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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노다가시의‘장사의 신’이란 책을 읽고 있다. 이 책 중에‘사람도 없고, 돈도 없고’가 최강의 무기가 되는 이유? 라는 소제목이 내 호기심을 자극한다. 마치 내게는‘작은 교회가 최강의 무기가 되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좋은 환경, 좋은 조건에서 가게를 내는 것도 좋겠지만 그럴 경우에는‘배고픔’이 없어져 위기감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손님을 모을 수 있는 진짜 실력을 가진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짜 실력은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선을 끌 수 있는 흥미를 갖게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교회와 복음에 대해서 마음을 닫고 살아가는 영혼들의 마음을 열 수 있을까?‘흥미’‘감동’‘배려’‘기쁨’‘즐거움’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장사와 전도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장사를 잘하는 사람을 통해서 배울 점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짧은 만남 속에 감동을 줄 수 있다면, 지속적인 관계로 이어질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전도소그룹’전도방법이 이 시대에 참 잘 맞는 전도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먼저 다가가야 한다. 그리고 먼저 주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섬겨야 할지를 고민하지 않고서는 관계를 맺어갈 수가 없다. 오늘은 치킨집 사장의 집에서 한 달에 한 번 가정예배를 드리는 날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분 앞에 서는 것이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이 든다. 9년째 같은 건물에 살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저런 조언을 해 주었지만 그분의 장사를 위해서 매출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섬기고 돕는 일은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나에게 주님은 다시 한 번 내 생각의 틀이 깨지길 원하고 계신다. ‘창34:22 그러나 우리 중의 모든 남자가 그들이 할례를 받음 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라’ 그들의 할례가 아브라함의 할례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갈라디아 성도들의 할례도 이와 같이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주신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표징일 뿐이었다.
바울은 오늘‘이방인’이란 틀을 십자가의 은혜 아래 과감하게 깨뜨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했다.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방인’의 벽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아암아 무너졌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바울은 두 언약을 비교한다. 하갈과 사라, 이 땅의 예루살렘과 하늘의 예루살렘, 계집종의 자녀와 사라의 자녀, 약속의 유업을 이을자와 잇지 못할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두 언약을 비교하면서 가장 큰 특징으로 바울은‘자유’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다시 한 번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서 이미 자신을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한 자들이라면 이런 자녀라고 당당하게 선포하고 있다.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구원의 참된 증거가 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그저 겉으로 보여지는 언약의 표징인 할례에 있지 않다. 아무리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이라고 할지라도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 은혜 속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살라는 것이다. ‘31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유대교의 율법에 묶인 노예의 자녀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고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아들이실 자유인의 자녀입니다.’(현대어)
복음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잘 전할 수 있을까? 장사꾼도 충분히 고민하고 날마다 연구하는데 왜 난 아직도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왜 난 이렇게 소극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을까?
‘손님과 서로 이름을 부르는 관계를 만드는 건 개업하고 바로일 때가 아주 좋아, 얘기를 걸 계기를 쉽게 만들 수 있거든.’어떻게 하면 이 지역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또 내 자신을 깨야 한다. 더 깨야 한다. 그래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랑의 주님! 세상에 장사꾼도 자신의 장사를 위해서 자신을 깨고 손님에게 다가가고 있는데 전 아직도 나라는 틀에 갇혀서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혼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저 복음을 점잖게 전하고 있습니다. 배려하고 섬기는 것이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소극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지혜를 주시옵소서,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담대함을 주시옵소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복된 믿음의 후손들이요 이삭과 같은 언약의 자손들임을 알게 하옵소서. 전도의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부담을 떨쳐 버리고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