도움이 필요
한 사람을 보고 외면했다면 그것은 분명한 죄이다. 내가 남을 상하게 하지 않거나,
남의 물건을 빼앗지 않은 것으로만 죄 없음을 말할 수 없다. 주님은 죄를 짓지 말라
는 소극적 윤리를 넘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말라는 적극적 윤리를
말씀하고 계신다. 누가복음 16장에는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나온다. 도
대체 그 부자는 어떤 죄를 저질렀기에 그 영혼이 불꽃 속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을
까? 물론 그에게 여러 가지 죄가 있을 수 있지만, 이 비유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
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부자가 무관심하고, 무자비했다는 것이다. 그 부자는
나사로의 고통을 외면했다. 그는 자기 집 대문간에서 개들이 온 몸에 헌데를 핥으
며, 먹다 버린 쓰레기나 뒤져 먹고 살던 거지 나사로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고,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하지 말고,
사랑을 나누며 베푸는 적극적 윤리의식을 가져야 한다.
둘째, 이웃에 대한 시각을 바꾸는 것이다. 율법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제1장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13
라고 묻는다. 그는 분명 자기지향적(self-oriented) 이웃관을 가지고 있다. 내가
도와줘도 될 사람들인지 따져 보고 돕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비유에 나오는
두 사람, 제사장과 레위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이방인들이나 율법에서 죄
인이라 여겨지는 사람들(세리, 창기, 그리고 심각한 병자들)은 도울 수 없었다. 그
들은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그 사람을 도와도 되는지 여부를 따진 후 도울 것인가
를 결정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가 단지 유대인들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일일
까? 오늘 우리들 역시 우리들의 시각에서 이웃을 평가하고 있지는 않은가? 정치인
들은 자신들에게 정치적으로 이익이 되는 사람들만을 그들의 이웃이라고 생각한
다. 경제인들은 자신들에게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는 사람들만을 그들의 이웃이라
고 생각한다. 우리 역시 우리에게 도움이 되거나, 우리와 어울릴 수 있는 사람만을
우리의 이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라! 우리가 어울릴 만한 이
웃들은 실상 우리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다. 세상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외면하려 하고, 반면 도움이 필요치 않은 사람과
는 이웃이 되려고 한다.
하지만 주님의 이웃관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주님은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하
신다.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인가?” 타자지향적(other-oriented) 이웃관이
다. 그 사람이 나와 어떤 관계이든 상관이 없다. 설사 그 사람이 나와 적대관계에
있다 하더라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내가 도와주어야 할 나의 이웃인 것이다. 원수라
도 주리면 먹이고, 목마르면 마시게 해야 하는 것이다(롬 12:20). 서로 배타적이
고, 적대적인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도움이 필요하기에 강도 만난 유대인의 이웃
이 되어 그에게 사랑을 베푼 사마리아인처럼, 우리도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라면
누구든지 나의 이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나의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해야 한다.
6.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
더욱 충격적인 주님의 이웃관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나타난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
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주님
은 세상에서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신다. 우리 주위에 있는 작은 자들을 섬기고 나누는 것을
14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곧 주님 자신을 섬기고 자신에게 나누어 드린 것으로 여기신다는 것이다.
양과 염소의 이야기는 단순히 성경에 나오는 비유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오늘
날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전 세계에서 8억 명이 넘는 이들이 먹지 못해 심각한 영
양실조를 겪고 있으며, 그중 3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극심한 기아로 허덕이고 있
다. 매일 25,000명이 기아로 사망하고 있으며, 1초에 다섯 명 꼴로 어린아이들이
생명을 잃는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는 먹을 것이 넘쳐 나고 있다. 2010년을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1년 동안 지출한 군사비가 약 1,600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반면에 세계의 기아를 해결하는 데에는 매년 20~30조 원 정도면 가능하다고 한다.
약 2%의 군사비만 줄여도 세상에서 굶주려 죽는 사람이 없어진다는 분석이다. 그
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죽이는 살상무기를 만들어 내는 데는 열성이지만, 사람
을 살리는 일에는 너무나 인색하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며, 빈곤한 우
리의 마음이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은 양보다 염소의 모습에 가깝지 않을까? 내가 손해 본 것이
나 불편했던 것은 기억하지만 내가 남에게 끼친 손해나 불편은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 아프고 괴로웠던 것은 강조하지만 내 주위의 사람이 아프고 괴로워하
는 것은 보지 못하는 우리. 내가 상처받은 것은 기억하지만 내가 남에게 상처 준
것은 잊어버리는 우리. 내가 도움을 베푼 것은 기억하지만 내가 지나온 세월 동안
받아 온 그 수많은 사랑의 빚은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 이기적이고 자기만을 생각
하는 염소와 같은 모습이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주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신다. 우리 안에 영으로 함께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의 모습으로 오신다. 때로는 노숙자의 모습으로, 병든 환자의
모습으로, 갈 곳 잃은 실업자의 모습으로, 길을 잃은 아이의 모습으로, 상처 입은
성폭력피해자의모습으로, 부모잃은소녀가장의모습으로, 차별받는이주노동자
의 모습으로, 사회적 편견에 내몰린 다문화가정의 모습으로, 몸과 정신의 장애를
가진 장애인의 모습으로, 기아와 불의에 신음하는 북한동포의 모습 등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사랑과 나눔을 요구하신다.
교회는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타자를 위해 존재하
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마음과 몸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더불
어 그분이 만드신 창조세계와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며 나누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제1장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15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레 19:9-10)고 명하
신 구약의 율법과,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었던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공동체
의 사회적 본질이 사랑과 나눔에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교회는 결코 스스로
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처음부터 이웃을 위한 그리고 세계를 위한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가 사랑을 나누는 것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다.
주님은 오늘도 작은 자의 모습으로, 찢기고 다친 이웃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
신다. 이제 우리가 주님이 베푸셨던 그 사랑에 보답할 차례이다. 작은 자의 모습으
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때이다.
7. 나가는 말:사랑의 나눔으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정의하는 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주님의 표현은 ‘주님을 따르는 자’ 곧 ‘제자’이
고, 주님은 그 제자의 정체성을 사랑으로 정의하신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
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우리는 주
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기에 또한 사랑할 수 있다. 사랑! 여기에 참 제자도가 있
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지난날 한국교회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항쟁을 통해서, 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활동을 통해서, 병원의료사업과 구제사업을 통한 사회복지활동을 통해서, 민
주주의운동과 양성평등운동과 같은 인권운동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복음전파에
앞장서는 선교활동을 통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해 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한국교회는 단순한 반감 수준을 넘어 세상의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웃을 사랑하고 섬겨야 할 교회가 이웃으로부터 외면받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이러한 기조를 단지 교회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일부 사람들의
편견이나 곧 지나갈 일시적 유행이라 볼 수는 없다.
지금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철저하게 자신을 반성하고 새로운 각성이 필요한
때이다. 교회 안팎으로 개혁에 대한관심이그 어느때보다높아진 오늘, 먼저신앙
적으로는 교회가 둘러쓰고 있는 물량주의, 세속주의, 이기주의(개교회주의)와 같은
어떤 형식적인 위선의 껍데기라도 단호하게 벗겨 내야 하며,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16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우리의 무능력을 고백하고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는 자기부인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실천적으로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우리 이웃들의
고난에깊은애정과관심을가져야하며, 총회산하65개노회와8,500여개의교회
와 285만 성도들이 모두 함께 힘을 모아 이웃들을 위한 사랑과 나눔을 실천해야 한
다. 우리는 뜨거운 가슴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이웃이 되어 주고, 그들의 생명
을 풍성하게 만드는 사명과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 총회가 지
향하고 있는 “치유와 화해의 생명공동체운동 10년(2012-2022년)”에 적극 참여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의 미래는?” 이 질문의 답은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앞으로 선택
할 태도와 실천에 달려 있다. 한국교회가 위기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도리어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한국교회가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면, 사랑으
로 새롭게 거듭날 수 있다면 한국교회의 앞날이 결코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다. 오
늘날 교회가 세상 속에서 영적공동체로서의 권위를 회복하고 신뢰를 회복하는 유
일한 길은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
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
9)라는 말씀처럼, 오늘 우리가 심는 사랑과 나눔의 씨앗이 자라 한국교회의 영적
본질과 신뢰성의 회복이라는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제2장 주제의 성경적 이해 17
제2장
주제의 성경적 이해
<주제>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주제성구>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참고할 말씀>
(1) 구약의 아가서
(2) 마태복음 18:22~35
1. 들어가는 말
제98회 총회주제는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다. 생각해 보면, 부
연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이야기이다. 세상 사람들도 기꺼이 사랑을 나누는데, 하
물며 우리 그리스도인은 두말할 나위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삼 생각해 보면,
부끄럽다. 사랑을 나눔에 있어 응당 상대적 우위에 있어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만 우리의 자화상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이번 총회주제는 우리에게
먼저 ‘자성’을 촉구한다. 하지만 자성이 중요하되, 자성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민경진 목사
18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자성의 목적은 변화이다. 곧 자성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제 예전보다 한껏 더 사랑
을 나누는 일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제97회 총회주제가 작은 이들
의 벗이 되자는 ‘다짐’에 방점이 있었다면, 이번 주제는 다짐을 넘어 사랑을 ‘실천’
하자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을 나누되, 일회성이 아니라 좀 더 효율적이고 지속적인
사랑 나눔을 위해 점검해 볼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왜 사랑을 나누어야 할까?”
또한 “사랑을 나누되, 누구처럼, 어떻게 사랑을 나누어야 할까?” 성경은 이에 대해
어떻게 답하고 있는가?
2. 사랑을 ‘입은’ 그리스도인
우리들은 마땅히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왜 그럴까?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받았는가? 부모와 가족, 연인, 친구로부터 받았다. 하지만 이들로부터
받은 사랑은 ‘이유 있는’ 사랑이다. 사랑할 만하니까 사랑을 준 것이다. 내 자식이
니까 사랑하고, 내 연인이니까 사랑하고, 내 친구니까 사랑을 준 것이다. 다른 사
랑이 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다. 생명을 부여받았고, 이 창조세계 속에 살고
있으며, 또한 영생을 희망하며 살고 있다. 우리가 사랑을 받을 만하기에 주신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이유 없는’, 무조건적 사랑이다. 하나님의 이 위대한 사
랑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책이 구약성경의 아가서이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이다. 솔로몬이 누구였는가? 이스
라엘 왕이요, 최고의 지혜자였다. 잠언 삼천개를 줄줄 말했으며, 노래도 일천다섯
을지었다고했다. 다윗으로부터물려받은부도풍부했었다. 권세, 지성, 감성, 경제
력어느것하나부족한것이없는사람이었다. 요즘식으로말하면슈퍼갑(甲)이다.
반면, 술람미여인은 누구였는가? 산골짜기의포도원지기였다. 야외에서늘 일해야
했기에피부도까칠하고, 몸을가꿀여유가없어그야말로인간적인볼품이전혀없
는여인이었다. 하지만무슨일이일어났는가? 전혀어울리지않았고, 어울릴수없
었던이둘사이에사랑이‘시작’됐고, 사랑이‘성장’했으며, 결국사랑이‘완성’된다.
하늘과 땅 만큼이나 먼 둘 사이의 신분의 격차가 사랑으로 인해 깨진 것이다.
아가서에 묘사된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의 사랑 이야기를 비유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의 사랑의 대
상이 될 수 없었지만 솔로몬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시작되어 결국 가장 아름다운
제2장 주제의 성경적 이해 19
사랑의 결실이 맺어졌듯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그렇다는 것이다. 죄악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지만(사 59:2),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들을 잊지 못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이
다. 버림 받아 마땅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오히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허무
한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넘치는 사랑
을 확증해 주셨다는 것이다.
3. 사랑을 ‘나누는’ 그리스도인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되, 넘치게 받았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롬
5:8), 심지어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였지만(롬 5:10)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사
랑해 주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에게 주신 이 과분한 사랑
을 누리고만 있으면 될까? 이 시점에서 재고해 볼 말씀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마 18:22-35)이다.
한 임금이 있었다. 시간이 되어 결산할 때가 됐다. 결산하던 중, 한 종이 일만
달란트나 빚을 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됐다. 갚으라는 통보를 받은 종은 도저히 갚을
수 없어 주인에게 와 엎드려 절하며 시혜를 청한다. 이를 불쌍히 여긴 주인은 일만
달란트 빚을 모두 탕감해 준다. 그 후, 종이 나와 길을 가다가 자기에게 일백 데나
리온 빚진 자를 만난다. 종은 그를 만나자마자 빚을 갚으라며 해코지를 한다. 빚진
자가 엎드려 종에게 간구했지만, 결국 감옥에 가두고 만다. 종의 이러한 행실이 곧
바로 주인에게 알려졌다. 주인은 종을 불러 역정을 내며, 탕감받았으니 다른 이에
게도 은혜를 베푸는 것이 마땅한 것이 아니냐고 책망한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우리가 용서받았으니, 우리도 남을 용서해야 함을 교훈한
다. 다른 말로 하면,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를 나누어야 하며, 사랑을 받았으니 사
랑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종이 주인에게 빚진 것이 일만 달란
트라고 했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에 해당하고,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
루 품삯이므로, 일 년에 300일 가량 일한다고 계산하면 약 20년 동안 하나도 쓰지
않고 모은 액수이다. 그런데 종이 빚진 액수는 ‘일만’ 달란트이니, 20만 년 연봉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다(연봉 3,000만 원으로 계산할 경우 6조 원에 해당). 반
면, 일백 데나리온은 일만 달란트의 60만 분의 1에 해당된다(약 1천만 원).
이 비유는 이 종의 행실에 대해 꾸짖는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았다면 그와 같
20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은 처신은 옳지 않다는 지적이다. 물론 6조 원이나 되는 큰돈을 탕감받았는데, 겨
우 1천만 원에 대해 인색했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본문에서 이 종
의 행실을 문제 삼는 것은 받은 사랑을 자기만 누리고, 남에게 나누지 않았기 때문
이다. 만일 그 종이 주인에게서 받은 사랑을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나누었다
면, 추정컨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 역시 받은 사랑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을 ‘베푸는’ 연쇄작용이 계속된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지겠는가? 이런 점에서 볼 때, 종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인
해 주인이 베푼 사랑이 종 한 명을 넘어가지 못하고 끊긴 것이다.
생각해 보자. 우리는 모두 사랑을 받았다. 거저 받았고, 과분하게 받았다. 귀한
것일수록 거저 받았다. 생명도 거저 받았고,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도 거저 받았다.
더 나아가 술람미 여인 같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은 사
랑을 받았다. 일만 달란트보다 더 값진 사랑을 받은 것이다. 거저 받은 사랑이니,
우리도 거저 나눠 주어야 함은 자명하다.
4. 사랑의 ‘본’(本)이신 그리스도
받은 사랑을 나눠야 함을 위에서 살펴보았는데, 질문이 있다. ‘어떻게’, ‘어느 정
도’까지 나눠야 하는가? 이번 총회 주제성구인 마가복음 10:45은 이에 대한 답변
을 주는 본문이다.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시기에 해당한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
에게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는 고백을 들
으신 후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 수난예고를 하신다. 그 직후, 여리고를 거쳐 예루
살렘에 입성하여 마지막 주간을 보내게 되는데, 본문은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예고
기사(막 10:32-45)의 마지막 구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기적으로 볼 때, 이
구절 안에는 예수님의 사역이 총체적으로 농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곧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수난당하고, 이방인들에
게 능욕당하실 것을 예고하신다. 엄숙한 상황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훗날 좋은 자리를 달라며 이기적인 요구를 한다. 이 말을 들은 다른 열 제자
들이 분개하자, 제자들을 향해 촌철살인의 말씀을 남기신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
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
려 함이니라”(막 10:45).
제2장 주제의 성경적 이해 21
무슨 말인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해 성경은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가령, 마태는 예수께서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
고’,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전한다(마 4:23). 누가는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께서 오신 목적을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함이라고 전한다(눅 4:18). 이 말씀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관찰한 마태와 누가, 곧 제3자의 입장에서 요약한 것이다. 하지만
주제성구인 마가복음 10:45은 세상에 오신 목적을 예수님께서 직접 밝히신 것이
다. 더군다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본문의 맥락이 예수님의 공생애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시기라는 점에서 이 구절은 더 중요하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단언하신다. 곧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오셨다”는 것이다. ‘섬
김’으로 당신의 정체성과 세상에 오신 목적을 요약하신 것이다.
본문은 ‘섬김’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로 디아코네오(diakone,w)를 사용하고 있
다. 이 단어의 기본 의미는 ‘식탁에서 시중들다’(눅 10:40; 요 12:2)인데, 신약
성경에서는 이 의미만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가령, 바울이 예
루살렘 교회에 가난한 이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이 연
보한 물질로 섬길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롬 15:26-27). 중요한 것은 이
단어가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곧 ‘섬기는 자’가 있고, ‘섬김을 받는 자’
가 있다.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자가 있고, 시중을 받는 자가 있다. 물질로 섬기는
사람이 있고, 섬김을 받는 사람이 있다. 당연히 누구나 섬김을 받는 자리를 선호한
다. 어린아이부터 노년까지 누구나 그 자리에 있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자가온것은섬김을받으려함(디아코네테나이, diakonhqh/nai)이 아니라, 섬기
기 위함(디아코네사이, diakonh/sai)”임을 분명히 하신다. 이 섬김은 종의 신분이
기에 어쩔 수 없이 섬기는 것을 뜻하는 둘류오(douleu,w)나, 삯을 받으려는 목적
때문에 섬기는 라트류오(latreu,w)와는 다르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접대하듯이(눅
10:40), 바울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기쁜 마음으로 돕듯이(롬 15:26-27), 자발
적으로 상대방을 섬기는 것을 뜻한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좀 더 나아가 섬기되, 자기 목숨을 걸고 섬기셨다. 섬기는
자의 자세와 각오를 보여 주신 것이다. 아르바이트하듯, 혹은 적당한 관계 유지를
위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도 줄 수 있을 만큼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섬겨야 하는가? 본문에 의하면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라는 표
현이 나온다. 이 ‘많은 사람’이란 ‘한 명’과 대조되는 단어이다. 곧 섬김의 자리에
22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있는 한 분, 예수님을 제외한 나머지 전체를 가리킨다. 한편 ‘대속물’은 헬라어로
‘루트론(lu,tron)이라고 하는데,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코페르( כפר )이다. 이 코페르’는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나(출 21:30),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내는 돈(민 35:31-32)을 가리킨다. 요컨대,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이들이 내야 하는 돈을 가리킨다. 곧 예수님은 섬기시되, 죽을 처지에 있는
세상 만민을 위해 기꺼이 당신의 목숨이 대속물이 되게 하시는 섬김의 본을 보이셨다.
정리해 보자.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명료하게 한 단어로 밝히셨다. 즉, ‘섬김’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섬김’ 때문이다. 이 ‘섬김’(디아코네오)
은 신분이 종이기에 어쩔 수 없이 섬겨야 하거나 대가를 바라고 일하는 섬김이 아
니라, 자발적 섬김이다. 섬김은 응당 타인과의 관계를 전제한다. 섬기는 사람이 있
고, 섬김을 받는 사람이 있다. 누구나 섬김을 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섬
기는 자’임을 분명히 하셨다. 섬기되, 죽기까지 섬기셨다. 누구를 위해 섬기셨나?
죽어 마땅한 이들, 죽을 운명에 있던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과 ‘무관한’ 이들
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나누는 사랑을 보이셨다.
5.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섬기셨다. 말씀을 전파하시고, 약한 자들을 치료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또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기까지 세상을 섬기셨다. 왜 그러셨을까? 세상을 ‘사랑’하셨
기 때문이다(요 3:16). 사랑을 마음에만 담아 두지 않으시고 표현하셨다. 힘든
길, 고난의 길이었지만 사랑을 기꺼이 나눠 주신 것이다.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은
정작 예수님이신데, 사랑으로 우리를 섬겨 주셨다.
우리는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께 속했고,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
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섬김의 길을 가셨다. 좁은 길이요, 불편
한 길이다. 하지만 그 길을 가셨기에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올 수 있었다.
대부분동의하듯, 지금은비상사태이다. 교회가세상을걱정하는것이아니라, 세
상이 교회를 걱정해 주는 시대가 됐다. 자성과 자숙의 시간을 갖고, 행동해야 한다.
예수께서가신길을가는것이교회를살리는길이요, 우리의정체성을회복하는첩
경이다. 예수께서섬기셨으니우리도섬기면된다. 예수께서사랑을나누셨으니, 우
리도 받은 사랑을 나누면 된다. 그리스도인라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제3장 주제의 신학적 이해 23
제3장
주제의 신학적 이해
1. 왜 사랑인가?
데이비드 보쉬1)는 그의 책의 결론으로 “그간 우리 기독교인들은 ‘믿음’이란 정통
교리에는 전문가들이었지만 사랑이란 정통실천에는 초보자들에 불과했다. 바른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셀 수 없는 회의들이 열렸지만, 아직까지 단 한 차례
도 어떻게 최고 계명인 사랑을 실천에 옮길 것인가에 대한 회의는 개최된 적이 없
었다.”며 한탄하였다. 로잔운동을 주도하는 복음주의는 발 빠르게 대처했다. 2010
년에 도출된 ‘케이프타운 신앙고백’은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라는 제하
에 10가지 사랑의 고백을 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하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을, 성자 하나님을, 성령 하나님을, 하
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세상을, 하나님의 복음을,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선
교를 - 사랑한다.”2) 연합을 강조하는 세계교회협의회는 2013년 10월에 제10차 총
회를 부산에서 개최한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라는 주
제에 “믿음, 소망, 사랑 안에서 함께 누리는 생명”이 덧붙여진다.3) 제97회 총회가 “치유와 화해의 생명공동체운동 10년”을 전개하기로 결정한 것도 사랑 실천을 통
하여 세상의 상처를 싸매고 화해자의 사명을 다하는 생명공동체로 거듭나기를 바
김우철 목사
24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라는 희망을 담고 있다. 기독교는 자타가 공인하는 ‘사랑의 종교’이다. 교회가 사랑
을 말하고 행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사랑’은 다시 신학적인 핵심 주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2. 사랑의 나눔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다. 그런
데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랑을 어떻게 나누게 되는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은 사
랑을 주기에 앞서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랑을 어떻게 받게
되는가? 그리스도인은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다.
1) 성삼위 하나님의 사랑(The Love of the Triune God)
(1) 삼위일체 사랑(Triune Love)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8).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고
계심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은 삼위의 교제 속에서 일체로 존재하신다. 지난 세기
위대한 신학자로 꼽히는 칼 바르트는 삼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를 발견하
였고, 일체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를 발견하였다. 붙여 말하면, 하나님은 ‘자유 안에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시는 분’이요, 하나님은 자유로운 주권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 주권을 가지고 삼위의 사랑의 교제 속에 거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
이다.4) 희망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은 그 자신을 삼
위의 교제 속에서 사랑이라고 알려 주신다.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는 하나님이 베푸
신 창조적이고 위험과 고난을 감수하며 또한 구속적인 바로 그 십자가의 교제 속에
서 우리 사람들을 주님의 벗들로 불러 주시는 그 친근한 사랑에 놓여 있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라는 선포는 “우리의 종말론적인 희망이다.”라고
강조한다.5)
스탠리 그렌즈는 “인간은 공동체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인류 가운데 아름다운 공동체를 형성해 가라는 하나
님의 사랑의 교제로의 당부를 담고 있는 염색체와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형상’의
참된 의미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교제하는 교회가 이제 새로운 인류로서
제3장 주제의 신학적 이해 25
가꾸어 가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이야기들 속에 가장 확연하게 드러날 수 있다.”6)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유를 누리시면서 사랑 가운데서 거하시니, 하나님을 사랑하
고 그 형상을 닮은 우리들도 이제는 자유를 가지고 아름다운 교제와 공동체를 이루
고 살아가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인
격, 관계, 공동체로 존재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인격을 무시하며,
관계와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지 않게 된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입은 사람은 인격을 존중하고, 관계와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게 된다.
(2) 은혜로운 사랑(Gracious Love)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주도적이고 선취적인 은혜를 가르쳐
주고 있다. 토마스 오든은 “은혜는 하나님이 그것들을 통해 자신을 내어 주시는 사
랑을 나타내고자 인류와 [세상에] 베푸시고 행하시는 모든 선물들, 구원의 모든 복
들과 모든 사건들을 통칭하는 용어이다.”7)라고 했다. 사랑은 감정이고, 느낌이지
만 또한 사랑은 사귐이고, 관계이다. 나아가 사랑은 의지이고, 행동이다. 자기 자
신을 내어 주는 헌신까지 나아가야 참다운 사랑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간을 내어
주시면서 우리를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안에서 우리들이 아름다운 교제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자기의 영원하신 독생자를 내어
주시면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고, 또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우리가
죄의 위력에 더 이상 눌리지 않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가게 하셨
다.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사랑은 그저 감상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의지이고, 행동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야한다. 종교개혁가루터는“인간의자유의지는하나님의은혜없이는전혀자유롭
지 않으며, 악의 영원한 포로요 노예의지로 결코 자신을 선으로 바꿀 수 없다.”8)고
했다. 종교개혁가 칼뱅은 “하나님은 [일반 은총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칭의의 은총으로,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성화의 은총으로 자신을 인간 의지
에 붙들어 매심으로써 용서하시고 능력을 주시는 언약을 성취하셨다.”9)고 했다. 하
나님은 사랑으로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성부 하나님은 만
물을창조하시고지금도주관하신다. 성자하나님(예수그리스도)은우리와같은몸
을 입으시고 찾아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사랑을 베푸셨다. 성령 하나님은 교회
와 함께하시며 성도 곁에서 도우신다. 그리스도인은 성삼위 하나님이 베푸시고 행
26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하시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따라 사랑으로 섬기게 되고, 사랑으로 나누게 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요(갈
5:6), “자유를 위하여부르심을입었으나그 자유로 오직사랑으로종노릇할” 뿐이
다(갈 5:13). C. S. 루이스(Lewis)가 「순전한 기독교」에서 대조하여 묘사하듯이,
구원받아 자유하게 된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의지와 행동에 무감각한 장난감 병정들
이 아니라 사랑에 실제로 반응하여 섬기고 나누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2) 그리스도인의 사랑(Christian Love)
(1) 성결(Holiness)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면 하나님을 전
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이 사랑을 가리켜 ‘성결’이라고 한다. 성결은 하나님 앞에서
의 경외와 떨림의 체험으로 시작한다. “그
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사 6:7).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은 성전에
있던 이사야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신다.
이사야는 천상의 보좌에 높이 들리신 하
나님을 뵙게 된다. 이사야는 경외와 떨림
을 체험하게 된다. 그때 천사가 제단 숯불
로 이사야의 입술을 정결하게 하였다. 이
사야는 ‘성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절대 순응하였다. 하나님이 불순종하는 백성에
게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일꾼을 찾으실 때 이사야는 그 부르심을 소중
히 여기고 자기를 보내 달라고 응소했다(사 6:5-8).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하나
님의 정결케 하심, 하나님의 선교와 부르심, 하나님의 말씀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이것을 가리켜 ‘성결’이라고 한다. 개혁주의 신앙 전통에 서 있었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와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성
결의 사랑’(holy tempers)은 회심의 증거요,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의 원동력이 된
다고 했다.
제3장 주제의 신학적 이해 27
(2) 긍휼(Compassion)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 이 사랑을 가리켜 ‘긍
휼’이라고 한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
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부활의 주님이 친히 찾아 주신 사건을 계기로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육체, 할례, 가
문, 혈통, 전통, 율법, 지식, 학문,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보았었다.
예전에 그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잡아들여 위협을 가하고 심지어는 죽이
는 일에 동조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의 마음과 다르
게 행동한 것이었다. 이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제는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되찾게 된다. 더 이상 외적 자랑
으로 자신을 뽐낼 필요도 없고, 더 이상 남을 괴롭힐 일도 없게 되었다. 자신이 예
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가장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빌 3:1-21). 그 안에
서 그는 그리스도의 심장을 느끼게 되었으며(빌 1:8), 그리스도의 마음에 공감하
게 되었다(빌 2:5).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되고,
주신 소명을 감당하게 되었다. 자신을 본받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치되어
사명을 감당하게 됨으로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때, 이를 가리켜 ‘긍휼’이라
고 한다. 인격 신학을 주장하는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성화의 은혜는 마음이 분열
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치되는 것을 함축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너비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와 제자도의 성격이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이해되느
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10) 또한 내적치유 사역에 있어서는 이러한 긍휼과 공감의
사랑이 꼭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3) 환대(Hospitality)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면 나와는 다른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게 된다. 이 사랑
을 가리켜 ‘환대’라고 한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
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창 18:18). 하나님께서 두 천사와 함께 사람의
모습을 하고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
브라함은 뜨거운 날씨 가운데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이들을 자
신의 집에 초청해 극진히 대접하였다. 자신 역시 나그네 처지였던 아브라함은 언제
28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나 나그네를 환영하고 대접하였다.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하나님과 천사들을 모시
게 되었고, 그와 그 가족과 그가 속한 사회가 큰 복을 받게 되었다(창 18:1-10).
이웃의 처지와 필요를 살펴보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여 복과 은혜를 나누게
되며 사회 전체가 아름다운 공동체로 발전하게 될 때, 이런 이웃사랑을 가리켜 ‘환
대’라고 한다. 크리스틴 폴은 “원래 이웃과 나그네를 맞아들이고 환대하는 사랑의
주 기관은 가정과 교회였는데 지금은 교회와 가정이 이런 일을 낯설게 느끼고 있
다.”고 하면서 “근대기를 지나면서 환대의 전문 기관이 설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가정은 여전히 환대의 사랑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11)고 했다. 또한 미로슬
라브 볼프는 오히려 피해자가 나서 용서하고 가해자를 받아들이는 천국의 행위인
이 될 수 있음을 역설했다.12)
(4) 보전(Creation Care)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은 창조세계를 적절하게 사랑하게 된다. 이 사랑을
가리켜 창조세계를 돌보는 사랑이라고 한다. “드디어 왕이 명령을 내려 브엘세바
에서부터 단까지 온 이스라엘에 공포하여 일제히 예루살렘으로 와서 이스라엘 하
나님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 이는 기록한 규례대로 오랫동안 지키지 못하
였음이더라”(대하 30:5). 히스기야는 온 이스라엘과 유대에 사람을 보내고 편지
를 보내어 하나님을 위하여 그간 오랫동안 지키지 못했던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
하였다. 그는 제사장들을 성결하게 하고,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하여 유
월절을 지키게 했다. 많은 준비와 노력이 필요했고, 한 달 늦게 준수한 유월절이었
지만, 하나님은 온 백성과 땅에 회복을 주셨다. 앗수르의 침략에도 땅을 지킬 수
있었다. 그간 소유욕과 분쟁에 시달렸던 땅에서 풍성한 소출을 거둘 수 있었다(대
하 30:1-27). 유월절은 속박의 땅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약속의 땅을 예비하신 은
혜에 감사하는 절기이다. 유월절을 지키게 되었다는 것은 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
시고, 땅을 받은 사람은 잘 돌볼 책임이 있다는 청지기 사명을 되찾게 된 것을 의미
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과 땅의 소산물과 온갖 재화를 포함하여 창조세계를
적절하게 사랑하게 될 때, 이를 가리켜 ‘보전’이라고 한다. 윌리엄 더네스는 온 땅
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은 온 땅을 회복시키시며, 사람의 주요한 임무는 창조
세계를 보전하는 것이라고 했다.13) 하워드 스나이더는 “창조세계는 질서와 아름다
움과 놀라움이 깃든 세상이요, 죄악으로 신음하는 창조세계는 그 아픔을 치유하고
잘 돌볼 선한 청지기를 기다리고 있다.”14)고 했다.
제3장 주제의 신학적 이해 29
3. 미덕의 순환
사랑은 여러 차원과 여러 색깔을 가지고 있다.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정의란 무엇인가」(2010)에서 정의는 개인의 자유나 공공의 행복이라기보다는 아
름다운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다. 자유나 평등이나 정의나 그 무엇이든지 사랑을
빼놓고는 말하기가 쉽지 않다. 삶의 주변 구석구석을 다각도로 비추며 사랑을 실천
해야 하는 맞춤 복지시대에서 사랑은 제 이념을 통합하고 융합하는 기능을 감당하
게 된다. 더욱이 하나님의 사랑을 빼놓고서 다른 사랑을 말한다는 것은 무모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여러 사랑을 대체하기보다는 각양각색의 사랑이 제 기능을
감당하도록 대속한다. 악한 일이 사슬처럼 엮여 있다면, 아름다운 일도 역시 강력
한 순환 고리를 형성한다.
톰 라이트(N. T. Wright)는 「그리스
도인의 미덕」(2010)에서 미덕의 순환 고
리를 제안한다. (1) 첫째 고리는 성경이
다. 성경은 아름다운 사람이 되게 한다.
(2) 둘째 고리는 이야기이다. 아름다운
사람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된다. (3) 셋
째 고리는 본보기이다. 아름다운 사람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본보기가 된다. (4)
넷째 고리는 공동체이다. 본받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은 아름다운 공동체가 된다.
(5) 다섯째 고리는 실천이다. 모인 사람
들은 함께 아름다운 실천을 하게 된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
하게 매는 띠니라”라고 했다(골 3:14). 이 말씀대로 사랑은 영성이기도 하고 전략
이기도 하다. 사랑은 나눔의 환경이기도 하고, 나눔의 내용이기도 하며, 나눔의 방
법이기도 하다. 교회가 하나로 일치되는 일에 있어서 성경은 미덕의 순환을 말씀한
다. 겸손함과 온유함, 오래 참음, 사랑 가운데 용납함, 성령이 주시는 평안함, 그리
고 한 세례가 있어야 하고, 한 주님이 있어야 한다(엡 4:1-6).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제안처럼 ‘사랑의 기술’을 연마하되, 성경대로 해야 할 것이다.
톰 라이트, 「그리스도인의 미덕」
(포이에마, 2010), p. 430.
30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제4장
주제의 교회사적 이해
1. 서 론
그리스도인은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지만, 특히 사랑의 실천자 혹은 ‘사랑 나
누미’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핵심은 믿음, 소망, 사랑인데, 그중에
서도 제일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먼저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고, 그 하나
님을 믿는 교회 안에서 경험되었으며, 나아가 교회 밖으로 흘러넘쳐 왔다. 따라서
사랑은 하나님의 문제요, 교회의 문제요, 사회의 문제이다. 교회는 교회사를 통하
여 이 사랑의 실천이라는 사명을 감당해 왔다. 물론 때로는 성공했고, 때로는 실패
했지만, 결코 이 사명을 완전히 잊거나 포기한 적은 없다.
오늘날 사회는 교회의 진정성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기
준은 바로 사랑이다. 교회에 대한 교회 내적인 비판이 주로 진리를 기준으로 삼는
다면, 교회에 대한 교회 외적인 비판은 주로 사랑을 기준으로 삼는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교회의 사랑의 실천 전통과 유산을 다시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지난 2천 년의 역사 동안 어떻게 이 사명을 감당해 왔고, 그 교훈
과 유산은 무엇일까?
안교성 목사
제4장 주제의 교회사적 이해 31
2. 본론:교회사에 나타난 기독교의 사랑의 나눔의 전통과 유산
교회사에 나타난 기독교의 사랑의 나눔의 역사는 너무도 다양하여, 이같이 제한
된 글에서 일일이, 상세히 기록할 수는 없다. 따라서 대표적인 것들만 추려 보기로
한다. 이 글이 교회사적 이해를 다루는 글이고, 성경적 이해를 다루는 글이 별도로
있지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사 시대는 성경 시대와 분리되지 않고 이
어진다는 점에서, 교회사를 이해하는 데 전제가 되는 몇 가지만 먼저 간단히 다루
고, 그 다음에 교회사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1) 예수님 시대에 나타난 사랑의 나눔
(1) 두 가지 큰 계명:예수님께서는 한 율법교사의 질문에 답하시면서, 구약의
계명을 두 가지로 압축하셨다.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는 이웃 사랑이다. 이
런 가르침의 의미는 방대하지만, 본 주제와 관련하여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하나님 사랑만큼 이웃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는 사랑으
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기독교의 본질과 사랑의 나눔: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은 예수님 자신의 교훈
에도 반영될 뿐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 극적으로 바뀐 사람의 삶에도 나타났다. 따
라서 이웃 사랑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훈이며, 정상적인 삶이다.
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에 대하여 추가로 설명
하시는 가운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드셨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인을 예로 드셨다. 당시는 아직 기독교의
탈유대화, 즉 세계화가 이뤄지기 전이다. 따라서 이런 논의는 충격적인 것
이 아닐 수 없다. 구약의 핵심적인 두 계명 가운데 하나인 이웃 사랑에 있
어서, 어떤 사람이냐보다 어떤 삶을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주님께서는 사랑 실천을 중시하셨다.
② 삭개오의 도전:예수님 당시,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했지만,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인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삭개오이다. 삭개오는
회심을 나눔으로 연결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런 전통은 이후 교회사에
나타난 부흥운동에서 회심이 사회봉사로 이어지는 것으로 되풀이되어 나
32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타난다. 나눔이 회심의 진정성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진정한 회심이 진정한 나눔과 분리되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다.
2) 초대교회에 나타난 사랑의 나눔
초대교회는 기독교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첫째는 기독교의
기원으로서의 의의이다. 둘째는 기독교의 원형, 특히 이상적인 원형으로서의 의의
이다. 여기에서는 두 번째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자. 초대교회가 정말로 모든 교
회가 본받아야 할 이상적인 원형이냐 하는 문제는 상세한 연구가 필요하지만, 여하
튼 교회사 가운데 많은 교회들이 위기가 닥쳤을 때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움직임
을 보여 왔다. 심지어 교회사를 훌쩍 뛰어넘어 성경 시대만 중심으로 하자는 신약
교회 모델까지 나타났다. 각설하고, 초대교회는 사랑의 나눔에 있어서 몇 가지 교
훈을 준다.
(1)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랑의 나눔
① 초대교회의 원시공산주의적 공동체의 이상:초대교회는 강력한 성령의 임
재를 경험하고, 영적인 공동체로서 출발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영적인 역
동성이 강력하게 나타나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이 드러난다. 즉, 영적인
나눔과 물질적인 나눔이 함께 이뤄지는 ‘원시공산주의’적 공동체의 모습을
보였다. 과연 이런 공동체가 역사상 얼마나 널리,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
었는가는 상세한 연구가 필요하지만, 이런 공동체의 경험 혹은 기억은 성
경과 초대교회에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이후 교회사의 지속적인 공
동체 운동의 남상이 되고 있다. 대다수의 개혁운동은 공동체 운동을 추구
하는데, 초대교회의 원형 회복을 지향한다.
② 초대교회 나눔의 한계와 대안:그러나 이런 원시공산주의적 공동체의 나
눔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
듯이, 이상의 추구는 위선과 범죄의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사실 교회사
에 나타난 모든 공동체 운동은 이 같은 위선과 범죄 해결에 부심하였고,
대부분 성공하지 못하여 오래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공동체의 이상의 내면화와 지속적인 실현화가 뒷받침되지 않은 공동체
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제4장 주제의 교회사적 이해 33
나. 집사직의 출현:초대교회가 발전하면서 공동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
단 가운데 상충되는 이익과 그로 인한 갈등이 대두되었다. 바로 구제를
둘러싼 헬라파 공동체와 히브리파 공동체의 갈등이었다. 초대교회는 공
동체에 나타난 이 같은 두 번째 위기에 대하여 집사직을 제정하는 결정
을 통하여 해결하였다. 이로써 교회는 나눔과 봉사의 직분을 갖게 된 것
이다. 교회는 흔히 교회의 5가지 기능이라고 하는 케리그마(말씀), 레이
투르기아(예배), 디다케(교육), 코이노니아(교제), 디아코니아(봉사) 가
운데, 봉사를 위한 공식 직분을 갖게 되었다.
(2) 사도바울의이해:기독교의 세계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로 사도 바울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사랑의 나눔과 관련하여 두 가지 교훈을 남기고 있다.
① 이웃과의 관계의 대표적 특성으로서의 사랑: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예
수님께서는 모든 계명을 두 가지,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
셨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믿음과 사랑으로 요약하였다. 즉, 하나님 사랑
은 믿음으로 대신하였고, 이웃 사랑은 사랑으로 대신하였다. 따라서 바울
은 흔히 믿음의 사도라는 점이 부각되고 있지만, 사랑도 그만큼 강조한 사
도였다. 이런 사실은 그가 소위 ‘사랑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3장의 저
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바울의 이웃 사랑에 관한 교훈은
먼저 교인 사랑, 그리고 사회 사랑이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바울은
그만큼 교인 사랑을 우선시했다. 그 이유는 그가 편협한 교회주의자여서가
아니라, 교회가 먼저 사랑의 경험 현장이 되어야 진정한 사회 사랑이 가능
하다는 이유에서이다.
② 가난한자를 기억하라:바울의 사랑혹은 이웃 사랑의교훈 가운데 가장강
력한것은바로가난한자를기억하라는것이다. 사실바울의사역에있어서
전도와선교만큼중요한것은가난한자사랑이었다. 그리고가난한자는초
대교회이후두가지면에서중요한주제가되었다. 첫째, 가난은교회와교
인의본질적인 모습으로여겨졌다. 물론 교회사를통하여 가난이점차 현실
적인 가난보다 정신적인 가난으로 이해되는 영적화 현상(spiritualization)
이 나타났다. 둘째, 가난은 교회가 사랑을 실천하는 기준이었다. 교회는 초
대교회이후가난한자, 이방인과여행자, 병자, 그리고장애인들을향한기
관을 만드는 등 사랑을 실천해 왔다.
34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3) 중세교회에 나타난 사랑의 나눔
중세는 비록 개신교의 입장에서 회복이 필요할 정도로 신앙적 문제가 많았던 시
기였지만,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적지 않은 교훈을 주고 있다. 특히 선행이 신앙과
구원의 기준으로 여겨지는 현상은, 역설적으로 사랑을 강조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
였다. 물론 이런 현상은 신앙적, 신학적 검증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다.
(1) 자발적가난, 혹은가난의영성의도전:중세에는 가난이 교회와 교인의 본질
적인 모습이란 생각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현상이 점차 사라져 갔지만, 완전
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수도원과 일부 극적인 회심자의 경우가 그것이다. 수도
원은 세 가지 서원인 가난, 정절, 순명 가운데 하나로 가난을 내세웠고, 노동을 중
요한 사역으로 생각했다. 물론 이런 정신은 점차 왜곡되고 변질되어 갔다는 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또한 발도, 프란체스코 등은 그들의 회심에 있어서 삭개오처
럼 재산을 나눠 주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사역에 앞서 사랑을 먼저 실천하
는 모습을 보였다. 프란체스코는 아예 가난을 사역의 본질적 행태로 선택했다.
(2) 교회 직제의 성직화로 인한 봉사직의 위축:초대교회 말부터 교회 직제의 성
직화가 이뤄졌다. 즉, 초대교회에는 감독, 장로, 집사 등 여러 직분이 나타났는데,
이런 다양한 직분은 주교, 사제, 부제 등 성직자 일색의 위계질서로 축소되었다.
원래집사에해당하는집사직은주로감독, 즉주교를돕는보조자가되었다가, 마침
내사제예비생인부제가되고말았다. 그결과, 부제도, 사제도, 주교도모두성직자
가 되어 버렸다. 이로 인한 부수적 결과는 교회의 봉사직이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4) 종교개혁 시기에 나타난 사랑의 나눔
종교개혁은 신앙의 개혁과 회복 운동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사랑의 개혁과 회
복 운동이기도 하였다. 종교개혁은 사랑이 구원의 빌미가 되는 왜곡현상을 교정함
으로써, 사랑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즉, 사랑은 구원의 전제가 아닌 구원의 결과
라는 교훈이다. 또한 종교개혁은 교회를 사랑의 실천 기구로 회복시켰다. 지면상,
이 자리에서는 본 교단과 특히 관련 있는 칼뱅의 경우를 들도록 하겠다.
(1) 교회 직제의 회복, 집사직의 회복:칼뱅은 종교개혁자 가운데서도 특히 교회
의 개혁자이다. 따라서 그는 교회의 참된 모습을 회복하려고 하였고, 그 일환으로
제4장 주제의 교회사적 이해 35
교회의 4중직을 제안하였다. 즉,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등이다. 특히 집사직의
회복은 교회의 봉사기구로서의 본질을 회복하는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2) 나눔공동체로서의 교회:칼뱅은 이런 직제의 회복뿐 아니라 그가 섬기는 교
회와 사회가 봉사기구, 즉 나눔공동체가 되는 데 앞장섰다. 칼뱅 자신이 제네바에
서 오랫동안 외국인의 신분이었고, 또한 종교난민이었다. 따라서 그는 교회의 전
통적인 관심이었던 가난한 자와 병자에 대한 관심을 확대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
교회의 새로운 사랑의 대상이 되었던 외국인에 대한 관심을 확대하였다.
칼뱅은 특히 가난한 자와 관련하여 「기독교강요」에서 상세한 교훈을 주고 있다.
첫째, 교회가 소유하는 모든 것은 가난한 자들의 재산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둘
째, 교회 수입의 네 가지 용도 가운데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을 포함시켰다. 셋째,
특히 교회의 재물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키릴루스, 아카시
우스, 엑수페리우스, 암부로시우스 등 초대교회의 예들을 인용하였다.
칼뱅의 나눔 사역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는 구빈원을 확장하면서
집사가 주요직을 맡도록 하였다. 둘째, 그는 집사직을 구제품을 나누어 주는 집사
들과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한 집사들로 나눠 그 기능을 세
분화하였다. 셋째, 그는 외국인 전담 구제기금을 마련하여 오늘날 교회의 다문화
사역의 선구자가 되었고, 또한 이 일을 집사가 주도하게 하였다. 넷째, 가난한 자
를 돕는 것은 집사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의 책임임을 강조하였다.
5) 근현대교회에 나타난 사랑의 나눔
(1) 양극화의 문제와 교회:현대는 놀라운 발전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양극화가
되어 가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교회는 19세기부터 이런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
려는 다양한 노력을 해 왔다. 가령 기독교사회주의, 종교사회주의, 사회복음운동
등이 그것이다. 그 이후에도 교회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연구는 산업화, 제국주의,
냉전, 세계화 등의 사회적 변화에 맞서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사회적 기능은 충분히 활성화되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이런 가운데, 무력으로
강제적 평등을 가져오려고 한 공산주의의 실험은 한 세기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금 주목받는 것이 바로 ‘삭개오 모델’이다. 부자의 자원적이면
서도 파격적인 나눔은 비록 가난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중요한 대안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36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2) 재평가되는 교회론, 가난한교회:그동안 교회는 사회적 기능에 있어서 가난
한 자를 위한 교회(the church for the poor), 나아가 가난한 자와 함께하는 교회
(the church with the poor)로서의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러나 20세기 4/4분기부
터 기존의 교회의 사회적 기능을 재평가하는 가운데 가난한 자의 교회(the church
of the poor)라는 교회론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에큐메니칼 신학이 이 교회론 탐
구를 본격화하고 있는데, 그 발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최근 교황으로 선
출된 프란치스코 1세가 자신의 교황명으로 이전까지 사용되지 않았던 프란치스코
라는 명칭을 채택하였다. 새로운 교황은 중세의 프란체스코의 사상을 이어받아 가
난 정신의 회복이 새로운 가톨릭교회의 회복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표
명한 셈인데, 그 결과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다양한 교회들이 가난한 교회
라는 교회론을 재발견하려는 노력을 벌이고 있다.
(3) 디아코니아의 회복:이와 아울러 주목할 만한 것이 바로 디아코니아의 회복
이다. 교회의 디아코니아에 대한 관심은 디아코니아학이란 학문의 발전으로 이어
졌다. 특히 한국의 경우, 가장 중요하면서도 난관으로 여겨지는 남북한 관계에서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이란 나눔 운동이 물꼬를 트고, 이후 디아코니아라는 관점
으로 남북한교회 관계, 북한교회 인식 등이 이해되고 있다. 최근 북핵문제로 불안
한 상황을 맞은 남북한은 디아코니아와 나눔의 정신을 시급하고도 집중적으로 재
검토할 필요가 있다.
(4) 공공신학의 대두:또 한 가지 20세기 후반에 괄목할 만한 것은 공공신학
(public theology)의 대두이다. 공공신학은 정치·사회·경제 등 제반 문제를 대상
으로 하고 있다. 공공신학이 기존의 정치신학이나 사회신학과 구별되는 것은, 자신
의 위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즉, 기존의 신학에서는 교회가 사회에 대한 가르
침을 구성하는 자세를 취했다면, 새로운 공공신학에서는 사회가 사회에 대한 가르
침을구성하는데있어서, 교회가사회의일원으로참여하는자세를취한다.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교회는 일방적인 주체가 아니라 주체의 일원으로서 혹은 간주체적
주체로서 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사역의 공유만이 아니
라 사역 주체의 공유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즉,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교회와 사회의 갈등과 경쟁을 협동과 공유라는 관점으로 보려는 것이다.
제4장 주제의 교회사적 이해 37
3. 결 론
이상에서 교회사에 나타난 교회의 사랑의 실천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교회는 이
웃 사랑의 강조, 자발적 나눔의 전통, 공동체의 경험, 교회 봉사직의 제도 마련,
교회 안팎의 나눔의 문제에 대한 관심, 가난의 영성의 지속적인 재발견, 가난한 교
회의 교회론 등 다양한 사상과 실천을 이뤄 왔다. 이제 이런 전통과 유산에서 배운
교훈을 다시금 실천할 것을 요청받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이며, 구원받은
자의 본질적인 모습이고, 교회의 자랑스러운 사역이며, 시대와 사회의 요청인 것
이다.
38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제5장
우리가 사는 세상 이해:
가속화되는 세계화 시대의 사랑 나눔을 위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세계화
에 대한 이해이다. 세계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속도도 빨라지고, 적용되는 영역도
넓어지고 있다. 경제를 중심으로 한 국가들 사이의 교류가 정치와 문화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으며, 모든 분야에서 국가들 사이의 의존도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오
늘날, 세계화는 많은 이들에게 비판의 대상이다. 가난한 나라가 빈곤에서 벗어나
지 못하는 것도, 새롭게 부상한 나라들의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것도 세계화
때문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한 국가의 문화적 전통이 급격하게 단절을 경험하는
것도, 지역의 특수성이 사라지는 것도 세계화가 주요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더욱이 생태학자들은 급격한 기후변화와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세계화를 지목하기
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세
계화는 앞으로도 중단되지 않을 것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세계화 현상은 확실히 새로운 기회들을 제공하면서 사회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
였다. 예컨대 세계의 유아사망률은 지난 30년 동안 절반 이하로 줄었고, 사람들은
평균 17년을 더 살게 되었다. 1960년에서 1993년 사이에 남반구와 북반구 사람들
의 평균수명 차이가 23년에서 11년으로 두 배 이상 줄었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임성빈 목사
제5장 우리가 사는 세상 이해 39
입학한 학생 수가 두 배 이상 증가하였고, 개량된 통신 기술은 공동통신망들이 더
효과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도왔으며, 기존의 형태에 비해서 대안적인 ‘공정거
래’(fair trade) 통신망들의 확장을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1조가 넘는 남반구 사람들은 아직도 기본적인 보건과 교육, 그리고 안전
한 식수와 적정 영양섭취가 어려운 실정이다. 지속적인 지구경제의 발전에도 불구
하고,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궁핍하게 살고 있다. 과거와 다른 것은 이제 가난한
사람들이 진보된 통신 기술을 통해 부자들이 얼마나 잘사는지에 대해서 예전에 비
해 훨씬 많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며, 사회적 양극화가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문제가 되어 사회적인 불안요소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세
계화는 어떤 이들에게는 행복을, 또 다른 이들에게는 고통을 주는 양날의 검과 같
은 역할을 하고 있다.
1. 세계화 시대, 생활환경의 변화와 교회의 과제
1) 실업률의 증가
세계화는 국가들 사이의 교역을 늘리고, 지식과 기술 이전뿐 아니라 외국인 직
접 투자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더 넓은 고용시장을 창출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아 왔다. 실제로 금융위기가 닥치기 전인 2007년, OECD 평균 실업률은
20년만에6% 미만으로떨어졌으며, 여성의고용참여율도증가했다. 그러나2007년
1억 6천만 명에 이르렀던 실업자 수는 지금까지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국제노동
기구가 발표한 ‘2013년 세계고용동향 보고서’에 의하면, 이제 전 세계 실업자 수는
전년보다 400만 명 증가해 1억 9,7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런 추세가 계속
된다면, 2017년에는 전 세계 실업자가 2억 1천만 명이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15)
이는 전 세계 경제가 저성장 국면에 돌입하면서 기업은 고용을 꺼리고 있고, 각국
정부는 재정긴축에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불확실한 경제전망과 부적
합한 정책 등은 투자 감소와 함께 기업의 채용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국제노동기구
에 따르면, 2012년 고용전망이 악화되면서 약 3,900만 명에 해당하는 인원이 아예
취업을 포기했다고 한다. 특별히 청년 실업률은 매우 심각한 수준인데, 2012년
5.93%의 실업률에 청년 실업률은 12%를 넘어섰다고 한다. 현재 2억 명에 육박하
고 있는 실업자 중에서 15세 이상 24세 이하 연령층은 7,380만 명이다.16)
가속화되는 세계화의 어두운 일면인 실업률의 증가는 특별히 청년층에게 치명
40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적이다. 이른바 ‘삼포세대’, 즉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음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회적 병리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을 이해할 때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사회와 나누어야 할 사랑의 내용과 대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주요국 실업률>
자료:통계청 보도자료(2012. 5. 16.)
2) 이주 노동의 증가
세계화 시대를 활용하여 다국적 기업은 생산 공정을 개발도상국으로 이전해 생
산 노동자들에게 지불해야 할 경비를 더욱 최소화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에는 기업
이 해외에 생산라인을 갖추지 않더라도, 제3세계에서 들어온 인적 자원들을 값싼
임금으로 고용하기도 한다. 노동력의 이동이 돈과 상품의 이동속도를 따라갈 수
없지만, 해마다 국가별로 이주 인구가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에서
다문화 국가가 증가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다. 최근 한국도
2011년 기준, 백만 명 이상의 이주 노동자들이 들어와 있다고 보고되고 있으며,
매년 이주자들의 비율도 약 11%씩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 선진국들
은 1인당 국민소득이 증가하고 저출산·고령화사회로 변하고 있다. 이는 선진국
국민들이 좀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고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도 함께 상승했지
만, 선진국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생산인력과 저임금 일자리에 고용할
사람을 더 이상 자국 인력으로 충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저출산·고
령화사회는 절대인구의 감소라는 인구학적인 압력도 피해 갈 수 없는데, 이는 사회
적 규모에 맞는 노동인력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경우, 현재
의 생산가능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2050년까지 840만 명의 해외 이주민을 받
아들여야 한다고 한다.17)
노동력의 이주는 저임금 근로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신흥국을
비롯한 제3세계 국가들은 자국의 인재 유출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자국의 경제성
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능력 있는 자국 인재들이 필요하지만, 각국의 인재들이
한국(‘12년 4월) 미 국 호 주 일 본 독 일 프랑스 스페인
실업률(%) 3.5 7.7 5.0 4.7 5.5 10.1 24.8
청년층(%) 8.5 15.4 10.9 10.8 7.1 22.2 53.2
제5장 우리가 사는 세상 이해 41
좋은 환경과 여건을 찾아 이주하고 있다. 2009년 아랍리그가 공개한 보고서에 따
르면 약 10만 명의 과학자, 의사, 엔지니어들이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떠났으며 대
다수의 과학자와 의사들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일부 선진국들도 우수한 인력
의 유출을 우려하고 있는데, 뉴질랜드의 경우 지난 2006년에 국외 거주자들을 불
러들이기 위한 프로그램을 가동했다.18)
가속화되는 세계화가 동반하는 이주 노동과 결혼의 증가와 그로 인한 다문화사
회의 부상은 한국교회에게 더욱 구체적인 다문화 사역을 요구한다. 특별히 이주
노동자들 대부분이 처한 열악한 사회문화 환경에 대한 인권적 차원에서의 사랑 나
눔이 주요한 사역이 될 것이다. 또한 다문화 이주민 중 2세들의 교육환경에 대한
개선을 위한 참여에 각별한 관심과 참여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3) 노동 유연성에 따른 노동조건의 악화
세계화는 세계 경제체제를 빠르게 지식 기반 경제체제로 바꾸고 있다. 지식은
한정된 자원에서 새로운 이익과 가치를 창출한다. 21세기 국가들은 국가 경쟁력의
핵심을 지식 기반에 두고 있는데, 여기서 지식이란 조직 사이의 상호작용, 정보통
신기술, 기초과학 등의 학문적 지식과 디자인, 마케팅 등의 실용적 지식을 포괄한
다. 기업을 보더라도 과거 기업은 물질적 자산을 소유한 고용주가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으나, 이제는 기업 이익에 부합하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가가 근로자의 위
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지식 기반 경제체제는 기업으로 하여금 급변하는 시장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
는 유연한 경영전략을 강제한다. 전통적인 직업들 외에도 다양한 직업군과 직업 형
태가 끊임없이 출몰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지식 기반 경제체
제에서 기업 경영의 유연성은 보통 노동의 유연성으로 이어지는데, 국가가 노동자
들의 고용환경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거나 고용주와 노동자들 간의 상호적인 합
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파트타임 노동자들, 임시 노동자들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이는 자칫 노동조건의 악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안정적이고 숙련된 노동력은 축
소되고 있고,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직업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최고임금
과 최저임금의 차이도 늘어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임금의 불평등은 정부의 노동시
장에 대한 규제 철폐가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에서 높게 나타난다. 정부가 보다 유
연한 직업보호정책을 허용한다면, 고용을 더 용이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회사는 노동자들을 낮은 임금으로 고용할 수 있고 해고하기도 수월해진다.
42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생겨난 직업들은 근무여건이 열악한 저질 직업이 되기 쉽다.
가속화하는 세계화가 동반하는 노동조건의 양극화, 근무조건의 악화와 불안정
은 교회가 더욱 위로와 치유 공동체로서의 사랑 나눔 사역에 힘을 기울여야 함을
요청한다. ‘삼포세대’로 상징되는 청년들을 향한 구체적 관심과 함께 특별히 우리
사회의 중추적 허리 역할을 감당하는 50대들을 향한 목회와 사역에도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IMF 경제위기로 인한 타격을 받았던 세대들이 이제는 조기 은퇴로 인
한 사회경제적 압력을 받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인식하고, 그 세대를 향한 각별한
관심과 사역을 모색하고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4) 경쟁의 병리적 심화
세계화 현상의 특징 중 하나는 치열한 경쟁이 사회의 전 분야에서 증가한다는
것이다. 경쟁이 때때로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경쟁은 혁신을
증진시키고, 더 질 좋은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을 자극하며,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
용하도록 도움을 준다. 특정 영역에서의 경쟁은 사기나 불법적 조작을 방지해 왔
고, 모든 구성원들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잘못된 일이 발생할
때마다 서로 견제하고 개입하는 민주적 책임의식을 고양하는 것도 경쟁이 지닌 긍
정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점차 거의 모든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경쟁이 제시되고 있다.
경쟁은 이제 하나의 이념이 되었다. 예컨대, 개인이 실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남에게 뒤지지 않는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거나, 사회의 높은 실업률을 더 강력한
경쟁과 성장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는 것 등이다. 학교와 대학 등의 교육기관들도
이 시대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경쟁력 있는 구조를 채택해야만 한다는 압력을 받
는다. 모든 기술연구는해당 산업의 경쟁력강화를목표로해야 한다. 스위스로잔
에 위치한 ‘세계경제포럼과 경영발전연구소’(The World Economy Forum and the
Institute for Management Development in Lausanne)는 해마다 세계 각국의 경
쟁지수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국가 경제의 경쟁력을 평가하기 위한 300개의
기준들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나 경쟁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의 한 부분만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
에서문제가있다. 경쟁을지나치게강화하게되면, 협력과연대를지향하는인간의
본성이무시될수있다. 개인과집단이서로유대감을강화하는것은약한사람들이
하는 행동이고, 실제로는 비현실적이며 비효율적인 것으로 비하될 수 있다. 이러한
제5장 우리가 사는 세상 이해 43
인간 본성에 대한 환원주의적 관점에서는 승리자의 논리가 성공의 규범이 되고, 약
자는소외되며, 희생자는경쟁력이약했기때문이라고비난받게된다. 이는직업세
계의현실이지만, 직업세계를파괴하는원인이기도하다. 공동선(common good)에
대한공동의노력에관심을갖기보다승자가되기위한경쟁에몰두하다보면, 경쟁
에서 도태된 패자는 회복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경쟁구도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본래적 관계를 파괴하고, 경쟁에서 뒤처진 인간을 패자로 내몬다.
가속화하는 세계화가 동반하는 경쟁은 어느덧 사회 전반에 보편적 현상으로 자
리하게 되었다. 시장과 기업의 효율성을 담보하기 위한 경쟁이 사회문화영역과 심
지어 교육영역에까지 획일적으로 적용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앙공
동체로서의 교회는 ‘작은 자와 함께하는 사랑’을 더욱 넓게 구체적으로 실천하여야
할 과제를 갖는다.
44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제6장
오늘의 사회와 나눔의 생명선교
1. 오늘날 사회의 문제 진단
오늘날사회에서는여러문제점들이나타나고있다. 첫번째는금권만능의시대라
는 것이다. 돈이 최고인 세상이다. 돈이 된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는 사람들 천지이
다. 두 번째 문제는 성적인 타락을 들 수 있다. 성경은 간음과 음란을 지독한 죄로
말하지만오늘의세상은음탕으로가득한곳이되었다. 세번째로말할수있는바람
직하지 못한 시대상 중의하나는 힘과 권력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라할 수 있다. 힘
자랑하며 주변의 사람들을 억압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네 번째 문제는 건강과
장수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건강에 좋다면 무
엇이라도 먹는다. 수명 연장을 위해 온갖 수단이 동원되고 있다. 건강 추구는 좋은
것이지만지나치면문제가된다. 다섯번째로오늘날사회의병폐로서의개인주의적
인 삶의 스타일을 들 수 있다. 공동체와 모두에 유익이 되는 일을 하려 하기보다는
자기만의유익에혈안이되어있다. 자신의유익을위해아이들도낳지않는저출산이
만연하고있는상황이다. 찰나적이고육감적이며저차원적행복을위해자신의영혼
이라도파는사회이다. 가까운장래의행복을위해영원한미래의행복을팔아버리
는 세상이다. 이생의 염려와 자랑으로 고민과 방탕함이 가득한 오늘날이 되었다.
노영상 목사
제6장 오늘의 사회와 나눔의 생명선교 45
2. 왜 이런 문제들이 야기되었는가?19)
생명을 말하는 헬라어 단어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비오스’(βίος)이며, 다른
하나는 ‘조에’(ζωή)이다. ‘조에’는 내연적인(intensive) 생명을 말하는 반면, ‘비오
스’는 외연적인(extensive) 생명을 언급한다.20) 보통 ‘비오스’는 개역성경에서 ‘생
활’(living)이란 말로 번역되는 바, 생명의 본질을 지칭하기보다는 생명의 지속과
생명유지의 방편 및 수단이란 의미로 쓰인다.21) ‘조에’는 생명의 핵심과 본질을 말
하는 반면, ‘비오스’는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 및 생명의 껍데기를 의미하는
곳에 사용된다. 이에 있어 생명의 알갱이에 해당하는 것은 ‘조에’이다. ‘비오스’는 보통 생명의 수단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는 바, 우리의 생명이 유지
되기 위해서는 건강과 물질(돈)과 생식능력(자녀)과 힘(권력) 등이 필요하다. 물질
이 생명을 위해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에 대한 집착이 지나치면 도둑질하게 된
다. 생식(reproduction)도 마찬가지다. 생식과 자녀양육을 통해 우리의 생명이 이
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생식에 집착하면 성적 탐닉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삶을 영
위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권력과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집착은 사람
을 거짓되게 한다. 건강이 생명을 위해 요구되는 것이긴 하지만, 눈에 보이는 육체
의 생명이 인간생명의 전부는 아니다. 육의 생명을 넘어서는 초월적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제시하셨다. 죽어도 다시 사는 생명, 눈에 보이는 생명
을 넘어서는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존재한다.
누가복음 8:14에는 다음의 말씀이 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this life)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
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여기에서 ‘생’이란 말은 ‘비오스’로 표현된다. 생의 껍데
기로서의 ‘비오스’에 집착하면, 생명의 바른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또한 재물로서의
물질, 향락으로서의 육적이며 성적인 쾌락을 탐닉하는 것은 생명의 원리와는 멀다.
두 가지의 삶의 태도가 문제이다. 먼저는 생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을 보
고 사는 것이며, 다음은 보이는 생이 전부인 줄 알고 이생을 만끽하며 즐기려는
태도이다. 이생을 자랑하고 숭배하는 삶은 죄이다(요일 2:16).
요한1서 2:16은 이생의 자랑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의 이생의 ‘생’도 ‘비오스’로
쓰여 있다. ‘비오스’가 모자라는 사람은 염려를 하며, 남는 사람들은 자랑을 한다.
이생에 대해 염려하고 자랑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생을 허비하기 일쑤이다. 경제문
제, 곧 돈에 대한 염려, 자식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힘에 대한 염려 등이
46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우리들의 삶을 짓누른다. 형편이 나아지게 되면 스스로를 자랑하며 기고만장하기
쉬운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그러한 ‘비오스’에 대한 ‘염려’와 ‘자랑’은 다 부질없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생의 껍데기만을 추구하면 알곡이 아니라 쭉정이가 된다.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는 알갱이는 잃어버리고 껍데기와 포장만을 추구함에서
오는 것들이다. 돈과 자녀와 힘과 건강이 우상인 세상이다. 눈에 보이는 표피적인
것들이 삶의 모든 것인 양 주장되고 있다. 진정한 생명으로서의 ‘조에’의 길을 저버
리고, 껍데기의 생명인 ‘비오스’만을 추구하는 데에서 이런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
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문제들이란 주님께서 주신 참 생명의 길을 무시하고 표피적
생명에만 착목하는 데에서 야기되는 것들이다. 본질을 상실한 허한 삶에 온갖 욕심
들이 잦아든다.
3. 문제를 극복하는 길:알곡 생명에 대한 이해
다음으로 껍데기의 생명이 아닌 알곡 생명에 대해 설명하려 한다. 요한복음에서
는 생명이란 개념이 ‘영생’이란 말로 종종 표현된다. ‘영생’은 헬라어로 ‘조에 아이
오니오스’(ζωὴ αἰώνιος, eternal life)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생명이란 단어의 의
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 단어를 수식하고 있는 형용사 ‘아이오니오스’라는 단어의 의
미를 파악할필요가 있다. 여기서형용사 ‘아이오니오스’란단어는 상당히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 말임에 유의하여야 할 것 같다. 헬라어 사전에서 보면 그 ‘아이오니오
스’라는 형용사가 본질적인(essential), 종말적인(eschatological), 신적인(divine),
영원한(eternal), 우주적인(universal) 등의 다양한 뜻을 가진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22) 그단어의어근이 ‘아이온’(αἰών)인 바, 시간을 초월한 것으로서의 영원(고
전 2:7 등), 또는 오래 지속된 시간을 의미하기도 하며(눅 1:70, 행 3:21), 헬라
어 ‘코스모스’(세상)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막 4:19, 히 1:2 등).23) ‘아
이온’은 시간적 연장선상에서 영원과 만나는 시점으로 일종의 종말론적 위상을 가
진다(히 6:2, 5, 살후 1:9, 벧후 1:11 등). ‘아이온’은 시간적 의미로서의 ‘영
원’(eternity)함이나 공간적 의미로서의 ‘우주’(universe)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
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영생은 시간적인 영원한 삶일 뿐 아니라, 공간적인 의미에
서의 우주적인 삶 및 질적인 차원에서의 신적이며 본질적인 삶,24) 또한 무궁하고
종말적인 삶을 의미한다. ‘아이오니오스’란 단어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다시 정리할 수 있다.
제6장 오늘의 사회와 나눔의 생명선교 47
1) 본질적인(essential)
‘아이오니오스’란 단어는 ‘본질적인’이란 의미를 갖는다. 이 의미를 택하여 ‘조에
아이오니오스’를 번역하면, 본질적인 생명, 참 생명이 될 것이다. 껍데기의 생명이
있는 반면 핵심적인 본질적 생명이 있다. 성경은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의 방편으로
서의 껍데기의 생명을 ‘비오스’라고 말하며, 생명의 알곡과 같은 부분을 ‘조에’로
표현한다.
2) 종말적인(eschatological)
‘아이오니오스’라는 단어는 헬라어 ‘아이온’(αἰὡν), 곧 영어 에온(eon)을 어근으
로 갖는다. 에온은 ‘우주의 한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에온이 바뀌면 새로운 세
상이 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올 새로운 하늘과 땅이
열리는 새 세상에 대해 설명한다. ‘조에 아이오니오스’는 그 새로운 에온에서의 생
명을 나타낸다. 지금 여기에서 맛보는 종말에서의 새로운 생명이 ‘조에 아이오니오
스’이다. 우리가 천국에서 맛볼 그 온전한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도래한 종말 속
에서 우리에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3) 신적인(divine)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종말로서, ‘아이오니오스’란 단어는 또한 하
나님이 부여한 생명을 의미하기도 한다. 창세기 2:7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말한다. 시편 104:29은 모든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하나님은 생명의 기원되시고 주인이 되신다고 말하
며, 요한복음 10:28은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
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한다. 영생이 하나님에게
서 부여된 것임을 언급하는 구절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영생은 그의 아들 예수 그
리스도 안에 있으며(요일 5:11), 우리는 그 아들을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게 된다
(요 17:3, 3:16, 6:47).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안에 있는 영생을 드러내
시고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분이다. 인간은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됨
을 통하여 ‘조에 아이오니오스’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4) 영원한(eternal)
‘아이오니오스’란 단어는 성경에서 대부분 ‘영원한’이란 단어로 번역되고 있다.
48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인간의 생명은 시간적인 한계 속에 있다. 야고보서 4:14은 “……너희 생명이 무엇
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
는 생명은 시간적인 굴레를 뛰어넘은 영원한 생명인 데 비해, 오늘의 타락한 인간
의 실존을 그러하지 못하다. 그리하여 우리의 시야가 원시치 못할 때가 많다. 우리
는 한치 앞의 상황도 파악하지 못한 채 그릇 행하곤 한다. 우리는 이 같은 근시안적
인 인간의 전망을 넘어서는 신 중심적인 전망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5) 우주적인(universal)
히브리서 11:3은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알게
됨을 언급한다. 여기에서의 세계란 헬라어 ‘아이온’으로 쓰는 바, 이 세상 곧 우주
를 지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우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됨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조에 아이오니오스’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전 우주에 연결된 우리의 삶의 모습을 나타낸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샬롬의 모습으로 실재한다. 자연과의 생태
적 관계, 이웃과의 사회적 관계,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의 온전함 속에서 인간의
생명은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다. 인간은 자기라는 존재를 통해, 공간적 제약 속에
감금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과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교통에 의해
우주에 개방된 삶의 모습을 갖게 된다.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우주적인
삶이 조에의 삶인 것이다.
4. 알곡 생명을 구현하는 방법:남들과의 사랑의 나눔
마태복음 19:16~22의 본문에는 다음의 말씀이 있다. 한 청년이 예수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는지 물었으며,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십계명의 원리대로 사는 것이
참 생명을 얻는 길임을 제시하셨다. 예수께서는 마가복음 12:28~31에서 십계명
의 내용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신 바 있다. 십계명의 원리는 사랑
의 원리이며 생명의 원리이기도 하다. ‘조에’를 구현하는 첫 번째 원리가 요한복음 5:24에 나타난다. “내가 진실로 진
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벗어나 생명에 이르게
제6장 오늘의 사회와 나눔의 생명선교 49
된다. 우리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목숨을 희
생해서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참 생명의 길이다(시 63:3). ‘조에’를 구현하는 두 번째 원리는 이웃 사랑과 연관된다. 요한일서 3:14은 다
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
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나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먹는 것에서 생명이 야기되는 아니라, 남을 위해 나의 삶의 에너지
를 쓰는 것에 참 생명이 있다는 말씀이다. 목숨을 소유하고 쌓아 두는 데 생명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주는 데 오히려 참 생명이 깃들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말하는 알곡 생명은 역설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생명의 원리는 그렇게 줌으로써 얻는 원리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것을 남과 나누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마가복음 10:45에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
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
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이 본문은 자기 목숨을 제한할 수 있는 더 큰 가치
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우리 생명의 제한성의 표지이며, 동시
에 인간 생명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마태복음 16:25은 이러한 측면을 또렷이 설
명한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요한복음 12:24~25의 말씀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
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
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
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
리라”. 이와 같이 생명이나 건강에 대한 논의는 자신만을 위한 보신주의로 끝나서
는 안 되며, 눈에 보이는 생명이나 건강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한 도구적인 가치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25)
이상과 같이 기독교의 ‘조에’의 원리는 십자가의 원리로 볼 수 있다. 그 십자가의
원리는 십계명의 원리로서, 우리는 나의 생명을 희생해서라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
랑함을 통해 참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참 생
명의 원리를 우리에게 나타내신 분으로, 인간은 그 안에서 생명과 부활을 경험하게
된다(요 11:25-26). 하나님에게 있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드러나게 되
었으며, 그를 통해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요일 1:1-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복
종의 표시이며(마 26:39), 수평적으로는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의 표시이다. 그
50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십자가의 원리는 일반적인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원리로서, 우리는 그
러한 원리를 믿음으로만 깨닫게 된다. 목숨을 잃으면 얻는다는 것, 줌으로써 받는
다는 것, 나의 생명을 미워함으로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기독교 생명의 신비
이다. 결국 기독교의 생명탐구는 십계명에서 시작하여 십자가에서 종결되는 것 같
다. 우리는 가끔 내 속에 생명의 힘이 충전되면 하나님과 남을 위해 헌신할 것이라
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는 그 순서를 달리한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
랑하여 살기 시작할 때 참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생명의 원리는 철저히 관계이며, 교통이고, 커뮤니케이션이다. 한 중심체와 다
른 중심체 사이에 내용물의 이전과 상호교환 및 정보의 교환이 없다면 어떤 생명체
도 존립할 수 없다. 얼핏 보면 존재들이 따로따로 존립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모
든 것들을 깊이 바라보면 볼수록 서로 어우러져 있으며, 뗄 수 없는 고리로 연결되
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통해 “이것이 만인을
위한 나의 살이며 피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만인과 만물을 향해 자기의 것을 주고
분여하는 것이 부활의 원리요, 영생의 원리이다. 금번 제98회 총회는 총회주제를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라고 정한 바 있다. 그리스도의 생명에 접하
면 접할수록 우리는 자신을 비워 나눔을 실천하게 된다.
죽으면 산다는 역설적인 논리에서 명상하여 볼 때, 기독교의 생명은 인간이 그
속에 지니고 있는 일종의 요소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 및 전체와의 관계성에
서 생성되는 어떤 것이라 볼 수 있다. 생명은 하나의 요소나 존재가 아니며, 일종
의 생성(becoming)이고 과정(process)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개의 사물이 아니라
개개의 사물을 연결시키고 하나로 만드는 관계성 또는 순환운동 그 자체를 부차적
인 것이 아닌 근원적인 생명으로 깨닫는 인식으로서의 전환이 요구된다. 그 같은
관계로서의 생명의 본질은 기독교가 말하는 삼위일체론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
다.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의 세 위로서 서로 순환하며 전체로서 하나를 이룬다
는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가 말하는 생명의 전형이다. 삼위일체론에서 우리는 본
질적인 생명현상을 찾게 된다.
5. 문제 많은 오늘날의 사회를 향한 생명선교 실천
성경이 말하는 참 생명으로서의 알곡 생명은 십자가의 능력을 통하여 부여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은 자기부정의 정신으로서, 십자가의 구원을 통해 신자는
제6장 오늘의 사회와 나눔의 생명선교 51
자신을 넘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우리를 얽매
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축을 확장하여 우리로 하여금 전지구적 샬롬에 이르게 한
다. 자기 속으로 움츠러들어 퇴행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그리고 종국적
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나아감에 의해 우리는 진정되고 정화된 하나님이 부여하시
는 참 생명과 만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십자가에 매어 닮을 통해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에 다다르며,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며 우
주적인 생명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넘어서서 하나님과 전체를 향해 나아가는 생명
정신은 오늘의 현 문화를 비판한다. 자기중심주의(egocentrism), 인간중심주의
(anthropocentrism),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 남성중심주의(androcentrism),26)
자유방임의 경쟁적 자본주의(capitalism), 자기 종교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선
교의 열정을 후퇴시키는 종교적 폐쇄주의 등의 문화가 초극의 대상이다. 우리는
더 큰 공동체로의 사랑의 길을 버린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십자가에 나타난
알곡 생명의 원리로 극복할 수 있다. 찰나적 쾌락과 이생의 향락만을 추구하는 일
시적 삶의 향연으로부터 영원까지 펼쳐진 무궁한 삶의 차원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
는 ‘조에’의 생명원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먼저 오늘의 지나친 개인주의적 경향 및 자기중심주의는 초극되어야 할 대상 중
의 우선이다. 개인주의를 조장하는 교육환경, 개인주의에 입각한 정치·경제구조
등 우리가 보다 넓은 전망에 투신하는 데 방해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나만의 자유,
나만의 성공을 위한 삶, 이기적인 경제활동 등의 한계를 넘어 우리 모두는 국민행
복시대와 전지구적 행복시대를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겠다. 인간을 만물의 중심
또는 척도로 보거나, 인간의 생명을 절대화하여 자연을 그에 부가하는 어떤 것으로
볼 때 생기는 부조화도 우리가 극복하여야 할 편견 가운데 하나이다.
공동의 복리를 위한 공공선(common good)을 소중히 여기며 공동의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하는, 소읍과 같은 자치공동체로서의 지역마을공동체 만들기를 통한 오
늘의 정치·경제체제의 대안 모색은 오늘의 시점에서 중요한 노력이라 생각한다.
또한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문명 블록 간의 공생적 관계 형성 및 세계 정치와 경제
를 규제하는 세계 윤리(global ethics)27) 구상을 위한 넓은 지평의 사고도 요청된
다. 이와 같은 일들은 혼자만의 노력으로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에 서로 모여 논의
하고 함께 실천하는 협의적 과정(conciliar process)을 필요로 할 것이다.
오늘의 시대를 주시하며 올해 열리는 WCC 제10차 총회의 주제를 “생명의 하나
52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God of Life, Lead us to Justice and Peace)
라고 정한 바 있다. 정의로운 평화로서의 샬롬의 길, 곧 사악한 세상의 길이 아닌
주님의 길로 우리를 인도할 원리는 주님이 지시하신 생명의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
제97회 총회는 “치유와 화해의 생명공동체운동 10년”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능력으로 자연과 세계의 문제를 치유하며 화해하
게 하는 생명의 능력을 구현하는 공동체로 거듭날 것을 확인한 것이다. ‘조에 아이
오니오스’로서의 알곡 생명의 원리만이 오늘과 같은 샬롬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다. 주님이 주신 생명을 통해 이 땅에 정의와 평화 및 창조의 보전이라는
생명선교를 하는 신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제7장 총회주제의 목회적 적용 53
제7장
총회주제의 목회적 적용:
목회 현장에서의 성경 읽기와 그 적용을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제98회 총회주제가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로 정해졌다. ‘그리스도
인’ 시리즈로 하면 이번이 세 번째 해로 - “그리스도인, 세상의 소금과 빛: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제96회),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다시 희망이 되
겠습니다!”(제97회)에 이어, 이제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교회와 성도 개개인의
사랑 나눔의 삶에 그 강조점이 주어져 있다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주제를 앞에 두고 다시금 질문하게 되는 것은 “무엇을 위한(For
What) 사랑을 나누는 삶인가?” 하는 것이다. 혹시나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는 신학적 명제가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명제와 대립되게 이해되
고 있지는 않는지, 또한 사랑으로 나눔과 섬김의 삶을 복음 선포, 즉 선교의 수단
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등.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오늘 다원
주의적인 우리 현실 속에서도 복음은 유일한 대안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을 해
가는 과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살 것인가?”라
는 질문에 답해 가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도 그럴것이 1990년대를 넘어서면서한국교회의 정체를 이야기하더니언젠가
홍성호 목사
54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부터 너도나도 입만 열면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세
상에속해있기에바로그세상으로부터외면당하고있다는말일텐데, 국가나여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그동안 성공의 열매에 취해 있던 탓도 있었겠지만,
외형적, 물량적 성장에 가려내면적, 질적성숙이 뒷받침되지못한 불균형, 곧복음
이 삶으로 살아지지 못한 측면이 이제는 세상으로부터 교회가 외면당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90년대 초에 소개된 용어임에도 최근 들어 ‘공
(적) 교회’(Public Church), ‘공적 신앙’이란 용어들이 심도 있게 거론되고 있는 것
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한국교회의 신앙과 실천이 그동안 지나치게 개인주
의적 혹은 개교회적으로 흘러갔다는 자기반성과 함께, 이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정통(正統, Orthodox)의 강조만큼이나 정행(正行, Orthopraxis)의 시대,
믿는 바대로 살아가는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그렇다면 목회적 영역에서 제98회 총회주제,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
들”은 어떻게 다루어질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나누는 삶은 항상 구원의 은총에 대한 응답, 곧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의 자발적인 나눔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응답
은 즉각적이라기보다 과정이기에 목회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할 과제들이다. 무엇
보다도 목회 현장에서 우리의 성경 읽기는 그 어떤 본문일지라도 그에 대한 응답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기에, 이런 과정을 예수님께서 우리에
게 주셨던 소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방향성과 함께 적용점을 찾아
보기로 하자.
2. 질문하는 사람(들), 또는 그 상황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어떤 율법교사의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문
으로 시작한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
이것은 목회의 현장에서 사랑을 나누는 삶을 이야기할 때 너무나도 쉽게 접하게
되는 그리스도인의 자기정체성과 함께 세상을 향한 관계성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위르겐 몰트만식으로 말하자면, 정체성(Identity)과적합성(relevance 또
는 involvement)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구분될
제7장 총회주제의 목회적 적용 55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느새 체질화되다시피 한 것이
바로 이런 구분이 아닌가 싶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 바로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문이다. “예수께서이르시되율법에무엇이라기록되었으며네가어떻게읽느냐”(눅10:26).
그 ‘어떤 율법교사’의 대답(눅 10:27)은 스스로가 가진 성경적 지식 범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소위 ‘하나님 사랑’(신 6:5)과 함께 동전의 양면격인 ‘이웃 사
랑’(레 19:18)은 적어도 율법교사라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학습되었을 것이고, 질
문해 오는 그 누구에게나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을 곁들여 얼마든지 설명해 줄 수
있는 항목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오늘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
는 게 아닌가 싶다. 적어도 오늘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자기정체성과
함께 세상을 향한관계성에대한 질문만 있는게 아니다. 그에 대한답은 이미 우리
에게 주어져 있다. 단지 그 답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바로 그리스
도인의 삶의 근간인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이 우리에게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도 잘 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바로 그런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이고, 하나님은 바로 그 공동체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도 잘
안다. 비록 예수믿는 사람이, 그리고 그믿음의공동체가완벽할 수는 없다할지라
도 우리가그 복음을 가지고 있기에더 나은 세상을꿈꿀수 있고, 하나님의능력이
있기에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되짚어 보아야 하는 현실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3. 예수님의 선언 - 아느냐? 그러면 행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눅
10:28).
이것은 오늘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응답의 문제를 말한다.
그 ‘어떤 율법교사’의 다음 질문, 그것도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질문했던 “그러
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는 질문은 평상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내용 파악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응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제98회 총회주제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과 관련한 성경 읽기
에서, 그 어떤 성경 본문과 관련해서도 독자가 성경의 인물이나 상황과 어떻게 동
56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화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그 본문의 적용, 곧 ‘사랑을 나눔’ 그 자체를 적용하는
것에 있어 제1차 관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나의 성경 본문(text)
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은 당대의 상황(context)에 비추어 오늘의 상황에 어떻
게 적용될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그 ‘어떤 율법교사’가 행했던
성경 읽기의 내용과 그 한계는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들 하나
하나에 자신을 대비하며 동화해 가는 과정에서, 어쩌면 “주님, 저는 아니지요?” 했
던 바로 그 인물과 상황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그 다음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단순 비교를 통해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 군상으로서의 강도, 자기 공동체에 충실했던 레위인과 제사
장 같은 사람들, 그러나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충실하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의 진의는 애써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라인홀드
니버가 이야기했던 ‘책임적인 자아’에 해당되는 인물로서 사마리아인. 인간은 하나
님, 이웃, 자기 자신에 대해 책임을 갖고 있는 존재이며, 이 책임이라는 것은 결국
오늘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 개개인들이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
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하나만을 두고도 오늘을 살
아가는 그리스도인들과 그 모임인 교회의 실체를 볼 수 있지 않은가? 이기적인 신
앙생활, 신앙과 생활의 이원화(Dualism, 또는 Disintegration of Faith and Life)
또는 배타성,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복음의 의외성 -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주변부 인물을 통해서 드러나는 - 등.
4.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
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가……”(눅 10:29-37).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그러면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사랑으로 나눌 것인가?
이것은 목회 현장에서의 성경 해석 문제, 곧 하나님의 말씀의 원래의 의도를 찾
아 그대로 살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거론했던 것처럼, 오늘 한국교회
의 문제는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말씀의 적용에서 소위 믿는 바와 실제 삶에
제7장 총회주제의 목회적 적용 57
있어서의 간격이 문제라는 진단이 정확하다면 심도 있게 다루어져야 할 부분이라
여겨진다.
1) 성경 해석의 문제
자, 이 문제를 이제 부산에서 제10차 총회를 갖게 되는 WCC 문건을 통해 한 번
생각해 보자. 2001년에 발간된 「Interpreting Together」라는 문건에서는 WCC
가 지향하는 성경 해석의 원리를 ‘응집(또는 일관성)의 해석학’(hermeneutics of
coherence)과 ‘의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suspicion)이라는 명제로 제시하
고 있는데,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 현장에서 귀담아 들어야 할 요소가 이 두 명제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기독교 신앙과 공동체의 통합적 일치를 명백히 함을 추구하는 그러한 해석을 ‘응
집의 해석학’이라고 불렀다. 이는 해석자가 해석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해석학적
과제의 비판적 실험적 부분은 ‘의심의 해석학’이라고 불려 왔다. 계속되어지는 과
정 속에서 책임적 에큐메니칼 해석학은 진리를 위해 봉사하되 의심에 의해 경종을
울리고, 또한 항상 응집을 목표로 한다.
곧 성경 본문(text)은 하나로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본문이 해석되는 과정
에서 주어진 상황에 비추어 왜곡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 의심의 해석학
은 바로 그것을 지적할 수 있으며, 특히 성경 본문에 대한 한 해석은 해석 그 자체
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문제로 연결된다는 차원에서 해석의 주체일 수 있는
교회에 대해 자기반성과 함께 삶의 문제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에 대해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문제이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그 대상을 향해 내가 먼저 경험한 사랑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일단 비유를 들고 난 다음 예수님께서 건넨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는 질문에 그 ‘어떤 율법교사’도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보아, 사랑을 나누어야 할 대상이 누구이며, 누구처
럼 나누어야 하는지는 아주 분명해졌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나타난 ‘어떤 율법교사’는 자신이 너무나도 익숙
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모든 율법의 강령이라 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염두
에 두고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물었다. 다른 말로 “내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58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자가 누구인가?”라는 자기중심적 의미를 담은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하여 예수님
께서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되물으셨다. 주님께서는 사랑
나눔의 대상에 대한 물음의 중심을 바꾸어 주신 것이다. 다른 말로, 중심이 바뀌지
않으면 사랑 나눔도 자기중심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사랑 나눔, 곧 이웃
사랑이란 내 중심에서 이웃 중심으로 생각과 관심이 바뀌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셈
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설교하면서 이렇게 해석했다고
한다. 강도 만난 자를 피해 간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고
치료해 준 사마리아인과의 차이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기가 강도 만난 자를 도와
줄 때 “내게 어떤 일이 생길까?”를 생각했고, 사마리아인은 자기가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지 않을 때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생길까?”를 생각했다는 것이다. 자기중
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사랑 나눔의 대상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그 과정뿐만 아니라 결과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일 년 연중 ‘행복 나눔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사랑
을 나누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데, 해가 거듭될수록 사역의 내용이 서서히 바뀌어
가는 것을 살펴볼 수 있었다. 바로 우리 중심이 아니라 소위 사랑 나눔의 대상 중심
으로 생각이 바뀌어 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를테면 2월 중에 시행하는 사랑의
연탄 나눔 같은 경우, 처음에는 겨울의 초입에 시행했는데, 이제는 봄이 오는 겨울
의 말미에 진행하고 있다. 그것은 겨울의 초입에는 국가나 기타 복지기관들로부터
충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지원이 이루어지지만, 봄으로 가는 길목에서는 그
마저도 어려운 지경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그런 시기에 한 집에
연탄 100장이면 하루 3장씩으로 계산할 때 봄이 오는 길목에서 한 달을 더 따뜻하
게 보낼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상황이 파악되고 나니까 연탄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
도 있어, 그 경우는 유류를 공급해 줌으로 마찬가지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또 여름에는 젊은이 사역부를 중심으로 농어촌 지역 봉사를 나가는데, 마찬가지
로 해를 거듭할수록 사역이 원숙해지는 경우들을 보게 된다. 작년 같은 경우에는
고흥 지역의 한 농촌 교회와 연계해서 사랑 나눔 사역을 진행했는데, 이를테면 준
비하는 과정에서 선물로 준비한 타월 한 장에도 사랑 나눔의 주체라 할 수 있는
우리 교회의 이름은 아예 빼고 그 지역교회 이름만을 인쇄해서 감사를 표현하여
복음을 듣고 교회를 나오게 될 때도 그 교회를 염두에 두고 나올 수 있도록 그렇게
진행했다. 사역의 내용에 있어서도, 처음 시작할 때는 연합해서 여름성경학교를
제7장 총회주제의 목회적 적용 59
인근 지역 여러 교회의 어린이들을 모아 진행했는데, 작년 같은 경우에는 지역교회
의 요청으로 장년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했다. 물론 장년이라 해도 거의 60대 이상
노년층이지만 200여 명 이상이 모여 마을 축제 성격을 띠는 그런 경우도 있었다.
우리의 관점만 조금 바꾸면 사랑 나눔 사역의 내용이 그만큼 더 풍성해지더라는
것이다. 올해는 정책적으로 다시 그 지역교회를 중심으로, 그래서 적어도 3년 이상
을 한 지역을 중심으로 사역을 진행해서 그야말로 피폐해진 농어촌 현실을 품고
단순히 하계 봉사활동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시 교회와 농어촌 지역교회가
연대해서 그 이상의 것을 찾아가고자 계획 중에 있다.
2) 사랑 나눔, 그 현장성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37).
여기 주님의 마지막 명령 중 ‘가서’라는 단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고난당한 자, 도움이 필요한 자를 보면서 돌아가고 말았다. 사랑이 필요
한 자를 회피하면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제사장으로서, 레위인
으로서 사랑에 대하여 설교를 하거나 가르치거나 생각을 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필요한 자를 회피하면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의 역사는 오직 도움이
필요한 자를 회피하지 않은 사마리아인으로부터 일어났다.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제98회 총회주제는 사랑을 나누는 현장에서 그 빛을 발할 수 있다.
오늘 우리 교회와 개개 그리스도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 바로 그곳이 사랑
을 나누는 현장일 수밖에 없다. 그 상황과 형편이 어떻든지, 또 기회가 주어지든,
주어지지 않든 그 어떤 경우에도 말이다.
5. 마무리하면서 - 사람을 나누는 목회를 위한 제언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제98회 총회주제로 채택되었지만, 사랑 나눔은 비단 제98회 총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또한 오늘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와 도전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
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교회의 본질, 또는 존재 이유 중 하나인 사랑을 나누는
삶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식의 분석에 따른 개선 차원의 문제도 아니다. 그러므로
목회의 한 영역만으로 제한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
60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개개인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총체적인 삶의 문제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총체적인 삶의 지향점을 이렇게 말한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
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
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이 말씀에서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은 곧 사랑을 나누는 목회에 대한 제안점이
될 것이다.
1) 다시 자기 정체성, 또는 자의식의 문제
요즘 일반 사회에서도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한다는 ‘펀(fun) 경영 리더십’이니, ‘섬김의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니 하면서 어떤 개인의 탁월한 리더십을 강
조하던 리더십에서, 공동체를 이끄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끌어
가는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다. 그만큼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역량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세상 안에 있는 우리 교회는 어떤가? 혹시나 여전히 한 개인의 탁월
한 리더십에 기대어 그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김무곤은 「NQ로 살아라」라는 자신의 책에서 현대사회의 성공의 척도는 IQ(지
능지수)나 EQ(감성지수)보다 NQ(Network Quotient, 공존지수), 곧 새로운 네트
워크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공존의 능력이라고 말하며, 놀랍게도 예수님을
NQ의 원조라고 주장한다. 그 내용은 한마디로 사랑을 나누는 삶을 말한다.
제98회 총회 주제성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 가운데
사랑 나눔을 위해 오셨다(막 10:45). 그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몸소 가난한 자
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목마른 자에게는 마실 것을 주셨다. 일방적으로 섬기며 나누신 것 같아 보이지만,
바로 그 소위 사랑 나눔의 대상들과 함께 오히려 삶을 공유하셨다. 마지막에는 자
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못 박히셨다. 예수 그리
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그 사랑을 온전히 나누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하시고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만이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그 사랑을 나누신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눌 수 있는 제자들을 부르셨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
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라고 하시면서(요 13:15) 이런 행동을 통해
제7장 총회주제의 목회적 적용 61
자신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말씀하시고 동시에 사랑을 나누는 삶에 대한 가르침을
실천적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
와 함께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서 속에서 제자들은 예
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 나눔에 대한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사도행전에 가면 오순절 성령 강림의 경험 이후에는 그 모습이 현저하게
달라져 있다(행 2:42-47). 이후 이방 지역인 시리아 안디옥에서 이런 제자들의
사랑을 나누는 삶을 본 헬라인들이 제자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게 되
기에 이르렀다(행 11:26). 특히 여기 ‘제자들’은 예수님의 12제자가 아닌 안디옥에
있는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을 가리키고 있다는 측면에서, 바로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참 정체성이 드러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에베소서 4:12의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라는 이 말은 그리스도
인의 자기 정체성의 확인 내지 회복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에서 “온전하게 함”(καταρτισμος, 카타르티스모스)이라는 이 말
은 “구비하다, 바로 잡다”라는 뜻을 가진 καταρτιζω(카타르티조)에서 유래했는
데, 사실 이 단어는 몸의 모든 부분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뼈 마디마디
를 잘 맞추는 것을 의미하는 의학 용어이다. 게다가 사도 바울이 이 말을 할 때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성도, 바로 앞 11절을 보면 특히 영적 지도자들에
게 한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그리스도인’과 ‘구비’라는 것을 연결하
여 영적 지도자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골고루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중 그리스도인의 자기정체성의 회복, 그것이 그 ‘온전하게 함’의 첫
번째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2) 사랑을 나누는 삶도 가르쳐야 한다.
위에서 살펴본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인 예루살렘 교회는 오늘 우리 교회가 정립,
또는 회복해야 할 중요 커리큘럼의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행 2:42-47). 그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선포인 케리그마(kerygma),가르치는 활동인 디다케
(didache),함께 모여 떡을 떼며 교제하는 코이노니아(koinonia), 오로지 기도하
며 예배하는 레이투르기아(leitourgia),그 필요를 따라 궁핍한 사람을 돌보는 디
아코니아(diakonia)인데, 이 다섯 영역은 교회가 교회 되기 위해 서로 연결되어 피
차를 보완하는 중요 커리큘럼이다. 다른 말로 그 어느 것도 배제되어서는 안 되며,
또 피차에 균형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62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그런데 여기서 깊이 보아야 할 것은 교회의 커리큘럼이라 할 이 다섯 가지 요소
가 사랑을 나누는 삶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이다. 섬김을 뜻하는 성경의 히브리어 ‘아바드’( עבד )는 놀랍게도 “경작하다”(cultivate, 창 2:15)라는 단어와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다른 말로, 태초로부터 피조 세계를 경작하는 ‘노동’은 창조주 하
나님을 섬기는 ‘예배’와 분리되어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물론 인간의 타락은,
곧 하나님을 향한 섬김을 거부함으로 결국 피조물에 대한 섬김(경작)의 단절로 이
어져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된다(창 3:18).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했
지만, 그 결과는 피조 세계를 섬김으로 얻는 소출마저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이후 오경에 사용된 ‘아바드’의 용례들은 이스라엘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라는 하나님의 선언(출 8:1), 종의 주인에 대한 노동(출 21:2, 섬기는 ‘종’을의미하는명사형‘에베드’), 또는레위인의하나님을향한봉사(민4:23, 8:
19)를 묘사함으로 인간의 타락과 추방 이후에도 노동을 통해 피조 세계를 섬기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할
것이다. 이런 용례 하나만 보더라도 사랑을 나누는 삶이란 그 삶이 예배이고, 또한
예배가 삶이라는 명제를 드러낸다.
결국 사랑을 나누는 삶이란 이런 맥락에서 목회의 전 영역 - 예배로부터 시작하
여 말씀의 선포와 가르침, 친교를 통하여 대사회적 의식의 확장 및 사회적 돌봄
등의 일련의 과정으로 나아가는 가르침과 그 시행이 있어야 할 것이다.
3) 사랑 나눔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그 다음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되 어디에,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것이다. 분명히 교회는 세상 속에 세워지고,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리스도인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바로 그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구현하면서 살아
간다. 더군다나 이 말씀 가운데 ‘성도의 온전하게 됨’, ‘봉사의 일을 함’, 그리고 ‘그
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일련의 과정인 것을 기억한다면,
바로 사랑 나눔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상 가운데 세워 가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결국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
간다는 것이 그저 비아냥거림처럼 들리는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면, 사랑을 나
누는 삶은 세상과의 소통을 위한 중요한 통로여야 하며, 결국 교회와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신앙과 삶이 지극히 사적 영역으로만 제한되어 가고 있는 오늘의 맥락에
서 사랑을 나누는 삶은 개인주의, 개교회주의, 교파주의 등을 넘어서서 세상 가운
제7장 총회주제의 목회적 적용 63
데 존재하는 공적 공동체로서의 교회(공교회)와 공적 신앙의 재정립을 가져오는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작하면서 질문했던 것처럼, 교회와 그리스도인 개개인
의 자기 정체성과 적합성에 대한 질문,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
제는 바로 이 사랑을 나누는 삶을 통해서 답해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을 나누는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차원이 세상을 향한 청지기로서 삶과 통합
되는 차원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서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에 대해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
리고 그리스도인은 만물을 섬기는 종이며 모든 이에게 예속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대단히 중요한 하나님의 말
씀을 갈라디아서에서 접하게 된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이것은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으로 세상을 향해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하는 사람
들임을 말한다. 원래 축복이라는 영어 단어 blessing은 ‘피 흘리다’라는 뜻을 가진 ‘bleed’에서 온 말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심’(bleeding)으로 하나
님의 ‘복’(blessing)이 우리에게 옴으로 우리는 그야말로 그 복을 마음껏 누리는 자
유인으로, 이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는 수준을 넘어 “사랑으로써 역
사하는 믿음”(갈 5:6)을 통해 세상을 향해 그 복이 흘러넘치는 통로가 되어야 함
을 의미한다.
64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제8장
주제와 목회 - 이 시대의 목회와 실천
1.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사도행전 11장에 등장하는 안디옥 교회에서 최초로 시
작되었다. 2천 년 전, 안디옥은 그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제국 내에서 로마,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서열 3위의 도시로, 상주하는 인구만 50만 정도 되는 대도시
였으며, 중요한 상업도시로서 ‘동방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다인종
이 모여 살고 다문화를 가지고 다언어를 사용하는 국제도시인 안디옥에는 다양한
문화와 민족적 배경을 가진 적어도 4종류의 민족들이 모여 살았다. 첫째는 그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인들이었고, 둘째는 민주주의와 문화의 꽃을 피운 그리
스인들이었으며, 셋째는 주로 하층 계급을 형성하고 있던 시리아 본토인들, 그리
고 넷째는 이런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게토를 이루어 유일신 경외 사상과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었다. 이러한 다양성과 화려함이 존재하는 도
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 흘러들어 왔다. 예루살렘에서 핍박을 피해
아시아로 흩어졌던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영적인 상태가 황량한 벌판과도 같
은 안디옥에도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초대교회에서 기둥같이 쓰임
받던 충성스러운 일꾼 바나바와 나중에 바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거듭난 사람
사울이 있었다. 그들이 전한 예수 십자가의 복음에는 하늘 생명의 능력과 인간의
조재호 목사
제8장 주제와 목회 - 이 시대의 목회와 실천 65
근본적인 존재 변화를 이끌어 내는 능력이 들어 있었다. 이들은 입만 열면 그리스
도(Christos)를 말하는 사람들이었기에 교회 밖 사람들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따
르는 사람들(Christianoi)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드디어 안디옥에 ‘그리스도
인’이라는 전혀 다른 5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리스도인
은 복음 안에서 거듭난 사람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그분의 제자들
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과 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사랑의 최종 메시지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며,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는 세상 가운데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떨어져 사
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사는 사람들이며, 세상 속에서 나눔과 섬김이
라는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2.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로서의 오늘날의 교회
오늘날의 기독교와 교회는 만만치 않은 과제들을 안고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뿐
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인데, 가장 핵심적인 조류 중의 하나는 18세기 이후
서구 사회의 계몽주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적으로 만연되어 있는 세속화 현
상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이미 하나의 진리보다는 객관적 진리를 추구하고 다양
성을 존중하는 포스트모던 사회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이는 기독교 선교에
심각한 장애요소로 작용하고 있으며, 지역교회 목회에 큰 도전을 주고 있다. 데이
비드 보쉬는 이 같은 사회현상의 분석을 통해 서구 교회가 시간이 갈수록 노령화되
고 공동화되어 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교회의 미래에 대하여 심각한 질문을 던지
고 있다. 이러한 외부적인 위협으로 말미암아 교회 공동체는 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데, 더 심각한 것은 기독교 진리 이해와 기독교적인 삶의 실천 상실이라는 내
부적 원인도 이 같은 사회현상에 한몫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
인의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입으로 자신의 신앙고백
을 명확히 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삶의 자리에서 믿음의 고백대로 살아가
야 하는 요구를 더 급격하게 받고 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에서 “나는 그리
스도인으로서 이렇게 살아갑니다.”로 나아가야 하는 성경적 요청과 시대적 요구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66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이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지 120년이 넘는 역사를 가
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복음 전래 역사가 그리 긴 것은 아니지만, 세계 선교역사에
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그 부흥의 역사는 굵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교
회는 많은 어려움과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교회의 영적 역동성이 크게 상실되었
고, 교인들의 신앙적 태도가 이전과 다르게 회의적으로 바뀌었으며, 이에 따라 교
회 내의 갈등 또한 폭넓게 자리 잡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사회가 교회를 향하여
냉소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한국교회의 위기를 진단하는
내용들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외부 요인과 내부 요인을 들 수 있다. 외부
적인 요인으로는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세속화의 물결을 대표로 들 수 있는
데, 기독교가 다원주의 조류 가운데서 유일한 길(the way)이 아니라 하나의 길(a
way)이 되어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거대 전환기 가운데 한국교회만이 겪
고 있는 내부적인 요인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데, 개교회주의, 물질성공주의, 변
화 없는 성장주의, 이로 말미암는 사회로부터의 신뢰성 상실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환기에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성령의 역동성 회복을 통
한 신앙 회복을 가져오면서 교회의 울타리 너머로 나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섬김과 나눔의 자리로 나아가야 할 것을 요구받는다.
3. 선교적 교회운동
이러한 상황적 변화 속에서 강력한 대안 모색을 따라 선교적 교회운동이 일어나
고 있다. 선교적 교회운동은 교회의 존재 목적과 존재 양식에 대한 새로운 숙고가
일어나면서 나타나 지난 10여 년 동안 교회 변혁을 이끌어 온 운동(Movement)이
었다. 선교적 교회론의 역사적 출현 배경은 1952년 독일 빌링겐에서 열린 국제선
교협의회(IMC,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여기에
서는 선교적 교회운동의 실질적인 출발점이 되었던 영국과 미국의 상황을 잠시 살
펴보려고 한다.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이 35년간 인도에서의 선교 사역
을 마치고 본국인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의 영국 사회는 세속화와 종교다원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었고, 교회는 영적 위치와 정체성을 상실한 채 잔뜩 움츠리고 있었
다. 이에 복음과 변화된 현대사회의 문화적 세계관 사이에서의 교회적 대응을 모색
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운동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1990년대 미국에서 복음과 문
화를 연결하는 네트워크(GOCN, 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를 이끌어 냈
제8장 주제와 목회 - 이 시대의 목회와 실천 67
고, 이를 바탕으로 교회존재론의 새로운 연구와 교회 실천의 과정 가운데 선교적
교회론이라는 교회 존재와 본질적 사명에 관한 새로운 접근이 일어났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4가지 유형을 4M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교회의 본질과 사명
을 잃어버린 채 움직이지 않는 오래된 유물처럼 되어 버린 박물관 교회(Museum
Church), 교회가 교회 됨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큰 건물 유지에만 어쩔 수 없
이 급급해하는 건물 유지 교회(Maintenance Church),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즐비
하여 생명력 없는 프로그램 중심의 사역 중심 교회(Ministry Church), 그리고 교
회의 본질인 선교적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 등이다.
데릴 구더는 선교를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여러 가지 영역 가운데 한 가지 프로
그램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로 보았기 때문에 교회를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신
사람들로 정의했다(not program-focused, but people-focused). 다시 말하면
선교와 봉사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적 존재이고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
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가 자기의 울타리를 넘어 하나님의 세상인 지역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나아가는 역동적으로 확장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 요구된다.
미국의 오스틴 시티 라이프 교회의 조나단 닷슨 목사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제
시하고 있다. (1) 비기독교인들과 식사하라. 직장이나 가정에서 신앙을 갖지 않은
동료들이나 이웃들과 식사하라. 교회 공동체의 내부 문화에서 과감하게 나오라.
(2) 자동차를 이용하지 말고 집 근처 동네나 아파트 주변을 걸어라. 만나는 사람들
에게 인사하고 말을 걸어라. 기름도 아끼고 지구도 보존하고 이웃을 구원하기 위한
방식이다. (3) 같은 장소에 같은 시간에 가서 웃고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가 돼라.
(4) 비기독교인들과 취미를 함께하라. 운동이나 음악 등 취미생활에 함께 참여해서
나누라. 기도로 준비하고 의도적으로 노력하고 꾸밈없이 대하라. (5) 동료와 이야
기를 나누라. 휴식시간이나 일과 후 동료와 시간을 가지고 당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라. 일하면서 선교하라. 이웃 어머니들과의 모임을 만들고 그
들을 위해 기도하라. (6) 집 주변이나 회사 주변에서 비영리단체를 찾아 자원봉사
를 하라. 이때 이웃이나 친구를 초대해 함께 가라. 당신의 교회가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라. (7) 지역사회 행사에 참여하라. 집에서 TV를 보거나 인터넷 검
색을 하는 대신 지역사회 행사에 선교적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참석하라.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문화에 대해 배우라. (8) 이웃을 섬겨라. 크고 작은 이웃 일
에 도움을 주라. 아파트 사무실, 경찰서, 소방서에 가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는지
물어보라. 당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면 기꺼이 도와주라.
68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선교적 교회운동이 현시대적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지역
교회론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교회론적 이유와 목회 현실적인
이유가있는데, 이것은교회의본질에대한자성적성찰의결과이다. 지금까지교회
론은 세상과 교회라는 이중적 구조의 틀 안에서 설명되어졌다. 특별히 1980년대를
지내면서 교회성장론의 확산 가운데 교회의 양적 증대 과정 속에서 ‘오라’(coming)
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는 교회가 교회 자체 생존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
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을 따라 교회에서 세상으로 ‘가
라’(going)는 구조로 전환하는 의식의 전환을 갖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
중심의 구조에서 하나님 중심의 구조로의 전환을 따라, 하나님은 교회를 세상으로
보내신다는 새로운 각성이다. 목회 현장의 현실적 이유는 교회의 선교 내지는 봉사
가 사회에서의 역할에 한계를 맞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자리하
고 있는 사회와 지역 속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
는 사회와 문화적·생활적 소통을 할 수 없는 고립된 자족집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교회는 새로운 자기 인식과 본질적 접근을 해야 한다. 여기에
한국교회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교회 밖 세상에서 실천하기 위
한 선교적 교회운동이 요청되는 것이다.
4. 지역사회로 들어가기:섬김과 나눔을 통한 사랑의 실천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의 삶의 방식의 출발은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에서 출
발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의 실천 사명자로 선택하신 것은 우리의 특권이라
기보다는 세상을 섬기도록 하는 거룩한 책임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잃어버린 사람
들, 소외당한 사람들, 착취당한 사람들, 버려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로와 치유의
손길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세상으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성령 안에서
회복시키시는 하늘의 일을 하게 하셨다.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이를 프로그램이 아니라 삶으로 보이셨다.
지역교회는 지역사회에서 새로움을 찾아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지역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라는 것은 곧 지역교회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의 가
시적 교회는 지역의 특수한 상황 가운데 놓여 있다. 그런 까닭에 지역교회는 외부
에서 가져온 매뉴얼화된 프로그램을 무분별하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만의
고유한 필요에 따라 목회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것이 지역교회의 특수성이다.
제8장 주제와 목회 - 이 시대의 목회와 실천 69
한스 큉은 “지역교회는 전체교회의 작은 세포가 아니다.”라는 말로 지역교회의 특
수성을 논했다. 전체교회는 지역교회와 그것의 구체적인 행위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지역교회는 지역과 구별되어 존재하지 않으며, 지역의
일부분이다. 따라서 지역사회의 부분으로서의 교회는 단지 프로그램의 연출을 떠
나 사회 속에 스며들어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지역교회는 지역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프로그램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서 사랑을 실천하며 지역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순더마이어(Theo Sundermeier)는 세상과 교회의 관계를 설명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은 교회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지향한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
님의 사랑과 관심은 세상에 적용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적 활동의 궁극적
목표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 세상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 세상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기만족이나 자기보전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교
회를 사용하셔서 궁극적으로 세상을 인도하시고 교회의 사명을 통해서 세상을 섬
기도록 하신다.
교회의 사랑의 실천과 그 동기는 교회 자신에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본
질로부터 출발한다. 선교적 차원에서 볼 때 성경의 하나님은 보내시는 하나님이시
다. 하나님은 이 땅의 하나님의 일의 집행과 성취를 위해서 사람을 보내신다. 하나
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고향과 친척을 떠나 그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 보내셨
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보내시기 위함이고, 그분의 보내심은
그분의 일을 진행하고자 하심이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압제받는 이스라엘 백성
의 해방을 위해서 모세를 보내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계속해
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그리고 때가 차매 하나
님은 마침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보내시는 하나님은 ‘원심적
존재’이시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대단한 원심력을 가지고 있다. 사랑의
원심력은 교회를 넘어 교회 밖으로, 세상으로 뻗어 나간다.
교회는 지역과 단절되어 있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지역 가운데서 이웃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지역교회는 지역을 책임지도록 그 자리에 세우신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 도구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사랑의 통로로서의 교회 공동체
는 지역공동체인 이웃을 위한 교회를 넘어서서 지역공동체와 함께하는 교회로 나
아가야 한다.
70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5. 나가는 말
한국 사회 전체의 NGO 사회복지 혹은 사회봉사의 영역 가운데서 기독교 사회봉
사의 비중이 결코 작지 않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의 섬김과 나눔은 사회 일반의
사회봉사 영역을 넘어선다. 교회의 섬김과 나눔은 교회의 본질적 위치이며, 그 출
발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시기를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기 위함이라고 하셨다(막 10:45). 예수님의 섬김의 삶은 타자를 위한
희생적사랑이었고, 그나눔의깊이는전존재를세상에다주시고십자가에서죽으
심을 통해 드러난다. 예수님의 섬김과 나눔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핵심이다. 예수님의나눔과섬김은그당시사회약자계층전반에걸쳐실행되었다.
병든 자, 강도 만난 자, 귀신 들린 자, 헐벗은 자, 옥에 갇힌 자, 목마른 자, 죄지은
자, 나그네된자들은그리스도의섬김의대상이었다. 예수님은제도나형식의경직
성을 벗어나서 사랑의 본질적 유연성을 가지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에
게 접근하셨다. 예수님의 섬김의 울타리 밖에 존재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의사는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에게 필요하듯이, 예수님의 섬김의 대상은 하나
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고통 받고 소외당한 모든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이 사랑의 실천은 초대교회 안에서 더욱 확장되어 나갔
다. 교회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고있었던까닭에섬김과나눔이교회사역의핵심주제가되었고, 예수님의사랑
의 행함과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이는 지역교회는 예수 그
리스도의 유기체적 몸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의 뜻이 행해지는 곳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십자가 안에서 분리될 수 없는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교회의 나눔과 섬김은 시대적 요청 이전에 예수님의 삶의 모본을 따
르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고,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의 내용이다.
제9장 주제와 교육 - 교회에서의 나눔 교육 71
제9장
주제와 교육 - 교회에서의 나눔 교육
‘빌과 멜린다 게이츠 재단’(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의 홈페이지에서
주목할 만한 문구를 발견할 수 있다. “나눔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
다.” 즉, 나눔은 교육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여러 실증적 연구를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우선 미국의 비영리 연
구기관인 ‘인디펜던트 섹터’(Independent Sector)의 연구에 의하면 어린 시절 나
눔의 경험은 성인 시절의 나눔과 봉사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이 연구보고에
의하면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나눔을 실천했던 사람들의 66.80%가 성인이 되어서
도 나눔을 실천한 데 비해, 이 시기에 나눔을 실천해 보지 못했던 사람들 중 성인이
되어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고작 33.20%에 불과했다는 것이다.28)
다음으로 「동아일보」가 서울 양천구의 한 초등학교 6학년 110명을 대상으로 ‘나
눔’에 대한 생각을 설문조사하여 보도했다. 여기서 “스스로 찾아서 봉사활동을 해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63%가 “없다.”고 답했다. “왜 봉사활동을 하지 않느
냐?”고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몰라서”라는 답변이 42명
으로 가장 많았다. 그리고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의견도 10명이나 되었
다.29) 즉, 나눔을 실천하지 못하는 학생들의 가장 큰 이유가 ‘몰라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 우리 사회에 ‘나눔 교육’이 강조되고 있다. 2004년부터 ‘아름다운재
단’에서 본격적인 나눔 교육을 시작하였고, 그 이후 비영리단체들을 중심으로 나눔
박봉수 목사
72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교육이 확산되어 왔다. 2008년에는 나눔 교육과 관련된 항목을 국가 교육과정에
포함시키기 위한 협의가 진행되었고,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본격적으로 나
눔 교육이 반영되기 시작했다.
기독교 신앙의 영역에서도 ‘나눔 교육’은 절실하게 필요하다. 우선 나눔에 대한
실천을 주님만큼 강조하신 분도 없다. 요한1서 3:16~1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
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그
리스도인들은 주님께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나눔으로써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다. 고린도전
서 2:16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그러니까 바울은 성
경적인 재정 원리를 수행하면서 ‘성경적 나눔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지 깊이 고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바울은 이런 고민을 기초로 성경적 나눔 교육을 실
시했던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 한국교회는 나눔 교육이 거의 전무한 상태이다. 성경 말씀
에 기초해서 나눔을 강조하고는 있으나 나눔 교육이 실행되지 않기 때문에 나눔의
필요성은 알아도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나눔이 실천되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오늘 한국교회가 나눔을 강조하는 데 머물지 않고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나눔 교
육을 실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1. 나눔 교육이란 무엇인가?
나눔 교육은 국내에서는 ‘아름다운재단’이 처음으로 시도하였다. 이 재단에서는
2003년 서울 시내에 있는 두 개의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특별활동 시간을 이용한
시범 나눔 교육을 진행했다. 그리고 이 시범수업을 통해 2004년 ‘나눔 교육’이라는
타이틀로 본격적인 나눔 교육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이 재단에서는 나눔 교육을 “학습자에게 빈곤, 장애 등에 처해 있는 사회적 약자와 나를 ‘수평적 관계’로 인식
하고, 나눔이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한 적극적인 참여의 방법이자 사회 구성원으로
제9장 주제와 교육 - 교회에서의 나눔 교육 73
서의 즐거운 책임임을 받아들이도록 이끄는 ‘열린 교육’이다.”라고 정의했다.30) 여
기서 주목할 부분은 나눔 교육이 타인을 나와의 수평적 관계로 인식하고, 기부와
봉사의 중요성과 실천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근자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나눔을 실천한다는 것이 선택적 활동이
아닌 사회 구성원이자 시민으로서의 책임으로 인식하게 이끄는 교육을 뜻하는 방
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눔 교육을 단순히 불우이웃에게 동정을
베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나눔을 베푸는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즉 가정, 학교, 지역사회 전체에서 나눔을 자연스럽게 느끼고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나눔 교육이 베푸는 사람들에게 친사회적 가치와 시민
으로서의 참여의식을 높이고 직접적인 나눔 행동의 실천을 통한 지역사회 참여를
가능케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교육적 활동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물론 교회에서의 나눔 교육은 일반사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이런 나눔 교육과 똑
같이 정의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눔의 목적과 나눔의 방법 그리고 나눔의 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교회에서의 나눔 교육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1) 기독교적 나눔을 가르치는 교육
교회에서의 나눔 교육은 우선 기독교적 나눔을 가르치는 교육이어야 한다. 일반
시민사회에서 펼치는 나눔 운동과 기독교 공동체에서 펼치는 나눔 운동은 가진 것
을 나눈다는 점에서는 같아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사상적 맥락은 다르다. 기독교
적 나눔 교육은 이 점을 가르쳐야 한다.
기독교적 나눔의 핵심은 나눔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펼치신 하
나님 나라 운동 그 자체라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나눔을 역설하신 것은 단순히 자
선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치시면서 나눔을
하나님 나라 운동의 소중한 방법적 틀로 사용하셨다. 즉, 가진 자들로 하여금 나눔
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참여토록 하셨다. 반대로 나눔을 실천하지 않는 자들은 하
나님 나라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시기도 하셨다.
이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서의 나눔은 초대교회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펼쳐졌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서의 나눔의 독특한 특징을 보여 준다.31) 즉,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서의 나눔의 세 가지 원리를 보여 준다. 첫째는 자발적인 나눔의 원
리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나눔은 성령의 감동으로 자발적으로 시작되었다.
어떤 요청이 있거나 강요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나눔의 필요를
74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깨닫게 되었고, 성령의 역사로 나눌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래서 자발적으
로 나눔을 실천할 수 있었다. 둘째는 지속적인 나눔의 원리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
회에서 나눔은 지속적이었다. 한두 차례 행사적 성격으로 이루어진 나눔이 아니었
다.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지속적으로 채워 주기 위해 교회 안의 나눔은 지속적
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희생적인 나눔의 원리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나눔
은 자기의 소유를 팔아 행하는 나눔이었다. 가지고 있는 여유분을 나눈 것이 아니
다. 어떤 이들은 땅을 팔아 나누었고, 또 어떤 이들은 재산을 팔아 나누었다.
교회에서의 나눔 교육은 이와 같은 기독교적 나눔을 가르치는 교육이어야 한다.
2) 기독교적 나눔을 실천케 하는 교육
교회에서의 나눔 교육은 기독교적 나눔을 아는 일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나
눔은 구체적인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적 나눔 교육은 나눔을 실천케
하는 교육이요, 나아가 그 자체로 프락시스(praxis)여야 한다. 여기서 프락시스란
변화와 통찰을 일으키는 비판적 성찰에 의해 영감된 창조적 행동을 말한다.32) 그리
고 비판적 성찰이란 기독교 메시지를 기초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것을 말한다. 또한 창조적 행동이란 비판적 성찰로
이루어진 통찰과 대안을 구체적으로 실행해 가는 것을 말한다.
프락시스로서의 나눔 교육은 다음의 두 가지 교육 활동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행동 속에서의 앎’(Knowing-in-Action)이다. 이것은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알
아 가는 과정을 말한다. 실제로 나눔을 실천해 보면서 나누는 법을 습득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행동 속에서의 성찰’(Reflection-in-Action)이다. 위의 ‘행
동 속에서의 앎’이 특별한 상황 하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행동 속의 앎’이 특
별한 상황 속에서 적절치 못해 나눔에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때 학습자는
성찰을 해 보게 된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보다 나은 나눔을 생각
해 가게 되는 것이다.
2. 나눔 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
일반적으로 나눔 교육은 하나의 프로그램 형태로 진행된다. 대상자를 모집하고
이들을 정해진 프로그램에 참여토록 하여 교육해 가는 방법이다. 국내에서는 아름
제9장 주제와 교육 - 교회에서의 나눔 교육 75
다운재단의 나눔 교육 프로그램33)이 대표적이고, 외국의 사례로는 영국의 ‘옥스팜
(Oxfam) 프로그램’34)과 미국의 ‘러닝투기브(Learning to give) 프로그램’35)을 대
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런 프로그램들의 공통점은 크게 두 가지 교육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인지적 교육방법이다. 예를 들어 토론하기, 관련된 자료 읽기, 자신의 생각
을 쓰기 등이다. 그리고 각 나라의 상황에 따라 미디어를 많이 활용하기도 하고,
문제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고, 또 특정 인물에 대한 모
델링 수업을 활용하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경험적 방법이다. 구체적으로 나눔을
실천해 보는 방법을 말한다. 대체로 모의 활동을 통해 나눔을 경험해 보거나, 모금
행사를 실시하거나, 나눔을 실천하는 단체와 연계된 자원 활동을 하는 것과 같은
방법을 활용한다.
교회에서의 나눔 교육은 이런 일반 나눔 교육을 벤치마킹하여 나름대로 기독교
적 나눔 교육을 구성해 갈 수 있을 것이다.
1) 나눔 교육 프로그램을 통한 교육
교회에서의 나눔 교육은 우선 나눔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실시할 수 있다. 즉,
나눔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이 프로그램을 이수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나눔 교육 프로그램의 한 예로 다음과 같은 프로그램을 구성해 볼 수 있다.
<프로그램의 개요>
일 정 / 10주 과정
인 원 / 30명 전후(5개 조 편성)
진 행 / 주 1회, 매 회 100분씩 진행
내 용 / 1주:기독교적 나눔이란 무엇인가?
2주:그리스도인들은 왜 나누어야 하는가?
3주:예수의 나눔
4주:구약의 나눔
5주:신약의 나눔
6주: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가?
7주:나눔의 실천Ⅰ
8주:나눔의 실천Ⅱ
76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9주:나눔의 유익
10주:나의 나눔의 비전
방 법 / 이론적 방법과 실천적 방법을 병행한다. 우선 이론적 방법은 강의,
주제 발표, 토론, 탐구 및 조사 등을 활용한다. 다음으로 실천적 방
법은 나눔의 현장 방문, 나눔의 모의 실습, 나눔의 기획 및 실천 등
을 활용한다.
교회에서는 이와 같은 나눔 교육 프로그램을 개설한다. 특히 교회학교용 프로그
램, 청년용 프로그램, 그리고 장년용 프로그램으로 프로그램 자체를 세분화하여
운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교인들을 모집하여 이 프로그램을 이수하게
한다. 그래서 여러 해를 지나며 점점 많은 교인들로 하여금 이 프로그램을 이수케
할 필요가 있다.
2) 교회의 나눔 사역을 통한 교육
교회에서의 나눔 교육은 교회가 실시하고 있는 나눔 사역에 참여케 함으로 보다
실제적인 나눔 교육을 실시할 수 있다. 교회가 실시하는 나눔 사역은 성격상 다음
의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 이벤트성 나눔 사역
교회는 이벤트성 나눔 사역을 실시하면서 교인들에게 나눔을 교육할 수 있다.
여기서 이벤트라 함은 사람들이 모이도록 모임을 개최하여 정해진 목적을 실현시
키기 위해서 행해지는 행사를 말한다.36) 교회가 실시할 수 있는 나눔 이벤트는 독
거노인, 소년소녀 가장, 노숙자들과 자매결연을 맺는 사랑의 띠 이벤트, 어려운 이
웃을 돕기 위한 바자회와 같은 후원 이벤트와 농어촌 교회 돕기 직거래 장터와 같
은 참여 이벤트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이벤트는 우선 설교를 통해서 그 의미와 취지를 알릴 수 있다. 이때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나눔을 깊이 생각해 보게 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동기
를 유발해 낼 수 있다. 다음으로 인터넷 홈페이지나 홍보 전단을 통해 나눔의 목적
과 나눔에 참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 등을 알릴 수 있다.
이런 이벤트성 나눔 사역을 통해서 교인들은 자연스럽게 기독교적 나눔을 배우
게 되고 또한 참여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 그리고 점차 나눔의 사람으로 자신을
세워 가게 될 수 있다.
제9장 주제와 교육 - 교회에서의 나눔 교육 77
(2) 정규적 나눔 사역
교회는 정규적 나눔 사역을 실시하면서 교인들에게 나눔을 교육할 수 있다. 교
회는 상설 나눔 사역을 위한 조직을 두어 정규적 나눔 사역을 실시할 수 있다. 노숙
자 사역팀, 푸드뱅크 사역팀, 소년소녀 가장 사역팀 등을 들 수 있다. 교인들로 하
여금 이런 팀에 참여하여 봉사하면서 기독교적 나눔을 배우게 할 수 있다.
그중에푸드뱅크사역팀을예로살펴보자. 푸드뱅크사역이란지역의독거노인들
에게 정기적으로 반찬을 제공해 주는 사역을 말한다. 이 사역에는 여러 봉사자들이
필요하다. 후원자들을관리하는팀, 음식을만드는팀, 배달하며독거노인들을보살
피는 팀 등이다. 교인들이 각 팀에 참여하여 정규적으로 이 사역을 담당케 된다.
이때 교회는 참여하는 이들을 교육하게 되는데 이 교육을 통해 참여자들에게 기
독교적 나눔을 가르칠 수 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이 사역에 후원하고 기도하도록
홍보하면서 전 교인에게 역시 기독교 나눔을 교육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나눔은 교회의 본질적 기능 가운데 하나이다. 교회의 본질적 기능의
영역인 디아코니아(Diakonia)의 가장 대표적인 사역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눔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고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위성도 인식하고
있지만, 정작 나눔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 원인
은 나눔의 실천에 대해 교회가 교육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교회가 나눔 교
육을 실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교회가 본격적으로 나눔 교육을 실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반사회에서
나눔 교육이 확산되면서 나눔의 실천이 활성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가 이 나눔
에서조차 주도권을 빼앗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대사회적 이미지
회복이 절실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의 나눔의 실천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한국교회가 나눔의 교육에 나서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그래
서 교인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구체적인 안내를
제공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37)
78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제98회 총회
주제설교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마가복음 10:45
샬롬! 생명의 주인 되시며 정의와 평화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
와 사랑이 제98회기 총회와 총회 산하 65개 노회, 8,305개 교회, 3백만 성도들에
게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돌이켜 지난날을 바라볼 때, 에벤에셀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벅찬 기대와 소망 가운데 총회 창립 100주년을 지내고 새로운 2세기
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러나 지난 회기 우리 총회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도전
과 시련을 안팎으로 겪어야 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거꾸로 된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역사 앞에 부끄러운
지난 시간을 반성합니다. 그래서 ‘작은 이들의 벗’으로 사회의 그늘지고 어두운 곳
으로 다니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일에 전심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자비로우
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힘과 용기를 주셔서 주신 사명을 감당케
하시고 오늘 이 자리에 모이게 하셨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할렐루야!
일찍이 교회는 이 민족의 희망이었습니다. 국권이 상실되고 나라가 해체되는 절
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총회가 조직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제가 드리운 깊은 어둠
속에서 진리의 횃불을 들고 이 민족을 이끌었습니다. 해방과 더불어 찾아온 민족분
단의 아픔과 전쟁의 비참함 속에서 교회는 애통하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김동엽 목사
제98회 총회 주제설교 79
위로자였고, 전쟁으로 부모와 남편을 잃은 고아와 과부의 보호자였습니다. 독재의
그늘 아래 인권이 유린되고 정의가 무너질 때, 공의를 선포하는 광야의 소리였습니
다. 이처럼 교회는 인도자, 위로자, 보호자, 예언자의 자세로 이 민족을 위한 시대
적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기독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부흥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 시기에 세우는 교회들마다 부흥에 부흥, 성장에 성
장을 거듭했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청년들의 찬양소리, 어른들의 기도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귀한 은혜를 주셨지만 달콤한 성장의 열매에 취하면서 교회는
깊은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지도자대로, 성도들은 성도들대로
세속가치만 추구하며 교회 본래의 사명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저마다 육신의 욕
심을 취하면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물질과 명예 앞에서 갈등과 분열을 일삼았습
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지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상
처를 받고 말았습니다. 실망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면서 교회가 비어
가는 암울한 현실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틈을 사이비 이단이 파고들면서 택한
백성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병드니 사회의 병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빈부의 격차는 간격을 넓혀 가고 있습니다. 심화되는 양극화 현상 앞에 전통적 가
치는 사라지고 물질만 추구하는 배금주의가 득세하고 있습니다.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재를 쓰고 옷을 찢으며 통회의 눈물을 흘릴 때 상하고 통
회하는 마음을 멸시치 않으시는 하나님(시 51:17)께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허락하십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도우심만추구해야 했지만, 우리는하나님보다 하나님으로부터오는복만을 추구했
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세속적 가치만 경배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번영하
니까 하나님을 버렸듯이, 교회가 부흥하면서 교인 수와 건물과 헌금만 바라보았습
니다. 세속 권력과 부귀영화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악한 우상숭배였습니다.
고난의 현장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떠났던 베드로 앞에 부활의 주님이 오셨습니
다.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7) 베드로는 대
답했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우리에게는 없는 하나님 수준의 사랑입니다.
주 예수께서 이 싸움과 아픔의 세상에 그 사랑을 가져오셨습니다. 믿는 사람마다
그 마음에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 사랑으로 사랑하느
냐 물으셨고, 베드로도 그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대답했습니다.
80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본질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우리에게
도 인간 수준의 사랑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물 한 컵 수준입니다. 우리의 생
명만큼이나 약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습니
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 13:
37)라고 할 때는 인간적 사랑이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주신 사랑은 하나님
수준의 사랑입니다. 우리 속에 부어졌음을 믿을 때 우리도 그 사랑으로 감히 사랑
하기를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사랑도 바로 이 사랑입니다. 믿을 때 나
오는 신비한 사랑입니다.
왼뺨을맞았을때오른뺨도내주는행동은할수있습니다. 그러나그것이하나님
의 사랑으로 저절로 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영적 힘을 발할 수 없습니다. 나의 육신
의힘으로하지않고주를의지할때, 주의마음을내마음으로삼을때저절로오른
뺨이 나갑니다. 그 영적 권세가 상대를 누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주의 사랑으
로 본질적인 변화를가져와야합니다. 내 힘으로 아무리 큰일, 훌륭한 업적을남겨
도 단지 육신일 뿐입니다. 아무리 큰 교회를 세워도 주님의 몸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신자로서 가장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소
요리문답 제1조가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 대답을
제대로 하고 제대로 실천한다면 이미 회개를 완성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
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의 사랑의 힘으로 살아야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육신의열매만가져옵니다. 오늘날교회의문제가여기에있습니다. 교인들도, 당회
원들도모두이제는목회의목적을분명히해야합니다. 목적만바르게하면교회는
삽니다. 교회는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외형적인 크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교회의 목적을 바로 합시다.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
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
니라”(엡 1:22-23). 여기 세상에서 교회의 자리가 있습니다. 만물 위에 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머리가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
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입니다. 교회 안에 모든 충만이 다 있습니다. 눈을 밖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이제부터는 교회에 더욱 집중해야 합니다. 수가 줄어든다고 걱
정 마십시오. 있는 양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보면 양들은 늘어나게 됩니다.
제98회 총회 주제설교 81
교인 수에만 집착하는 것은 세속적 가치요,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이 수만 명
의 교회를 더 기뻐하고 사랑하시겠습니까? 주님이 베드로에게 큰 교회, 큰 건물을
세우라고 하셨습니까? “내 앙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숫자가 그렇게 중요합니
까? 그보다 주님의 사랑으로 양을 먹여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됩니다. 세상 방
법, 경영과 마케팅과 심리학보다 사랑의 기도와 눈물이 먼저입니다. 목사와 교인
들이 함께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고 돌보는 교회에 주님은 자기 양들을 보내 주십니
다. 교회가 안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의 도움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의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함께하고, 섬기고, 나누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 10:45)라
말씀하신 주님은 우리들에게 섬김과 나눔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요 13:1-11). 하나님이
신 그리스도가 종처럼 섬기셨고, 자기의 생명까지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
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얼마나 감사한지요. 주님은 교회에 붙은 우리를 자신과 동일시하십니다.
돈이나 건물이나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처럼 우리도 섬겨야 영원한
열매를 얻습니다. 주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다음의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노인들을 향해 섬기는 사랑을 실천합시다.
올해 우리나라 65세 이상의 노인인구는 613만 8천 명으로 전체 인구의 12%에
달합니다. 2025년이 되면 1천 33만 명으로 전체의 20% 가량을 차지할 전망입니다.
초고령화 사회를 눈앞에 두고 있지만 대비는 별로 없습니다. 대개 노인들은 경제활
동을 하지 못해 빈곤합니다. 정서적 외로움, 사고와 질병 등 건강과 여러 문제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들 노인들을 돌보고 섬기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교회가 감당
해야 할 사명입니다. 교단 산하 8,300개 교회 중에서 노인대학을 비롯하여 노인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교회는 3,200여 교회에 지나지 않습니다. 노인이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모든 교회들이 각자의 처지와 형편에 맞게 노인들을 섬긴다면
노인 문제의 상당 부분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각 교회들이 저마다의 형편과 처지
에 따라 힘을 모으고 연대하여 노인들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82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아이들을 사랑으로 길러야 합니다.
2010년까지 우리가 해외로 입양 보낸 아동 수는 약 16만 명입니다. 세계 10위권
의 경제 규모를 자랑해도 OECD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장애아를 해외로 입양 보내
는국가입니다. 성가치관변화에따라미혼모의출산이급격히늘어나고있습니다.
가정의 해체가 가속화됩니다. 결과적으로 2010년 한 해에만 요보호아동이8,600여
명이었고, 매년큰폭으로늘어나고있습니다. 우리의아이들도우리가못기르면서
어떻게 주님의 사랑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는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야 합니다. 이제는 교회가 나서서 입양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현실과는 다소
괴리가 있는 입양법을 고치고 국내 입양이 활발히 이뤄질 수 있도록 교회가 관심을
기울일때입니다. 이를위해총회적차원의국내입양활성화를위한노력을전개해
나갈 것입니다.
사랑으로 물자를 아껴야 합니다.
지난 2011년 3월 일본 대지진으로 원전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고장 난 원자로에
서는 엄청난 방사능이 새어 나와서 주변 땅과 바다와 하늘을 오염시켰습니다. 반경
수십km가 사람도 살 수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고, 고기도 잡을 수 없는 불모지가
되었습니다. 필요에 의해 건설한 원전이 엄청난 환경재앙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이미 우리나라에는 23개의 원전이 있습니다. 갈수록 늘어나는 전력수요 앞에서 정
부는 또 다른 원전건설을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 짓는 것만이 능사가 아
닙니다. 아껴야 합니다. 총회 산하 8,300여 교회들이 지금보다 5~10%씩 전기를
절약한다면 엄청난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 네온 십자가를
비롯하여 교회 안의 전력시설을 절전형으로 교체하고 불필요한 낭비를 줄인다면
교회도 이익이지만 국가적으로도 큰 이익입니다. 나아가 온실가스를 감축하여 환
경을 보전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아껴 쓰는 사랑으로 교회를 지키고 나라
를 지키고 환경을 지켜야 합니다.
살리는 사랑을 실천합시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처럼 교회도 병든 자를 고쳐야 합니다. 특별히 더욱 관심
을 기울여야 할 대상은 희귀병, 난치병으로 고통 받는 아이들입니다.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치료를 중단하는 아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제는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생명 살리기 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홀로 할 수
없다면 힘을 모으고, 마음을 모아서 생명을 살려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야
제98회 총회 주제설교 83
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성탄절, 부활절을 맞이하여 의미 없
는 행사로 그칠 것이 아니라 생명 살리는 일로 연결시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세계를 품는 사랑을 실천합시다.
특별히 올해는 세계교회협의회 제10차 부산총회가 열립니다. 이번 총회는 110개
국, 349개 교단, 5억 6천만 성도들을 위한 큰 잔치입니다. 선교 130년도 되지 않은
한국교회가 총회를 유치하게 된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번 총회로
말미암아 세계는 한국교회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로서는 세계를 바라보
는 기회가 됩니다. 복음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각 나라와 민족의 문화에 맞도록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이번 총회는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경험하는 놀라운
기회가 될 것입니다. 세계선교의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우리에게 귀한 경
험이 될 것이며, 이번을 계기로 그 역할과 지위가 보다 더 확고해질 것입니다. 이
제 우리는 세계가 품고 있는 문제와 고통에 대해 더욱 민감해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만을 바라보는 우물 안 사랑을 벗어나 세계를 품는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외에도 우리가 눈을 돌리고 귀를 기울이면 사랑을 나눌 곳이 얼마든지 있습니
다. 장애인, 북한동포, 외국인 노동자, 이주여성, 노숙인, 재소자, 비정규직 노동
자 등 사랑을 나눌 곳은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라고 했으며,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
라”(약 4:17)라고 질타했습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알고도 선을 행치 않
으면 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섬길 수 있을 때 섬기지 않고, 나눌 수 있을 때 나누
지 않는 것이 바로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모든 사랑이 믿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신자는 믿음으로 삽니다. 믿음으로 하
나님이 주시는 모든 복을 받습니다. 그 안에는 세상 모든 좋은 것들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만 경배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도 하나님을 의지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만 모심이 확
실할 때 우리의 사랑도 확실해집니다. 믿음으로만 아가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
랑하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각자의 십자가를 질 수 있게 합니다.
주님이 부어 주신 사랑으로 사랑을 나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
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84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주 석
<제3장 주제의 신학적 이해>
1) David Bosch, Transforming Mission, 1991, p. 519.
2) http://www.lausanne.org
3) http://wcc2013.info
4) Karl Barth, Church Dogmatics, 2/1 1975, p. 352.
5) Jürgen Moltmann, The Trinity and the Kingdom, 1981, p. 35, 57, 59.
6) Stanley Grenz, The Social God and the Relational Self, 2001, p. 328.
7) Thomas Oden, The Transforming Power of Grace, 1993, p. 33.
8) Luther, The Bondage of the Will, 1957, p. 104.
9) Calvin, Institutes, 3.11.1, 3.6.2, 4.20.15.
10) Stanley Hauerwas, Character and the Christian Life, 1975, p. 214.
11) Christine Pohl, Making Room, 1999.
12) Miroslav Volf, Exclusion & Embrace, 1996.
13) William Dyrness, The Earth Is God’s, 1997.
14) Howard Snyder, EarthCurrents, 1995.
<제5장 우리가 사는 세상 이해>
15) 「경향신문」2013년 1월 23일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122140
2561&code=970100)
16) 「경향신문」2013년 1월 23일자.
17) 「한국경제」2013년 1월 23일자.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3012234681)
18) 대니얼 앨트먼, 「10년 후 미래」(서울:청림출판, 2011), p. 121.
주 석 85
<제6장 오늘의 사회와 나눔의 생명선교>
19) 이하 부분의 내용들은 필자의 책, 「기독교 생명윤리 개론」(서울:장로회신학
대학교출판부, 2004)의 마지막 장을 일부 참조하였다.
20) 히브리어 하이임( י.םי ꕘ)은 ‘비오스’의 의미를, 네페쉬( שׁꗾ)는 ‘조에’의 의미를
갖는다.
21) Richard C. Trench, Synonyms of the New Testament(Grand Rapids:
Eerdmans, 1980), pp. 91ff.
22) Ed. by G. Kittel,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 1
(Grand Rapids:Eerdmans, 1968), pp. 200-207. ‘아이오니오스’의 어근은 ‘아이온’인데, 시간적으로는 시대(age) 또는 영원성(eternity)이란 뜻을, 공간
적으로는 세계(world)나 우주(cosmos)라는 뜻을 가진다. ‘아이오니오스’란 단
어는 보통 영원한, 시작과 끝이 없는, 불멸의 등의 뜻을 가지는 형용사이다.
그러나 가끔은 ‘우주적’(universal)이나 ‘종말적’(eschatological)이란 뜻의 형
용사로 쓰이기도 한다. 히브리서 1:2은 전자의 우주나 세상을 가리키는 뜻으
로, 히브리서 6:2, 5은 종말을 나타내는 형용사로의 쓰임새를 보여 준다.
23) Ed. by G. Kittel,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 1,
pp. 197ff를 참조하시오. 쿨만도 그의 책 Christ and Time에서 이 ‘아이온’이
연장된 시간이란 의미와 영생이란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Oscar Cullmann, Christ and Time, trans by Filson(Philadelphia, 1950/51),
p. 62.]
24) ‘아이오니오스’는 신이 가지고 있는 신적인(divine) 본질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히브리서 9:14에는 “영원하신 성령”이란 말이 있는데, 그 ‘영원하신’이
란 ‘아이온’을 번역한 단어는 신의 본질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Ed. by
G. Kittel,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 1, p. 208
참조.]
25) 필자의 책 「예배와 인간행동」(서울:성광문화사, 1996), pp. 44-54, 제4장 참조.
26) John Walter Quiring, Total Liberation:Spirituality for Green Politics
(Michigan:UMI Dissertation Service, 1994), pp. 25ff.
27) 세계 윤리(global ethics) 구상의 방향에 대해서는 큉(Hans Küng)의 책 A
Global Ethics for Global Politics and Economics(New York:Oxford
University Press, 1997)를 참조할 수도 있다.
<제9장 주제와 교육 – 교회에서의 나눔 교육>
28) Independent Sector, Engaging Youth in Lifelong Service (Washington
D.C.:Independent Sector, 2002), p. 6.
86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29) 「동아일보」2012년 1월 13일자.
(http://news.donga.com/3/all/20120112/43279912/1)
30) 아름다운재단, 「나눔교육 교사연수 자료집」(서울:아름다운 재단, 2004), p. 8.
31) 사도행전 4:32-37.
32) 박봉수, 「교육목회의 이해」(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p. 92.
33) http://www.beautifulfund.org/foundation/main/
34) http://www.oxfam.org.uk/education/
35) http://www.learningtogive.org/about/
36) 박봉수, op. cit., p. 256.
<제9장의 참고문헌>
Independent Sector. Engaging Youth in Lifelong Service. Washington D. C.
:Independent Sector, 2002.
아름다운 재단. 「나눔교육 교사연수 자료집」(서울:아름다운재단, 2004).
박봉수. 「교육목회의 이해」(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2008).
강철희 외(2007). “나눔 교육을 통한 아동의 변화 연구” 한국사회복지학 제59권 제
4호. pp. 5-34.
Baus, Karl. “교회의 탄생과 예루살렘 공동체,” 신학전망 78(1987년 가을). pp.
110-125.
http://www.learningtogive.org(LTG)
http://www.beautifulfund.org(아름다운재단)
http://www.chest.or.kr(사회복지공동모금회)
http://www.nanumedu.org(나눔교육)
역대 총회주제 87
<역대 총회주제>
제58회 1973년 선교하는 교회
제59회 1974년 선교하는 교회교회개척의
해
제60회 1975년 선교하는 교회계속
300교회 개척
제61회 1976년 교회신설과 개척매년
300교회 목표
제62회 1977년 교회성장과 개척
1. 구체적인 교회성장 및 개척 세미나
2. 교회성장을 위한 자료제공
3. 교회신설과 개척의 강화
4. 매년 300교회 목표달성 추진
5. 폭넓게 개혁하는 교회
제63회 1978년 한국을 위한 교회
1. 사회개발과 선교권 강화
2. 교회개척과 평신도훈련
3. 교회성장과 신학교육 강화
제64회 1979년 세계를 위한 교회
제65회 1980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정의, 일치, 복음화, 평화
제66회 1981년 나는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15)
실천목표 1. 교회성장과 협력 2. 개척전도와 선교
3. 성서교육과 경건 4. 사회정의와 참여
제67회 1982년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마 8:7)
실천목표 1. 교회성장과 일치 2. 교회갱신과 치유
3. 100주년사업의 적극 참여
제68회 1983년 든든히 서 가는 교회(행 9:31)
실천목표 1. 100주년사업의 완성 2. 5천 교회와 150만 성도 달성
3. 적극적인 사회봉사
제69회 1984년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사 60:1)
실천목표 1. 100주년의 해 2. 개척교회 목표 달성의 해
3. 국제선교운동 착수의 해
제70회 1985년 세계를 향한 교회(행 1:8)
제71회 1986년 역사를 새롭게 하는 교회
제72회 1987년 정의, 평화, 일치를 향한 교회
제73회 1988년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74회 1989년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공의,
사랑, 겸손
제75회 1990년 선교공동체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교회(행 1:8)
제76회 1991년 화해와 평화를 실천하는 교회(약 1:18)
88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제77회 1992년 선교·통일·평화
제78회 1993년 시대에 앞장서는 교회(시 34:14)
제79회 1994년 새롭게 하는 교회(행 21:714)
제80회 1995년 세계와 함께 나누는 교회(사 40:911)
제81회 1996년 화평케 하시는 그리스도(엡 2:14)
제82회 1997년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고후 5:17)
제83회 1998년 치유하시는 그리스도(마 8:7)
제84회 1999년 인류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딤전 1:1)
제85회 2000년 임하소서, 성령이여!(행 1:8, 엡 4:23)
제86회 2001년 성령이여 교통케 하소서(고후 13:13)
제87회 2002년 생명의 성령이여 삶의 주인이 되소서(롬 14:17 하)
제88회 2003년 보혜사 성령이여 깨끗케 하소서(시 51:10)
제89회 2004년 교회, 세상의 소망(벧전 2:912)
제90회 2005년 교회, 백성의 위로자(사 40:1)
제91회 2006년 교회여,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라(사 51`:17, 롬 13:11)
제92회 2007년 교회여, 생명을 잉태하라(요 10`:10 하)
제93회 2008년 섬겨야 합니다(갈 5`:13, 전 11:1)
제94회 2009년 하나님을 기쁘시게(요 8`:29, 시 37:4)
제95회 2010년 다음 세대와 함께 가는 교회
(신 6:49,
마 28:1820,
행 2:17)
제96회 2011년 그리스도인, 세상의 소금과 빛
(마 5:1316,
벧전 2:1112)
제97회 2012년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마 25:40, 레 19:18)
부 제 1. 가난한 이들의 벗 2. 다음 세대의 벗
3. 장애인의 벗 4. 다문화가족의 벗
5. 북한동포의 벗
제98회 2013년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막 10:45)
※ 제58회 총회 이전에는 주제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