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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남정맥 2차
일시; 2011.11.6 04:25—12:25
구간; 고운동재..길마재..양이터재..돌고지재..
천왕봉..배토재 19.5km
참가인원;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원 42명
출발점 고운동재는 지리산 국립공원을 벗어나는 지점이다.
좌측으로는 산청군 시천면이 길마재 내려서기 전까지 이어지고
그 이후로는 하동군 청암면, 횡천면과 옥종면을 경계로 하여 배토재까지 이어진다.
지리산을 지근 거리에서 조망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구간으로서
낮에는 비가 그칠 것 이라는 일기 예보에 기대가 크다.
하동군은 우리에게 너무도 많이 알려진 곳 이지만
산청은 지리산 중산리, 대원사/치밭목 산장으로 이르는 등로 이외에는 낮선 곳이다.
그러한 산청은 경남의 山地 깊숙히 자리한 탓에 왕래가 쉽지 않았으나
진주통영을 잇는 고속도로로 인하여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지리산행 때 자주 이용하는 산청군 단성 IC주변 단성면은
우리 역사상 목화를 가져와 무명옷을 입게 한 고려시대 문 익점 선생의 출생지이자
최초로 목화를 재배한 곳이다.
또한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유학자로서 수 차례의 관직 요청을 뿌리치고
지리산 자락 산청군 시천면 덕산에 은둔하여 학문과 제자 가르치기에 전념한 남명 조식 선생께서
61세 되던 때부터 돌아 가시기 전까지 10년을 보낸 곳이자 덕천서원과 묘소가 있는 곳이 시천면이다.
그런가 하면 진주민란의 시발점이 된 1862년 1월,
벼슬아치들의 전정, 군정, 환곡이라는 삼정의 문란이 극심하고 농민 수탈이 극에 달하여
농민 봉기의 단초를 제공 하였으며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서 진주 민란으로 확대 된 곳이
산청군 단성면 이며 그것을 기리기 위한 장소로서 단성면 강루리의 단성 향교가 남아있다.
근래에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간단하게 설파한 성철스님이
출가 하기 전 태어난 생가가 또한 산청군 단성면이다.
산청읍 보다도 단성면이 역사에 자주 기록 된 것은 그 당시 단성현이었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는 우리가 가야 할 낙남정맥의 근원이 되는 낙동강의 출발점으로서
천왕봉을 중심으로 한 동남부 계곡 중산리 거림지구 계곡의 물이
대원사, 내원사 계곡의 물과 시천면에서 합류하여 덕천강을 이루면서 진주 진양호로 흘러가고
한신계곡, 칠선 계곡의 물이 산청읍내를 감고 돌아 경호강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진양호로 흘러 들어 남강으로 이름을 바꾼다.
이번 산행부터는 국립공원 지리산의 장엄한 산군을 뒤로하고
역사의 고장, 가야 문화의 잔재에 흠뻑 젖을 수 있는 경남 지역에 본격적으로 접어든다.
참가 인원이 많아 운영진에서 골머리를 많이 앓았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 2차 산행이다.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에도 불구하고 참가 인원은 42명이나 된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42명은 완주 의사가 확실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지난번 하산 지점, 고운동재에서 내려 출발 준비를 서두른다. (4:10)
고운동孤雲洞 재(806m)
좌측 시천면 반천리에는 고운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고운동이라는 한글 어감은 곱디고운 느낌이지만 한자로는 고운(孤雲),
외롭게 떠도는 구름이라는 최치원의 호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해인사 구름을 벗 삼는다 하여 해운海운이라고도 불렸던 최 치원이 뿌린 한줌의 차茶 씨로 인해
차나무가 많은 아름다운 계곡이다.
실비가 가랑비 수준으로 바뀌자 모두들 우중 산행을 위한 채비를 서두른다.
출발하기 전에 하나 둘씩 순번을 외치게 하여 인원을 확인한다.
후미 대장이 마지막 42번을 재차 확인하고 출발이다.(4:25)
예상대로 산죽이 처음부터 앞을 가로 막는다.
조금 진행을 하니 키를 넘는 산죽이 얼굴을 때리고 빗물은 우의를 타고 흘러 내린다.
안개마저 짙게 깔려서 한치 앞을 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시야가 답답하다.
낮은 능선에 이르니 우측으로 가느다란 철사줄이 2-3가닥 쳐져 있고
중간 중간에 “위험, 전기 울타리 산야초 재배지’라고 쓰여진 경고판이 메달려 있다”
이 경고판은 한동안 우리 진행 방향과 함께 적당한 간격을 두고 나란히 한다.
어떤 산행기에는 이 구간에는 산죽이 잘 정비가 되어서 수월 하다고 하였으나
그것도 계절에 따라서 산죽 절단 작업을 실시 하는지 오늘 우리에게는 다소 고통이 될 것 같다.
짙은 산죽은 앞서가는 산우들의 불빛마저 볼 수가 없어서 때때로 불안하기 조차 하다.
이따금씩 산죽을 벗어나니 등로에 쌓인 낙옆이 미끄럽다.
무성한 산죽을 따라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진행 하기를 여러 차례, 툭 터진 공터가 반긴다.
주변의 나무 가지에는 선답자들의 수많은 꼬리표가 메달려 있고
봉분이 낮은 묘 1기와 함께 공터는 수북히 쌓인 낙옆이 뒤덮고 있다.
진행 시간과 지형으로 판단을 하니 묵계리 고기(리)로 떨어지는 갈림길이다.(4:50)
이정표나 갈림길 표지판은 없지만 수북히 쌓인 낙옆위로 등로를 짐작할 뿐이다.
잠시 선 자세로 휴식을 한다.
비가 와서 우의속 베낭을 헤집기가 귀찮아서 그런지 모두들 숨만 고르다가 그대로 출발이다.
내리막 길은 비에 젖은 낙옆으로 인하여 위험 천만이다.
그런데도 모두들 조근조근 잘도 걷는다.
이곳부터는 산죽이 끊어 지다가 이어 지기를 수 차례 반복한다.
능선에서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이 후덥지근한 우의 속을 시원스럽게 해준다.
기왕지사 오는 비는 피하지 못하겠고, 우의 지퍼를 열고 바람을 맞으면서 걷는다.
누군가 말했듯이 피할수 없으면 즐겨라….오히려 마음이 편해 진다.
이제 산죽은 거의 사라진 듯,
바위 구간을 지나다가 정상으로 판단되는 지점에서 삼각점을 발견한다.(790m, 삼각점 5:50)
등로는 다소 안정된 고도로 이어 가다가 우측으로 꺽어서 내려선다.(주산 갈림길, 6:00)
조금 더 진행을 하니 내리막 경사도가 매우 가파르고 선두의 불빛이 발아래 저 멀리서 깜박인다.
조심조심 내 딛는 발걸음도 위험 천만, 앞서가던 여성 회원이 한마디 한다.
“워메 징하네잉…..”
소나무 숲 사이로 여명이 서서히 트인다.
등로 좌측에 묘 1기가 있어 반가운 마음에 상석을 읽어 보니 “처사 오천 박씨 ..” 가 잠들어 있다.
고대하던 길마재에 도착하여 안도의 숨을 내 쉰다.(6:25)
길마재에서 산불 감시소 능선으로 오르는 입구
길마재(512m)
고개 마루 좌측 동리가 빈이터라서 빈이터재 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
우측 계곡에 있는 장재기 사람들은 질매재 또는 (길마재까지 꼬불 꼬불한 모퉁이가 열둘이어서)
열두 모랭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다른 의미로는 고개의 형상이 아래서 올려다 보면
짐을 실으려고 소의 등에 얹는 안장같이 생긴 것(길마)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또 통행이 많지 않은지 시멘트 도로는 낙옆과 풀이 무성하고
이동 통신사 중계탑이 고개 마루에 설치되어 있다.
지도를 보고 고도차이를 계산해 보니 그 짧은 시간에 물경 180 m를 내려선 것이다.
베낭을 벗고 시원한 물을 들이킨다.
후미 대장과 함께 하려고 기다렸으나 내려서는 불빛이 보이지 않아 본대의 후미를 따라 다시 오른다.
산죽과 심한 오르내림 구간을 지났다는 안도감,
서서히 밝아오는 아침과 함께 가늘어지는 실비가
어쩌면 멋진 조망을 안겨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속에 가벼운 마음으로 등로를 오른다.
낮은 봉우리에 도착하니 낡은 산불 감시초소가 홀로 아침을 맞고 서있다. (6:45)
아직 이른 탓인지 초소 안에는 아무도 없다.
하기야 이렇게 비가 오고 흐린날에 무슨 산불이 날까….
잠시 주변을 둘러보니 좌우 계곡 사이로 민가가 하나 둘씩 자취를 드러낸다.
안개 탓에 전망은 그것 뿐, 밝으면 조금 더 좋아 질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고 출발 한다.
산불 감시초소
등로는 낙옆이 수북히 쌓여 황금 카펫을 걷는 기분이다.
고도는 거의 없을 정도로 완만하고 실비도 멎은 상태가 되었다.
답답한 시야는 별로 낳아진 것이 없지만 발걸음은 그래도 가볍다.
완만한 능선을 타고 오르는 중턱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는 선 채로, 또 하나는 누운 채로 묘한 형상을 하고 서있다.
어떤 선답자는 산행기에 “고인돌”, 또는 “선바위.누운바위”라고 이름을 붙인 곳이다.
조금 더 진행을 하여 정상에 오르니 산죽이 무성하게 서있고 꼬리표도 많이 메달려 있다.
누군가 써놓은 7중대 고지라고 쓴 꼬리표도 메달려 있다.
산죽속에 박혀있는 삼각점에는 온통 이끼가 잔뜩 끼어있어 구별이 어렵지만
시간과 고도로 판단 하건데 지도상의 칠중대 고지가 확실해 보인다 (7:15)
잠시 둘러 보다가 내려서니 넓직한 공터가 연이어 나타나고 축대 같이 돌로 쌓아 놓았다.
7중대 고지(565m)
여순 반란 사건 때 지리산 및 인근 산악지대에 숨어있는 반란군을 소탕하기 위해서
아군 군대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앞서가는 솜다리님에게 말을 건내본다.
칠중대(고지)가 무슨 의미인지 아시나요 ?
아니요, 뭔데요 ?
군 부대의 체계상,
소대à중대à대대à연대-à사단으로 되어 있고요, 대대는 3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1대대는 1,2,3 중대가 있고, 2대대는 5,6,7 중대, 그리고 3대대는 9,10,11중대가 있습니다.
중대는 약 150—160명 정도의 중급 규모의 부대라는 의미 입니다.
그런데 왜 4,8중대는 건너 뛰어요 ?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4 라는 숫자는 죽을 사死와 연관 되어서 피한 것 같은데요…
군에 간 아들이 있나요 ?
아니요, 이번에 갑니다.
그렇군요. 2-3월 입대가 좋습니다.
왜요 ? 추운 겨울에 고생 하잖아요…
겨울은 오히려 훈련 받기도 좋고, 혹한기에는 그렇게 강도 높게 하기 어렵습니다.
일조 시간도 짧아 야외 훈련 시간도 많지 않을 것 이구요.
훈련소에서도 겨울에는 동상 등 날씨가 나쁘면 신경을 많이 써 주지요.
그리고 훈련 기간를 제외하고는 겨울을 한번만 넘기면 제대 하고요….
아하…그렇겠군요…
걸걸한 목소리에 비해서 얼굴은 거의 소녀 같이 홍조를 띈 밝은 분이다.
앞서가던 일행과 다시 합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는 사이 간이 건물과 함께 임도가 보인다.
잠깐 사이에 양이터재에 내려서니 고개 마루에는 나무 의자와 간이 화장실이 설치 되어있다.(7:40)
양이터재 양이터 방향
양이터재(517m)
동학란때 피난온 양씨, 이씨가 살아온 양이터라는 마을이 칠중대 방향 계곡 아래에 있다.
미리 도착한 선두 그룹이 삼삼오오 아침 식사를 시작한다.
보온병에 담아온 된장 국물이 아직도 따듯하다.
수평선님이 소주를 건낸다.
달찌근한(?) 소주를 한잔 들이키고 나서 한 숫갈 떠 넣는 아침 밥이 그대로 넘어간다.
다른 그룹은 고기와 당면까지 준비해서 아침 밥상이 근사하다.
혼자서 조용히 즐기는 가 하면 떡, 김밥이나 주먹밥으로 아침을 대신 하는 사람도 여럿이다.
아직은 서로 낮이 익지 않아서 서먹서먹 하겠지만,
식사는 여럿이서 담소 하면서 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도 매우 좋다고 한다.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은 따듯한 커피 한잔이 더욱 간절하다.
식사를 마치고 서서히 출발을 한다.(8:10)
거리상으로 8.5km를 지나 왔으며
가야 할 거리는 큰 오름길 없이 10여 km 정도로 판단되어 마음이 느긋해 진다.
그러나 대간, 정맥은 어느 하나 쉬운 구간은 없다고 한 선답자들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잠시 후 오름길에서 느낀다.
식사를 마치고 바로 올라선 등로는 한동안 가뿐 숨을 몰아 쉬게 한다.
완만한 경사의 등로가 끝없이 이어지는 느낌이다.
정상이라고 판단되는 봉우리에 오르니 주변 지형이 전혀 파악이 안된다.
잠시 앉아서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 고도계를 확인해 보니 646m봉우리이다,.(8:30)
우의와 베낭을 벗고 물을 들이킨다.
어떤 분은 방화 고지라고도 하지만 거리상으로 아직은 많이 남은 것 같다.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서 내려선다. (8:40)
다시 완만한 능선이 이어진다.
잡목과 억새풀, 그리고 싸리나무 가지가 얼굴을 할키지만
갈 참나무 잎이 등로에 쌓여 발을 편안하게 해 준다.
안부를 지나고 완만한 봉우리를 하나 더 오르니 3거리 방향으로 갈림길이 뚜렷하다.
(방화고지 갈림길, 9:10)
방화고지는 이곳에서 살짝 떨어져 있으며 그곳에서 하동호를 내려다 보는 조망이 아주 좋다고 하지만
오늘은 안개 때문에 포기하고 좌측 등로를 따라 내려선다.
조금 더 진행을 하여 또 다른 봉우리에 오르니 수많은 꼬리표가 메달려 있다.
지도상으로 표시된 652m(어떤 지도는 663m)지점이다(9:35)
베낭을 벗고 잠시 휴식을 한다.
고문님이 건네는 생밤같이 잘게 쪼갠 단감이 기가 막히게 달고 맛있다.
낮은 봉우리를 두개 더 지나고 등로는 방화로인지, 인도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의 내리막길로 이어진다.
안개가 다소 걷히고 우측 계곡의 밭과 산비탈이 잠시 모습을 보여준다.
중턱에 이르니 안양사로 향하는 표지판이 서있고 등로는 평탄한 길로 내려선다.
잠시 후 낮은 능선 비탈에 묘 10여기가 2-3개씩 자리잡고 있고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포장도로는 등로 우측으로 가까이 지난다.
묘지 좌측에는 삼각점과 함께 훼손을 금지하는 안내판이 서있다.(10:00)
지형 지물이 많이 않은 구간이라서 선답자들이 사진으로 확인 하는지점이다.
주변에 묘지 10여 기가 자리하고 그 아래는 도로가 지나간다.
삼각점
등로는 한동안 도로와 나란히 이어 가다가 낮으막한 높이의 갈대 동산에 이른다.
갈대밭은 이리 저리 길이 나 있지만
다소 넓직 한 우측으로 돌아 내려선다.
묘 2기를 지나서 하늘을 덮는 대나무 숲을 통과하고 포장도로 돌고지재에 도착한다. (314m, 10:15)
돌고지재에서 바라본 횡천면 방향
돌고지제,횡천면,위태리
고개 좌측 아랫 동리 이름이 “돌고지” 이다.
하동군 횡천면 전대리에서 옥종면 회신리를 잇는 59번 도로가 지나는 고개로서
'돌고 도는 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이 고개를 넘는 서포-옥종간 도로가 '돌이 많다 하여 돌고개재'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옥종면에 사는 한 참봉이 명당을 찾아 왔다가
이미 다른 사람이 묘를 써 그냥 돌아갔다 하여 돌고지재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선답자의 산행기 에서.....
고개 우측 전대리는 횡천면 구간이고 좌측 회신리 위에는 위태리라는 지명도 있다.
횡천면은 얼핏 들으면 무시 무시한 뜻(황천)과 흡사 하지만
읍내를 가로 지르는(橫) 내(川)가 있다는 뜻이다.
위태리는 무언가 위태롭다는 뜻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원래 마을 이름은 상촌(上村)이었으며
일제 시대 행정구역 통 폐합때 위태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다분히 한자의 일본식 표기 냄새가 나는 지명이다.
도로를 건너 시멘트 임도로 들어선다.
임도 옆에 있는 건물은 지도에는 강림자연농원이라고 표시 되어있으나 아무도 없는 건물같이 낡았다.
서시히 경사를 높이는 시멘트 길 임도가 지루하고 답답하다.
임도 중간에서 뒤 돌아보니 돌고지재 건너편, 우리가 지나온 능선 계단식 밭에는
감나무가 얼마나 많은지 빨갛게 익은 감이 꽃을 이루고 있다.
임도를 타고 흘러 내리는 빗물이 졸졸 흐를 정도로 빗 방울이 굵어진다.
옥산 방향 시멘트 임도
고개를 푹 숙이고 걷고 또 걷는다.
중간에 우측 산속으로 들어가는 꼬리표가 메달려 있으나
임도와 결국 만난다는 산행대장의 설명에 따라 계속 임도를 따른다.
시멘트 길이 끝나고 거의 정상에 이를 무렵 좌측 언덕에는 산불 가시초소가 서있다.
임도 좌우 능선에는 소나무 숲이 끝없이 이어진다.
시멘트 임도가 끝나고 비포장 임도로 바뀌면서 평탄한 길이 훨씬 수월하다.
굵어지는 빗 방울이 다소 걱정이 되지만 다시 이어지는 시멘트 임도를 타고 내려 오다가
우측 “화정”, 좌측 “옥산” 이정표가 서있는 3거리를 만난다.(10:50)
돌고지재에서 올라온 임도와 옥산, 천왕봉 방향 임도 길림길
좌측으로 난 비포장 임도를 따라 옥산 방향 오름길로 접어든다.
좌우 소나무 숲이 빼곡하여 가뜩이나 짙은 안개로 어두운 길을 더욱 어둡게 만든다.
그러나 이 길은 밝은 날에는 호젖한 데이트 길로 안성 맞춤이다.
비에 젖었지만 풋풋한 소나무 냄새가 싱그럽다.
좌측 능선에는 버섯을 재배하는지 키만큼 잘라서 세워놓은 나무가 한동안 이어지고
무단 침입 금지판과 그물로 만든 낡은 울타리는 있으나 마나 한 모양이다.(11:00)
버섯재배 능선
평탄한 비포장 임도가 다시 고도를 높인다.
소나무로 빼곡한 주위가 너무 어두워서 앞선 일행을 놓치면 큰일이다 싶어 발걸음을 빨리 한다.
다시 우측 숲으로 이어지는 등로 위로 꼬리표가 빼곡하다.
잠시 휴식을 하면서 또 한번 재충전을 한다.(11:10)
그 사이 앞서가던 회장께서 뒤 따라 온다.
무슨 연유인지 놀라서 물어보니 잠시 알바를 하고 오는 중이라고 한다.
도대체 어디서 알바를 하였을까….?
돌고지재 이후 지금까지는 무아지경에 빠져서 산행을 하지 않으면 알바 하기도 매우 힘든 구간이다.
임도에서 천왕봉으로 가는 숲길 입구
오른쪽 숲으로 들어가니 더욱 고요한 소나무 숲이 이어진다.
조금 전에 헤어진 임도를 다시 만나서 우측으로 접어 들면서 잠시 후에 천왕봉에 도착한다. (11:15)
먼저 도착한 아리아리님이 같이 오던 일행 중 처음 오신 여자분이 없어 졌다고 한동안 찾는다.
옥산을 갔을 것이라고 가볍게 이야기 하고 일행이 함께 사진을 찍는다.
날씨가 맑으면 이곳이 오늘 산행의 백미이자
지리산까지 조망되는 원경이 사뭇 감동적 일텐데 비와 안개가 너무도 원망스럽다.
천왕봉 정상..
오솔길 같은 하산길로 접어든다.
소나무 숲에 서있는 이정표(옥산 1km)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11:30)
천왕봉 아래 갈림길에서 옥산 왕복이 2km라고 하던데,
옥산을 다녀 올 경우 이곳으로 합류 할 터인데 시간이 이른 탓인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고문님을 포함한 일행은 도무지 쉴 줄을 모르고 내 닫는다.
천왕봉에서 배토재 방향으로 내려서서 만나는 옥산 갈림길.
옥산2봉 김포산우회 영일만 친구와 그일행들! 띠지
임도를 따라 가다가 옥산으로 가는(천왕봉으로 가지 않음) 길목의 이정표
옥산가는 길(지점)과, 옥산에서 내려서서 등로를 만나는 길(지점), 그리고 천왕봉은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옥산을 다녀 오신 분들이 천왕봉을 못 보았다고 한탄한 이유이다.
일행 3명이 남아서 휴식을 하다가 뒤 따르는 다른 일행과 다시 출발을 한다.
노랗게 물든 솔잎이 땅에 떨어져 깊어가는 가을에 푹 빠지게 한다.
등산객이 만들어 놓은 키 높이의 돌탑이 군데 군데 서있어서 고즈녁한 분위기가 한껏 더하다.
등로에 소복히 쌓인 솔잎
마지막 이정표 앞에서 앞서가던 일행과 함께 휴식을 한다.
고문님이 또 다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헤친다.
계약 이혼, 경매, 주택의 등기 이전, 빈 털털이, 버스 기사…..
줏어온 자식(?)과 산 꿩은 아무리 잘 키워도 결국은 산으로 간다고 마무리를 한다.
걸쭉한 목소리에 경상도 억양이 담긴 입담으로 일행이 모처럼 큰 웃음을 터트린다.
내려서는 등로 주변으로 잘 가꾸어진 묘 수십기가 이어진다.
한동안 내려서니 등로는 붉은 색을 띈 흙길이다.
색갈로 볼 때 백토는 아닌 것 같지만 흙 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산소를 찾아가서 제사(?)를 지내는 시제, 고인의 기일에 지내는 기 제사,
장묘와 화장 문화에 대해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야 한다는 고문님의 주장과
옛 풍습을 이어가는 것이 좋지 않겠는냐는 평창.대화출신의 사나이와 가벼운 설전이 이어진다.
참으로 난해하고 복잡한 주제로서 언제라도 이견이 생기는 화두이다.
배토재 부근 하산길의 붉은 흙 길
노란 솔잎이 수북히 쌓인 소나무 아래에 나무판자 같은 돌이 2개가 나란히 서있다.
서울 근교 산행때 자주 만나는 개나 고양이 무덤으로 짐작이 된다.
하늘을 덮는 대나무 비탈을 내려서서 임도를 따라 배토재에 도착한다.(174m, 12:25)
2차선 지방도로가 관통하는 완만한 고개이고
아름답게 단장을 한 고개 마루에는 큼직한 돌에 한자로 옥종면을 알리는 글을 세겨 놓았고
건너편에는 낙남정맥 구간을 알리는 커다란 지도가 서있다.
배토재에 설치한 옥종면 알림 표지석
북천면 방향으로는 오른쪽에 커다란 “지리산 자연 요양병원”이 자리하고
그 옆으로 고령토 집하장 (주)범우 라는 간판에 큼지막하게 서있다.
우측 하동군 북천면 화정리 일대는 온통 백토 채굴 광산이었고
고개 넘어 옥종면 정수리에는 백토고개라는 지명도 있다고 한다.
배토재
신행종료 8시간 30분 소요
배토재(174m),백토
고개 명칭은 원래 백토재였으나 언제 부터인가 ㄱ 자가 사라 졌다고 한다.
사기와 도자기를 만드는 재료인 흙이 흰색을 띠고 있어서 흰白자와 흙土자를 써서 백토재라고 부른다.
바위 속의 장석(長石)이 풍화 작용을 받아 이루어진 흰색 또는 회색의 진흙으로서 중국의 대표적 도자기 생산지인 경덕진요(景德鎭窯) 부근의 장시성 고령촌(高嶺村)에서 생산되는 점토로 대표되기 때문에 고령토라고도 한다 양질의 고령토는 철분이 없어서 연하고 밝은 색을 띄고 얇은 그릇을 만들기에 적당하다. 하동군 진교면 백련리 소재 길성도예는 이조 다완을 제현하여 우리나라 보다도 일본에 널리 알려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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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백토가 많이 생산 되나요 ?
아니지요, 이젠 광산이 거의 다 문을 닫았습니다.
경기도나 다른 지방에서 백토를 사러 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양은 예전 같지 않지요.
배토재를 경계로 주변에 10여개의 채취 광산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광하였습니다.
요양병원에 근무하는 나이 지긋한 분이 자세히 설명을 하여 준다.
비는 맞아도 좋을 정도로 가늘어 졌지만
땀과 비로 뒤범벅이 된 옷에서 나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1시간 후에 도착하는 후미 그룹과 함께 버스로 이동하여
옥정 불소유황 온천에 몸을 담그니 이런 호사가 없다.
제첩국과 안주를 앞에 놓고 상견례를 하면서 힘든 산행을 잊는다.
산행준비, 특히 좌석 문제로 골치께나 아팠을 총무님,
온천과 식사 준비를 하느라 고생한 운영진들께 감사 드리면서 즐겁게 마무리 한다.
옥정면 정수리 불소 유황 온천 앞에서
첫댓글 비오는날 고생하셨네요. 마지막 구간까지 무사 완주하시길 바랍니다...
수고하셨어요.1구간은 반은 다녀왔고 2구간부터 갈까 했는데 전 자꾸 일이 생기네요.
첫구간서부터 마지막 구간까지 안산 즐산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