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과 16일 양일에 걸쳐 롯데콘서트홀에서 이루어진 다니엘레 가티 지휘의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RCO)가 들려준 다채로운 음색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RCO는 지난 수년간 내한하여 마리스 얀손스와 이반 피셔에 지휘에 따라 다양한 색깔과 방식으로 그들의 매력을 들려준 바 있다. 이번 가티와의 내한은 그가 RCO의 새로운 상임지휘자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 그들의 호흡이 어떤 소리를 들려줄지 기대되는 시간이었다.
RCO의 전반적인 음색의 특징이라면 각 악기파트의 뛰어난 연주실력과 더불어 그 실력들이 튀지 않으면서 다른 파트와의 조화를 잘 이룬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폴리포니(화성의 다양성)라는 면에서 전세계에서도 말러의 곡에 가장 어울리는 오케스트라의 하나로 손꼽을만 하다. 또한 그들의 가장 두드러진 장점이기도 한 비단결같은 현의 음색은 타 오케스트라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이다.
가티는 최근의 일 트로바토레를 비롯한 오페라 등에서 여러 매력을 보여준 바 있는데 그의 폭풍처럼 몰아치는 표현과 해석은 드라마적인 작품들에서 진가를 보여주곤 했다.
공연 첫날 첫곡은 하이든의 첼로협주곡이었고 첼리스트는 RCO의 수석이기도 한 타티아나 바실리바였다. 규모는 챔버에 어울릴 법한 소편성이었다. RCO는 각 멤버들의 실력이 탁월하므로 적은 규모에서 진가를 더 발휘하기도 한다. 또한 RCO 음색의 특징이 챔버와 현대오케스트라의 스펙트럼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만큼 하이든의 연주에서는 마치 아카데이 오브 에이션트 뮤직이나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처럼 바로크의 색깔에 가깝게 보여주고자 하는 시도가 보였다. 타티아나 바실리바는 자클린 뒤 프레나 장한나처럼 우렁차고 다이나믹한 영역보다는 바로 그 시대의 연주를 들려주는 것처럼 섬세하고 예민하고 부드러운 음색을 들려주었다. 그녀가 RCO의 수석이라는 점은 이 곡의 표현에서 튀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고 섬세한 소수정예의 매력을 보여주는데 충분했다. 가티는 이 곡의 주문을 전혀 튀지 않고 조화속의 다이나믹을 추구하는 해석을 보여주었다. 바실리바는 앵콜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 3번의 ‘부레’를 들려주었는데 소리의 특성이 마치 피터 비스펠베이처럼 바로크 첼로다운 매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두 번째 곡인 말러 교향곡 4번에서 RCO는 대편성으로 다시 정비되어 연주를 들려주었다. 흔히 인간적이고 희비극의 드라마가 진하게 묻어 있는 다른 곡들에 비해 ‘천상의 삶’라는 부제처럼 차별화가 느껴지는 말러 4번은 이반 피셔-RCO-미아 페르손의 조합처럼 천상의 소리에 어울리는, 마치 모차르트를 연상케 하는 해석으로 갈 수도 있고 드물게는 만프레드 호넥-피츠버그 심포니-임선혜의 조합처럼 매우 인간적인 해석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양극단 사이의 해석 어딘가에 대부분의 연주는 자리잡기 마련인데 아무래도 RCO는 전자에 가까운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가티는 이날 천상의 소리에 어울리는 RCO의 원래 특성에 더하여 인간적인 매력을 더한 드라마적인 해석을 들려주었다. 1악장 종결부(리허설번호.24)에 잠시 소리의 여백을 둔 다음 현들이 조그맣게 움직이면서 점점 상승해 가는 부분에서 가티는 루바토(속도조절)를 부여함으로써 드라마적 해석에 힘을 보탰다. 2악장 서주의 솔로 바이올린 파트에서 악장인 베스코 에쉬케나지는 음역대가 다른 바이올린을 바꿔가며 웬만한 솔리스트를 능가하는 아름다운 소절을 들려주었다. 3악장의 느리고 아름다운 소리가 흐르고 이 곡 전체중에서 가장 힘찬 총주가 흐를 때 4악장의 성악을 위해 소프라노 서예리가 무대로 등장했다. 3악장이 끝나고 쉼없이 4악장으로 넘어가면서 서예리는 ‘Wir genießen die himmlischen Freuden(우리는 천국의 삶을 즐깁니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노래를 들려주었다. 서예리의 목소리는 우아했다. 그런 우아함을 감상하는 것만도 큰 즐거움이었다. 또한 서예리는 캐릭터의 표현에서 흔히 희극적이거나 비극적이거나 스테레오 타입에 머물기 쉬운 함정에서 벗어나 희비극을 순식간에 오고 가는 표현력을 들려줌으로써 왜 그녀가 이 시대의 디바로 손색없는 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서예리는 오케스트라의 무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바이올린 파트와 지휘대 사이의 중간 뒤쯤에 서서 노래를 불렀는데 이는 곡의 표현을 성악이 독자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악도 오케스트라의 일부임을 보여주고자 한 의도로 보였다. 이 배치는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시각적으로는 이해되는 구성이지만 서예리의 경우는 음색의 특성이 우렁차거나 성량이 강한 톤이 아니므로 무대 앞으로 나선다고 하더라도 소리의 울림이나 조화롭게 들리는 해석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공연장에 따른 연주자와 성악가의 배치와 소리의 조절 관계는 연주자들이 일급이든 아니든 늘 현장에서 구현해야 하는 살아있는 숙제이다. 4악장의 후반부에서 호른 파트의 일부 불안정한 모습은 인간적이기 했지만 전체적으로 RCO의 연주는 능수능란에 가까웠다. 이날 공연에는 오보에 주자인 함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또 한명의 한국인인 2바이올린 연주자인 이재원씨의 순수하고도 밝은 모습을 본 것은 큰 기쁨이었다.
첫날 공연에서 보여준 다니엘레 가티의 해석은 나의 예상과는 조금 다르게 튀거나 과장되게 하지는 않고 RCO의 화성적이고 조화로운 매력을 전혀 죽이지 않고 최대한 살리는 방향의 해석을 보여주었다. 다만 템포와 루바토와 음량의 조절을 통해 그가 지향하는 바는 여전히 드라마적인 해석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둘째날의 공연에서 RCO는 베토벤과 브람스를 선택함으로써 정통 클래식 시기의 곡을 들려주었다.
이날 협연자인 프랑크 페터 짐머만은 독일 남성 정통 비루투오소의 맥을 잇는 적임자라 할 만 하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너무나 훌륭한 곡이지만 너무나 철학적인 곡이어서 모든 연주자들에게 큰 산일지도 모른다. 이런 곡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팀파니의 가벼운 연타로 시작해서 오보에 수석과 자랑스러운 한국인 주자인 함경의 두 오보에가 멜로디를 들려주며 곡은 시작되었다. 이날 연주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짐머만이 독주 부분에서만 연주를 한 것이 아니라 제1바이올린 파트의 대부분을 함께 연주한 점이었다. 대부분의 솔리스트는 긴장을 한 채로 자신의 부분만 연주하기에도 정신없을 텐데 짐머만은 뛰어난 실력을 바탕으로 이 곡을 바이올린 대 오케스트라의 대립 내지는 대비 구조가 아니라 협업 방식의 연주 해석을 보여줌으로써 마치 과거시절의 합주 협주곡을 보는 듯한 매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짐머만의 이런 연주참여는 마치 악장의 모습과 비슷해서 단원들의 표현을 이끄는 촉매로서의 역할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갈등보다는 조화를 통한 이런 해석은 감상자들에게 매우 유연하게 이 곡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했다. 독주 파트의 매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1악장 말미의 카덴차 부분에서 짐머만은 우리가 가장 자주 듣는 크라이슬러 버전을 보여주었지만 전혀 식상하게 들리지 않고 마치 예전의 탁월한 비루투오소였던 마이클 래빈이 들려주었던 음색처럼 중심을 잃지 않되 다채로운 음색을 다정다감하게 들려주는 매력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앵콜부분에서 짐머만은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2번의 알레그로를 들려주었는데 5분 넘게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선율의 호흡과 기교의 발산은 그가 남성 비루투오소의 적자임을 다시 한번 확인케 해 주었다.
두 번째 곡인 브람스 교향곡 1번에서 가티는 그가 이 악단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연주였다. 브람스 1번은 카라얀의 해석처럼 엄청나게 통제되고 일체화된 소리로 나아가는 밀도높은 해석이 가장 큰 매력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가티는 그의 평소 스타일인 표현을 밀어붙이는데(!) 치중하지 않고 각 악기파트가 들려주는 매력을 십분 발휘하는 데에 할애했다. 대부분의 브람스 연주는 단선율의 멜로디로 들리기 쉬운 법인데 이날 연주는 브람스의 폴리포니를 새롭게 발견한 것처럼 다채로운 소리로 가득했다. 폴리포니를 너무 강조하다보면 산만하게 들리기 십상이지만 이날 RCO는 각 단원들의 실력으로 인해 그 산만함보다는 화성의 조화로 가득 했다. 이런 해석의 매력은 베를린필이나 빈필이 아니라 RCO이기에 가능한 특성이기도 할 것이다. RCO의 백미인 비단결같은 현의 소리가 유지되는 이유는 아마도 전날 악장으로 나왔던 에쉬케나지와 더불어 오랜 기간 악장으로 함께 한 리비우 프루나루의 역할이 적지 않을 것이다. 프루나루는 두 번째 날의 악장으로 나와서 2악장의 바이올린 솔로 파트를 솔리스트급으로 연주해 보였다. 오랜 기간 이런 두 악장과 함께 한 RCO가 현이 아름답지 않게 들린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가티는 이틀간의 연주를 통해 RCO의 실력을 믿는 자세로 과도한 요구나 비팅을 하지 않고 속도 조절과 주요 파트에 대해서 포인트를 강조하면서 악단 자체의 매력을 드러내 주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가티의 드라마적인 해석은 여전히 몇군데에서 드러나긴 했지만 당분간 가티는 자신의 색깔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보다 악단의 매력을 더 살리는 것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시간이 더 지나면 RCO의 매력에 더해 가티의 색깔이 더 드러날 것으로 기대가 된다.
참고로 롯데콘서트홀은 1층 가운데 부분은 소리가 너무 부드럽게 들리거나 퍼지는 듯한 느낌이 있다. 좌우 양쪽 사이드와 합창석 쪽은 호불호와 취향을 타는 좌석일 것이다. 그러나 한층 올라간 2층의 좌석은 내가 보기에 어디서 앉아 들어도, 심지어 2층 맨 윗자리에서 들어도, 실내악인 경우에도 명확한 소리를 들려주는 좋은 자리라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연주를 아름답게 들려주지만 울림이 가끔 과도하다는 느낌이 드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과는 다른 매력을 주는 공연장인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연주자의 소리를 그대로 들려주는 롯데홀 2층이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2층보다는 내 취향에 가깝다.
완전한 통제력의 해석으로 보여주는 공연은 가능하지도 않고 인간적이지도 않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가티와 RCO의 호흡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운 일일 것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절대적인 결과를 보여주는 존재가 아니라 그날 보여주는 최선의 결과를 보여주는 존재일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온전한 과정이자 결과일 것이다.
매번 내한할 때마다 다른 지휘자들을 통해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팔색조와도 같은 RCO의 연주는 늘 기대된다. 암스테르담의 콘세트르헤보우홀에서도 그들의 연주를 보는 미래의 기쁨도 있겠지만 롯데홀에서 감상한 이틀간의 연주는 그에 못지 않은 기쁨이었다고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전해주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