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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사망
867년 |
936년 |
후백제의 초대 왕(재위 892~935년).
전주 견씨의 시조이고, 본성은 이씨이다.
신라에서 태어나 892년(진성여왕 6) 반기를 들고 일어나 무진주를 중심으로 기반을 닦았다.
927년 신라의 금성을 함락시켜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했다.
궁예의 후고구려와 충돌하며 세력 확장에 힘쓰다 후에 고려의 왕건에게 투항했다.
백제의 부활을 꿈꾼 영웅
견훤은 후백제의 초대 왕이다. 중국과 국교를 맺고 궁예의 후고구려와 부딪치며 세력을 키웠다. 하지만 훗날 고려 왕건에게 투항한 뒤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천년 왕국 신라가 멸망한 뒤 왕족과 귀족 세력은 몰락하고 지방의 토착 세력, 즉 호족이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견훤 역시 이런 혼란기에 나타난 지방 호족의 일파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농민이었지만 아버지인 아자개(阿慈介)가 장군으로 성장하면서 등장한 신흥 호족 세력이었다. 아자개가 호족 출신 여성과 혼인을 통해 장군으로 성장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견훤은 신라가 쇠락하던 892년(진성여왕 6) 반란을 일으켜 여러 성을 공격해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를 점령하고 사실상 왕으로 등극했다. 900년(효공왕 4)에는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후백제라고 했다. 견훤은 곧 관서와 관직도 정비했을 뿐 아니라 중국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는 등 국가의 기틀을 세우는 데 매진했다.
압록의 전경
견훤은 거점을 두고 세력을 확장한 무진주는 섬진강과 보성강이 만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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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는 성립 초기부터 후고구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양국은 수시로 물리적 충돌을 빚었다.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하자 견훤이 사신을 보내 축하한 일은 이 때문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견훤은 표면적으로는 화친 정책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고려를 넘보는 등 군사적 긴장 관계를 풀지 않았다.
920년(경명왕 4)에 견훤은 대야성을 무너뜨렸고, 4년 뒤에는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파견해 조물성(曹物城, 지금의 안동 혹은 상주 부근)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는 못했다. 이듬해 왕건과 화친하고 인질을 교환했지만 이 화친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925년 고려에 갔던 볼모가 병으로 죽자, 견훤이 왕건의 볼모를 죽이고 고려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견훤의 대외 정책은 더욱 강경해졌다. 그는 927년 신라의 수도인 금성(金城, 지금의 경주)을 공격했다. 그리고 친고려 정책을 펴던 경애왕을 살해하고 효종의 아들인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웠다. 그가 경순왕이다. 하지만 경순왕 역시 경애왕처럼 친고려 정책을 고수했고, 신라의 민심도 왕건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결국 929년 견훤의 군사가 고창(古昌, 지금의 안동)에서 왕건에게 크게 패한 후부터 유능한 신하들이 점차 고려에 투항하기 시작했다. 특히 932년 견훤의 충실한 신하였던 공직(龔直)이 고려에 투항했고, 934년에는 웅진 이북의 군현 30곳, 동해안의 성 110곳이 고려로 귀속되면서 견훤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세력을 잃은 견훤에게는 또 다른 골칫거리가 있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10명이나 있었다. 특히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金剛)을 편애해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형인 신검(神劍), 양검(良劍), 용검(龍劍)이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살해하고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었다. 견훤은 금산사에서 도망쳐 고려에 항복했다.
936년 왕건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견훤을 앞세워 황산에서 후백제군과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후백제는 50여 년의 짧은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로써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왕건은 되레 신검을 우대했고,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자책감에 화병이 난 견훤은 황산(黃山, 지금의 충남 논산) 불사(佛舍)에서 등창으로 인해 숨을 거뒀다.
금산사 석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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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비록 실패한 왕이었지만 그가 일찍부터 외교를 중시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925년에는 후당(後唐)으로 사신을 보내 ‘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오월(吳越)과도 소통했으며 927년에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서 사고(娑姑) 등 35명의 사신이 찾아왔을 때에도 장군을 보내 환대했다. 비록 발해를 멸망시키기는 했지만 거란의 지원으로 고려를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922년과 929년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일도 있다. 이미 장보고에 의해 중국과의 무역이 크게 성행했기 때문에 지방 호족 출신으로서 중국, 일본과의 사무역을 중시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다만 망해 가는 신라의 군사 조직을 흡수한 뒤 이를 유지하기 위해 신라와 똑같은 방식을 취하면서 견훤의 후백제는 새 길을 모색하지 못했다. 이미 전국에서 호족이 득세하면서 신라의 체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던 때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물결에 적응하지 못한 견훤은 결국 후백제가 무너지고,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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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고려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사연구실, BK21한국학 교육연구단 국제화팀에서 연구원을 지냈으며,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연구소에서 고대사에 ..펼쳐보기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현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조선 시대사, 정치사에 관심이 많으며 연구 논문으로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소통과 교류의 땅 ..펼쳐보기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 윤재운 | 청아출판사
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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