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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본문의 구조'와 '당시의 식탁 관습'을 통해 해석하는 수사학적-문화적 이해
앞에서 설명했듯이 ‘라오디게아의 물 사정’으로 이해하는 지정학적 이해의 틀은 여전히 극복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 첫째는 사용하고 있는 성서 고고학적 자료의 타당성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이러한 자료들을 통한 해석과 유추가 과연 당시 소아시아의 독자들에게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비록 불신자들 사이에서는 아니더라도 신자들 사이에서는 공감과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1] 이러한 점을 2003년 New Testament Studies 학술지에 미국 미네소타 주 세인트 폴 소재 루터 세미너리의 Craig R. Koester 교수가 ‘The Message to Laodicea and the Problem of Its Local Context: A Study of the Imagery in Rev 3.14–22’ 라는 글에서 검토하고 있다.[2]
서두에서 Koester 교수는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당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이 직면해 있었던 지역 사회, 특히 유대인 회당과의 갈등과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고. 이런 내용을 서신 속에 짜 넣었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연구 결과를 언급한다. 그리고 윌리엄 램지(William Ramsay)의 연구 이래로 많은 이들이 각각의 공동체가 있었던 도시들의 개별적인 특성들이 이 메시지 안에 이미지화 되어 인유되어 있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예를 들면 서머나 교회는 왕관의 이미지가 주님으로부터 받을 면류관에 사용되었고(계 2:10), 사데 교회의 경우는 그 도시의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인한 함락의 이미지가 ‘깨어 있으라’는 경고의 메시지로 사용된다(계 3:2). 그러면서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는 그 도시 주변의 뜨거운 온천수와 차가운 계곡물과 그 어느 것도 아닌 미지근한 물과의 대조적인 이미지가 사용되며, 금과 흰옷과 안약을 으로 하는 권고(계 3:14-22)는 그 도시의 은행업과 의류업과 의학 학교에 대한 라오디게아인들의 자긍심과의 암시적인 대조를 이룬다는 것이다.[3]
하지만 계 3:14-22의 본문은 요한계시록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식에 대한 소중한 시금석(기준)을 제공하는데, 이는 이 메시지가 아주 선명한 지역적 인유를 보여준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라고 Koester 교수는 말한다.[4] 필자는 그의 이 말을 ‘성경에 근거한 주관적 보편타당성’의 추구라고 생각한다.
그는 ‘라오디게아의 물 공급’으로 해석하는 이해의 틀에 대해 두 가지의 문제점을 제기한다. 첫째는 뜨거운 것, 차가운 것, 그리고 미지근한 것의 이미지는 사람이 ‘마시는가’ 아니면 ‘뱉는가’와 관련이 있는데 이런 은유는 골로새의 찬물에는 해당되지만 히에라폴리스의 온천물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온천물은 당시에 마시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고대의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5] 오히려 라오디게아의 물이 온천물보다 마시기에 더 좋다는 Strabo의 글을 제시한다.[6] 그리고 두번째로 그는 라오디게아의 물이 미지근하고 마시면 토할 만큼 거북하다는 증거가 없다는 점을 든다.[7]
이제 그는 두번째 장에서 ‘마시는 관습으로부터 채택한 비유적 묘사’(Imagery from dining practices)를 설명한다. ‘물 공급’이 아니라 ‘식탁 관습’이 비유의 원형이라는 근거로 그는 본문(계 3:14-22)의 구조를 먼저 말한다. 이런 시도를 하는 이유로는 국지적인 지형학의 특수 지식보다는 당시 독자들에게 친숙한 좀 더 보편적인 관습으로 참조(이해)의 틀을 변경하는 것이 상징에 대한 해석적 대안의 발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8]
그는 본문을 세 개의 동심원으로 파악했다. 가장 안쪽의 원은 17절과 18절로, 각각 자신들은 부유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가난하며, 눈이 멀었고, 벌거벗었다는(17절) 내용과, 그러므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주님으로부터 금을 사고, 안약을 사서 바르고, 흰 옷을 사서 입으라는(19절) 내용이다. 안에서 두번째 원은 16절과 20절로, 각각 미지근한 것은 주님이 뱉는다는(16절) 것과, 주님께서 두드릴 때 문을 연 자는 주님과 함께 식사한다는(20절)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바깥짝 동심원은 14절과 21절로 주권에 관한 주제를 묘사한다고 한다.[9]
중간의 동심원에서 ‘토한다’는 말과 ‘함께 식사한다’는 말은 ‘거부’와 ‘수용’의 이미지로 함께 해석될 수 있는데 이는 ‘라오디게아’라는 특정 지역의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공통된 식사 관습에 근거해 연상되므로 (독자들에게) 유효할 것이라고 한다.[10] 계속해서 식사 중에 뜨겁게도 마시고 차갑게도 마시는 것의 예로 포도주를 든다. 단순히 일반적인 물에서 세 단어의 비유의 원형을 찾지 않고, 식사 중에 함께 음용하는 포도주를 제시한 것이다. 차가운 포도주의 근거로 그리스의 역사가이며 철학자인 크세노폰(Xenophon)의 글을 든다. 또한 뜨거운 포도주와 같은 음식을 팔았던 그리스의 가판대(thermopolium)와 1세기 폼페이와 소아시아 지역의 가판대들도 언급한다. 또한 미지근한 것과 토하는 것에 대한 예화로 이솝의 전기 중 일부를 이야기한다. 이솝과 그의 동료 노예가 주인의 무화과 열매를 먹었다는 혐의에 대해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미지근한 물을 마시고 나서 입에 손가락을 넣어 토한다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러한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들의 행위(works, 에르가)가 차거나 뜨겁지 않고 미지근하다고 책망할 때 연상될 수 있는 내용은 차거나 뜨거운 것은 그 음료를 담은 컵이 주변의 대기와 구별이 되나 미지근한 것은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을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적용한다면 그 이미지는 그들의 일이 전혀 그들의 지역사회의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의 그 앞 부분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인내와 신실함과 사랑의 행위를 명하셨는데(계 2:2, 19; 3:8), 이 행위들은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처럼 긍정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일들이다. 이어지는 미지근함은 그들이 자신들의 부유함에 안주하는 것과 동일시된다. 이는 인간의 공통된 경향이다. 차거나 뜨거운 일에 대한 요구는 독자들에게 익숙한 주변의 부유함과 안락함에 만족하는 패턴(생활 방식)을 버리고(그것과 구별되고), 대신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따로 불러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표현하라(드러내라)는 호출이다. 그리스도가 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을 토한다고 하는 원색적인 이미지는 독자들을 깜짝 놀라게 해서 변화하지 않으면 거절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11] 이후로 나머지 이미지들에 대해서도 설명하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Koester 교수는 ‘라오디게아의 물 공급’으로 이해하는 틀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노력했고, 여러 자료와 논증을 통해 상당히 성공했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그의 이해의 틀 역시 한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다. 그것은 그의 수사학적-문화적 이해의 틀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점이다. 루드윅-그린과 마찬가지로 성경이 아닌 고고학이나 문장 구조와 같은 인간의 학문적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분명 문화적 요소는 그 문화적 배경을 지닌 독자들에게는 공감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문화가 쇠퇴하여 다른 문화로 대체되면 그러한 공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전혀 다른 문화권의 독자들에게는 오히려 전통적인 이해의 틀보다 훨씬 더 어색하고 낯설 것이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행 1:8)는 주님의 명령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는 모자람이 있다. 그가 말한 ‘계 3:14-22의 선명한 지역적 인유’를 뛰어 넘어 ‘땅 끝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필자가 말하는 '성경에 근거한 주관적 보편타당성'의 획득이 필요하다.
[1] 이는 칸트의 미학에서 말하는 ‘주관적 보편타당성’ (취향이 주관적이라는 경험적 사실에서 출발하나, 동시에 ‘미적 판단은 보편타당하다’는 주장)과 유사한 생각이나, 신앙적 이념과 확신에는 여기에 덧붙여서 ‘경전(성서)의 지지를 근간으로 하는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고고학적이고 역사-사회-문화적인 자료나 양식 비평 등과 같은 타 학문적 자료들은 단지 성서의 지지를 입증하는 용도로만 사용되어야 하며, 이런 것들이 해석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필자는 ‘성경에 근거한 주관적 보편타당성’이란 용어로 이 개념을 표현할 것이다.
[2] 그는 J. M. Ford의 Anchor Bible을 대체하는 The Anchor Yale Bible Commentaries 시리즈의 Revelation: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를 2014년 출간했다.
[3] Since the work of William Ramsay in the late nineteenth and early twentieth centuries, many have also argued that the messages allude to the distinctive characteristics of the city in which each congregation was located. For example, Smyrna could be compared to a crown, and Revelation is sometimes said to play on this image by assuring the faithful at Smyrna that they would receive a crown from Christ (Rev 2.10). Sardis was captured by surprise attacks in the sixth and third centuries BC due to the defenders' lack of vigilance[3], and Revelation's call for Christians at Sardis to remain watchful is sometimes taken as a warning not to fall into their forebears' pattern of negligence (3.2). When the congregation at Laodicea is censured[3] for being lukewarm, rather than hot or cold, many suggest that the author implies a contrast between Laodicea's lukewarm water and the hot and cold springs of nearby towns, and that Revelation's exhortations[3] to obtain gold, white garments, and eye salve from Christ make an implicit contrast to Laodicean pride in the local banks, garment industry, and medical school (3.14-22).
[4] The message to Laodicea in 3.14-22 provides a valuable test for the way Revelation communicates with its readers, since this message is generally thought to exhibit the clearest local allusions.
[5] Two problems make this theory unlikely. One is that the imagery in Revelation requires that hot and cold be related to what a person would take into the mouth, and that lukewarm be applied to what a person would spit out of the mouth. The metaphor might fit the cool water at Colossae, which was presumably good to drink, but it would not suit the hot water from Hierapolis since ancient descriptions of the hot springs do not suggest that their waters were desired for drinking.
[6] More importantly, Strabo thought that water from Laodicea was better for drinking than water from the hot springs at Hierapolis. He acknowledged that the water at Laodicea was like the water at Hierapolis in that it tended to calcify, then he added: 'although their [i.e. the Laodiceans'] water is drinkable' (καίπερ ὄντων ποτίμων; Geogr. 13.4.14).
[7]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그의 글을 참고하라. 해당 기고문은 Koester 교수의 블로그에 올려져 있다.
[8] An alternative interpretation of the imagery can be developed by shifting the frame of reference from special knowledge of local topography[8] to more common practices that would have been familiar to the readers.
[9] The outer ring of the message draws on themes of sovereignty.
[10] The two parts of the message can be interpreted together. The vulgar[10] picture of Christ vomiting something out of his mouth is a graphic image of rejection that comes from the field of meal practices, just as sharing a meal with someone is a common way to depict acceptance and fellowship. The passage would have been effective not because it draws on special knowledge of the locale of Laodicea but because it recalls common practices.
[11] The message to Laodicea rebukes the congregation by declaring that its works are lukewarm rather than cold or hot. Drawing on the imagery of a meal, the author expected readers to know that cold and hot beverages stand in contrast to their environment, and that diners find them refreshing. In contrast, the temperature of a cup of lukewarm water or wine is more like that of its surroundings; it does not distinguish itself to the touch. When applied to the Christians at Laodicea the imagery suggests that their works in no way distinguish them from others in their society. In previous messages the risen Christ commends works of perseverance, faith, and love (Rev 2.2, 19; 3.8) - the kind of works that would be positively regarded as cold or hot. Subsequent verses will identify the lukewarm quality of the Laodicean Christians with a complacency born of prosperity, which is a common human tendency that was frequently critiqued in antiquity. The call for works that are cold or hot summons readers to actions that are distinguished from the familiar pattern of wealth breeding complacency, and instead express the relationship with the risen Christ that sets the Christian community apart. The vulgar image of Christ vomiting the lukewarm Christians out of his mouth is designed to startle the readers into an awareness of the danger of being rejected unless there is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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