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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연합군의 공격 앞에 백제는 끝내 무너졌다. 서기 660년 백제의 사비성이 함락된 것이다.
그로부터 백제는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역사는 패망한 사람이나 국가를 기록하지 않는다고 했다.
'잃어버린 왕국' 백제는 그렇게 잊혀진 것이다.
백제금동향로.
1993년 12월 그는 1300년만에 홀연히 백제의 화신으로
우리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 근처에 위치한 절터 공기가 통하지 않는바닥 진흙 속에서 거의 녹도 슬지 않은 원형 그대로
발견되어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일본 학계를 흥분시켰다.
향로는 능산리절터의 서쪽에 위치한 제 3건물터에서 출토되었다.
제 3건물터는 지붕의 기와가 내려앉은 채 조사되었다.
전체 평면은 본체와 남쪽칸, 북쪽칸, 그리고 중앙칸 등으로 구분된다.
향로는 이 가운데 중앙칸에서 출토되었다. 중앙칸의 내부바닥과
북쪽에는 붉게 탄 소토층과 아궁이의 연도가 놓여 있었다.
소토층위에서는 유리구슬․동재료등이 발견되어 이곳이 다양한
물건을 제작하는 공방지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향로는 이 구덩이의 바닥부에서 뚜껑과 몸체가 분리된 채 금동제품 철기편 유리제품 토기류 기와류와 함께 출토되었다.
바로 그가 백제의 귀환을 알리면서 찬란한 백제 문화와 역사 정신을 우리에게 부단히 전하고 있다.
삼라만상이 그 향로에 들어있다.백제인들의 온갖 생각을 그 대향로에서 읽을 수 있다.
불교와 도교 그리고 유교의 이야기가 대향로에는 그대로 녹아있다.백제인들의 사상을 읽을 수 있다.
높이 61.8cm에 몸통지름은 19cm로 받침부 몸통부 뚜껑부 꼭지부의 4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머리를 들어올린 용을 조각하여 받침으로 삼았고, 그 위에 산을 표현하였으며
꼭대기에는 봉황 한마라기 서 있는 모습을 표현해 외형적으로는 신선사상의 지향처인 삼신산을
가리킨다는 박산향로의 형식과 유사하게 나타내었다. 또한 이 향로의 외형적인 구성은 연꽃이 만물을
화생, 즉 성서로운 조화로서 다시 탄생시킨다는 불교적인 시각의 '연화화생'과 관련있게 보인다.
이 향로에서 연봉오리, 또는 보주형으로 나타낸 몸체는 결국 연꽃 모양인데 이 연꽃은 연화화생의 기운을
뜻하는 불꽃과 함께 나타내어지고 있다. 이 향로에서 표현하고자 한 내용과 주제는 봉래산을 중심으로 한 신선의
세계이다. 향로의 꼭대기에서 날개를 활짝 펴고 서 있는 봉황은 봉래산에 살고 있는 상서로운 전설의 새이며
천하가 태평할 때 세상에 나타난다고 한다. 이 봉황의 속성 가운데 하나가 저절로 노래하고 저절로 춤을 춘다고 하여
예로부터 춤과 음악에 흔히 동반된다. 이러한 봉황의 노래에 귀를 기울인 듯 5마리의 원앙새의 시선과 동작이 봉황을
향하고 있으며 신선계의 악사들도 봉황을 맞아들이기라도 하듯 각기 다른 악기로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연꽃은 불교를 봉래산은 도교 예악은 유교를 각각 상징하면서 백제인들의 생각을 실감나게 설명한다.
백제금동향로의 꼭대기에 있는 봉황이다.
뚜껑의 상단에 앉은 봉황은 양의 세계를 상징한다.
매우 사실적이고 자세히 묘사되었으며 머리와 몸통 부분은 작은 구슬로
연결되었다.턱 아래에는 작은 여의주를 끼고 있어 상서로움을 나타내고 있다. 둥근 난형의 물체를 딛고 서 있는 형상이다.
봉황은 태평성대를 알리는 상상의 새이다.
봉황은 천하가 태평할 때 세상에 나타나며 봉황이 울면 사람들은 저절로 노래하고 춤을 춘다고 한다. 봉황는 환조기법으로 만들었다. 박산 위에서 여의주를 품고 있는 봉황은 턱밑과 발 아래 알을 품고 있다.
백제는 부여금동대향로에서 알 수 있듯이 봉황을 숭상했다.
봉황은 천국의 새이다.
동방에서 나온다고 고대 <산해경>에 기록되어 있다.
동방은 동해밖 무궁화피는 대인-군자국의 나라가 있는 땅이니
바로 우리가 사는 한반도 백제이다다.
이 동방에서 봉황이 나와 사해(세계)를 날면 평화와 덕이 실현되었다라고
<산해경>은 기록하고 있다.고대 한반도인들(마한)은 어질고 순박하여
살리기를 좋아한다고 또한 중국의 <후한서-동이전>이 기록하고 있으니
고대 한반도인들은 모두 왕의 자질을 가진 사람들로 봉황을 의미한다 하겠다.
이 봉황들이 만주를 걸쳐 유라시아.아메리카대륙을 날았으니 세계문명의 주역은 동방족이였던 것이다.
절터에서 나온 유물답게 불교의 상징물이 돋보인다. 바로 연꽃이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불전에 향을 피울 때 쓰는 향로로 크게 보면 앞발을 치켜든 용 한 마리가 막 피어날 듯한 연꽃
봉오리를 물고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연꽃 봉오리의 중앙이 아래위로 분리되어 향로의 몸체와 뚜껑을 이룬다.
향로의 뚜껑은 중첩된 형태의 산악으로 묘사되어있고 그 위에는 날개를 활짝 편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한 마리의
봉황이 보주 위에 서 있다. 이 사이에 표현된 5 봉우리에는 그 상단마다 1마리씩 5마리의 새가 얼굴을 들어 정상부에
있는 봉황을 올려 보고 있다. 그 아래 향로의 뚜껑에 장식된 박산은 중국의 동쪽바다 가운데에 불로장생의 신선들이
살고 있다고 하는 삼신산(봉래 방장 영주산)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정면을 바로보는 봉황의 바로 아래에 위치한 주악상으로 완함을 연주하고 있다.
주악상은 두 발이 오른쪽에 오도록 무릎을 꿇고 앉은 모습으로 오른손으로 완함의 줄을 튕기고 있다.
완함은 둥근 공명통(共鳴筒)에 줄걸개를 박고 네줄의 현을 맨 모양으로 중국 진(晉)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완함이라는 악공이 비파(琵琶)를 개량하여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현악기이다.
완함의 악기모양과 연주모습은 고구려의 덕흥리벽화분 삼실총 강서대묘 및 중앙아시아 일대의
불교 석굴사원에서도 나타난다.
이렇듯 봉황 바로 아래 즉 뚜껑의 제일 위쪽에는 5명의 악사가 각각 금, 완함, 동고, 종적, 소 등의 5가지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소발로 깎은 머리는 오른쪽으로 묶여져 있으며 통견의 도포자락과 악기마다의
독특한 자세를 취한 채 연주하는 모습이 실감나게 표현되어있다. 이 사이에 표현된 5 봉우리에는 그 상단마다
1마리씩 5마리의 새가 얼굴을 들어 정상부에 있는 봉황을 올려 보고 있다.
그 아래 향로의 뚜껑에 장식된 박산은 중국의 동쪽바다 가운데에 불로장생의 신선들이 살고 있다고 하는
삼신산(봉래 방장 영주산)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는 신선을 상징하는 듯한 각종 인물, 동물 산수 등이 다양하게 묘사되어있다.
동물들은 실존 동물 이외에도 상상의 동물도 많이 등장한다.
뚜껑의 문양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전면에 걸쳐 삼산형의 산봉우리 24개가 배치되어있다.
산봉우리 가장자리에는 집선문 문양대를 배치하여 산림이 가득한 산을 연출하였다.
이 산봉우리와 계곡 사이에는 각종의 진금기수가 드라마틱하게 고부조로 묘사되어있다.
6군데의 나무와 12군데의 바위, 폭포 그리고 산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을 비롯하여
잔잔한 물결이 있는 물가의 풍경도 보인다.
이들 곳곳에는 상상의 동물뿐 아니라 호랑이 멧돼지 사슴 코끼리 원숭이 등의 실존 동물
그리고 산중을 거닐거나 나무 밑에서 참선하는 인물 기마수렵인 낚시를 하는 듯한 형상의 인물상 등
도합 16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그 아래쪽 즉 뚜껑의 구연부에는 1단의 유려한 당초문 문양대를 배치하였다.
몸체의 구연부에도 같은 형태의 당초문 문양대를 배치하여 뚜껑을 닫았을 때 두 문양대가 서로 맞닿도록 배치하였다.
받침은 용이 한쪽 발을 치켜들고 있으며 나머지 세 다리와 꼬리로 둥근 원을 형성하여 안정되게 만들었다.
받침에 표현된 용은 승천하는 듯한 격동적인 자세로 굴곡진 몸체의 뒤와 그 곳에서 뻗어 나온 구름 모양의 갈기를
투각 기법으로 장식하였다. 용의 정수리에서 솟아 오른 뿔은 두 갈래로 갈라져 목 뒤까지 길게 뻗어 있고 길게
찢어진 입 안으로 날카로운 이빨까지 세밀히 묘사되었다.
용의 입안에 물려진 짧은 기둥(간주幹柱)은 향로 몸체의 하부 받침과 연결시켰다.
용이 입에 물고 있는 기둥의 위로는 향로 받침과 몸체를 연결시키기 위한기둥이 이어져 있다.
이 기둥은 몸체의 둥근 안쪽 면으로 약간 솟아올라 그 끝에 별도의 고리를 끼워 고정시켰다.
우룡(雨龍) 모습과 몸통에 휘감겨 있는 화염문 등은고구려 집안의 5호분 용의 모습과 흡사하다.
중국에 서역의 향품이 전해져서 전국시대 말기부터 악취를 없애고 부정을 쫓기 위해 향로를 만들었다.
백제 금동대향로의 기원을 중국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이들에 의하면 백제 금동대향로는 한나라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아
백제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제작되었다고 한다. 중국에는 백제의 것과 같은 대형 향로가 없다.
한나라 때와 같은 금동 제품이 남조에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중국의 남조시대 유물들 중 비록 실물은 아니지만 백제의 금동대향로와 비슷한 것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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