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문 >
저 삼일 이재영이 2017년에 웹 소설 플랫폼인 ‘문피아’에 ‘해경 특공대’라는 소설을 연재했습니다.
그중에 진주성 전투 관련 부분이 있어 옮겨 봅니다.
( ‘문피아’에서 제 필명은 ‘맘세하루’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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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제2차 진주성 전투
“예? 왜군이 9만 3천 명이나 쳐들어왔어요?”
삼봉이 엄청난 숫자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훈에게 물었다.
“그 당시 조선 전체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이 약 12만 명 정도였다니까, 80프로 정도를 진주성 공격에 투입했다는 말이 되지요.”
“야~ 그 자식들, 진주성 1차 전투에서 패배한 설욕을 하려고 아주 작정하고 덤볐구먼.”
문도도 10만에 가까운 대군이 이 진주성을 공격하는 장면을 연상하며 촉석루 아래 성벽과 남강 건너편을 바라봤다.
“그래도 그 당시는 명나라 지원군사도 들어와서 우리 관군과 의병까지 합하면 15만 8천 명이나 됐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군이 진주성을 공격할 조짐은 염탐하고 있었을 건데, 그렇다면 그때 진주성에는 아군이 몇 명이나 주둔하고 있었을까요?”
삼봉이 적어도 수만 명은 있었겠지 싶어서 물어봤다.
“지금까지 알려지기로는 그때 진주성 안에 있던 조선 군사는 전부 5천 8백 명밖에 안되었다고 해요.”
“예? 겨우 5천 8백 명밖에 안됐다고요? 그럼 뭐냐, 왜군이 9만 3천 명이면 16배나 되는데, 어떻게 싸워요?”
삼봉이 어의가 없어 혹시 5만 8천 명을 잘못 말하지 않았나 싶어 정훈을 빤히 쳐다봤다.
“그것도 전부 정규 군사가 아니고 의병 1천 3백 명을 포함한 숫자랍니다. 그러니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수밖에 없었지요.”
정훈도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2차 전투의 패인이 완전히 중과부적이었음을 강조했다.
“혹시 성 안에 수만 명이 들어와 있을 수 없어서 지원군이 성밖에 주둔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1차 전투에서 의병대장 곽재우는 성밖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다며?”
문도도 안타까워서 설마 그렇게 적은 군사로 성을 지켰겠냐는 듯 말했다.
“아니야! 왜군이 몰려왔을 때 진주성 밖 백리 이내에는 아군이 전혀 없었대. 완전 고립무원이었단다.”
대답하는 정훈도 씁쓰름한 미소를 지었다.
“백리면 40키로잖아? 아니, 어째서 9만 명이 넘는다는 조선군사가 하나도 없어? 하다못해 2만 3천 명이나 된다던 의병은 다 어디 가고?”
이해가 안 되는 문도가 계속 따지고 물었다.
“내가 그 이유를 어떻게 다 알아? 그렇다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흐흐.”
진주가 고향이라고 관광 가이드 자청했던 정훈이 더 이상 설명할 수 없어 난색을 표했다.
명나라 원군의 개입으로 1593년 5월에 한양을 내준 왜군은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후방 보급로가 차단되자, 군량 공급이 어려워져 하는 수 없이 부산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일본으로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는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명나라 파견군 지휘부에 뇌물을 바쳐가며 지속적으로 강화 회담을 가졌다.
그 과정에서 일본 본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군 전군에 진주성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명나라와 유리한 강화협상을 위한 무력시위와 함께, 침략 첫 해에 1만 명이나 몰살당하고도 공략하지 못한 진주성 1차 전투에 대한 보복도 하려는 의도였다.
그와 아울러 또 다른 목적이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조선 점령의 야욕을 버리지 못한 일본은 진주성을 함락하면 곡창지대 호남에 병참기지를 구축하고 이를 발판으로 재차 북상하여 전쟁을 계속하려는 계획도 지니고 있었다.
왜군의 동태를 염탐하고 있던 조선 조정은 명나라 군대에 진주성 병력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명군은 왜군이 진주성에 잠시 머물다 퇴각할 거니까 전투를 치르지 말고 성을 아예 비워주는 게 낫다는 공성론(空城論)을 내세우며 응하지 않고 시종일관 방관하는 자세만 취했다.
당시 명군은 진주 근처인 대구, 남원, 상주에 주둔한 군사가 다 합쳐야 1만 명을 조금 넘을 뿐이어서 열 배 가까이 되는 왜군을 상대할 수 있는 여력이 없기도 했다.
의병대장 홍의장군 곽재우와 선거이, 홍계남 등 조선군 장수들은 진주 근교까지 갔다가 10만 대군을 보고는 도저히 무리라 판단하여 진주성 구원을 포기했다.
당시 다른 의병을 입성시켜 수성군을 증원하라는 작전명령에 대해 곽재우는 적의 군세를 “천하에 능히 당해낼 수 없는 형세”로 파악하고 “차라리 자결할지언정 입성은 않겠다”고 하며 삼가 등지로 물러났다.
도원수 권율마저 진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운봉에 주둔하며 사태를 주시만 했다.
그러나 그러한 형세 속에서도 진주성이 지닌 전략적 중요성(곡창지대 호남지역의 보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사수를 결심하고 합류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 진주 목사 서예원 휘하의 본주군(本州軍)은 약 2천 4백 명이었는데 진주성 안으로 피신해 들어온 민간인 5만 5천 명 중에 6백 명 정도를 뽑아 보충해서 고작 3천 여명의 군사로 수성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의병장인 창의사 김천일이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진주로 왔고, 충청병사 황진이 7백 명,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5백 명을 데리고 와서 관군 1천 5백 명이 늘어났다.
이어 의병 복수장 고종후가 4백 명, 부장 장윤이 3백 명, 의병장 이계린이 1백 명, 의병장 변사정의 부장이 3백 명, 의병장 민여운이 2백 여명을 거느리고 와서 의병 1천 3백 명이 보태져, 진주성 안의 군사가 2천 8백 명이나 불어났지만 전체 수성군사는 모두 합하여 겨우 5천 8백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초유사 김성일, 목사 서예원과 김준민, 이종인 등은 합세한 이들과 함께 수성을 논의하며,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고립무원의 낙동강 오리 알 처지이고, 9만 3천 명의 왜군 코끼리 앞에 5천 8백 명의 비스킷 같은 신세이면서도, 감히 대적해 싸워 진주성을 사수할 작전 계획을 짜고 있었다.
관, 군, 민은 서로 역할을 나누어 전투에 임하기로 했다. 관은 편대를 나누어 군사들을 독려하고, 주민들은 성안의 토담을 높이는 작업과 무기로 사용할 돌을 나르는 작업을 하며, 의병장들은 성을 넘으려는 왜군을 직접 상대하여 무찌르기로 했다.
부산과 경상도 연해지역에 내려와 있던 왜군은 1593년 7월13일부터 선박 800척을 동원하여 9만3천명의 군사를 김해, 창원으로부터 진주성으로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7월14일 함안점령을 시작으로 16일 반성을 거쳐 18일 의령을 분탕질했고, 19일부터 동쪽 단성, 삼가 및 남강 변 등지로 진출하여 원군이 이르지 못하도록 진주 일원을 완전히 봉쇄했다.
7월19일 적의 선봉인 기마병 2백여 기가 진주성 동북쪽 산 위에 나타나 진주성을 살피고 돌아갔다.
7월20일에 처음 교전이 일어났는데 왜군 30여 명을 쏘아 죽이자 퇴각했다. 초저녁과 2경, 3경에 다시 공격했다가 또 퇴각하였다. 진주성 남쪽에는 남강이 흐르니까 조선군은 침입이 예상되는 서북쪽에 해자를 파고 물을 흘려 호를 만들었다. 그러나 왜군은 해자에 흙을 메워 길을 만들었다.
7월21일에는 낮에 3회, 밤에 4회 공격을 하였고, 22일에는 적의 증원군 1천명이 동서로 진을 쳐서 포위하였다.
7월23일 왜군은 동문 밖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 흙으로 된 대를 세워 성안으로 사격을 퍼부었다. 이에 충청병사 황진도 성안에 다시 높은 언덕을 쌓아 대처를 하였으며 낮의 세 차례 공격과 밤의 네 차례 공격을 모두 격퇴하였다.
7월24일 왜군은 방책을 만들어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화전 공격을 시도했다. 성내의 초옥을 불태우며 맹렬한 공격을 퍼붓더니 다시 전서를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 이날도 밤낮으로 일곱 차례를 싸워 적을 격퇴했다. 이 때 경상도지역 민심을 다스리는 초유사 김성일이 병사했다.
7월25일 왜군은 동문과 서문 밖에 다섯 군데의 언덕을 축조하고 거기에 공성용 대나무 대를 세워 하향 조준으로 사격을 하여 조선군 300여 명을 죽였다. 그리고 철갑을 입고 사륜거라는 장갑차를 끌고 와 철추로 성문을 뚫으려 했다. 장사였던 김해부사 이종인이 연거푸 적을 베어 물리치고 조선군은 기름과 횃불을 던져 왜군에 대항하여 격퇴시켰다.
7월26일 피로가 겹쳐 야간 경비가 소홀해진 틈을 타 적이 몰래 와서 성을 뚫으려 하는 것을 힘들게 방어했으며, 1천 여명의 적이 죽었는데 황진도 적이 쏜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성 안의 유일한 베테랑 관군 장교였던 황진의 죽음은 이미 절망적이었던 전투의 승패를 완전히 결정지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7월27일(음력 6월 29일) 전사한 황진을 대신하여 목사 서예원이 경비대장을 맡았으나, 겁을 먹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자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직을 파하고, 장윤에게 그 직을 맡겼으나 장윤도 탄환에 맞아 죽게 된다.
오후에 폭우가 내려 동문의 성벽이 무너지자 왜군은 노도와 같이 밀려왔는데, 활과 화살로 대응을 하지 못하므로 창과 칼로 육박전이 일어나게 되고, 이종인도 왜군 탄환을 맞고 죽게 된다.
사실상 진주성 전체를 지휘하던 의병장인 창의사 김천일도 촉석루로 모여 항전을 하다가 아들과 함께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죽는다.
이때 경상우병사 최경회와 여러 장군도 남강에 투신하여 죽게 된다.
이 전투로 인하여 전라도 의병은 김천일을 비롯한 지도부가 한번에 날아가 버려 와해 되었다.
일본 본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5월 중순에 진주성 공격 선봉장 중의 한 명인 ‘가토 기요마사’에게 보낸 서신에는 “진주성을 공위하여 모조리 토멸하고 그 후에 전라도, 경상도를 정복하고 축성할 것. 한성에 집결한 병력을 인수하여 진주성을 공위하고 축산으로 압축하여 한 명도 남기지 말고 도살할 것”을 명령하는 등 자못 광기 어린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진주성이 함락된 후 성안에 있던 사람들은 군인과 민간인을 막론하고 남녀노소 구분 없이 전멸하였다. (조선측 기록에는 6만 여명, 일본 측 기록에는 2만 여명)
왜군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사창(司倉)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로 왜병은 3만 8천 명이 전사하였고, 병력의 3분의 1을 잃은 왜군은 추가 진격을 포기하고 부산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전황의 보고도 제대로 받지 못한 무능한 조선 조정에서는 명군의 이여송과 송응창에게 진주성 구원을 요청하는 자문을 보냈는데, 이미 진주성이 함락되고 열흘이나 지난 뒤였으며, 그 다음날에야 진주성 함락을 알리는 장계가 조정에 도착했다.
결론적으로 6만 진주목민들의 희생은 무의미한 죽음이 되어버렸고,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책임소재를 놓고 다툼이 벌어졌다.
류성룡은 “김천일이 의기만 높고 재주가 없어서 졌다”고 김천일을 비난하였고, 안방준은 이런 주장을 하는 류성룡을 역으로 비난했다.
김천일과 안방준의 당파가 서인이었기에 남인의 영수였던 류성룡이 그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존재한다.
첫댓글 이 사진들이 마치 대 화가의 작품 같습니다.
이 왜놈들 근원이 백제인데 못된 놈들, 언제고 가라앉아 없어질 놈들.
네, 난정 작가님. 퍼온 사진 멋있죠?
진주 '개천 예술제' 행사 중 촉석루 성벽 아래 논개 의암 주변에서 재연된 임진왜란 장면입니다.
임진왜란 전에 조선 인구가 1,400만 명이었는데, 전쟁 중에 330만 명 죽고 1,070만 명 남았답니다.
우리의 주 적국은 일본이 분명하지만, 일본의 현 수뇌부는 백제가 망하고 건너간 우리 민족의 후손일지도 모른다니,
저 왜노무세키들, 어째야 쓸지 모르겠슴다. ㅋㅎ
논개가 주논개인 거 아시죠?
논개의 성씨가 주씨 인줄은 이제야 알게되었습니다.
@蘭亭주영숙 네, 의기 주논개 손녀 의녀 주영숙 작가님 . ㅎㅎ
마침 오늘 올리는 제 웹소설 '논개'에 집안 내력도 조금 나옵니다.
@삼일 이재영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깊은 시심에 잠겨 잠시 머물러봅니다.
유년시절 할아버지께서 진주 촉성루에 다녀오시고 나서 논개이야기 들려주셨습니다.
네, 뱃사공님. 공감의 댓글 감사합니다.
음력 10월 3일에 열리는 개천예술제는 국내 최초의 지방 문화축제로 진주 경남일보 주간이던 문인 설창수 씨가 1949년에 1회를 개최했습니다.
작년에 70회가 열렸고, 그동안 1952년 한국동란과 2020년 코로나 사태만 빼고 쭉 열렸답니다.
제가 초등 때는 시내 가장행렬, 남강 백사장에서 씨름과 소싸움이 열렸고, 그 옆에 천막치고 입장료 받는 '말 광대'라고 부르던 서커스가 가장 인기가 높았지요. 물론 입장료 내고 들어가서 일반 서민은 홍보용 시가행진만 보며 가슴 설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