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을수록 촘촘히 박히기 시작하는 별들은 이내 은하수를 이루며 저 멀리 알프스의 침봉에서 비박하고 있을 젊은 알피니스트의 꿈으로 나타난다. 갑자기 가슴이 뛴다. 빛 하나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밤하늘에서가 아닌 검은 북벽 상단에서. 잠시 후 다시 빛이 발한다. 비박 지에 자리 잡은 알피니스트의 불빛은 더는 움직이지 않고 밤하늘의 별처럼 그 자리에 고정된다. 알피니즘이라는 별을 쫓는 그 젊은 알피니스트는 자신이 알피니즘의 별빛을 발한 사실을 결코 모를 것이다. <허긍열 저 ‘알프스에서 온 엽서 1’(도서출판 몽블랑) 중에서>
산에서 오래 살다 보면 저절로 시인이나 수필가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알프스에 사는 산악인 허긍열(48)이 그랬다.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해발 4,807m) 아래 마을, 샤모니 몽블랑에서 만난 허 씨의 시선은 먼 산정 어느 한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는 늘 산을 바라보고, 산을 생각한다. 그리고 산에 대해 글을 쓴다. 때로는 시인으로 산의 속삭임을 받아 적고, 때로는 산악인으로서의 삶을, 자신의 여정을 꼼꼼히 기록한다.
◆알프스를 찍고 쓰는 '알프스 소년'
그의 첫인상은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별로 손대지 않은 듯한 머리카락은 햇살에 바랜 듯 약간은 푸석해 보였다. 산의 품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의 눈매도 선하기 그지없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빗대 ‘알프스 소년’이라 우스개 삼아 부른다. 그는 알프스에서 산을 오르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그의 글과 사진에는 자신만의 감수성이 그대로 스며 있다. 그 거친 산록에서, 그 얼어붙은 눈밭을, 그 깎아지른 절벽을 기어오르는 산 사나이가 이렇듯 여리고 섬세하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음이 선뜻 믿기지 않는다.
그는 한국 산악계 누구라도 인정하는 산사람이다. 젊은 시절 국내외 수많은 유명 산과 봉우리를 누비며 그의 이름 앞에 ‘산악인’이란 타이틀을 더 깊게 새겼다. 그의 이력을 보면 연도별로 이어지는 세계 곳곳 고봉들의 이름들이 줄을 이루고 있다.
◆소년의 마음을 뺏어버린 산
성주군 용암면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에게 자연은 집이었고 놀이터였다. 철들기 전 어린 나이에 대구라는 대도시로 나와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지만 가슴 속에는 늘 고향 성주의 시골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산에 빠졌다. 앞산 안일사 옆 해골바위는 방과 후 놀이터였다. 교련복에, 혹은 교복을 입은 채 운동화 차림으로 해골바위를 볼더링(bouldering`로프없이 하는 암벽등반)으로 오르곤 했다. 그러다가 한 산악회를 알게 되었고, 연경의 듬바위와 팔공산의 병풍바위를 거쳐 대학에 들어가면서 히말라야와 알프스로 반경을 넓혔다.
허 씨는 벌써 10여 년을 알프스 몽블랑 자락에 머물면서 산악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눈과 얼음으로 덮인 암벽을 타기도 하고, 산악스키를 타고 거대한 빙하를 질주하기도 한다. 여름이면 산록을 누비며 들꽃을 즐기기도 한다. 그 많은 세계의 고봉들 중 몽블랑을 택한 이유는 뭘까.
"몽블랑은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바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습니다. 히말라야의 고봉들은 베이스캠프지까지 가는 데만도 수일 수십 일이 걸리기도 합니다. 몽블랑은 바로 집 앞이라 지금이라도 떠날 수가 있습니다. 게다가 몽블랑은 알피니즘(스포츠로서의 등산)의 태동지이면서 여전히 그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곳이죠. 알피니즘의 성지지요."
◆나의 운명은 넥타이보다 자일
그의 직업은 '산악인'이다. 돈을 버는 직업은 아니지만 산악인으로서의 업무(?)에 충실하려 노력한다. 매일 아침 6시면 일어나 집 앞의 2천m 정도 되는 산을 '산책'하고 온다. 서너 시간의 등산을 마치고 점심을 먹은 후에는 스포츠센터에서 상체단련을 한다. 일주일에 4, 5일은 이런 운동을 거르지 않는다. 6월 말부터 두세 달 정도 어쩌다 그와 함께 등산을 하려고 찾아오는 산악인들이 한두 팀 있다. 겨울에는 산악스키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한 팀 정도 찾아온다. 산악인과 스키어들을 위한 가이드 수입이 그를 알프스에 머물 수 있게 해주는 재원이다. 국내 유명 산악잡지들에 정기적으로 글과 사진을 보내는 일도 하고 있다. 연봉을 묻자 “한 1천만원쯤?”하며 웃어버린다. 이 수입은 그의 1년치 방세로 거의 들어가버린다. "그래도 이렇게 산에 머물 수 있으니 다행이죠. 적게 벌면 적게 쓰면 그만이죠."
그는 넥타이를 맬 줄 모른다. 대학 졸업 후 첫 입사 면접 때, 결혼식 때 잠깐 매어봤을까. 짧은 기간 세일즈맨 생활을 할 적엔 사장이 매듭지어준 넥타이를 풀었다 조였다 하기만 했다. 그에 비하면 그의 자일(등산용 밧줄) 매듭은 눈부시다. 넥타이는 그의 목을 옥죄는 물건이었지만, 자일은 그의 생명을 지켜주는 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넥타이를 벗어 던져버렸다.
"비 오는 날을 위해 준비하는 우산은 하나면 족한 것 아닌가요. 사는 만큼 돈이 필요한 거지 돈을 위해 인생을 살 수만은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언젠가 서울에서 대학생들에게 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비슷한 얘기를 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너무 노는 것도 모르고 공부에만 매달리는 게 아닌가. 인생은 적당히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한 기억이 나는데 아마 그날 선생님들은 별로 안 좋아했을 겁니다. 하하하."
프랑스 샤모니 몽블랑에서 홍헌득기자 duckdam@msnet.co.kr
◇산악인 허긍열은
한국산악회 소속. 2009년 월간 '산' 한국의 산악인 40인에 선정. 1965년 경북 성주군 용암면 동락2동(두만리)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고등학교 2학년 때 산에 입문, 우정산악회에서 활동했다. 영남대학교 기계공학과에 다니면서 히말라야 참랑(7,319m)을 시작으로 해외 원정을 시작했다. 1990년부터 2000년까지 알프스의 여러 봉우리와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 등을 순례했다. 대학 졸업 후 한국전력, 전력설비 무역회사 등을 잠시 다녔으나 2001년 이후 알프스 샤모니에서 계속 거주하며 산악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국내외 산악잡지에 글과 사진을 기고하고 있으며 다수 저서와 번역서가 있다.
매일신문 공식트위터 @dgtwt / 온라인 기사, 광고, 사업 문의 imaeil@msnet.co.kr
ⓒ매일신문사,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