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광주의 5월. 참으로 처참했다. 그 당시 전두환과 그 일파들을 이미 대학가에서는 알고 있었다. 그 당시 대학은 현재와는 달랐다. 4년제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대학입학자격 예비고사에 반드시 합격해야 입학원서를 낼 수 있었다. 본고사도 봤다. 숫자도 매우 적게 뽑았다. 1개 학과의 입학정원은 보통 20명 정도였다. 그것도 대학교 3학년 정도 가면 숫자는 훨씬 더 적어졌다. 학비 부족으로 중퇴함은 물론 군입대 등으로도. 거기에다가 광주·전남에는 4년제 대학이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등 2개 교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견 엘리트 의식도 있었다. 때문에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선후배와의 유대관계도 깊었고. 1980년 5·18에 관여했던 학생들의 주축은 대체로 1977년부터 입학한 대학생들이었다. 이때는 종횡으로 선·후배들 간의 유대감이 끈끈했다. 그래서 수많은 정보도 나눌 수 있었고. 때문에 이미 1980년 5월 이전부터 전두환 군부세력에 대한 갖가지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학생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양 대학교에는 정보기관원들이 학생을 가장해서 대학도서관 등에 포진했다. 수시로 강의실에 대한 출석 체크도 이뤄졌고. 이런 살벌한 상황에서 양 대학교 학생들이 민주화운동의 도를 높여갔던 것이다. 밤이면 밤바다 그 당시 전남도청 앞에서 집회를 가지는 등. 양 대학교 정문 앞에는 군대가 동원되어 진을 구축했었다. 그야말로 살벌한 상황들의 연속이었다. 이런 가운데서 음습 살벌한 기운들이 광주의 숨통을 조여들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80년 5월 18일 드디어 전격적인 합동작전으로 대학생들을 비롯한 광주시민들을 아비규환 속으로 몰아갔었다. 이때부터 수많은 학생들을 비롯한 시민들이 죽어가고 부상당하고 투옥됐던 것이다. 이 같은 포악한 군부세력의 악랄한 작태를 보다 못한 일반 시민들까지 거리로 나와서 민주화운동을 맨몸으로 실행하기 시작했다. 여성들은 주먹밥을 만들어서 제공했고.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모두 참여했었다. 이럴수록 극악무도한 군부세력들은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어떤 여성은 아파트 창문 앞에 있다가 날아든 총탄에 맞아 가슴이 관통당했다. 어떤 젊은 남성은 광주를 도륙 내는 군부세력들을 피해 시골집을 향해 걸어가다가 군인들이 “손들 엇!” 해서 들었는데 총을 쏴버렸다. 그래 놓고서 그들이 하는 말은 “내가 맞췄다”라고 외치면서 ‘희희락락’ 했다는 사실이다. 어떤 고등학생은 팔이 부러지도록 무자비하게 폭력을 당했다. 그 당시 전일빌딩 근처 YWCA에서 잡힌 20대 여인에 대한 악랄한 사건도 있었다. 계엄군이 무자비하게 각목으로 가격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성기에 대검을 넣어서 몇 번이나 돌려 버린 사건이었다. 그날의 상처로 지금까지도 미혼인 체로 불쌍한 고아를 돌보면서 근근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게 그 당시 전두환 군부의 실체였다. 이런 처참한 사건들이 연속되었기 때문에 모두가 목숨을 걸고 나섰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순수한 대한민국의 민초들이었다.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도, 북한의 지령을 받고서 움직인 사람들도 아니었다. 전두환 군부세력들과 그 추종자들의 압제에서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었던 순수토종 대한민국 국민이었단 말이다. 그런데도 현대를 살아가는 일부 극악무도한 정치인들이 회색빛을 뿌려대고 있다. 지역감정까지 교묘하게 조장해 가면서. 자신들의 정치생명을 위해서. 얼마나 비굴·간악하고 후안무치한 족속들인가. 이럴수록 1980년 광주의 5월은 반드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