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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한 천사, 그 묵시론적 이야기
까마귀쪽나무가 있는 숲길을 지나자 바다를 향해 탁 트인 언덕길이 나왔다. 언덕에는 시든 풀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아래로는 모래톱 위에 흰 눈이 덮혀 있었고 잔잔한 옥빛의 바다가 펼쳐졌다. 그 너머 수평선 위엔 이제 막 눈이 개인 하늘이 보였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기시감이 있는 바다였다. 그 바다에는 말을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해변의 끝에서 쓰러진 여신상을 발견했다. 그때서야 그는 자신이 불시착한 이 낯선 혹성이 지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해변에는 또 나무의 형해가 있었다. 그 형해 위에 시계가 녹아 흐르고 있었다. 그 모래밭 위엔 또한 '이르고 미토라이'의 〈추락한 천사〉가 있었다. 추락하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천사가 남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추락하고 나서야 비로소 천사는 자신에게 날개가 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인간에게 날개가 달려 있다는 것은 매우 우울한 일이었다. 날개가 달려있는 인간은 천사 아니면 악마였다. 최근에 한 노시인이 추락했다. 당분간 인간에게는 어떠한 성행위도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성행위를 포장하고 있는 어떤 로맨스도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남과 여는 서로 두려워할 것이며 타락을 막기 위한 제도였던 결혼이라는 우스꽝스러운 통조림도 결국 부패할 것이다. 앞으로 인간은 기계와 더불어 보다 안전한 섹스를 구가할 것이다. 진정 자본주의가 원하는 한없이 아름다운 사이버 섹스 시대가 열릴 것이다.
권현옥의 '3인의 독백'
작가 권현옥은 가끔 실험적인 수필을 쓴다. 지금 수필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험의 의도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모종의 변화를 획책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대부분의 수필은 화자와 작중 서술인이 동일한 일인칭 시점의 글들이었다. 자연발화自然發話에 가까워서 특별히 형식이랄 것도 없지만 어쨋든 내적 고백을 표현하기에는 적합한 형식이었다. 그러나 그 형식이 고착화되자 사람들은 좀 답답하다는 생각이 든 듯하였다. 글을 읽다 보면 어쩔 때는 무한 재생산되는 자폐적인 옹알이를 듣는 듯하는 착각에 빠질 때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새로운 시도를 요구하는 반성과 선언의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실험은 대개 세 가지 방향으로 진척되었다. 첫째는 위로의 질적 상승을 위한 모색이었다. 그것은 주로 몇몇 평론가들이 시와 소설의 이론들을 수필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두번 째는 장르라는 개념 자체를 와해하여 외연을 넓히는 방식이었다. 시 같은 수필, 소설 같은 수필, 희곡 같은 수필, 심지어 판소리 형태의 수필도 등장하였다. 세번 째는 장르를 넘나드는crossover 방식이었다. 말하자면 수필 본연의 영토는 지키되 타 장르의 기법을 빌어오는 방식이었다. 이번 권현옥의 '3인의 독백'은 세번째 방식에 기반한 일종의 실험 수필이었다. 이 수필은 교차적 시점, 또는 다자적 시점에 의하여 쓰여졌다. 부동산을 매수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단순한 사건을 매수인의 관점, 매도인의 관점, 매수인 어머니의 관점으로 기술하였다. 문제는 3인의 시점이 모두 화자가 '나'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수필의 범연한 독자중 하나인 나는 잠시 당황하게 된다. "아니, 진짜 나는 누구지?" 그러나 곧 그 의문은 거두게 된다. 필자는 '나'가 그 중 누구일 수도 있게끔 설정해 놓았고 내가 누구인지는 하등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식으로 시치미를 떼고 있다. 이런 다자적 관점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꽤 빈번히 사용되는 기법이다. '하인리히 뵐'의 소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남편과 아내의 교차적 시각을 사용함으로써 사건이 그 자리에서 맴돌면서 한 주제를 향해 나선형으로 밀고 올라가는 집요하고 끈질긴 힘을 보여주었다. '구스 반 산트'감독의 〈엘리펀트elephant〉는 한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카메라 엥글이 그의 뒤를 쫓는 다자적 관점으로 영화를 마치 모자이크 퍼즐처럼 짜맞추기 시작한다. 결국 한 컷 한 컷이 다 표적이 되는 총기 난사 사건으로 마무리된다. '3인의 독백'은 그보다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을 연상시킨다. 말하자면 기억이나 사건에 대한 주관적 해석에 관한 이야기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작가는 여기서 '주관적 해석의 차이'를 가지고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일까? 보다 더 근본적으로 소설이나 영화의 기법을 차용함으로써 수필에 어떤 변화를 주고자 하는 것일까? 먼저 작가는 각 화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일상을 이야기한다. 1. 열심히 현실을 사는 일이 때론 의도치 않게 서로의 마음을 해친다는 게 아프다. 2. 나의 지친 마음이 상대에게 얼마나 무거운 건지 알면서도 이를 해소할 수 없어 안타깝다. 3. 이해로 가는 통로에서 독백이든 방백이든 서로 들어주어야 소통이 가능할 텐데, 말할 여유조차 없는 삭막함이 슬프다. 작가는 결국 세 사람의 관점을 어느 한 사람의 관점으로 수렴한다. 즉 전지적 관점으로 화자를 정리한 것이다. 한 사건을 두고 세 사람이 각기 다른 체험과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 그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 그것이 소통의 가장 근본적인 단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점은 작가의 반성에 불과하다. 세 사람 다 다르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소통의 의지는 없는 것이다. 세 사람의 관점은 역으로 불통과 소외의 벽이 엄존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다. '다자 관점'이라는 이 소설적 시도는 우리에게 보다 객관화된 시각을 부여하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있는 주관의 심연을 보다 여실하게 보여주고자 함이 아닐까?
구자호의 '빈 깡통'
나는 어린 시절을 도시에서 보냈다. 그리고 방학이 되면 시골 할머니댁으로 가곤 했다. 그래서 도시와 시골의 간극을 여러 측면에서 겪을 수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가난의 이중성 같은 거였다. 도시의 우리 동네는 꽤 부유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그들의 집에 비해 막다른 골목에 있던 우리집은 항상 꾀죄죄하게 보였다. 부잣집 아이들이 우리집에 놀러오면 재래식 변소가 항상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한 번 그애들 중의 하나 애 집에서 수박 한 조각을 얻어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 맛이 내가 집에서 먹던 수박 과는 차원이 달랐다. 우리집은 수박을 물 속에 종일 넣어두어 식혀서 먹었고 그애 집은 냉장고 속에 넣어두었다 먹었다. 나는 그때까지 냉장고를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시골에 내려가면 사정이 달라졌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아이들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시꺼멓고 헐벗은 까까머리 아이들이었다. 그들에게 나는 부잣집 도시 아이로 비쳤을 것이다. 나는 그 때부터 어렴풋이 부란 상대적인 것이란 걸 알게된 것이다. 내가 가난하다고 느낀 것도, 내가 부유하다고 느낀 것도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이중성이 나의 내면에 수치심으로 자리잡지 않았나 싶다. 작가 구자호는 우리 눈앞에 불쑥 깡통을 내어밀며 어린 시절 그의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나는 또 한번 심리적 갈등을 겪는다. 과거에 실제로 깡통을 들고 다니던 어린 걸인들이 많았다. 어른 걸인들은 주로 자루를 들고 다녔고 아이들은 깡통을 들고 다녔다. 깡통이 의미하는 바는 한 끼의 밥이었다. 자루에는 비축의 여지가 있지만 '뚜껑 없는 빈 깡통'은 단지 한 사람 또는 한 가족이 한 끼 먹을만큼의 분량밖에 담을 수 없었다. 그래서 깡통에는 곡식이 아니라 오로지 밥이 주어졌다. 반찬이나 국물을 따로 받는 여분의 깡통도 없었다. 그때 사람들은 오로지 깡통 하나만 허용했던 셈이다. 한 끼를 먹으면 또 한 끼를 빌러 가야 했다. 사지 멀쩡한 사람이 깡통을 들어서는 안 되었다. 아침 식전에 깡통을 들고 와서도 안 되었다. 그것이 그 당시의 불문율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깡통을 들어본 자와 들어보지 않은 자의 간극이란 엄청난 것이리라. 부자와 빈자 사이에서 항상 갈등해 온 나로서는 깡통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깡통을 찬다는 건 죽음보다 더한 나락일 수 있으니까. 우리의 삶이 복잡해진 이유는 어떻게 하면 깡통을 차는 수치를 면할까 하는 궁리와 계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작가는 달랐다. 그는 어린 시절 숙명처럼 깡통을 달고 다녔다. 그는 자신의 삶을 명확하고 단순하게 그렸다. 그는 인생을 빈 깡통이 채워지고 비워지고 다시 채워지는 과정으로 비유했다. 그것은 단지 문학적 수사만은 아닌 것 같다. 깡통을 들고 구걸해보지 않은 자가 어떻게 깡통을 가벼운 문학적 수사 정도로 치부할 수 있겠는가. 그는 희망과 기쁨을 깡통에 담았으며 절망과 슬픔을 깡통으로 비워냈다. 어쩌면 깡통의 단순함이 그의 힘이었고 삶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뚜껑 없는 깡통 하나에 그는 인생의 파란만장과 신산고초를 다 담았다. 깡통이라는 절대 빈곤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들의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참으로 나약하다. 나 스스로도 이해 불가능한 지금의 삶에 아득한 절망감을 느낄 때가 많다. 그 때 문득 누군가가 이 복잡한 세상에 대하여 '눈물 젖은 빵'의 힘을 이야기한다. 바로 그가 우리에게 '깡통 속에 들어 있는 식은 밥 한 덩어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장캉캉의 '모란의 거부'
수필은 이야기다, 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야기 뿐이라면 소설을 읽거나 쓰지 굳이 수필을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수필에는 이야기(서사) 외에 그 무엇이 담겨 있는 것이다. 혹은 이야기라도 소설 속의 이야기와는 다른 종류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수필에는 모종의 이야기들이 범람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일상에서 건진 잡다한 이야기에서부터 한 사람의 일생을 축약한 이야기, 또는 세상 전반에 관하여 관심을 표명하는 이야기들이 도처에 넘쳐난다. 사실 그 이야기들에 조금 식상하기도 하고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의아할 때도 있다. 언제까지나 우리가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 따위로 만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는 우리가 이야기의 차원을 좀 달리해야 할 때이다. 통상의 이야기에는 갈등이 있고 전개가 있고 파국이나 반전 등이 있으며 그 모든 이야기에는 반드시 개연성이 있어야 그럴듯한 이야기가 된다. 즉 물리적인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에서는 '내적인 필연성'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시적인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그 상상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작품이 바로 '모란의 거부'이다. 그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꽃(모란)은 장안에서 낙양으로 쫓겨난다. 개화開花를 명령한 무측천(측천무후)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꽃은 낙양에 와서야 비로소 비단처럼 펼쳐지며 오색찬란한 모란성牡丹城을 이룬다. 신분이 하락하면서 오히려 그 진가가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올해의 모란 축제에 꽃은 피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개화를 재촉해도 꽃은 결코 서두르지 앓는다. 시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그 오연함에서 진한 꽃의 품위가 느껴진다.」 꽃이 절대 권력에 의해 귀양을 갔다는 것이 집단의 상상력이라면 그 꽃이 올해는 개화 시기를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은 작가 개인의 상상력이다. 그 일화들은 모두 '꽃에도 의지와 미의식이 있다'는 결어를 도출해 내기 위한 내적 필연성으로 직조되어 있다. 에즈라 파운드가 지적했듯이 한자는 이미지즘의 문자다. 그런 의미에서 모란의 이미지들로 충만해 있는 이 작품은 어떤 의미에선 가장 중국적인 작품이다. 누가 뭐래도 수필의 핵은 이야기다. 그러나 이미지들이 삼투하며 빚어내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들은 바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심연'인 것이다.
김응숙의 '공터'
세익스피어는 '인생은 연극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제 그 말을 사회적 통념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연극 대신 영화나 드라마란 말로 대체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배우라는 점은 공통이고 우리가 그 연극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여전히 관객이다. 그러나 그 말의 해석은 그 때나 지금이나 모두 각각이다. 어떻게 해석해도 의미가 통한다는 점에서 그 말은 또한 매력적이다. 작가 김응숙의 '공터' 역시 그 말에 대한 충실한 해석이자 또한 수필적 적용이다. 그는 주로 공터라는 무대의 해석에 주력했다. 공터라는 무대에서는 본격적 연극이 행해지지는 않는다. 짜여진 플롯에 의한 의도적 행동이나 대사도 없고 정해진 등장인물도 없다. 그저 스포트 라이트가 이리저리 떠돌며 붙잡는 인물이 그 날의 주역이 되는 식이다. 공터는 각본이 있는 무대라기보다는 즉흥적 퍼포먼스에 가깝다. 그러나 모든 연극이 그러하듯이 각각의 인물에는 역할이 있다. 우리들의 인생처럼 직업 상의 역할일 수 있고 신분 상의 역할일 수도 있고 관계망 속에서의 역할일 수도 있다. 공터에는 두부 장수, 엿장수, 뻥튀기 장수, 이발사, 약장수가 등장하고 출근하는 가장, 여공들, 학생들, 아이들이 들락거린다. 때로는 원숭이와 함께 써커스단이 집단으로 출몰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노제가 치러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무대에서는 죽음도 한 역할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작가가 굳이 '인생은 연극이다'를 해석하기 위한 무대로 공터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 눈에 비치는 현실적 삶이라는 것이 진실에 기반한 합목적적 드라마라기보다는 무의미하게 흩어져 있는 편린들, 시작과 끝이 별 차이가 없는 부조리극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공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는 분명히 역할이라는 게 있다. 역할은 어쩌면 본질을 숨기기 위한 가면일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본질을 찾기 위한 도구일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우리 모두는 역할을 맡고 있고 상대를 역할로 인식하기 때문에 인생은 연극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드디어 공터에 역할이 불분명한 사람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를 '바바리 아저씨'라 불렀고 그가 혼자 펼치는 연기를 '모노 드라마'라 불렀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동조하는 배우가 없는 것이다. 온갖 장수들에게는 손님들이 있고 가장에게는 가족이 있고 심지어 망인에게도 애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서로의 역할을 인정하고 서로의 본질을 내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안도한다. 그러나 바바리맨의 독백은 다르다. 한 손을 치켜들고 외치는 그의 독백에서 어쩔 수 없이 그의 본질이 드러난다. 그의 페르소나는 찢겨져 있고 그 틈 사이로 보이는 그의 민낯은 보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 역할이 없는 민낯의 사람이 또 하나 등장한다. 공납금이 없어 학생이라는 역할을 잃은 작중 화자(작가)이다. 그녀는 들창을 통해서 항상 바라만 보던 공터에 어느덧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소통의 욕망이리라. 하지만 그녀에게는 소통의 빌미가 될만한 역할이 없다. 그렇다고 상처 투성이의 자의식을 내보일 수도 없다. 어둠 속의 독백은 어떠한가. 아무도 없는 방범등 아래서의 그녀의 독백은 어쩌면 방백에 가깝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길갓집 들창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는 '사람은 누구나 배우이며 동시에 관객'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어쩌면 자기 자신의 가장 열렬하면서도 유일한 관객일지도 모른다. 공터는 '광장처럼 도도히 흐르는' 역사적 의미도 없고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임시적 공간일 수밖에 없다. 또한 공터는 상존하는 인물도 배경도 없는 덧없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우리 삶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작가는 전통적 의미의 스토리텔러는 아니다. 작가는 차라리 이미지를 중첩시켜 본질을 드러내고자 하며 하나 하나 전개되는 이미지들이 구심점을 잃지 않고 극적인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작가는 이로써 수필의 한 진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공터라는 개념 자체는 이미 전형화된 프레임이다. 전형화된 시각으로는 자칫 인간의 심연을 놓칠 수 있다. 이 작가의 역량으로 볼 때 고정된 프레임을 깰 수 있는 파격의 힘과, 보다 깊이 있는 시력을 충분히 기대해도 좋으리라고 본다.
구활의 '목로주점에서 만난 친구들'
수필가 '구활', 나는 그를 기억한다. 어느 모임에선가 나는 그를 본 적이 있다. 큰 키와 멋진 외모, 그리고 관록이 붙은 언행으로 그는 좌중을 압도했다. 그는 시대를 거스르는 듯한 검은 중절모를 쓰고다녔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낭만파로서의 풍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나의 한 친구가 처와 이혼하고 젊은 여자와 연애를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한 친구가 그 친구를 '우리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라고 지칭했다. 이처럼 한 때 유행했던 낭만이란 말은 조금은 시대착오적인 어휘가 되어버렸고 조금은 비아냥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낭만적'이라는 수식어를 지울 수가 없었다. 술 먹고 거침없이 떠들고 밤 늦게 거닐고 아무 데서나 딩굴고 자면서 문학과 인생을 논하는 모습이 낭만적인가? 아니면 젊어서 맺은 우정을 대과없이 유지해온 넉넉한 모습들이 낭만적인가? 아니면 침침한 돌체의 분위기나 밑빠진 소파나 찌그러진 술주전자 같은 젊은 날의 대책없는 절망이 낭만적인가?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그의 글이 왜 낭만적인 인상을 주는가, 도대체 낭만주의라는 인생론은 정체가 있기는 한 건가, 아니면 단지 허상에 불과한가, 평생을 낭만주의자로 자처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느끼게 될 인생의 뒷맛은 어떤 것일까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그와 삶의 방식이나 기질이 크게 다르다. 나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내가 낭만주의를 내세울 때는 나의 부족한 점이나 나의 죄악을 땜빵질할 때뿐이다. 나는 그의 호방한 기질을 결코 흉내낼 수조차 없다. 그럼에도 그와 나 사이에는 기묘한 접점이 있다. 그 지점은 그와 내가 만나는 부분이면서 동시에 서로 갈리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것은 일종의 '이류 의식'이다. 자신은 결코 주역이 아니라는 생각, 자신이 속한 집단은 결코 주류가 아니라는 의식 등이다. 그는 젊은 시절 일생의 친구들을 얻었다. 그가 수필 쓰는 사람이니까 그의 교우관계를 문필업 쪽으로 압축해보자. 그 중 한 사람이 우리가 잘 아는 소설가 김원일이고 또 한 사람이 시인 도광의다. 그는 스스로 자신은 그들에 비해 문학적 재능이 부족하였으며 늦깎이로 데뷔하여 이나마 성취를 이룬 것도 모두 김원일이 길을 터준 덕분이었다고 고백한다. 단순한 겸양으로만은 들리지 않는다. 글의 문맥 여러 군데서 그는 기꺼이 조연의 위치를 인정한다. 영화나 현실에서나 조연이 주연의 역할을 탐하거나 질시하면 그 판은 깨어지게 마련이다. 그는 이인자의 역할을 감수하며 그 판을 잘 유지해 왔다. 그러나 나는 그 지점을 공유하면서도 바로 그 지점에서 엇갈린다. 나는 '살리에르'의 역할을 감당 못한다. 나는 그 판을 흔들거나 깨버리며 궁극적으로는 회피해버린다. 그러나 어느 판으로 도망가도 나는 이류라는 의식을 떨치지 못한다. 그의 글을 다 읽고나서 나는 또 이런 상념에 잠겼다. 과연 일류의 인생만이 진품이고 이류의 인생은 모조품인가. 그들은 프로이고 나는 영원히 아마추어인가.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좀 다르다. 그들은 뭔가에 매몰된 자들이고 나는 약간 비껴선 자일 뿐이다. 어쩌면 인생의 진면목은 약간 비껴선 방관자들의 눈에 더 여실히 보일지도 모른다. 무대에서 춤추고 있는 자들은 벽 앞에 월플라워wall flower처럼 서있는 여성들의 비애를 모른다. 그리고 진실은 언제나 비애 속에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다. 그는 아마도 일찌감치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사실은 냉철한 현실주의자며 낭만주의자는 그의 외피에 불과할 것이다. 나처럼 평생을 히어로 콤플렉스hero complex를 버리지 못한자가 진정한 골수 낭만주의자며 사이비 로맨티스트다. 그런데 아시는가? 모든 로맨티슴은 허구이며 진정한 로맨티스트는 그 외피만 걸치고 다닌다는 사실을?
그 노시인은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 개인을 위해서나 우리나라 문학계 전체를 위해서 그는 반드시 재기해야 한다. 그러나 그 노시인이 다시 일어서려면 그 날개부터 벗겨야 한다. 아니 벗어야 한다. 이 땅의 차디찬 땅 위에 달랑 나무의자 하나 놓고 앉아서 얼아나 많은 시인들이 혹한에 떨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 노시인은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한 달에 한 편 정도, 아니면 일 년에 한 편 정도만 시를 써야한다. 그것도 나무의자 위에 앉아서, 연필로, 고독하게. 그는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냥 쓸쓸히 죽어 간다면 그는 시인도 뭣도 아니다. 지금까지의 시는 다 잊어도 좋다. 나이 불문하고 지금부터 진정한 시를 써야 우리는 그를 비로소 시인이라고 부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