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8월 31일 헤르만 괴링은 특별히 긴박한 사태에 대한 봉투를 받았습니다. 외무부의 암호해독가들은 이미 폴란드의 외교 암호체계를 깨트린지라, 평문으로 옮겼고, 괴링은 폭발했습니다.
전문의 마지막 문구는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논의에 참석하지 말것……" 으로 끝났습니다. 네, 독일과 협상할 의지가 없다고 결정적으로 증명해주는 거죠. 여튼, 그 순간 히틀러는 전쟁 명령 1호에 서명하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독일군은 폴란드를 침략했습니다. 이게 독일군 침공과는 전혀 무관했지만, 당시 독일이 보유한 정보 기술의 정확성과 효율성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독일 외무부의 암호분석 부서는 1919년 초 32세의 전직 육군 정보 대위인 쿠르트 젤초프의 제안으로 창설되었습니다. 한참 뒤 외무장관인 요하임 폰 리벤트로프는 암호작성 부서를 휘하에 두었습니다. 1936년을 전후해 이 부서는 페르스제드 Z(Pers Z, 인사행정 담당 Z부대)가 되었고, 분석 분과를 둘로 나눴습니다. 한쪽에선 암호를 담당했고 하나는 코드를 담당했죠.
1936년 독일은 일본 2급 기밀이었던 RED(2개의 로터로 암호화, RED는 미군의 코드명입니다)를 풀어냈지만, PURPLE은 풀어내지 못했습니다.
암호 분석 자료는 군의 무선국이나 우체국 전보국에서 가로챈 것이었습니다. 번역은 대부분 여성이었던 비서들이 담당했지만, 통계 작업은 암호분석가들이 맡았습니다. 이 암호해독반의 외국어 지식을 유지해주는데 더 많은 도움이 된건 금전적 보너스였습니다. 모두 다 알고 있는 프랑스어와 영어엔 돈을 주지 않았고, 4년마다 외국어 시험을 보았습니다. 상당수가 4개 국어를 했고, 매년 지역 외국어 학교에서 시험 한달전에 공부했죠.
당연하게시리 독일은 그들이 동맹국의 코드 메시지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기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1941년 초에는 예민한 상황이었습니다.
1945년 4월, 미군은 고성에 숨어 있던 암호분석가들을 쓸어갔습니다. 며칠뒤, 해병대 암호부대의 장교인 해스켈 클리브스는 그들이 뭘 했는지 알게 되었고, 미국, 영국, 프랑스 전문가로 구성된 혼성 심문조의 심문이 가해졌습니다.
독일 암호반은 중요한 기술상의 성취를 이끌어 냈습니다만, 결과물은 나치의 편견에 의해 외곡되기 일쑤였기 때문에, 암호 분석이 이뤄진 정보를 특별한 것으로 골라낸다는 것은 거의 불간으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건 전쟁에서 진거죠.
그들은 영국, 아일랜드, 프랑스,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바티칸, 스위스,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 폴란드, 이집트, 에티오피아, 터키, 이란, 중국, 일본, 만주, 태국,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멕시코, 볼리비아,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도미니카공화국, 우루과이, 베네수엘라의 비밀 통신문을 해독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전체주의 상의 추가적인 권력은 탈취한 통신문으로부터 얻어진 지식으로부터 나왔습니다. 1939년 당과 정부 경찰 조직이 '제국 중앙 보안국' 즉 RSHA로 통합되었습니다. 게슈타포는 4국이 되었고, 경찰은 5국이 되었습니다. 정부의 국내 감시를 맡는 SD(친위대의 암호부대)는 3국이었고, 6국은 해외감시와 더불어 적국에 대한 비밀정보를 만들어 내는 책임을 가졌죠
RSHA가 행한 가장 큰 작전은 키케로 작전인데, 터키 주재 영국 대사였던 휴 휴게센 경을 위해 일하던 알바니아인 엘리에사 바즈나가 팔아넘긴 자료였습니다. 코드명 키케로였던 그는 15000 파운드를 받았습니다.
그 문서는 휴게센 경의 굉장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스탈린과 루스벨트, 처칠간의 대화내용까지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보가 1943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베를린에 전달 되었을때 베를린은 진짜라고 하기에 너무 양질의 정보였습니다... 그들은 제 3 라이히의 어두운 몰락을 읽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암호를 깨도 연합군이 제공권을 장악함에 따라 공군의 지원이 불가능해지자, 무선 감청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특히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한층 심해졌습니다. 1944년 가을 패튼 장군의 군대가 메츠의 요새를 공격할 준비를 하자 무선 감청만으로 준비를 했지만 기습공격에 당황했죠...
이탈리아는 통신정보를 전적으로 육군과 해군에 의존했습니다. 해군 분석관들은 영국 해군 암호를 깨버려렸습니다. 그 결과, 너무 커서 앤드류 커닝햄 제독은 더 나은 암호를 주지 않는다면 크레타 침공 이후 그 전체를 이탈리아에게 넘겨주겠다고 위협할 정도였습니다.
자 여기서 사막의 여우가 등장합니다. 당시 카이로 주재 미국 무관은 팰러스 대령으로 2년동안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보좌했습니다. 그는 1940년 10월에 근무를 시작했고, 정열적으로 전쟁터를 순회하였으며, 사막 전투의 사막 전투의 전략과 문제점에 관해 연구했고, 영국은 기밀사항을 허락함으로써 미국이 랜드리스를 해주길 바랬습니다. 그는 메시지를 BLACK 으로 조심히 암호한 후 보냈는데, 사막의 여우가 이를 가로채서 몇시간 후엔 메시지를 받을수 있었죠.
그러나 가솔린이라던가 보급이 없으면 어쩌라구요... 1942년 10월 10일 영국군 부대가 시뵘을 죽이고 부하 대부분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정보들이 영국군 수중으로 떨어졌고, 감청팀이 가지고 있던 수많은 값진 정보들이 상실되고 영국군은 통신 보안에서 수많은 문제점을 찾아내어 개선할 수 있었습니다.
그 해 봄, 미군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껴 팰러스를 직무해임시켰습니다. 이미 독일군 포로에게서 확보한 감청과 깨진 BLACK 코드와 초암화를 가지고 있던 영국군은 시험삼아 펠러스가 보낸 무전을 직접 감청하고 감청에 성공했습니다. 그 결과는 뭐 당연한거죠. 워싱턴으로 소환되었고, 7월에 새 무관과 더불어 제퍼슨 디스크의 수정 버전이라고 할수 있는 M-138을 들고왔습니다. 망했죠
이집트 국경을 넘어 승리가 거의 눈앞에 왔을때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영국 제 8군은 엘 알라메인까지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고, 주요 공격 날짜와 방향까지 완전히 숨기고 2개 사단에 240대의 야포와 150대의 탱크가 전달되었습니다. 예전 펠러스의 메시지는 끊겼고, 수많은 더미 메시지와 함께 진짜 메시지를 은폐 했습니다. 당시 독일군은 공군 지원에만 의존할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도 영국의 위장술로 기만당했습니다. 네 가짜트럭 아래에 야포와 탱크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몽고메리 장군이 10월 23일 엘 알라메인에서 독일군을 향해 수천발의 포격을 가했을때, 완벽한 기습을 당한 셈이었습니다. 롬멜은 자기가 오스트리아에 치료를 위해 가 있는 잠시 동안 아무 일도 없을거라 생각했지만, 그가 도착했을때 이미 끝났죠.
석유, 병력, 무기 부족에 시달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철수시키고 전력을 회복하려 했지만, 망했습니다. 몇달 뒤 크레타를 거쳐, 이탈리아 남부로 철수했습니다.
그렇게 엘 알라메인 전투는 연합군 운명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첫댓글 정보는 승리를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