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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14일 금요일 11시30분 안성축산농협 식당 별실에서 병국炳國, 기후基後, 윤호潤浩 세 사람은 기환基煥 종손을 만나 한 시간여 동안 점심을 겸한 대담을 나눴다. 안성의 명품 한우고기 요리가 곁들인 맛깔스런 점심식사도 대접 받았다. 앨범책자에 담을 서흥김씨삼강정문 촬영 작업을 위해 오후에는 무열사로 이동해 남은 이야기를 나누려 했으나 재실齋室 안이 춥기도 했지만 대담을 나눌만한 자리도 아니었다. 우리 일행을 맞이하러 무열사로 달려오신 의환義煥 안성종친회장도 오이 밭에서 바로 오셔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다. 농업도시 안성에 오니 봄을 맞은 모든 생명체들이 약동하는 듯한 느낌이 순간 들었다. 추가 대담은 email을 통해 주고 받기로 하고 기환 종손과 악수를 나눠야 했다. 종손과의 대담은 기고문과 보내주신 글 그리고 추가 답변자료들을 한데 모아 정리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대담 및 정리 : 기후 종보편집주간] |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 소재 무열사武烈祠 이야기부터 꺼냈다. 무열사가 지금의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기환基煥 종손의 조부 고 택수(澤洙 1905-1990) 어르신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1972년부터 후손들이 뜻을 모아 헌성금을 모으기 시작해 5년만인 1977년 무열사가 재실 숭모재崇慕齋와 함께 확장 준공되었다. 뿐만아니라 서흥군신도비, 판서공설단비 건수建竪에도 서흥군의 사손嗣孫과 문중 어르신들이 그 중심에 계셨는데 이 모든 일들을 작고하신 인득仁得 벽산그룹 회장이 전폭 지원하여 주셨다.
조부님과 선친에 대해서 기억나는 일들...
조부님은 안성 지방에서 한학의 최고 권위자로 이름을 떨친 분입니다. 학업에 열의를 보이셨기 선친을 육군사관학교에, 숙부(정식 珽植)는 중앙대학교에 진학케하여 공부를 시켰습니다. 안성 부군수로 봉직한 숙부께서는 서흥김씨삼강정려각을 경기도 문화재기념물 제77호로 만드시는데 공이 크셨습니다. 1968년 선친께서 38세의 나이로 월남전쟁에서 전사하시자 집안 형편도 어려워졌습니다. 이 때 초등학교를 서울에서 다녔는데 2학년 때 할아버지가 계신 안성에 와서부터 거의 숙명적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한테 귀가 따갑도록 듣던 말씀이 있습니다.〝우리집 종손 장하기도 해라!〞 철이 없던 당시 종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고, 또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어요...
선친(홍식弘植 1931-68)께서는 68년 7월 맹호부대 수색정찰 중 적의 유탄에 맞아 순직하셨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육사동기이셨기 지금 살아계시면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실가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있지요. 현충일에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있는 선친묘소에서 참배 하는데 월남전선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동지들이 참배하러 오신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사십년이 지난 지금도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참배하러 오시는 분들이 여섯 분이 계십니다. 철없던 시절 아버지가 안 계시다고 놀림도 받고 어려운 살림으로 인해 서러움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국립묘지에 찾아오시는 그 고마운 분들로부터 선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사랑과 감사, 솔선수범을 보이신 아버지의 정신을 본받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합니다.
•결혼생활과 가족에 대해...
선친께서 일찍 돌아가시자 할아버지께서 결혼을 서두르셨고.. 그래서 저는 23살에 결혼 했습니다. 문중의 맏종손으로 금지옥엽처럼 자랐기 집에서 키우던 소 두 마리를 팔아서 간신히 올린 저희 혼례는 지금도 눈물날 정도로 가슴 아픈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결혼 후에는 조부님을 모셔야 했고 10년 동안 함께 살았습니다. 종손으로서 제가 감내해야 할 책임이나 역할을 생각하기 이전에 1남1녀를 둔 한 집안의 가장家長으로서 겪어야 했던 중압감은 너무나 컸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문중어른들께서 서흥김씨대종회 모임에 종손과 함께 가자는 말씀을 하시므로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매년 5월5일 당시 서울올림픽공원에서 개최되던 정기총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숭조효친崇祖孝親의 정신이 우리 종회의 가장 큰 덕목이다. 무열사 음수문飮水門의 유래가 음수사원[飮水思源-물을 마살 때 물의 수원을 생각해 근본을 잊지 말라]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매년 음력10월 첫째 일요일 모시는 제향 참제자들이 늘어나는 추세인지 줄어들고 있는지?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나름대로 짚어봤습니다. 남여의 구분도 없어져가는 듯하고 그 시간에 가족과 함께 주말을 보내고 싶기 때문이 아닌가봅니다. 뿐만아니라 직장을 가진 분들은 주중의 평일을 바쁘게 보냈는데 쉬고 싶기도 하겠죠. 게다가 대제에 참제하더라도 내게 득도 안 되고 시간 낭비 돈 낭비라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열사 대제후 점심 준비하는 부녀자들을 보고 감동 받은 적이 있다.
안성 종회宗會는 어떤 식으로 운영하고 있는지...
오래전부터 「뿌리회」라는 친목 단체를 만들어 매분기별로 만나 종회를 운영하고 있지요. 이 모임에는 부녀자들도 함께 모입니다. 바쁘신 분들은 전날 나오셔서 음식준비 하시고 조금 여유가 계신 분은 대제 날에 나와서 일손을 돕습니다. 또한 1년에 한 번씩은 관광버스 대절하여 외부로 나가서 식사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종손이 종신직 회장을 맡고 현재는 총무(준환俊煥) 부인께서 재무를 맡고 있습니다. 10년이 되었지만 종회 운영은 대체적으로 잘 이루어지고 있는 편입니다.
•젊은이들의 종사 참여를 위해 안성 종중에서 솔선해서 불씨를 지필 생각은..
아시다 시피 고삼면 월향리에서 거주하고있는 서흥김씨 가운데 나이가 가장 적은 분이 49세입니다. 또한 40대부터 60대까지 전부 모여도 10명 안팎입니다.
•무열사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그리고 향후 발전계획이 있다면?
예전 익翼 고문께서 무열사 관리동에 상주하셨는데 지금은 사람도 없고 자물쇠로 채워 놓고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무열사는 황해도 서흥봉지에 있었는데 안성에 정착하면서 옮겨왔다는 기록이 있다.
남북통일이 되면 서흥으로 봉지를 옮긴다든지 통일 후의 구상은...?
아직 거기까지 생각은 못했습니다만 황해도 서흥을 본관으로 하는 우리 문중은 분단의 현실 앞에 안타까운 반세기를 지내왔습니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이라는 솔깃한 이슈가 등장하면서 빨리 서흥으로 달려가고픈 마음이 드는 것은 우리 종친 모두의 바람일 것입니다.
•지역신문에서 월향리가 명문가 서흥김씨 세거지로 소개된 기사를 읽었다.
이곳에 거주하는 서흥김씨는 어느 정도?
서흥김씨가 안성에 정착한지도 어언 오백년이나 되었으니 그 자부심 또한 남다르다 하겠습니다. 안성 고삼면 월향리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효인 숙부인 묘소와 큰 아들 석규(碩珪 10世 1473-? ) 선조님의 묘소가 안성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대체로 조선 성종(1457-1494)대에 이주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시 월향리 집성촌의 고택들은 고삼저수지가 생기면서 대부분 사라졌고 삼강정문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입니다. 지금 이 지역에 사는 서흥김씨는 18가구 정도에 불과합니다.
•네비게이션을 검색하면 서흥김씨삼강정문이 표시되어 나온다.
지역신문에도 안성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으로 소개된 기사를 읽었다.
서흥김씨삼강정려각瑞興金氏三綱旌閭閣은 경기도 기념물 제77호로 지정되어 있고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충수金忠守공과 아들 김 함涵의 효행, 함의 손자며느리 온양정씨溫陽鄭氏와 김익성金益聖의 아내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정절을 기리며 나라에서 세운 정문旌門입니다. 1592년 임진년(선조25)에 왜적이 쳐들어오자 충수 대조부께서 의병을 일으켜 죽산전투에서 접전을 이루다 붙잡히게 되자 아들 함과 함께 순절하셨고, 이후 정절貞節을 지키기 위하여 자결自決한 함의 손부 온양정씨와 병자호란때 병든 남편을 간호하다 남편이 죽자 함께 순절한 청주한씨 등 나라에서 내린 네 분의 정표가 각각 모셔져 있습니다.
•지금 몸담고 계신 안성축산농협에는 언제부터 일하셨고 지금 하는 일
안성농업대학 원예과 졸업 후 직장을 선택하면서 겪어야 했던 또 하나의 고충은 조부모를 모셔야 하는 상황에서 고향을 등지고 도회지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직장 선택의 폭을 고향으로 한정한 가운데 86년 입사하게 된 곳이 지금의 안성축협이었습니다. 이곳에서 30년 가까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중년의 위치에 서 있게 되었네요... 지금은 신용사업(금융) 총괄하는 상무일을 맡고 있습니다. 예금과 대출, 보험 사업이 주된 업무입니다. 특히 축산정책자금 대출금은 전국최고로 1,013억원에 이르고 있습니다,
•안성축산농협에 대해
과거에는 축협중앙회와 농협중앙회가 분리되어 있었으나 2000년 김대중 정부시절 통합되어 지금은 농협 안에 소속되어있고 온라인 등 모든 업무가 농협 계좌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크게 나누어 지도사업(축산 및 영농) • 신용사업(금융) • 구매사업(사료 및 동물약품) • 판매사업(도축,송아지경매) • 하나로마트사업 • 브랜드(안성한우,목우촌육우,안성한돈) 사업으로 대별할 수 있슴니다
•사회생활하면서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면
저의 종교는 가톨릭으로 자선봉사단체인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 가입하여 봉사활동을 돕고 있습니다. 매주 일요일 빈체시오 회원들과 함께 가난한 이들과 소외받는 이들 그리고 소년소녀가장과 치매 노인 등을 찾아가 도움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모임입니다. 직장에서는 여러 에피소드가 있지요... 90년대 중반인가 대출받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나 봅니다. 부부노인이 오셨는데 대출을 제가 친절하게 해 드렸는지 이것저것 저한테 주시는 것을 정중하게 사양하였더니 제가 없을 적 돼지고기 3근정도를 저의 집에다 놓고 가셔서 어쩔 수 없이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한 번은 아침에 문을 열자마자 나이드신 분이 찾아와 우리 딸이 교통사고 났다는데 얼른 송금시켜야 한다기에 차분히 설명하고 그 따님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내가 직접 통화를 해보니 보이스피싱임을 감지하여 막아준 것 등 이런저런 할 얘기는 만지만 이정도로 그치겠슴니다
•종중일을 지켜보며 대종회에 바라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열사와 삼강정문을 우리 후손들이 자연스럽게 찾아 볼 수 있도록 부지를 매입하면 좋겠는데 여력이 없습니다. 종원들께서 오실적마다 주차 공간이 협소 하여 어려움을 격고 있습니다. 넓은 부지가 확보되면 이곳에 캠핑장도 만들어 우리 문중 가족들의 야영장으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열사대제 모시는데 어려운 것들은 무엇인지...
종친분들을 위한 식당을 만들면 좋겠는데 이것 마저 여력이 없네요... 비가 온다든지 바람이 분다든지 할 때 편안히 앉아 담소도 하고 음식을 들어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합니다. 더구나 부녀자들도 음식을 조리하고 설거지 할 때 쪼그리고 앉아 일을 하다보니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네요... 그저 안쓰럽기만 합니다.
•맏집 종손으로서 종보 독자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
어려운 시기를 살아오면서 ‘종손宗孫’이라고 하는 정신적 압박감은 어느덧 어려움을 이겨나가게 하는 큰 힘이 되어 있습니다. 자녀들에게도 좋은 가문家門에서 자라고 위대한 조상님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실과 근면으로 모범이 되는 삶을 늘 견지하려고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고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직이 곧 최선의 처세술이다’ 이 말은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가 한 말입니다. 제가 마음에 늘 새기고 있는 경구이기도 합니다. 종손으로서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고 기개 있고 기품 있는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처세술이 있어야 하는데 정직과 함께하는 처세술이야말로 더 없이 큰 자산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서흥김씨는 안성에서 비록 인구는 작지만 명문가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앞으로 큰일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집안의 후손으로 자부심을 잃지 말고 어느 곳에 있든지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서흥인으로서 조상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담자는 무열사를 나오는 길에 기환 종손과 헤어지면서 이런 말을 건넸다... 삼별초의 진압 현장 강화도와 진도의 유적지... 젊은 무인 서흥군의 대마도 정벌길... 려원연합군 선봉장으로 감사대장敢死隊長을 맡았던 천록 장군의 발자취를 종손과 함께 답사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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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삼별초의 진압,대마도정벌,려원연합군 선봉장이신 천록 시조님 영정을 봉양한 서흥인의 무열사, 음수문, 삼강정려각을다시한번 의미깊게 생각하며 후손들의 훈육에도 깊은 감명을 주고싶습니다. 이어 기환 종손님의 무열사 주변 환경정화사업에도 동참합니다.이어 병국사무총장님, 윤호,기후이사님 노고를 아끼지 아니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