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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물주머니
온통 눈으로 뒤덮인 계곡안,
입구가 좁고 긴 그 골짜기 안쪽에는 제법 넓은 터가 마련되어 있고,
그곳에는 십여 개의 짐승 가죽으로 만든 막사가 세워져 있다.
제일 가운데 있는 막사는 그래도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는데
안에서는 한 중년인이 투덜거리고 있다.
"음식이 맛이 없어. 지난 십오 년 간 매일 똑같은 맛이야."
"아무소리 말고 먹어요. 이곳에서 다른 사람들은 소금도 없이 살아요."
부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인이 탁자위에 삶은 고기를 가져다 놓으며 말했다.
중년인이 이를 악물며 또 말했다.
"이젠 정말 지긋지긋해.
이번 겨울만 지나고 나면 봄에는 다시 돌아가야지."
"제발 그래요. 그말을 들은 것도 이젠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 예요.
해마다 겨울에는 제가 그말 때문에 미쳐버릴 것같아요."
"이번엔 정말이야.
내년엔 반드시 돌아가서 그놈을 죽여 사문의 복수를 할 생각이야."
"당신의 무공은 아직도 멀었어요.
그자는 당신보다 훨씬 무공이 고강한 사숙과 사백들도 모두 죽였어요.
아마 우린 영원히 돌아가지 못할 거예요. "
중년 여인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사나이의 기가 팍 죽는다.
"사숙과 사백들만 다 돌아가시지 않았어도..
.그 무공을 내가 조금만 더 열심히 배웠더라도..."
"그말은 맞아요. 대체 이게 무슨 꼴이예요.
그 무릉도원같은 우리 무극동(無極洞)을 남에게 빼앗기고
이 추운데까지 도망쳐와서 살게 된 건
모두 당신을 비롯한 우리가 무공을 열심히 익히지 않았기 때문이예요. "
중년 여인이 사나이의 맞은 편에 앉으며 말했다.
이미 아득한 옛날을 더듬는 듯한 눈빛이다.
한데 무극동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무극동이라면 무림사대비세(武林四大秘勢)의 하나가 아닌가?
그런 무극동이 이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중원에서도 일만리가 넘게 떨어진 곳에 와있단 말인가?
중년인은 탄식을 했다.
모든 것이 자기의 탓인 것만 같다.
그때다.
"사부님! 첩자를 잡아 왔습니다."
여러 명의 젊은이들이 우루루 몰려들어오면서 소리친다.
그 중 두사람의 팔에는 만강이 매달려 있다.
피비린내가 물신 풍기며 식욕을 없애 버렸다.
"데려가서 문초해봐라."
중년인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들이 우루루 몰려 나가자 부인이 다시 말했다.
"무림의 첫손 꼽히는 우리 무극동이
여기서 한갓 도적떼와 영역다툼이나 한다는게 대체 말이나 되요?"
"휴... 하지만 중원은 순천원의 땅이오
. 그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소.
세분 사조(師祖)들만 있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것을..."
말로는 내년에는 중원으로 들어가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이미 중년인은 중원에 대한 꿈을 포기한 지 오래인 것같다.
그의 부인도 입을 다물고 눈물을 닦는다.
옛 영화를 그리워하는 듯하다.
"첩자를 문초하는 애들이나 보러 가세요."
중년인이 점심을 먹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하자 부인이 하는 말이다.
그것이 그들의 현실이었다.
중년인의 이름은 관자청(關自晴)이다.
무극동의 제 사십 이대 제자이니 무극삼존자(無極三尊子)의 사손(師孫)에 해당했다.
늘 삼국시대 관운장의 후예라고 생각하며 수염을 기르고자 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도무지 수염은 쥐꼬리처럼만 나서 포기하고 매일같이 면도를 했다.
그의 아내는 문위란(文偉鸞)인데 바로 그의 사매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는 무극동의 제자는 오직 그를 포함하여 아홉 명,
나머지 사람은 그가 알기로는 모두 죽었다.
죽은 이유는 오직 하나, 무공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관자청은 문을 나서 세번 째 막사로 들어갔다.
그의 일곱 제자가 모두 허리를 굽히고 인사를 했다.
그들은 무극동이 무너질 때 살아남았던 어린 아이들인데
관자청과 문위란이 구해서 데려온 것이다.
그의 제자들은 막 만강을 의자에 묶어놓고 문초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키가 크고 눈이 퉁방울처럼 큰 사내가 제일 맏제자 대군(大君)이다.
그가 말했다.
"사부! 이자는 지금까지 왔던 자들과는 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단 말이냐?"
"이 근처에 살던 자가 아닌지 아니면 바보인지 알 수 없습니다.
먼길을 떠날 것같은 행장을 하고 있습니다."
둘째 제자 대영(大榮)이 채찍을 들면서 말했다.
"놈들이 이제 별 수작을 다 부리는 것같습니다.
이놈을 족쳐서 놈들이 언제 공격하려는지나 알아봐야겠습니다."
만강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다가 게슴츠레하게 눈을 떤다.
관자청의 일곱번째 제자인 유일한 여자 전일문(田逸文)이
그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돌린다
. 만강은 머리가 터져 피에 젖어 아수라같은 모습이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이거 너무하지 않소?
도적은 아닌 것같은데 지나는 사람을 다짜고짜 잡아들이는 경우가 어디에 있소?"
관자청이 눈이 둥그레졌다.
"호오! 이거 강남의 억양이 아닌가? 자넨 고향이 강남인가?"
"그렇소. 황산 일검문이 바로 내 사문이오."
"일검문? 처음듣는데, 보잘 것없는 문파인가 보군."
그러자 세째 제자 전차문(田遮文)이 말했다.
"사부! 이자는 첩자입니다."
"그렇지. 내가 쓸데 없는 걸 물을 필요가 없지."
관자청은 눈을 무섭게 치켜 뜨면서 소리친다.
"어서 말해라. 네놈들은 언제 우리를 공격할 계획이냐?"
만강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군
. 여기에 제정신이 박힌 사람은 아무도 없는가."
짝!
둘째인 대영이 그의 뺨을 쳤다.
"이 새끼! 주둥이를 함부로 놀려? 아무래도 쓴 맛을 봐야 겠구만.
사부님, 나가 계시면 제가 실토받아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관자청은 좋을 대로 하라고 말한 후에 나가버렸다.
한마디로 그는 용렬한 사람이다
. 사람을 다스리는 일에도 무공을 익히는 일에도
그다지 수완을 발휘하지 못했다.
명색이 사부이지만 무공을 가르치는 외에는
제자들이 모두 스스로 알아서 하고 있다.
만강은 속으로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이놈들은 실로 무식한 놈들이다.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나를 첩자로 취급했다.
오늘 이놈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은 피할 수가 없겠구나
. 하지만... 언젠가는 네놈들이 네놈들의 피로 목욕하게 해주겠다.)
짝!
다시한번 대영이 그의 뺨을 후려친다.
만강을 처음 발견했던 자는 네째로 대사(大梭)라는 자이다.
그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둘째 형이 직접 손을 들었으니 미리 부는 게 좋을 거야.
둘째 형의 솜씨는 예술이니까."
첫째인 대군이 눈쌀을 찌푸린다.
"그가 불기만 하면 지나치게는 하지마라."
대영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에 전일문에게 말했다.
"물을 가져 와라.
먼저 이놈이 얼마나 독종인지를 시험해 보고 사용할 수단을 정해야 겠다."
전일문이 물을 한바가지의 물을 가지고 왔다.
"이게 무엇인지 아나?"
대영은 허리춤에서 새파란 비수를 꺼내들었다.
만강은 눈을 감아 버렸다.
무슨 짓을 하건 이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날 일이다.
대영은 씨익 웃으며 둘러서있는 다섯 명의 사제들을 본다.
그의 사제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
"이새끼가 꽤 버틸 모양인데, 실과 바늘도 준비해야 할 것같애."
그는 비수를 휘둘러 만강의 웃옷을 갈갈이 찢어버렸다.
"흡!"
비수가 옷을 베면서 그의 가슴도 함께 그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영의 실수가 아니었다.
그의 가슴에 난 상처는 옆으로 길게 그어져있다.
깊이도 만만치 않다.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대영은 악마같이 웃으며 그 상처에 네개의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흐흐흐... 이 단계를 거치고 나면 살아있다는 게 저주스러울 거야.
미리 부는게 어때?"
"잘못짚었다. 나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다."
만강이 분노한 눈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대영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기어코 맛을 보겠다면야... "
뿌두둑!
만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영은 그의 상처로 손을 넣어 배쪽으로 가죽을 일어키고 있었다.
상처로 들어간 그의 손이 명치에 까지 닿았다.
"으으으..."
껍질을 벗기우는 고통,
그 껍질 속으로 손을 밀어넣고 움직이는 고통,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극렬한 고통에
만강은 까무라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처음에 미미하게 신음소리를 냈을 뿐
이내 이를 악물고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애쓴다.
"뜻밖인데, 가죽이 생각보다 질긴 모양이군.
하지만 얼었다가 풀리면 절로 푸석푸석해질 거야."
대영이 피투성이가 된 손을 빼면서 말했다.
그리고 왼손으로 전일문에게서 물을 건내받아
바로 만강의 가슴에다 부었다.
한손가락으로는 상처를 벌린 채다.
물이 피를 씻어내며 상처로 들어가
만강의 배위에 불룩한 주머니처럼 되었다.
밖은 한겨울이다.
만강의 얼굴이 고통으로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 눈알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붉게 충혈되었다.
대영이 발끝으로 그의 배를 툭툭 차면서 말했다.
"이건 약과야. 이번에도 입을 열지 않으면 수은(水銀)을 부어버리겠어.
이봐, 죽더라도 곱게 죽는게 낫지 않아?"
만강이 그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내 배를 가른다고 해도 모르는 일은 모르는 일이다."
"그럼 정말 갈라보는 수밖에."
쭈악!
대영은 차갑게 내뱉으며 그대로 비수를 휘둘렀다.
(헉!)
만강은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대영의 비수가 뱃가죽을 반으로 갈라놓고 있었다.
얇은 내피만 베어진다면 그대로 내장이 쏟아질 판이다.
"정말로 갈라볼까? "
대영은 만강의 목에 비수를 대며 소리친다.
만강은 입을 다물었다.
정말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놈이고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때,
"사형, 죽이면 안되요."
일곱째 전일문이 문득 말했다.
"왜? 사매가 이놈에게 관심이 있나?
그리고 보니 이놈의 얼굴이 꽤나 반반하군."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전일문이 화를 내며 소리친다.
"우리는 그놈에게서 정보를 알아내는 게 중요하단 말예요
. 한마디도 불지 않았는데 죽여버린다면 잡아온 우리만 헛수고 한 거잖아요."
"그런 소리 마라. 아직 시작일 뿐이다.
지금까지 내손에 걸려서 술술 불지 않은 놈이 있느냐?"
대영은 냉소하며 말했다.
네째인 대사가 묻는다.
"실과 바늘을 사용할 거요?"
"물론 사용해야지.
하지만 이번은 좀 특별하게 해야겠다
. 가죽을 집는 바늘을 가져와라."
대사는 바늘을 가지러 나갔다.
대영이 만강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말했다.
"실과 바늘로 네 배를 기워줄까?
아니지 아니지. 네놈이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 그럴 수야 없지.
그건 그렇고 가슴에 느낌이 좀 오나?
이제 설설 얼때도 되었는데."
만강의 가슴에 고인 물은 정말 추위 때문에 얼 것만 같다.
만강은 숨쉬는 것이 고통이라는 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억지로 신음을 내뱉지 않고 혀를 깨물고 참는다.
비명을 지른다는 것은 놈들에게 굴복하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유일한 저항이 비명을 참는 것이다.
그의 비명을 무식하기 짝이 없는 놈들은 즐길 것이 분명하다.
대영이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네놈의 몸이 허약해 보이기에 좀 보수를 해주려는 것 뿐이야
. 팔을 허벅지에 꿰매고 두 다리를 서로 꿰매고 턱과 가슴을 꿰매고 나면
곱상한 네놈도 꽤나 무서운 얼굴이 되지 않겠어? "
"...!"
"게다가 살이 흩어지지 않도록 군데군데 그물을 쳐주지
. 그 입도 영원히 열 수 없도록 봉해주고 말이야."
"미친놈!"
만강이 입에 가득 문 피를 대영에게 뱉으며 소리쳤다.
퍽!
대영의 발이 그의 턱을 걷어찼다.
만강이 의자 채로 날려가 한쪽에 떨어졌다.
"더이상 알 것도 없다.
알고 싶은 건 내가 직접 가서 알아오겠다
. 이 새끼는 당장 죽여버리겠어."
대영이 비수를 던졌다.
푹!
새파란 비수가 만강의 오른쪽 가슴에 박혔다.
그래도 성질이 풀리지 않았는지
만강의 피를 뒤집어쓴 대영은 발을 높이 들었다가
만강의 머리를 향해 내리찍었다.
그때,
"안되요. 이 포로는 내가 잡았어요.
문초를 하는 건 가능하지만 죽이고 살리는 건 내 가 결정해요."
전일문이 뛰어들어 오른손으로 대영의 발을 밀쳐냈다.
와싹!
발이 빗나가며 만강이 묶여있던 의자를 산산조각 냈다.
대영이 그녀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웃기는 노릇이군.
포로를 죽이는 건 늘 있는 일인데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군, 사매."
"사형, 일문의 말도 틀린 게 아닙니다.
저자는 그냥 두어도 죽을 테니 일문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죠."
세째인 전차문이 나섰다.
그와 전일문은 남매지간이다.
"흥!"
대영은 그들과 다툴 생각이 없는지 콧방귀를 뀌고는 밖으로 나가버린다.
전차문이 전일문에게 말했다.
"왜 사형의 기분을 상하게 했느냐?"
"이 사형은 미쳤어요.
자기 기분대로만 하려고 해요
. 저 포로는 내거란 말예요."
전일문이 소리친다.
전차문이 화를 냈다.
"그때문에 사형제들에게서 따돌림을 받아도 좋단 말이냐?"
"흥, 내가 왜 따돌림을 받아요? 밤에는 모두 내게 슬슬 기는데..."
전일문은 어림없다는 듯이 말하고는
만강을 한손에 집어들고 자신의 막사로 가버렸다.
전차문은 분노하여 어쩔 줄을 모르면서
남아있는 네째와 다섯째, 그리고 여섯를 노려본다.
그들이 고개를 푹 수그린다
. 하지만 속으로 그들은 하나같이 투덜거린다.
(여자가 하나 밖에 없는데 어쩌란 말이야?
그렇다고 사모를 건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
*
전일문의 방은 그래도 아주 잘 꾸며져 있다.
좋은 물건이 있으면
그녀의 사형제들이 죄다 그녀에게 갖다 바치기 때문이다.
벽은 바람이 전혀 들지 않도록 털가죽으로 모두 덮혀있고
여성스러움을 돋보이게 하는 여러가지 장식품들도 놓여있다.
침상에는 여우털로 이어 만든 이불이 깔려있고
의자들도 사형제들이 정성들여 다듬은 것들이다.
그녀는 만강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먼저 가슴에 박힌 비수를 뽑았다.
푸악!
뜨거운 피가 분수처럼 솟구친다.
전일문은 재빨리 손바닥으로 상처를 눌렀다.
다른 손으로는 좁고 긴 천을 꺼내서 상처를 싸맨다.
비수에 찔린 상처는 그렇다 하지만
가슴에 생겨있는 물주머니와 갈라진 배는 보기에도 끔찍스럽다.
물주머니는 퍼렇게 변한 것이 벌써 얼고 있는 모양이다.
전일문은 가슴에서 뽑아냈던 비수로 물주머니의 아래를 터뜨렸다.
피부가 얼었는지 피도 나지 않고 피섞인 물만이 흘러나온다.
그 물들이 만강의 갈라진 뱃가죽의 틈으로 스며든다.
전일문은 손바닥으로 밀쳐서 물의 방향을 틀고는
수건으로 갈라진 상처를 닦았다.
사람의 입술처럼 상처는 벌어져 있다
. 속에는 얇은 막을 하나 두고 꿈틀거리는 내장이 비춰보인다.
다행히 날이 추워서 상처가 그다지 손상되지 않았다.
여름같으면 벌써 만강은 이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전일문은 실과 바늘을 꺼내 꼼꼼하게 만강의 상처를 기웠다.
마치 헝겁으로 된 인형을 깁는 것같다.
자수(刺繡)를 배운 여자의 솜씨인지라 꽁꽁 치매고 나자 피한방울 흘러나오지 않는다.
이윽고 바느질한 위에 약을 바르고 만강을 침상위에 옮겨 눕혔다.
"아참! 머리!"
전일문은 황급히 만강의 머리를 살폈다.
한데 머리의 상처는 이미 거의 아물어 있었다
. 피가 머리카락에 굳어있기는 하지만 상처는 심하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다
. 이불을 덮어 주었지만 만강의 몸은 여전히 싸늘하다.
점점 식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전일문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이곳을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다른 사람을 따라서 나가는 것 뿐이다
. 이곳은 이제 너무 지긋지긋하다.
이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누구와도 달라보인다.
첩자이든 아니든 상관할 바가 아니다
. 살려서 보내 준다면 이사람은 나를 이곳에서 빼내 줄지도 모른다."
그녀는 창백한 만강의 얼굴을 바라본다.
숨을 쉬고는 있지만 숨결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늘기만 하다.
전일문은 만강의 수려한 볼에 손을 대고 말했다.
"나를 이곳에서 구해줘요. 이곳은 너무 힘들어요
. 이제 밤마다 사형들을 상대하는 것도 지쳤어요."
이곳엔 그녀 이외에 여자가 없다.
아니 있기는 하지만 그 여자는 자신들의 사모이다
. 여자라고 말할 수 없는 존재이다.
언제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다
아무튼 상당히 오래 전의 일이다.
그녀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알 때 쯤에 이미 남자를 알았다.
밤중에 혼자 자는 그녀의 방으로 대사형인 대군이 찾아오면서 부터였다.
대군은 그녀의 옷을 벗기고 이상한 짓을 요구했다.
전일문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묘한 기분 속에서 그가 요구하는 대로 따랐다.
대군이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자신의 남성을 삽입하여도 반항하지 않았다.
통증이 있기는 했지만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다.
아무튼 그날부터 전일문의 남자를 받아들이는 일은 하루도 쉬지않고 계속되었다.
사형들은 점점 더 성장해갔으며 그녀 또한 더욱 성숙해져 갔다.
대군만이 아니라 그녀의 친오빠인 전차문을 제외한 모든 사형제가 그녀의 방을 찾았다.
어떤 때는 두사람 또는 세사람이 같이 오기도 했다.
그리고 점점 그들의 요구는 다양해 졌으며
전일문은 그들의 다양한 요구를 일일이 충족시켜 주었다.
그것이 이곳에서의 유일한 여자인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는 속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쾌락도 추구할 수 있었다.
이따금 그녀는 오빠인 전차문은
어떻게 욕구를 발산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것을 네째인 대사에게 말하자 그는 킬킬 웃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무슨 말이야?"
"자!"
대사는 일어서서 바지춤을 내리고 자신의 남성을 꺼냈다.
그리고 앉아있는 전일문의 얼굴 앞으로 그것을 들이밀면서 말했다.
"낄낄... 네 입이 하는 역활을 자기 손이 대신해 주는 것 뿐이야."
누구라도 요구하면 거절할 줄 모르는 전일문이다.
그녀는 대사의 요구대로 그의 물건을 입안에 넣어서 만족시켜 주었다.
어떤 날은 하루에 무려 열번 도 넘게 그짓을 할 때도 있었다.
특히 겨울엔 그랬다.
사형들은 낮에도 틈만 나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녀의 몸을 요구했고
, 밤이 되면 밤대로 찾아와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고 갔다.
오늘 낮에만 해도 전일문은 대사와 함께 말을 타고 순찰을 나갔다가
말위에서 정사를 나눴다.
전일문의 말로 옮겨탄 대사가
그 추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중요한 부분만 서로 맞닿게 하여
뒤에서 일을 벌였다.
전일문은 말잔등에 업드려 그를 받아들였다
. 말이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바람에 더욱 묘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듯 사형들과의 끝없는 정사는 그녀의 일상이었다.
전일문은 새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젠 지겨워.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야. 이곳을 벗어나야해."
함께 즐기기도 했지만 전일문은 차츰 자신을 자각하고 있었다.
사형들이 여왕처럼 떠받드는 것도
결국은 밤에 그녀의 몸을 요구하기 위해서 일뿐이다.
한가지 물건을 갖다 주면 댓가로 그녀는 온갖 봉사를 다해왔다.
응당 그래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전일문은 옷을 벗었다
. 잘 영근 과일같은 그녀의 나신으로 침상앞에 섰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식어가는 만강의 몸을 껴안았다.
살려내기만 하면
그녀는 이 잘 생긴 청년이
자신을 마굴같은 이곳으로 부터 구해줄 수 있을 것같았다.
그렇게 생각할 뚜렷한 이유도 없지만
무작정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으으음... 물물!"
만강은 희미한 의식 속에서 손을 저으며 말했다
. 가슴이 무엇에 짓눌린 듯이 무겁고 갑갑하다.
전일문은 화들짝 놀라며 그의 몸위에서 일어나 앉았다.
"정신이 들었어요?"
"물물...!"
만강은 눈을 꼭 감은 채 물만 을 찾고 있다.
전일문이 나체의 몸으로 뛰어나와 주전자를 찾는다.
그녀가 입술에 물을 묻혀주자 만강은 눈을 떤다.
"여기는 어디요. 나는 살았소?"
만강이 힘없이 묻는다.
전일문은 자신의 앞을 가리며 입가에 수줍은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인다.
"쿨룩!"
문득 만강은 가슴속에 이물질이 들은 것처럼 갑갑함을 느끼며 기침을 했다.
목에서 울컥 무엇이 넘어와 내뱉으니 돌처럼 단단해진 핏덩어리다.
가슴 속에 고였던 피가 굳어져 나온 것이다.
토해고 나니 힘은 하나도 없지만 가슴이 시원하다.
전일문은 문을 살짝 열어보고 오더니 그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밤이예요.
무린 줄은 알지만 지금 밖에 기회가 없을 거예요.
달아나야 해요."
"아가씬 누구시오?"
만강이 힘없이 묻는다.
전일문은 망설이다 대답했다.
"당신의 머리에 상처를 입혔던 사람입니다."
"내가 첩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소?"
"그런건 저와 상관이 없어요. 다만..."
전일문은 자신을 구해달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 정작 그의 목숨을 구해주기는 했지만
그것을 빌미로 무엇을 요구할 만큼 그녀는 뻔뻔 스럽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만강의 장검을 그의 손에 쥐어준다.
"빨리 가세요.
여기에 있으면 죽음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서는 이곳을 나가야 해요."
"나는 아직 몸을 움직일 수 없소."
만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일문이 입술을 깨물고 망설이다 얼굴까지 감싸지는 옷을 입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을 하나 더 꺼내어 만강에게 입히고 말했다.
"그럼 함께 가요."
만강이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소저, 난 아무 것도 가진게 없소
. 소저를 부양할 능력도 없소
. 아마 소저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같소."
전일문이 말했다.
"상관없어요. 아무튼 이곳을 벗어나는게 중요해요. 이곳은 지옥같아요."
그녀는 폭이 넓은 천을 꺼내어 만강을 자신의 등에 업었다.
만강은 키가 큰 편이다. 업혔지만 발이 땅에 끌린다.
"소저, 그럼 나를 버려두고 가면 될 것아니오."
"아무 말 말아요."
전일문은 그의 오금으로 천을 넣어 그 천을 자신의 어깨위로 두른다.
만강의 발이 들리워졌다.
(이 아가씨는 아마도 소녀적 감상에 젖어 있는 모양이다
. 밖에서 온 사람은 무조건 좋게 보는 버릇이 있는...
이렇게 여기서 살아 나갈 수는 있게 되었다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하나?
내 상처가 치유되자면 적어도 보름은 더 있어야 할텐데...)
만강은 자신의 상태가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상처는 전부터 아주 빠르게 치유되는 성질을 갖고 있다.
만강 자신은 잊어버렸지만
그는 태실산의 정상에서 동자삼을 복용한 일이 있다.
그 효능이 지금까지 남아있어서 그의 몸을 빠르게 치유시키는 것이다.
전일문은 털가죽으로 덮여 있는 두터운 문을 밀고 나선다.
바로 그때였다.
핑핑핑!
활시위가 당겼다가 놓여지는 소리가 들리며 하늘이 대낮같이 밝아졌다.
그리고 사방에서 와! 하는 함성이 들려온다.
그와함께 여기저기의 막사(幕舍)들에서 칼을 뽑는 소리와 함께 고함이 터져 나온다.
"적운애(赤雲崖)의 놈들이다."
"기습이다."
"사부! 놈들이 왔습니다."
화르르...!
불화살에 격중되어 전일문의 막사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전일문의 가슴은 세차게 뛰었다.
(어차피, 잘된 일이야.
내가 없어져도 잡혀 가거나 죽은 줄 알거야. 이건 하늘이 돕는 거야.)
갑자기 등뒤에서 만강이 낮은 음성으로 빠르게 외친다.
"좌로 삼보!"
전일문은 멍하니 있다가 무의식 중에 그의 말에 따라 움직였다.
순간 그녀의 곁으로 시퍼런 칼이 떨어졌다.
곰처럼 털가죽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자가 대감도를 들고 그녀를 내려치려고 했다.
전일문은 쌍장을 떨쳤다.
비록 무극동이 전의 면모는 잃어버렸다 하지만
강호의 도적들을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녀의 무공은 그래도 상당한 편이라
대감도를 든 자가 맥없이 나가 떨어져 눈위로 굴러간다.
"어어어..."
옷이 두터워 큰 충격을 받지는 않은 모양이다.
창창!
"죽여라!"
"으윽!"
여기 저기서 싸우는 소리와 함께 검광이 번득이고
불길이 모든 막사를 태우면서 하늘로 솟구친다.
전일문은 대감도를 들었던 자처럼 눈위를 굴러 미끌어져 내려갔다.
"히이이잉!"
놀란 말울음소리가 들리며 고삐풀린 말들이 밑으로 달려 내려온다.
전일문이 미끄러지면서 바라보니 자신의 애마도 있다.
"삐익!"
휘파람을 부르니 애마가 알아듣고 방향을 바꾸어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그녀는 황량한 곳에서 자란 소녀인지라 어려서 부터 말을 탔기 때문에
말을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말이 멈추지 않고 옆으로 스쳐가는데도 비스듬히 몸을 날려 말잔등에 올라앉는다.
말은 눈위를 위태롭게 달려 골짜기를 빠져나간다.
막사에서는 화광이 충천하고있고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이날 따라 바람도 잔잔하다.
전일문이 뒤에 매여있는 만강에게 말했다.
"적운애의 강도들이예요
. 항상 이곳을 탐내고 있는 자들이죠.
언젠가는 공격해오리라 생각했지만 오늘이 그날 일지는 몰랐어요."
말은 골짜기 입구를 막 빠져 나가려 했다.
만강이 말했다.
"머리를 낮추고 좌측으로 바싹 붙어서 달려요. "
"왜요?"
전일문이 고개를 뒤로 돌리며 소리쳤다.
순간 핑! 소리를 내며 화살하나가 그녀의 귀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더라면 목에 격중되었을 화살이다.
놀라서 등줄기로 식은 땀이 흐른다.
두번 묻지 않고 머리를 말잔등에 바짝 붙이고
말을 좌측 기슭으로 몰라서 골짜기를 빠져 나갔다.
"쏘아라!"
골짜기 양쪽에는 튀쳐 나오는 무극동의 후예들을 죽이기 위해
적운애의 강도들이 잠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뛰쳐 나오는 말을 보고 화살을 쏘려고 했다.
하지만 말은 양쪽으로 나뉘어 잠복하고 있는 강도들의
한쪽 앞에 바싹 붙어서 달려간다.
활을 쏘다간 동료들 마저 죽어자빠질 노릇이다.
우두머리가 명령은 내렸지만 화살은 한대도 나르지 않았다.
사람들에 놀란 말은 있는 힘을 다하여 골짜기를 빠져나가 버린다.
핑핑핑핑!
쉬익!
그때서야 십여 명의 강도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고 금전표를 던지고 했다.
몇 개의 화살이 전일문의 모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행스럽게도 강도들은 그들을 뒤쫓지는 않았다.
그녀의 뒤에서 또다른 자들이 뛰쳐 나올 것올 염려하는 모양이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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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봅니다
감사 드립니다
즐독했습니다.
감사ㅎ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