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상반기 [문학선] 신인상 당선작
유리아 / 누에의 방 외 4편
장상관 / 폐광 외 4편
누에의 방 / 유리아
쉿, 어둠은 켜 두세요, 은밀할수록 고백은 두근거리거든요
오늘은 불빛 한 장 없이 고요하네요 부드럽게 속삭이기 좋은 날이죠
어둠이 쥐어주는 불안은 갉아먹을수록 소복해져요 그 속에 욕망이
숨바꼭질 하듯 꼭꼭 숨어 알을 슬어놓곤 하잖아요 나는 술래잡이가 되어
꿈틀거리는 나만의 상징을 운 좋게 찾아내요 그럴 때면
숨 막힐 듯 환해지죠 눈썹 한 올 창밖으로 날리면
오디가 까만 눈알을 방글거리곤 하죠 하지만 이상하게도 금방 따분해져요
질긴 고독의 실로 옷을 지어 입혔는데 왜 시큰둥하죠?
비워놓은 의자에 앉히려하면 황망히 외투를 벗어던진 채 어디론가 훌쩍
날아가 버려요 강박증은 더 이상 새로운 징후는 아니죠 나는 무의식적으로
죽은 외투를 위로해줘요 슬픔으로 치환되지 않는 벽이 온 몸 휘감고
어둠을 꽉꽉 채워줘요 다행이죠, 어두울수록 욕망은 구체적이니까요
이제 슬슬 술래가 되어 몸 숨겨볼까요?
누란 가는 길 / 유리아
이 길을 감고 푸는 동안
내 몸에는 실오라기 한 올 남지 않았네
바늘귀에 바람의 갈기를 꿰어
길게 박음질한 신작로를 따라 걸어가는 저녁
몸 바깥으로 향한 솔기부터
올을 풀기 시작하네
바람이 모래구릉을 만들어 낙타풀을 키우는 땅
결리고 아픈 생의 안감을 뒤집어보면
천 년 전 행성이 반짝 켜졌다 사라지곤 하네
계절풍은 고름을 풀어 우기를 불러오고
초승달을 쪼개 먹다 목에 걸려 운 밤
캄캄한 잠실蠶室에 엎드려
산통을 열어 한 사내를 풀어 주었네
수천 겹 생각의 올이 몸에서 풀려나갈 때
내 살아 온 시간 다 바쳤어도
바람을 동여매지 못하리란 걸 알았네
내 몸속엔 이 지상에 없는
성채가 지어졌다 허물어지고
폐허가 된 태실胎室속
목숨을 걸고 돌아 갈 지평선 한 필지 숨겨두었네
궁산리 당산나무* / 유리아
씨족나무라 했다, 가지는 들로 산으로 강물가로 제각각 뻗쳐 있지만
날 저물면 한 뿌리로 저녁상 앞에 모여 앉는
식솔들이라 했다 가장은 지엄하여
종산 어지럽히는 솔잎혹파리나 개각충 방제를 족보에 박고
기웃거리는 잡목들 매운 회초리로 다스린다 했다
거목의 반상회보에 실뿌리까지 여문 알곡들
착실하게 쌓여있는
저 나뭇가지 하나 분양받고 싶다
따끈한 구들아래 꼼지락거리는 발가락들과
하루의 냄새를 섞고 싶다 허리를 펴면
덩달아 일어나 관솔불 지피고
햇살 물어 와 꼬박꼬박 월세로 지불하면서
내 몸의 상처 뭉근해지기까지
저 나무의 옹이를 닮고 싶다
더러 지나는 바람이 밑둥 잡아 뒤흔들어도
생가지 하나쯤 뚝 분질러 보증 서 줄 것도 같은
인심 좋은 저 나무의 세입자가 되어
오래 잎을 내지 못한 등걸에
움, 틔우고 싶다
*태풍으로 꺾여진 가지 하나에 '공개입찰' 붙은 나무
그 노인의 잠 / 유리아
채굴 멈춘 탄전의 철로를 따라
거뭇거뭇한 눈꽃이 피었다
종일 탄가루 새어드는 무연고 치매 노인 병상
잠든 노인의 벌어진 입이 지하 3200미터 땅굴 속에서
가쁜 숨 몰아쉬고 있다노인의 잠은
더 이상 매몰 될 것 없는 막장첫 삽 꽂았던
기억의 문장을배고 누워있다 빛나던 문맥을 퍼내던
팽팽한 힘 어둠속에서도 삽자루 움켜잡고
멈춰 선 컨베이어 불이 되지 못한
구공탄 구멍을 허물고 있다
가끔 싸락눈 내리는 고향집 마당을 다녀오는지
감긴 속눈썹위로타다만탄재가 눈발처럼 쌓였다 부서지고
식어가는시간의 화덕을 껴안고 노인은
제 몸의흑백필름을 온몸에 윙윙 되감고 있다
폐광의 마지막 인부초로의 간병인이
여기저기 내던져진 삽날 같은 이빨사이로
품어져 나오는 탄가루에 쿨럭 거릴 때
막장의 잇새에 박힌
금니 한 개,
탄 더미 속에서 번쩍인다
길상사에서 / 유리아
요사채 섬돌 위에
흰 고무신 한 짝 외따로 앉아 있네
목선을 길게 늘인 질경이 쑥부쟁이
오랫동안 아무런 기별 없어도
키가 자라는 저것들
기다림에 길들여진 것들은
이역만리 먼 시렁 속에 든 짚풀을 덮고도
추운 밤을 참아내지
밤새 신음하는 바람에게 이불을 당겨주며
축축하게 젖은 이마를 훔쳐주지
네가 올 때까지,
아니 기어코 오지 못할 몸이어도
바늘귀에 달빛을 꿰어 버선코를 깁지
돌아갈 때 신겨 줄
천 켤레 그리움을 짓고 풀어내는 동안
설웁고 안타까운 것들은 모두
詩가 되었어, 창호 없는 문살이 되었어
접동새 울음소리댓살을 쪼개는
부처 없는 절간이 되었어
유리아 시인
본명 조유리. 1967년 서울 출생. '화시' 동인.
폐광 / 장상관
협궤열차 입김은 거세고 뜨거웠다
기름칠한 은빛 삽날을 세워
몰래 불씨를 흥정하던 광부들이
새 광구를 찾아 곡괭이를 들쳐 멨던 청량리*
밤잠을 잊고 휘황하던 거리엔
늦저녁이 아직 불빛을 바르지 못한 창마다
벌겋게 우는 불꽃 홀로
끌어안고 후끈후끈 달래는 난로만 남았다
저도 철광석의 핏줄이라며
끓는 심장이 되어 이 겨울 넘어보자고
한숨 뱉는 골목 철없는 눈발들
연통에 매달려 몸을 녹여도
언 강 주물러 주던 기적은 오지 않는다
어린 그러나 이미 늙어버린 풀꽃들
나비는 어디쯤 오고 있을까
까닥까닥 바람 차는 소리 듣다못해
구름은 침통하게 침을 놓는다만
대책 없는 철퇴에 단단히 먹은 마음들 풀릴까
굳게 입을 다문 창들은
언제쯤 뜨거운 불빛을 내뿜으며 또 타오를 수 있을까
순한 집들은 검은 어혈에 어쩔 줄 몰라
간판도 맥없이 꺼버린 파장
헝클어진 화투짝처럼 주저앉아
겨우 밥 먹는 누이들
광구의 우울을 파내며 삐거덕거린다
*청량리 - 성매매가 성행하던 집창촌.
조선장(造船場) / 장상관
원탁에 파도를 놓고 씹는 목선들
저마다 집요하게 급소자리를 주장한다
독설에 잘린 삼치꼬리에 초를 치는 축도 있다
부서진 옆구리 지그시 눌러보는 미간마다
먼 바다가 밀려와 출렁인다
쉬운 밥술이 지천이면 그물질 하겠소
뱃고동 지느러미를 싣고
한차례 돌개바람이 천막을 들춘다
의자에 들이치는 빗발
불빛에 남은 행로 잠시 비추는 고등어 눈 같다
진열장에 모로 누워 헤집던 유폐된 밤
몇 번의 도마질에 절망마저 동강나고
맥 풀고 나뒹구는 방향타에서
검붉은 어혈이 기어 나와 물살을 타고 간다
저마다 앙금이 가라앉은 내면 뒤적이며
소리 없이 에워싼 안개에 발길 묶인 뱃사람들
방향타를 움켜쥐듯 술잔 움켜쥐고
백만 개의 이빨을 드러내던 풍랑에 떠는 조선장
뱃마루 패인 손톱자국 술로 섬질 할 때
어깨 털며 들어서는 젖은 선체
찢긴 돛자락이 격렬히 펄럭이고 있다
동백 꽃잠 / 장상관
슬그머니 돌아눕는다
인력시장 바람이 간간 신음 뱉는 머리맡
인형 머리칼 빗겨주던 딸아이 손
뒤척이다 선잠 든 팔뚝에 살짝 닿는다
창밖엔 몽글거리는 동백꽃망울
구부린 등엔 초롱초롱 내려앉는 눈빛
모른 척 두터운 한기 밀어내다
꽃잎 다듬는 먼 봄 부르는 혼몽
노모가 설거지통에 꿈결처럼 거품 부풀린다
내 몰골 북북 문지르는 수세미 소리
잠 속을 자맥질하며 이빨을 부딪는 그릇들
몸부림치는 전신을 몇 번이고 헹궈낸다
한 송이 몽우리가 된 딸애가 콜록
눈 덮인 꽃잠 데우는 새벽
칼바람 꽂힌 옷깃 거머쥐고 쪽문 나서는 나는
대체 몇 만 볼트의 점화 장치가 필요할까
컥컥 그을음 내뱉는 연통을 추스르고
창문은 불빛 들고 걸어 나와
동백이 걷는 꿈길 비추고 있는데
폐염전 / 장상관
산등성 붉나무는
내면 깊이 일구던 소금밭을 갈무리하다
갈라진 손톱을 깎고 있었다
두렁 잃은 바퀴를 인적 없는 뻘밭에 누이고서도
균형 잡던 맥박 하마나 기다리는 외발수레
밤하늘 염판을 둘러보는 불빛 우러르다
물의 내장을 말려 피우는 소금꽃
파도 굽던 아버지의 등이 폐업하고
열차 난간에 앉아 비로소
이젠 내가 흐드러지게 피울 차례라 예감했다
이따금 날개의 염분 터는 바람처럼
소금가루 털고 방문을 열면
벽지의 빼곡한 이름 갉던 곰팡이
객짓밥 푸는 근력 속에 고요히 번식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소금을 찍어 일기를 썼다
칠면초 핀 장단지로 아직은
검푸른 해수를 퍼 올려야 한다고
저문 갯벌이 품은 수차처럼, 그러나 삐걱거린다
왼쪽 가슴 찔러 오는 은침을 분지르며
소금 창고에 기댄 흐린 망막으로
팽개친 고무래 무딘 손이
소금꽃다발 눈부시게 들고 오는데
무위기 / 장상관
흑백 모니터가 입자를 뿌린다
자취방 무위에 갇혀 채널을 돌려도
부러진 안테나는 화면 가득
빗발의 발자국만 데려와 기대를 짓밟았다
필생을 무게 중심에 싣고
내항에 묶여서도 흔들려야 하는 선박들
오랜 흔들림이 더 탄탄한 중심을 키운다고
파도를 파헤치던 가쁜 숨질이
창턱까지 달려와 선잠을 물어뜯는다
너무 멀리 와버렸다, 발자국 깊이
등대 불빛이 찰랑거리다 사라지고
방파제 차고 오르는 이빨 사이로
생쥐 같은 눈 깜박이는 마을
파도에 물린 목덜미
닦을수록 붉게 번지는 통증이
홑이불 속으로 자꾸 손을 끌어당겼다
사는 일이 어디 통증 없이 이부자리 깔겠냐며
굶주린 기억에 수유되는 입자들이
김 서린 유리창에 매달아 놓은 몇몇 이름들
해파리 같은 촉수를 늘어뜨려
잊었던 심해를 더듬어가고, 등대는
은빛 팔목 휘둘러 길 잃은 배를 찾는다
장상관 시인
1957년 경남 창녕 출생. 부산 동의공업전문대학 졸업. '시산맥' 회원. '시와 문학' 동인.
[신인 작품 공모 심사평]
개성과 무난함의 거리
이번 당선작으로 올린 두 사람의 신인들은 여러 면에서 대조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우선 장상관의 「폐광」외 4편은 훼손되고 해체된 대상 인식을 보여준다. 그의 시적 사물이나 대상들은 칙칙한 의식을 바탕으로 한결같이 훼손되거나 망가진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족히 폐허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화자의 의식 세계도 갖가지 고통과 그로 말미암은 신음으로 꽉 차 있다.
반면에 유리아의 「누에의 방」외 4편은 대상에 대한 감각적 해석이 돋보인다.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바탕으로 그의 시들은 대상의 디테일들을 잘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인의 시선은 장상관에 비해서 훨씬 미시적이다. 그런데 그 미시적인 시선이 결코 따분해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이 시인의 부드럽고 활달한 상상력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상이한 성격의 두 시인을 당선으로 올리며 우리는 그들의 개성이 앞으로 우리 시단에서 보다 유니크한 것으로 빛나기를 기대한다.
이번 신인상의 경우는 다른 때에 비하여 응모 편수가 많았다 이들 작품을 통독하며 선자들은 시에서 무난함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 무난함이란 말에 대한 감각과 표현이 너무 작금의 시적 관습에 익숙한 것임을 뜻한다. 범박한 소리지만 문학 역시 새로움을 큰 미덕으로 여긴다. 그 새로움은 바로 무난함을 넘어선 자리에서 시작되는 것, 말하자면 이미 있는 것, 기성의 것과는 다른 무엇이 있어야 새로운 것이다. 이미 있는 기성의 틀에 안주하면 무난하기는 하겠지만 새로움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더더욱 신인에게는 다소 거칠더라도 기성의 틀을 깰 때 신인답다고 할 것이다. 이번 심사에서 등외로 밀린 작품들은 작품의 기본기나 역량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무난함 때문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심사위원 : 문효치 · 홍신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