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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강론 05
디모데후서 2:14-19
하나님의 견고한 터
바울 사도는 앞에서 복음의 핵심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려주심의 은혜를 입어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는 것으로 나타내었는데 이 모든 것은 믿음이 없는 우리에게 근거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근거한 것이기에 흔들릴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14절). “너”는 당연히 디모데를 말하지만 믿음 안에서 진리의 아들이 된 자들, 하나님이 된 자들, 하나님의 집이요 교회가 된 자들로 이 말씀을 진리로 읽고 받아들이는 자들을 지칭한다. “그들”은 10절에서 말씀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한 “택함 받은 자들”로 함께 진리를 넘겨받는 자들이다.
“이 일”이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일이다. “기억하게 하여”라는 말의 ‘휘포밈네스코’는 ‘휘포’(~로 말미암아, ~아래)와 ‘밈네스코’(기억하다, 회상하다)의 합성어로 ‘깨닫게 하다, 생각나게 하다, 상기시키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앞에 ‘휘포’(~로 말미암아)가 붙어 어떤 것이 계기가 되거나 그것을 근거로 기억나게 하거나 회상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십자가를 근거로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였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말다툼”의 ‘로고마케오’는 ‘로고스’(말, 말씀)와 ‘마코마이’(싸우다, 논쟁하다, 대적하다)의 합성어로 ‘말싸움하다’라는 뜻인데 곧 말씀을 대적하는 행위이다. 논쟁, 변론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와 성취함이 없는 족보(딤전 1:4, 4:7, 딤후 4:4)에 몰두하고, 율법적 행위를 좇기 때문에 나오는 것들이다. 당시 에베소교회 안의 영지주의적 가르침에 대한 논쟁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미 디모데전서 6:3-5에서도 전하였고 디도서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딛 3:9)
“하나님 앞”이란 ‘하나님 면전에, 눈 앞에’라는 말이고, “엄히 명하라”라는 말씀의 ‘디아마르튀로마이’는 ‘디아’(~을 통과하여)와 ‘마르튀로마이’(증언하다, 확언하다)의 합성어로 어떤 것을 관통하여 증언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주변의 잡다한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직설적으로 본질을 증거한다는 의미이다. 열 말씀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라고 하였는데 직역하면 ‘너는 내 얼굴 앞에 나 아닌 다른 하나님(신들)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 면전에서 증거한다는 것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 얼굴 앞에 다른 하나님으로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안에 들어가 하나 되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본질적으로 증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유익”이란 말의 ‘크레시모스’는 ‘사용하기에 적합한, 유용한’이라는 뜻이고 “하나도 없고”의 ‘우데이스’는 ‘우데’(그리고 아니, ~도 아니다)와 ‘헤이스’(하나)의 합성어로 ‘하나도 아닌, 아무도 아닌, 어떤 것도 아닌’이라는 뜻이다.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라는 말씀은 말다툼을 하는 것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쓸모없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라고 번역하였는데 ‘카타스트로페’는 ‘카타스트레포’(뒤집어 엎다)에서 온 단어로 ‘전복, 파멸, 멸망’이라는 뜻으로 듣는 자들을 뒤집어 엎어버린다는 의미이다.
정리하자면, 너는 진리의 아들이 된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나게 함으로 말씀을 대적하여 다른 교훈을 전하며 율법적 행위를 가르치는 자들과 논쟁이나 변론하지 말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오직 십자가를 증거하라. 말다툼하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뒤집어 엎어 진리를 대적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15절). “진리의 말씀”은 ‘그 진리의 그 말씀’이라는 표현으로 진리이며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옳게 분별하며”라는 말의 ‘오르도토메오’는 ‘오르도스’(곧은, 똑바른)와 ‘템노’(베다, 자르다, 깎다)에서 유래하였는데 숲이나 험한 지역에 길을 만들어 여행자가 목적지까지 잘 갈 수 있도록 ‘바르게 길을 열다’라는 뜻이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란 이미 언급한 것처럼 바울 사도가 감옥에 갇힌 것으로 같은 한 복음인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이다(딤후 1:8, 12, 16). “인정된 자”의 ‘도키모스’는 시험을 통해 확증되고 인정되었다는 뜻으로 ‘확증된 자’이다. “드리기를”이라는 말의 ‘파리스테미’는 ‘파라’(곁에)와 ‘히스테미’(서다, 세우다)의 합성어인데 과거형으로 썼다. 우리말의 어법상 “힘쓰라”라는 말이 가장 뒤에 나오지만 헬라어 문장으로는 맨 앞에 쓰인 단어 ‘스푸다조’는 ‘(두려워) 놀라다, 열심이다, 노력하다, 몰두하다’라는 뜻으로 과거 명령법으로 썼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라는 말씀은 너는 하나님 곁에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미 세워졌다는 의미이다.
정리하자면 너는 그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설 수 있도록 바르게 길을 여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확증된 일꾼으로 하나님께서 열심으로 자신 곁에 이미 세우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의 섬김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에 보내는 서신에도 이렇게 썼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7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16-17절). “망령되고 헛된 말”은 진리가 아닌 말이다. “버리라”의 ‘페리이스테미’는 ‘주위에 둘러서다’라는 뜻이다(요 11:42, 행 25:7). 비진리를 말하는 자들에 대하여 무조건 버리고 거리를 두라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둘러서서 그들에게 복음이 무엇인지 보여 주라는 의미이다. “점점”이라고 번역한 ‘플레이온’은 비교급으로 ‘더 많은, 더 큰, 보다 상위의’이라는 뜻이고, “나아가나니”의 ‘프로콥토’는 ‘전진하다, 진격하다’라는 뜻이다. 다른 교훈을 따르는 거짓 교사들은 주를 경외하지 않는 것보다 더한 것을 향해 진격한다는 의미이다.
“그들의 말”이란 ‘그들이 따르는 말씀’이라는 의미로 말씀이 아닌 비진리를 지칭한다. “악성 종양”의 ‘강그라이나’는 ‘그라이노’(갉아 먹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독한 창질’(개역한글), ‘암’(새번역)으로 번역하였는데 염증을 앓는 신체 부위가 계속 퍼져나가 썩는 부식성의 종기를 가리킨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 “퍼져나감”이라는 말의 ‘노메’는 ‘목초, 꼴’이라는 뜻으로 직역하면 ‘꼴을 가질 것이다’라는 말이다. 이 단어를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썼다.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7-10)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해 생명에 들어간 상태를 꼴을 풍성하게 얻는 것으로 비유한 것인데 본문은 이런 비유가 연상되는 말씀이다. 즉 영지주의의 이단적 가르침은 양이 꼴을 찾아 먹어가듯이 진리가 아닌 자신들의 사상을 가지고 주위를 감염시켜 썩게 만드는 병으로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생명을 누리는 것이요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 아버지를 보게 되는 것이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 14:6-7)
“후메내오”의 ‘휘메나이오스’는 ‘결혼의 신에 속함’이라는 뜻인데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에 종속된 신으로 묘사된다. “빌레도”의 ‘필레토스’는 ‘사랑하는’이라는 뜻인데 이 두 사람은 에베소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거짓 교사들이다(딤전 1:20). 결혼과 사랑을 말하지만 진짜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것이 죄성을 가진 인간들의 현실이다.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18절). “그릇되었도다”라는 말의 ‘아스토케오’는 ‘놓치다, 벗어나다, 빗나가다’라는 뜻이다. ‘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빗나갔다는 것이다. “부활”, 즉 ‘그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키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재생이나 환생의 개념이 아니라 살아 있음 그 자체로 ‘생명’을 의미한다(요 11:25). “무너뜨리느니라”의 ‘아나트레포’는 ‘뒤집어 엎다, 파괴하다’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성전 심판을 나타내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셨다고 할 때 쓰인 단어이다(요 2:15).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인 것은 선하고 물질적인 육체는 악하다는 이론에 근거하여 영의 부활은 인정하나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것뿐만 아니라 부활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 즉 누군가의 믿음을 뒤집어 엎어 심판 가운데 거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19절). “하나님의 견고한 터”(헬, ‘메델리오스’)는 ‘기초’라는 뜻인데 예수 그리스도이시다(고전 3:11). “그러나”라는 말의 ‘멘토이’는 ‘실제로,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일지라도’라는 뜻으로 다른 교훈을 가진 자들이 득세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확고하게 섰고 그 반석 위에 하나님의 집인 교회가 이미 세워졌기에(엡 2:20-22) 음부의 권세로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이다(마 16:18). 이는 성령의 “인침”으로 이루어졌다.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아신다”라는 말의 ‘기노스코’는 구약 히브리어 ‘야다’의 역어로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라는 것은 주님과 자기 백성이 하나 되었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란 ‘주의 이름이 된 자’라는 의미이다. 우리 성경에 “불의”라고 하였는데 ‘모든 불의’라고 말이고, “떠날지어다”라는 말은 과거 명령형으로 썼다. 즉 주께서 찾아오셔서 이미 자기 백성과 하나 된 자는 주의 이름이 되었기에 모든 불의에서(롬 1:28-32) 이미 떠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견고한 터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이다(2025030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