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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127 εὐλογέω
율로게오 eulogeo-
칭찬하다, 찬양하다, 축복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율로게오는 유(G2095: 좋게, 잘)와 로고스(G3056: 말, 진술)에서 유래했으며,
(a) '~에 대해 좋게 말하다', 즉 '훌륭하게 말하다'나 어떤 사람에 대해 '좋게 말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Plat.).
(b) '칭찬하다, 찬양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신들이 사람을 칭찬하는 것에도 사용되지만(Eur. Suppl.) 사람이 신들을 찬양하는 것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Isis).
단 한번 신들이 율로게인의 주어로 나온다. 신들은 사람들을 그들의 선한 행위로 고찰한다. 이것은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재능을 부여하는 신들의 역할을 반영한다. 이 역할은 헬라 종교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참조: Aesch., Eumenides, 997 이하). 그러나 우리는 축복이라고 하는 특별한 활동이 헬라 신들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율로게오는 70인역본에서 처음으로 '축복하다' bless라는 의미로 나온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율로게오는 70인역본에서 40회 나오며, 몇 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라크(H1288: 무릎을 꿇다, 찬양하다, 복주다, 축복하다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a) 아버지는 축복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상속자들에게 축복을 전달할 수 있다(창 27:4 이하; 창 48:15; 창 49:25-창 49:26).
(b)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축복할 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형식으로 하였다(창 49:25). 창조물은 하나님의 축복에 의존한다. 하나님은 복을 주어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다(창 1:22). 남자와 여자는 태초부터 축복 받는다(창 1:28). 하나님은 복된 소나기를 보내심으로써 그의 피조물을 유지시키신다(겔 34:26). 그는 농작물과 가축 뿐만 아니라(신 28:1 이하), 안식일도(창 2:3) 축복하신다. 특별한 축복들은 구원사와 관련되어 있다(참조: 창 17:7-8; 창 26:3). 선민의 역사는 축복이나 저주 하에 있다(신 11:26 이하; 30:1 이하). 계명을 지키지 않을 경우 축복은 저주가 된다.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을 행하는 의로운 사람들은 축복을 받을 것이지만 죄인들은 저주를 당한다(렘 17:5, 7; 시 24:4-5).
(c) 하나님의 약속한 복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은 제의적인 형태를 취한다. 참으로 제의(예배)는 이스라엘의 복 개념의 근원인 것이다. 제의에서 이스라엘은 생명을 구하며(암 5:4 이하), 이 생명은 신탁을 통하여, 제사장의 말을 통하여 그에게 허락된다(삼상 1:17). 축복을 선언한 자들로 멜기세덱(창 14:19), 모세(신 33:1 이하), 여호수아(수 14:13), 엘리(삼상 2:20), 다윗(삼하 6:18), 그리고 솔로몬(왕상 8:14) 등이다. 축복하는 것은 점차 제사장의 특권이 된다(레 9:22-23; 민 6:22 이하; 신 10:8). 시 3:8의 기도는 끊임없이 성전 예배식에서 반향된다.
(d) 이 어군의 중요한 용법은 또한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고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에서 신자들이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다(창 24:48; 신 8:10; 삿 5:2, 9; 시 16:7; 시 34:1; 시 67:26 등).
(e) 히브리 동사는 인사한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축복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기도 한다(삼상 13:10).
(f) 이 용어는 또한 저주가 의도되는 곳에서 완곡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욥 1:11; 욥 2:5; 욥 1:21; 왕상 21:10, 13).
3. 신약성경의 용법.
신약성경에서 동사 율로게오는 41회, 명사 율로기아([N]으로 표시됨)는 16회 나온다. 여기서 이 두 단어를 함께 설명한다.
(a)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복의 개념을 많이 이어 받는다. 히 7:1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고 하며(창 14:19 이하), 이로부터 그의 높은 지위나 우월성을 추론하는데, 더 큰 자가 더 작은 자를 축복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히 7:6 이하). 히 11:20 이하는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였고(창 27:28 이하),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였으며(창 48:15 이하), 그들이 믿음으로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신약성경 기자들은 조상으로부터 후손으로의 축복의 전수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위대한 약속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확신을 가지고 축복하는 자는 그가 축복한 자를 하나님의 보호 안으로 밀어 넣는다.
히브리서가 이 예들을 말하는 목적은 히 6:12에 언급되어 있다. 곧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때때로 이런 구절 들에는 "축복을 기업으로 받다"(히 12:17[N]; 벧전 3:9[N])와 "약속을 기업으로 받다"(참조: 히 6:12; 히 6:15)와 같은 공식 문구가 실리기도 한다. 축복과 약속이 병행되어 있다는 점을 통해서 볼 때 이곳에서 축복은 현재적인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복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참조: 마 25:34과 사 65:23).
에서는 악하게도 장자권을 경시했기 때문에 비록 축복을 구하긴 했지만 거부 당한다(히 11:21).
(b) 신약성경은 또한 하나님을 찬미할(bless) 인간의 의무를 인식한다.
눅 1:64에서 사가랴는 그가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즉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깨닫고 찬양을 돌린 참된 이스라엘인이다.
눅 2:28에서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팔에 안았을 때 구주를 보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흘러 나오는 복된 나라에 들어간 것이다. 따라서 그 늙은 시몬은 아기 예수의 양친을 축복할 수 있었다(눅 2:34).
(c) 마리아는 이미 이런 축복의 범위 내에 속해 있었다.
마리아는 이미 이 범위 내에 속해 있었다. 만약에 이스라엘의 모든 아내가 그의 아기에 대한 축복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다면 메시야의 어머니는 특별히 "여자들 중에 복된" 자인 것이다.
① 눅 1:28; 눅 1:42,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② 눅 1:42, "여인 중에서 네가 복이 있도다." 이 문구에 대해서는 유딧 13:18; 유딧 15:12; 신 28:3 이하; 삿 5:24을 참조하라.
③ 그러나 가장 복된 자는 메시야 자신이다. 백성들은 메시야의 시온 입성을 환성을 지르며 환영하였다(막 11:9 이하; 마 21:9; 눅 19:38; 요 12:13). 요한복음에서는 율로게오만 나온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오시는 그 분과 그의 나라는 그들이 속하는 하나님에 의해 축복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그들에게 복종하는 백성들에게 환영받는다.
환영(영접)의 형식은 시 118:26에서 유래하며, 메시야의 구속과 연관되어 있다(Midr. Ps 118). 예수님은 마 23:39; 눅 13:35에서 이 동일한 시편을 그의 재림의 날에 적용 시키신다.
(d) ① 메시야가 지상적 모습으로 나타나셨을 때,
그는 그의 백성 중에 경건한 사람으로 행하신다. 그는 관습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며, 특별히 종교적 관습에서 그리하신다.
그가 식탁에 앉으실 때나 4,000명, 혹 5,000명을 먹이실 때 그는 보통의 유대인 손님, 혹은 집 주인으로 행동하신다. 그는 인정된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신다.
그는 손에 떡을 취하시고 축사하신 후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신다(막 6:41과 병행구; 막 8:7과 병행구).
단 하나 새로운 모습은 기도하실 때 예수께서 예전처럼 아래로 내려다 보지 않고 하늘을 향해 우러러 보셨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것의 요점은 그것이 일상의 평범한 식사가 아니라 기적적인 것이요 그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계신다는 것이리라. 그러나 또한 그의 선교 의식과 이것이 주는 내적 자유에 힘입어 예수님은 이 딱딱한 형식적인 교제에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와 같이 그렇게 생명력 있는 것으로 만드는 신적인 그 무엇을 불어넣고 계신다고 보는 것도 가능하다.
아마도 그는 또 이 감사 기도를, 예컨대 주기도문과 같은 한결 더 자유로운 형태로 표현하셨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관한 어떤 것을, 떡을 축사하고 떼어 주는 그 단순한 매일의 과정에 융합하셨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았다면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이 행동으로 주님을 알아보았을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카리스테인이 때때로 율로게인 대신 사용된다면(그리고 막 8:6; 막 8:7에서 둘이 함께 나옴) 이것은 어떤 의미의 차이를 나타내지 않는다. 유카리스테오 역시 히브리어 베레크에 대해 사용된다. 다른 한편 그것은 아람어 원어에 대한 헬라어의 오해로, 많은 MSS가 막 8:7에서 대격 목적어(아우타 혹은 타우타)를 추가한다. 만약 이것이 예수님께서 떡에 축사하시고 그 기적적인 면을 더하셨을 것이라는 사상을 암시한다면 우리는 이스라엘에서 잊어버린지 오래된 개념으로 거슬러 되돌아 가는 것이다.
눅 9:16에서 유사하게 몇몇 MSS만이 독립형을 가지고 다수는 아우투스를, 그 중 몇몇은 에프 아우투스를 추가한다.
② 주의 만찬에서도 역시 예수님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취하시고 축복을 선언하신 후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시며(막 14:22; 마 26:26), 또 축복의 잔을 가지고 그렇게 하신다. 여기서 그는 해석의 말씀을 덧붙이신다. 축복의 잔은 초기 그리스도 교회에서 여전히 행해졌으며, 이에 대해 고전 10:16로부터 알 수 있다. 바울은 여기서 일반적인 유대적 표현인 토 포테리온 테스 율로기아스("축복의 잔")를 사용한다. 한 가지 새로운 요소는 '호 율로구멘' "우리가 축복하는 바"의 추가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잔을 다른 모든 잔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그 잔을 통하여 회중이 축복받기 때문에 그것에 감사 기도가 적용된다. 그것에 의해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한다."
(e) 예수님은 또 사람들을 직접 축복하셨다.
① 막 10:16에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신다(참조: 막 10:13-막 10:16). 그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유대 가장이나 랍비가 하는 것과 똑같이 행동하셨다(참조: SB). 주목할 요점은 마가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의 활동이 성인들에게만 제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활동은 어린이들까지도 포함하였으니 곧 생의 모든 단계에서 사람을 포용한다. 이 부분이 주로 관심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참조: 막 10:15)는 "예수님의 활동과 적극적으로 통합되는 인간의 몸이며 피조적인 실존"이다(C. Westermann).
② 눅 24:50 이하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시 제자들에게 축복하셨으며, 그리스도의 축복 이면에는 제사장적인 축복도(Schenk) 족장 기사에 나오는 기업의 축복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축복은 떠날 때 주는 축복의 관습이다. 떠나시는 주님이 자기 교회와 더불어 자기의 축복의 능력을 나누시므로 그는 교회와 결속되게 된다. 축복의 내용은 마태가 자신의 기사에 나오는 이에 상응하는 점에서 분명하게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참조: 마 28:20; 창 26:3)고 말한 것처럼, 높이심을 받은 주님이 교회와 더불어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응답하였다. 따라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역 전체를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사 복주셨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었다.
③ 롬 15:29[N]에서 어구는 축복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의 그리스도의 전도의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이, 곧 이 공동체의 성장을 촉진할 것임을 바울이 확신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신 복에 충만하여 로마로 여행할 수 있었다.
④ 마 25:34에서 이 복은 오래된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증거하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 안에서의 위대한 분리는 주님께서 아버지의 복된 자들을 저주 받은 자들로부터 분리하실 마지막 날에 성취될 것이다. 저주 받은 자는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반면, 축복 받은 자들은 생명을 누리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
⑤ 갈 3:8에서 바울은 창 12:3 하반절을 인용한다. "모든 이방(즉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바울은 이 인용문에 자신의 기독론적 사고 계열과 일치하는 새로운 해석을 부여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의 성취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적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축복의 은사는 이제 더 이상 큰 민족의 은사나 땅의 풍성함의 은사가 아니라 약속된 그리스도의 영(Spirit)이다(갈 4:14[N]). 야훼 기자의 인용문과 이에 대한 바울의 해석 사이의 공통의 근거는 약속된 축복과 그리스도 안에서 그 축복의 성취 모두가 땅의 모든 민족들에게 이르러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갈 4:8; 갈 4:14). 갈 3:8-갈 3:14에서도 바울은 축복과 저주의 관계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으심으로 율법의 모든 저주를 스스로 대신하여 단번에 받으심으로써(갈 3:13) 열방의 신자들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 활동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예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의 완전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갈 3:8 이하; 갈 3:14[N]; 히 6:14), "신령한 복"으로서는 지금 완전하게 이해하였다(엡 1:3; 행 3:25 이하).
(f) 복받은 자들에게는 새로운 율법이 적용된다(참조: 히 6:7 이하[N]).
땅을 기업으로 받으라고 요청받으며(벧전 3:9),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된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축복("찬송") 보다 저주하기가 더 쉽다(약 3:9 이하). 구약성경의 의인은 헬라인들처럼 저주에 대한 자연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또 저주를 당하지 않도록 경계했다. 이것은 욥 31:30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저주를 완전히 이기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것은 오히려 또다른 문제이다: "너희를 저주하는 그들을 축복하라"(눅 6:28; 마 5:44). 이 명령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롬 12:14; 고전 4:12).
여기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원수들의 저주, 핍박, 욕설 또는 비난을 그와 반대되는 축복으로 대하라는 권고를 받는다. 이곳에서 축복은 단순히 원수들에 대한 친절한 태도를 의미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보복법(이우스 탈리오니스[ius talionis])을 대신한다(이것은 특히 벧전 3:9에 명확하게 나타남). 축복을 방해하는 것과 저주는 폐지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저주를 받으셨으므로(갈 3:13), 기독교인들은 무조건적으로 축복하라는 권고만을 받을 뿐이다(롬 12:14). "그리스도의 교회와 각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아무도 저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역사는 또한 그의 대적들에게도 유용하기 때문이다"(Watermann; H.-G. Link).
(g) 율로기아는 그같은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솟아나는 것이므로 구약성경에서처럼 예루살렘을 위한 모금으로서 선물에 대해 사용된다: "5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5; 고후 9:6[N]). 여기서 축복과 은사의 관계(참조: 창 33:11)가 나타난다.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 공동체를 위해 모으고 있었던 연보를 율로기아(한글개역 난외 주: "복")라고 부른다. 이 문맥은 율로기아가 인색하지 않은 헌금("억지"와 반대됨)을 의미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고린도 교회는 "많이"(엡 율로기아스, 한글개역 난외 주: "복으로"; 반대어는 페이도메노스, "적게") 헌금을 해야 한다. 그래야 이 헌금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이 예루살렘 교회에 확실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h) 고전 14:16에서 율로게오는 하나님에 대한 무아지경적인 찬양을 표현하는 제의적 행위의 의미에서 사용된다. 저주의 말인 아나데마 예수스와 확연히 구별되는, 고백의 말인 퀴리오스 예수스는 성령에 의해 영감받는 것으로서 참 기독교인의 율로기아이다(참조: 고전 12:3).
(i) 거짓 교사들이 로마 교인들의 마음을 유혹하는 크레스톨로기아와 율로기아("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는 일반 헬라어 용법에 비추어 해석하려고 시도되고 있다(롬 16:18[N]). 한편 아마도 팔레스틴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확신을 주기 위해 약속에 대해 실제보다 부풀리는 듯한 인상을 나타낸다.
(j) 요한계시록의 기자는 마지막 때의 영원한 말씀이 보좌에 앉으신 그분과 어린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계 5:12; 계 5:13; 계 7:12[N]).
(참조: H. W. Beyer; H. -G. 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