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꾼의 손 / 김류수
지인이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저녁 무렵 검은 도포자락 휘날리며 바닷가에서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는 사진이었다. 정적이었지만 나는 그 사진속에서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았다. 그의 표정엔 세상의 아픔을 어깨에 걸머메고 혼신의 힘을 다해 털어 버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늘을 휘젓고 있는 그 지인의 손이 내게 말을 건넸다. 이 춤사위가 때론 생명을 살리는 거라고, 손끝에서 털어버리는 슬픔과 눈물이 바로 사람들을 치유하고 한에서 놓여나게 하는 거라고, 그래서 온 몸으로 춤을 추고 있노라고.....
담양에 사는 자칭 감성무인이다. 그를 안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는 대나무의 땅 담양에서 명가혜라는 찻집을 운영하며, 전통차를 연구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가 살고 있는 담양에 내려 간 적이 있었다. 대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이 감성무인의 집이었다. 그 집은 대문조차도 대숲을 열고 들어가는 모양새였다. 한옥으로 높이 지어진 집은 언덕진 곳에 있었다. 아랫마당에 내려서서 한층 높이 계단을 오르면 다시 윗마당이 있었다. 안주인의 손길인 듯 다양한 꽃이 마당가에 심겨져 있어 운치를 더했다. 보슬비가 대숲을 촉촉히 적시고 있었다. 밤이 되자 댓잎이 잔바람에 서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간간히 비에 젖은 댓잎이 담양의 풍경 한자락이 되어 마음에 담겨왔다.
그 밤 늦은 시간까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감성무인은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자기가 왜 춤꾼이 되었는지 이야기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어느날 밤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 얼큰하게 되도록 술을 마시고는 춤을 추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혼자서 정신 없이 춤사위에 빠져 있었단다. 어둠 속에서 모든 사람의 눈이 자신에게 향해 있었고, 박수 갈채를 받으며 춤을 마쳤다는 것이다. 친구왈, 그 춤 어디서 배운 춤이냐, 무대에 한번 올리면 좋겠다는 말이 뒤를 따라 오더란다. 춤을 추면서 자신의 존재를 잊고 빠져들었던 그 순간이 바로 유명한 담양 춤꾼 감성무인이 탄생하는 순간 이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국제적인 행사나 수 천 명이 바라보는 무대 등 많은 곳에서 춤을 추었고, 그는 춤꾼으로 이름이 났다. 자신의 춤 사위를 보면서 마치 사람들이 한을 풀어 버리듯 눈물을 흘리는 것을 목격하고는 평생 춤꾼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혹자는, 그것도 춤이냐? 누구한테 사사를 받은 것이냐? 묻기도 한다고 했다. 때론 유명한 명인이 제자로 받아줄테니 문하생이 되는 것은 어떠냐 묻기도 하였지만 그는 ‘나는 내 춤을 출란다’ 했다는 것이다. 명인이 되는 길을 마다한 것이다. 그는 자신만이라도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춤사위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하는데 더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야기를 마칠 무렵 감추어 두었던 속내를 꺼내 듯 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에게는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채 수년 째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장성한 딸이 있다는 것이다. 그 딸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단다. 죽음보다 힘든 시간을 춤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춤꾼의 손 끝이 하는 이야기를 생각하게 되었다. 새벽시간 홀로 깨어 나는 시 한 편을 썼다.
감성무 / 김류수
산다는 것은 어깨 위에
헤아릴 길 없는 고통 얹고
저마다 길 가는 것
그 무게 견딜 수 없을 때
깊디 깊은 영혼의 울림
귀 기울이다 보면
어깨는 절로절로 사위를 긋고
몸은 불꽃으로 타올라
천지 사방 흩어지는데
너의 눈물 내것 되고
너의 아픔 내 두 어께 실리니
안고 돌고 풀고 또 털어내어
아픈 상처 싸매주고
나뉜 것은 붙여주고
설운 눈물 닦아주고
고픈 사람 채워주고
억울 함은 풀어내고
본래 자리 찾아주고
허이허이 덩짓덩짓
생명줄 넋을 놓고
무너지듯 세워가세
사람들아 들어보소
이 어울림이야 말로
진정한 춤사위 아닌가
이 춤추다 나 죽어도
님은 끝내 남으리니
바닷가에서 춤꾼이 추는 춤은 남보기에 좋은 구경 거리가 될 수도 있었을 터이지만, 아무나 그 춤꾼이 가진 속내를 헤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진속에서 나는 그의 삶의 한 자락을 읽으려 애를 썼다. 그 손끝의 휘저음에서 세상을 향한 외침을 들으려 했다.
누구나 남이 알 수 없는 아픔들을 가지고 산다. 그 아픔의 크기와 색깔이 다르다는 것쯤은 다 아는 것 일게다. 하지만 자신의 아픔에서 비롯된 타인의 한을 공감하며, 그 아픔을 털어주려고 목숨을 걸고 춤을 춘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생각이나 할까? 사람들의 손사위에 담겨진 뜻을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해 본 경우가 별로 없었기에 사진 한 장에 담긴 말을 읽는 내내 나는 그날 밤을 생각했다. 춤을 추다가 죽을 것을 각오한다는 무인(舞人)의 손이 허공을 저으며 다시 말을 걸어 온다. 우리 이웃에는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그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아픔을 어루만지기도 했지만 스스로의 아픔을 승화시키고 치유하기도 했을 것이다. 딸의 오랜 고통에서 비롯된 극한의 슬픔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에게도 화해의 악수를 하며 춤을 추었을 것이다. 사진 속에 담긴 세상을 향해 열린 그의 손길은 나에게 묻는다. 너는 밀폐되고 닫힌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이삽십대 청년 시절 온전히 타인의 삶을 내것처럼 받아 들이며 살았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내 삶을 가누는 것조차 버거워 하며 살고 있다. 그때 나누었던 것에 기대어 오늘을 살아가는 내게 다시 열린 춤사위의 손길로 남은 생애를 춤추듯 살아 갈 것을 가르키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춤꾼의 손과 범인의 손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춤사위에서 나오는 춤꾼의 손 동작은 내가 비언어적 소통을 위해 휘젓는 손의 의미와는 다르다. 손은 보통 명사다. 손의 의미는 다양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춤이기도 하다.
오늘 나는 지인을 통해 춤꾼이 휘젓는 손의 의미 하나를 읽는 것으로 책 한 권 분량의 독서를 한듯 흐믓했다.
2014. 5.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