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호]
세탁기 사망진단서
양효숙
사람을 들이듯 세탁기 들이는 데 이것저것 따져 물었다. 주문했던 세탁기가 들어온다니 휴일 늦잠도 반납한 채 세탁기 곁을 맴돈다. 냉수와 온수 호스를 감쌌던 헌 옷 가지를 풀고 호스를 빼낸다. 세탁기 위에 흘린 세제 가루를 훔치며 세탁기를 쓰다듬는다. 허물처럼 벗어 놓은 옷가지들을 빨아주다 멈춘 대상에 대한 연민이다. 어느 소설가는 『인생사용설명서』를 쓰고 어느 목사님은 『결혼설명서』를 냈는데 나는 세탁기 사망진단서를 발급하고 있다.
가전제품에 속했어도 세탁기는 뭔가 다르다. 그 다름에 연민이 묻어난다. 사람을 닮았고 그 중에서도 엄마를 닮았다. 물길을 따라 가듯 가보면 오래된 빨래터에 쪼그려 앉은 모성애와 만난다. 안방과 거실에서 사랑받는 티비와 다르게 세탁기는 습하거나 차가운 곳에 있다. 욕실이나 베란다 쪽에 웅크린 채 나앉아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에는 존재감이 있다. 그 자리를 지키고 지켜내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존재감을 느낀다. 좋아하는 일과 잘 하는 일이 직업이 되면 행복하다. 좋아하는 일이 뭐냐고 누군가 물어봐 주기를 바랐던 시기가 지나면 스스로에게 물으며 길을 찾기도 한다. 마흔 넘어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어 돌고 도는 일이 재밌다.
십대부터 시작된 이른 자취생활과 경제적인 독립을 통해 뭔가 다른 나를 만났었다. 이십대에 노후대책 한다고 월급의 반을 연금보험에 붓기도 했다. 내 자리를 만들고 더 좋은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 돌고 돌았다. 젖은 빨래처럼 축 쳐졌다가도 툭툭 털고 일어서야 했다. 시립병원 중환자실에서 실습하던 스무 살의 내가 보인다. 생사를 넘나들던 환자의 호스를 빼고 시트를 거둬낸 후 죽음의 그림자를 닦으며 인기척 없는 그림자에서 무섬증을 느꼈다. 죽음의 그림자는 이따금씩 엄습하여 삶을 보여줬다. 언제나 내 방에선 햇빛과 그늘이 세제와 물처럼 맴돌았다. 이 집 저 집 전세로 옮겨 다니며 욕실이나 마당가 수도에 쭈그려 앉아 손빨래를 했었다. 막노동 하며 재수하던 막내 옷은 세탁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내 손을 거쳐야 했다. 시멘트 묻은 옷에 비누칠 하며 엄마처럼 앉아 있었다.
세탁기가 사람을 닮았는지 사람이 세탁기를 닮았는지 모르겠다. 건강하던 사람이 어느 날 쓰러지듯 일은 속도감을 탔다. 부품 교환하는 서비스를 한 번 받았을 뿐인데 마지막 신호처럼 ‘FE’가 깜박거렸다. 전원을 눌러 보고 수도꼭지를 열어봐도 글자가 사라지지 않았다. 결혼하면서 샀으니 십 년이란 세월이 세탁기 안에서 빨래들과 함께 돌아갔다. 아들 옷은 빙글빙글 돌면서 툭툭 털면 마술에 걸린 것처럼 사이즈가 커졌다. 세탁기 사용설명서가 어딘가에 있을 텐데 찾는다는 게 새삼스럽다.
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세탁기 상황을 물었다. 에프 이가 뜬다고 했더니 물이 넘친다는 뜻이라며 물을 빼고 사용하란다.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건조한 목소리로 처리한다. 빨래 돌릴 때 세탁기 안에서 뭔가 옷을 물어뜯는지 옷에 구멍이 난다고 되받아 쳤다. 사람이 건강검진을 받듯이 세탁기를 점검해 달라 부탁했다. 출장 나온 7년차 서비스 기사가 전원을 켜자 물새는 소리가 보란 듯이 나고 빨래 없는 통돌이가 거품까지 토해내며 사력을 다한다. 서비스 기사가 출동하기까지 전원을 몇 번 켰다가 껐었는데 그 때마다 무리가 갔나보다. 기회라는 타이밍을 놓쳤다. 물이 새서 부품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손을 댈 수 없단다. 그 순간 에프 이가 ‘FE'로 인지됐다. 십 년 된 제품이라 부품도 없다면서 돈이 제법 들겠다는 말을 반복한다. 세탁기를 버리라는 말처럼 들린다. 마치 의사가 전신 마취된 상태로 수술대 위에 놓인 환자를 두고 보호자를 불러 상황 설명을 하듯 진지하다. 남편에게도 상황을 알렸더니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고장난 것은 부담을 준다. 자리만 차지한 애물단지이니 돈을 주고라도 버려야 한다. 이따금씩 수명을 다하는 것들에 마음이 쓰인다. 버려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다. 낡은 것이 새 것에 의해 밀려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시대 흐름에 역행하기 힘들다. 사람들의 정신도 세탁기처럼 깜박거린다. 감지되는 깜박거림이 신호를 보내도 자가진단으로 끝나기 쉽다. 깜박깜박 뭔가를 잊다가 자기 존재감마저 잃어버린다. 손빨래하던 감각도 무뎌진다. 와이셔츠 날선 주름도 옷과 빨래감 사이를 오가며 무뎌질 것이다.
냉수와 온수는 정맥과 동맥처럼 세탁기와 연결 돼 있었다. 겨울 추위에 심혈관에 이상이 생겨 응급을 요하는 신호음을 보냈으나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전문 서비스 기사를 즉시 불렀어야 했는데 자가 진단하여 오진한 결과 수돗물이 부품 깊숙이 퍼지도록 방치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세탁기 사망진단서를 발급한 후 참회하듯 욕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두 손으로 손빨래를 했다. 남편도 쭈그려 앉아 손빨래를 한 모양이다. 손빨래 하면서 손바닥 가득 세월이 주물 거렸다. 거품처럼 사라지고 헹굼질에 씻겨간 줄 알았던 근원적인 물음들이 찾아 왔다. 욕망하는 인간의 군더더기는 씻길 줄 모른다. 안방 티비 자리에서 세탁기 자리로 밀려난 노후대책은 주책없이 FE 사인을 보낸다.
공중 부양된 내 영혼이 내 주검을 본다면 어떨까. 몸의 집인 몸집을 떠나 홀가분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내 몸을 닦아주는 따뜻한 손길에 가만히 맡기며 자기 연민에 머물다 갈지도 몰라.
양효숙/ 2010년 《시에》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