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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에 살던 신라인
당대 중국 땅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특히 산동반도 연해안과 회수와 대운하변 그리고 양자강 하류 및 남중국 연해안에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정착한 사람들이다. 그들 중에는 옛날 고구려와 백제에서 전쟁포로가 되어 강제로 끌려온 사람도 있었고, 굶주림을 피하여 온 사람, 해적에 나포되어 팔려온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삼국의 해외발전기에 진출해 온 무역상인·유학생·구법승·군인·선원·농민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시간과 나라와 경우를 달리하면서 건너온 이들 정착민들은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서로 융합하여 ‘신라인’으로 각자의 생업에 전념해 갔다.
일본의 견당청익승(遣唐請益僧) 엔닌(圓仁)은 서기 838년 7월부터 847년 초겨울까지 거의 9년 반 동안이나 당 나라의 동쪽 해안일대와 대운하변 그리고 광대한 제국의 내륙 등지를 여행하면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入唐求法巡禮行記』라고 알려진 이 책은 시대적으로는 9세기 중엽을, 지역적으로는 중국에 한하여 기록하고 있지만, 실로 시간적·공간적·지역적인 것을 초월한 역사적인 문헌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한 시대의 사회와 민중의 생활을 그토록 상세하고도 생동감 있게 적어 놓은 여행기는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순례행기』는 당을 여행하였던 일본스님의 기록이지만 전권을 통하여 등장하는 인물의 반 이상은 당나라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 아닌 신라사람들이 차지한다. 우리가 이 기록을 통하여 당시의 세계를 보는 한 이들 신라인들은 세계무역사의 새로운 단계, 즉 동서해상무역의 초기단계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는 종전의 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조공 무역에서 점차 사교역을 주로 하는 경제관계로 그 내용이 바뀌어 갔다. 그리고 우리는 이 『순례행기』를 통하여 당나라에 거주하던 신라인 마을과 그 분포, 그들의 생업, 그리고 그들 간의 유대와 조직이며 그들이 누렸던 치외법권적 특권 등이 어떠했던가를 알 수도 있다.
북방항로
당나라 가담(賈耽, 730-805)이 저술한 『도리기』(道里記, ·신당서· 권 43 지리지)에 보면 중국에서 신라로 가는 해로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북방해로’인 것이다. 이에 의하면 등주(登州, 산동성 봉래)를 출발하여 동으로 대사도(大謝島, 장산도)·구험도(구기도)·동도(대·소험도)·조호도(남황성도)를 거쳐 300리를 나아간다. 그리고 북으로 노철산 수로를 지나 마석산(馬石山, 노철산)의 도리진(都里津, 여순만)까지 200리를 가서 동으로 청니포(대련 부근)·도화포(금현 청수하구)·은화포(장하현 화원구)·석인왕(석성도)과 대양하구를 지나 오골강(烏骨江, 압록강)까지 800리 길을 간다.
여기서 다시 남쪽 해안, 즉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오목도(평북 선천군)·패강구(대동강 하구)·숙도를 지나 장구진(황해도 풍천군)에 이른다. 다시 곡도(백령도)·진왕석교와 마전도·고사도(강화도)·덕물도(덕적도)를 거쳐 당은포에 이른다. 이곳은 『도리기』의 종점으로 신라 시대에 대중국 대륙 교통의 요지 가운데의 하나였다. 당은포에서 ‘육로로 700리’ 길을 가서 신라의 서울 경주에 도착한다.
이 해로는 곧 중국의 산동반도 등주를 출발하여 동북쪽으로 발해만의 노철산하구를 거쳐 대련만의 동쪽을 지나 압록강 하구에 이른다. 여기에서 한반도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대동강 하구와 초도를 지나 옹진만과 강화도·덕적도를 거쳐 남양만에 이르는 항로를 말한다. 이 뱃길은 552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유한 뒤로 때로는 고구려·백제의 방해로 막히고 위협을 받기로 하였으나 멸망할 때까지 중단없이 이용하였다.
신라와 당 사이의 이 행로는 근해 연안 혹은 섬을 따라 항해하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하였다. 비록 항해 거리가 멀고 시간이 걸린다고는 하지만 안전하다는 이유로 이른바 ‘사신을 보내 공헌한다’는 정치적·경제적·군사적·의례적인 교빈 관계가 이 항로를 통하여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황해횡단로
이 항로는 중국의 산동반도에서 바로 황해를 가로질러 예성강·당은포에 이르는 해로로 비교적 일찍부터 개척되었다. 김정호(金正浩)는 그의 저서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역대항로’를 설명하면서 당 현경 5년(무열왕 7년, 669) 당장 소정방(蘇定方, 592~667)이 백제를 공격할 때 등주에서 바다를 건너 덕적도로 진군한 내용을 담고 있다. 『구당서』 소정방의 열전(권 83, 열전 33)에 나오는 내용이지만 『삼국사기』의 기록과도 출발지(산동반도 성산각)와 도착지점(웅진강구)이 다를 뿐이다.
이에 앞서 수(581-617) 문제(581-604)가 영양왕 9년(598)에 육·해군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할 때 수군총관 주라후(周羅喉)는 동래(산동성 봉래)에서 바로 황해를 횡단하여 평양으로 향하고 있다. 양제(605-616)의 제 2차 고구려 침략이나 당 태종(627-649)고 고종(650-683)의 고구려·백제 침공도 한두 차례는 직접 황해를 횡단하여 이루어졌던 것 같다.
구산선문의 성주산파 개산조인 낭혜화상의 탑비에 보면(『조선금석총람』 75쪽) 장경초(헌덕왕 13-16년, 821-824)에 왕자 김흔(金昕 )이 당나라로 사행할 때 당은포에서 출발하여 황해를 횡단하고 산동의 ‘지부산’(지부)에 도착하고 있다. 이와 같이 등주의 인근인 성산각(成山角)이나 지부도 이때의 황해횡단로의 중요한 출발항구였음을 알 수 있다.
해류와 풍항을 이용하는 항해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 항로는 많이 이용되었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는 신라승 의상이 총장 2년(문무왕 9년, 669) 상선을 타고 등주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9세기 중엽 일본승 엔닌의 『순례행기』를 보면 산동반도 등주부 관내의 많은 항만들이 신라와의 교통에 이용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839년 일본 조공사 일행이 신라선 9척을 고용하여 귀국길에 오른 곳도 적산포이며, 847년 엔닌 자신이 귀국할 때도 이곳 적산포에서 출항하여 황해를 횡단하고 있다.
이 직항로가 얼마나 쉽게 신라 연해안에 도달할 수 있었던가를 엔닌의 귀국일지를 살펴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그 해 9월 2일 정오 경에 적산포를 출항하여 3일에는 벌써 멀리 신라의 산들을 보았고, 4일 해뜰 무렵 웅주(공주) 앞 바다를 지나 그 날 밤에는 고의도(皐衣島)에 정박하였다. 다음날 아침 출발하여 6일에 황모도(구초도·갈초도)의 니포에서 정박하고 거기서 아도를 거쳐 곧 대마도에 이르고 있다. 적산포를 출발한 지 5일 만에 대마도에 도착한 셈이다. 그리고 모평현(牟平縣)의 유산포와 대주산의 교마포도 황해횡단항로의 출발항으로 자주 이용되었다.
그러나 당에서 신라로 항해하는 출항지는 북방해로이건 황해횡단항로이건 간에 등주가 그 중심항포임에 틀림이 없다.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 권11 등주)에 보면 신라·백제·발해로 내왕하는 항포의 중심지는 등주임을 명기하고 있다. 그러기에 등주부에는 신라관·발해관이 설치되었고 후일에 있어서는 고려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면 이곳은 분명 중국과 우리 나라와의 내왕에 있어 해상 교통의 중심항이었던 것은 틀림이 없다.
등주 봉래성과 봉래각
등주(登州)는 산동성의 동북쪽 해안에 있는 옛 시가지이다. 지금의 봉래수성의 동쪽 해안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다. 춘추 이래 그 이름이 사서에 나타나지만, 수당 시대에 와서 우리나라의 삼국을 비롯하여 발해·일본 등과의 교류가 활발해지자 더욱 번성하였다.
당나라 가담(賈耽, 730~805)이 저술한 『도리기』(道里記, 『신당서』권43 지리지)에 보면 중국에서 신라로 가는 해로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북방해로’인 것이다. 이에 의하면 등주(登州, 산동성 봉래)를 출발하여 묘도·대사도(大謝島, 장산도)·구험도(구기도)·동도(대·소험도)·조호도(남황성도)를 거쳐 300리를 나아간다. 그리고 북으로 노철산수로를 지나 마석산(馬石山, 노철산)의 도리진(都里鎭, 여순만)까지 200리를 가서 동으로 청니포(대련 부근)·도화포(금현 청수하구)·은화포(장하현 화원구)·석인왕(석성도)과 대양하구를 지나 오골강(烏骨江, 압록강)까지 800리 길을 간다.
여기서 다시 남쪽 해안, 즉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오목도(평북 선천군)·패강구(대동강 하구)·숙도를 지나 장구진(황해도 풍천군)에 이른다. 다시 곡도(백령도)·진왕석교와 마전도·고사도(강화도)·덕물도(덕적도)를 거쳐 당은포에 이른다. 이곳은 『도리기』의 종점으로 신라시대에 대중국대륙 교통의 요지 가운데의 하나였다. 당은포에서 ‘육로로 700리’ 길을 가서 신라의 서울 경주에 도달한다.
이 해로는 곧 중국의 산동반도 등주를 출발하여 동북쪽으로 발해만의 노철산하구를 거쳐 대련만의 동쪽을 지나 압록강 하구에 이른다. 여기에서 한반도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대동강 하구와 초도를 지나 옹진만과 강화도·덕적도를 거쳐 남양만에 이르는 항로를 말한다. 이 뱃길은 552년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유한 뒤로 때로는 고구려·백제의 방해로 막히고 위협을 받기도 하였으나 멸망할 때까지 중단 없이 이용하였다.
신라와 당 사이의 이 행로는 근해연안 혹은 섬을 따라 항해하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하였다. 비록 항해거리가 멀고 시간이 걸린다고는 하지만 안전하다는 이유로 이른바 ‘사신을 보내 헌공한다’는 정치적·경제적·군사적·의례적인 교빈관계가 이 항로를 통하여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그래서 이 곳에는 일찍부터 신라관·발해관이 마련되어 있었다. 신라 말 경애왕 4년(927)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등주 신라관에 지후관(知後官) 이언모(李彦謀)를 파송하여 사무를 관장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등주는 도교·신선사상과 매우 관계가 깊은 곳이다. 봉래각을 중심으로 한 전각들, 삼청전·천후궁·용왕궁 등에 모셔져 있는 상(像)들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등주 앞바다에는 예부터 신기루가 자주 일어난다. 중국 사람들은 ‘해시신루’(海市蜃樓)라고 하여 신선이 살고 있는 성시라 생각했다. 서복(徐福)이 불로초를 구하고자 배를 타고 떠난 곳도 산동성 성산각(成山角)이다. 산동은 중국 도교·신선사상의 고장이다.
곤유산의 무념선사비(無染禪師碑)
문등시 쇄자진(鎖字鎭) 곤유산(연대시 곤유산 임장) 아래에는 선산구문의 하나인 성주산파(聖住山派)의 조사 무념선사(無染禪師)의 중국 유석처이던 무념원터가 남아 있다. 여기에는 광서 13년(1887) 계월(음 8월)에 세운 ‘중수무념사원기’(重修無染寺院記)란 석비가 있다. 판독이 매우 곤란한 이 비문만을 보는 한에 있어서는 이 사원과 우리나라 선문구산의 하나인 성주산파(聖住山派)의 조사 무념선사와의 관계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런데 문등의 모평현지에 광화 4년(光化, 天復元年, 901) 신유 3월에 건립한 무념원비(無染院碑)의 명문이 수록되어 있다. 주로 무념원 중수 때 대시주들의 이름과 이에 관계된 단월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평노절도사(平盧節度使) 왕사범(王師範)(891~905) 등 당나라 고관들과 은수(?水, 영파)에서 부를 축적한 계림인(鷄林人) 김청(金淸) 압아의 이름도 발견된다. 이 승원이 신라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 ‘구당신라소’까지 설치해야만 했던 문등의 땅에, 그것도 적산촌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과, 계림인 김청 압아가 대시주였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보면 무념선사와 관계 깊은 사찰이었음에 틀림없을 것 같다.
『해동금석원』등에 수록되어 있는 최치원(崔致遠)이 찬한 무념선사의 석비명에 의하면 무념선사는 애장왕 원년(800)에 출생하여 12세에 출가했다. 헌덕왕 13년(821)에 도당하여 20여년간을 구법순례하다가 회창법난이 혹심하던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였다. 곤유산 무념원도 이때에 파괴되었다가 천복원년(901)에 와서야 중수된 것이다. 산동지역에 신라사원이 많았다는 사실은 신라인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법화원과 적산포
문등현 청녕향 적산촌(산동성 영성시 석도진)은 산동반도 일대를 중심으로 한 신라인 사회의 심장부일 뿐만 아니라 당 내륙이나 연해안으로 이르는 교통과 나·당·일 삼국을 잇는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이곳에는 서기 820년대 초반 장보고 대사가 세운 적산법화원이 있어 당시 중국에 살던 신라인들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였다.
법화원은 북쪽으로는 적산(赤山)이 우뚝 솟아 진산을 이루고 서남쪽은 낮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동쪽은 활짝 열려 바로 아래 산동 제일의 어항 석도만(石島彎)과 오(吳)나라 철공인 간장(干將)의 전설이 전해오는 막야도(莫耶島)가 보이는 아름다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 더욱이 절 마당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맑은 물이 이 절의 운치를 한껏 더해 준다.
연간 5백 섬의 알곡식을 수확하는 장전(莊田)을 소유하였던 법화원은 장보고 휘하의 구당신라소의 압아인 장영과 임대사(林大使), 그리고 왕훈 등 3명에 의하여 경영되었다. 상주승 24명, 니 2명, 노파 3명 등 29명이 있었고 5백석 수확의 장전은 아마도 가까운 척산(斥山)의 광대한 전지와 유산포 소촌 등의 땅이 그 일부였을 가능성이 크다. 법화원이 타국에서 이와 같은 넒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사원의 크기와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일부 기록만 보아도 법화원에는 법당과 장경각을 비롯하여 승방, 니방, 그리고 수개의 객사, 식당, 창고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법당의 크기는 당시 거행된 겨울철 법화경 강의에 모였던 스님과 신도들의 수로 추측이 가능하다.
839년 11월 16일에 시작하여 다음 해 1월 15일에 끝맺는 강회에는 매일 40며 안팎의 ‘남녀도속’·‘노소존비’ 할 것 없이 강회에 관계있는 시주들과 함께 참례하고 있었다. 강경의식은 신라 풍속과 신라 말에 의하여 거행되었고 마지막 이틀간은 250명과 200명의 신도들이 각각 참례하였다. 물론 이 기간에는 819년경 일본에 갔다 온 인근 진장촌(眞莊村)의 천문원 스님 법공(法空)과 유촌(劉村 )의 신라승 상적(常寂)도 참례했을 것이다. 이 법회는 법화원을 중심으로 한 인근 신라인 사회의 규모를 추정하는 자료로 전혀 부족함이 없다.
적산포는 신라와 당 그리고 일본을 이어주는 가장 안전하고도 중요한 항로의 종착지이며 중원과 일본으로 아나가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장보고의 ‘대당매물사’ 선박이 오고가던 곳이며 일본으로 교관선(交關船)이 출발하던 항포였다. 장보고의 통제 하에 있던 국제무역항이던 셈이다. 법화원의 승려들까지도 일본으로 쉽게 갈 수 있었던 곳이며 청주병마사 오자진(吳子陳) 등이 신무왕의 즉위를 위문하는 사신이 되어 수행원 30여 명과 함께 법화원을 방문하고 신라로 출발했던 곳도 바로 이 적산포였다. 앞서 초주에서 9척의 신라선을 구입하여 귀국하던 일본의 조공사 선박도 이곳에서 출항하였고 후일 엔닌도 적산포에서 귀국하였다. 장보고의 무역선단을 이끌고 온 청해진의 병마사 최훈이 다시 이곳에서 양주로 유산포로 왕래하고 있다. 이와 같이 많은 선박들이 국제무역선이건 연해안 운항선이건 적산포를 기점으로 남북을 멀다 않고 오고가고 하였다.
유산포와 신라인
신라인 촌락은 산동반도 남쪽 연해안 일대에 가장 많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모평현(牟平縣)의 소촌포(邵村浦) 도촌(陶村), 망해촌(望海村) 해양현(海陽縣) 동부의 유산포(乳山浦) 등이 그 대표적인 마을이다. 엔닌 일행은 이 지역을 지나면서 많은 신라인들의 거룻배를 목도하고 이들로부터 그들 일행의 소식과 신라에서 일어났던 정변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839년 4월 2일에는 신라에서 김명(金明) 일파와 김균정(金均貞)·김우징(金祐徵) 부자를 중심으로 한 양파간의 왕위계승의 싸움이었다는 소식이며, 4월 20일 아침에는 작은 배를 타고 온 신라인으로부터는 장보고의 도움으로 김우징(신무왕)이 등극하였다는 놀랄만한 정보도 들었다.
많은 신라인들이 오고 가며 크고 작은 소식을 전해준 이곳 사람들의 마을 가운데 유산포가 가장 큰 마을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엔닌의 증언에서 얻은 결론이다. ‘태자통사사인 김간중’(太子通事舍人 金簡中)이 ‘조문사겸책봉부사’가 되어 신라로 출발했던 곳도 이곳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더욱 그러하다. 839년 4월 26일 일본 조공사 선박이 유산포에 정박했다. 30여명의 신라인들이 말과 노새를 타고 선박을 조사할 신라인 압아(押衙) 장영(張詠)을 마중하러 왔다. 뭍에도 많은 ‘낭자’(娘子)들이 있었던 사실은 곧 유산포 신라인 마을의 크기를 말해 주고 있다.
이곳 유산포 주변은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 신라인들은 해운업·상업은 물론 농업에도 종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곳 주민들이 말과 노새를 타고 있었다는 사실과 일본 사절단 선박이 필요했던 식량을 인근 소촌(邵村)에서 구매할 수 있었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엔닌은 역어 도현(道玄)을 통하여 촌장 왕훈(王訓)에게 당나라 체류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왕훈이 엔닌 일행을 선뜻 받아들이려고 한 데는 그럴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장보고가 세운 적산 법화원의 관리자 3명 가운데의 한 사람이었다.
노산 승가장 (팔수하 인근)
노산만 부근 팔수하(八水河) 인근으로 추정되는 승가장은 당시 국제무역업자인 신라인 김자백(金子白) 흠량휘(欽良暉) 김진(金珍)등과의 관계가 깊은 항포이다.
노산(擄山)은 높은 바위산이기 때문에 해주의 동해산 밀주의 대주산 문등(文登)의 적산과 함께 당시 황해의 둘도 없는 좋은 표적물이었으므로 인근의 포구들도 많은 선박이 기항할 수밖에 없었다. 남쪽의 명주·소주에서 산동반도에 이르는 연해안 무역업자의 배들이 넓은 모래사장을 낀 포구에 모여들었을 것이다. 지금도 수많은 돛단배와 건조 중인 목선들이 눈에 띄어 시간의 흐름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대주산(大珠山)과 교마포(驕馬浦, 驕駐浦)
당시 대주산 교마포는 조선소와 선박수리소가 있었다. 대주산에는 좋은 목재가 산출되었고 신라인 기술자들도 많아 외양선들의 수리는 이곳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앤닌은 이러한 내용을 그의 일기에서 전해주고 있다. 또 이곳은 대주산에서 생산된 목탄의 집하장이기도 했으며 일찍부터 신라인 항해 선원들의 귀착포구이기도 했다.
해주와 숙성촌 (해주 동해현 숙성촌)
숙성촌은 바다에 임한 마을로 이곳 신라인들은 주로 소금 생산에 종사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곳에서 생산된 소금도 초주 시장에서 매매되고 있었을 것이다. 116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마을 사람들은 엔닌이 보았던 그 염밭에서 그대로 소금 생산에 열중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 중에는 목탄 생산과 운송에도 관계하는 자가 많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것은 밀주(密州)로부터 초주로 목탄을 수송하던 운송업자의 대부분은 신라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엔닌은 증언하고 있다.
당시 목탄은 밀주 대주산(大珠山) 일대에서 대량 생산되고 있었다. 이 목탄은 당의 동부 운하지역 즉 초주·연수향·양주와 심지어 양경(兩京)의 시장에까지 거래되고 있었다. 목탄은 잘 타고 연기가 없어 부자집 찻물이나 연회음식을 만드는데 가장 좋은 연료였을 뿐만 아니라 겨울에 난방용으로도 제일 좋았기 때문이다. 근래까지 회남·북 중심의 회양(강소성 회양)은 목탄의 집산지이다. 초주 연수향에서 지척의 거리에 있는 이곳의 목탄 시장은 옛날 신라방 사람들의 목탄시장을 이어온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초주·연수현의 신라방
초주는 회하하류에 위치하여 대운하와 회수를 이어주는 조운은 물론 경제적·전략적 요지이다. 회수(淮水)·사수(泗水)·변하(?河)·채수(蔡水)·영수(潁水)·와하(渦河) 등 수많은 하천이 직접간접으로 교회하여 이곳을 거쳐 흐르기 때문에 운송의 중심지이다. 남으로 양주를 지나 장강으로 나아가고 운하를 거쳐 소주(蘇州)·항주(抗州)·명주(明州, 寧波) 등 무역항으로 통한다. 북으로는 해주(海州, 연운항)로 나아가 산동반도와 직결된다. 서쪽으로는 와하·변하를 거슬러 올라가서 중원으로 진출할 수 있다.
이렇듯 초주는 강회지역의 경제적 요지이며 운송의 중심지였기에 이곳에 거주하던 신라인들의 생업도 자연 이 도시의 성격에 부합될 수밖에 없다.
신라인 취락은 대운하변을 따라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이던 초주(楚州, 강소성 회안)와 연수(漣水, 강소성 연수)에는 ‘신라방’이 있었다. 이곳에 신라인 사무를 전담하는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가 설치되어 ’총관(總管)이 행정을 관장하고 그 아래에 “전지관(專知官, 사무전담관)과 ‘역어(譯語, 통역관) 등의 관리가 있었다.
귀국길에 오른 일본의 사절단 일행은 뛰어난 항해술을 가진 신라선원과 보다 견고한 신라선이 필요했다. 신라인 통역관 김정남(金正南)을 통하여 9척의 신라선과 바닷길에 익숙한 신라선원 60여명을 고용한 곳도 바로 이 초주와 연수현에서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에서 당시 신라인들의 항해술이나 조선기술이 일본의 그것보다 월등히 앞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초주는 편리한 수운으로 많은 선박이 모이고 이를 이용한 중계무역도 성행하였던 것 같다. 884년 8월 최치원(崔致遠)은 양주를 떠나 신라로 돌아가면서 운하 길을 따라 초주에 이른다. 그곳에서 몇 문우들과 주고받은 시문에도 초주의 배와 바다 이야기가 등장한다(『계원필경』권20). 13세기 귀국길에 초주를 방문한 마르코 폴로(1254-1324)는 그의 『동방견문록』에서 초주에는 많은 선박들이 끊임없이 왕래하고 수운을 이용하여 갖가지의 상품이 모이고 팔려가고 있었으며 소금의 판매도 이곳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당대와 그 뒤까지의 초주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초주에서 35㎞ 떨어진 연수향은 옛 회하하류의 북안에 위치하고 동북으로 140여리, 운하를 통하여 바다에 이른다. 수운과 해운의 요충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곳에도 전술한 바와 같이 신라 사람들의 집단거주지인 신라방이 있었다.
9세기부터 고조되어 가던 세계무역의 조류가 당시 중국무역의 중심지의 한 곳이던 초주·연수향·양주 등지로 신라인을 모여들게 했던 것이라고 해도 억측이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항해술에 능숙했던 신라인들은 장보고 전성기(828-841)에는 신라·당·일본의 삼국무역에 주동적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며 양주·항주·명주 등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와의 교역도 활발히 전개해 갔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회하의 강줄기가 변하고 운하길이 막히고 바다가 메워져 연수향은 바다로부터 더욱 멀어져 수운은 겨우 폐황하와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서주와 용교 (중국의 대동맥 운하)
중국에서는 자연의 하천을 이용하여 운하를 개척하고 물자를 수송한 예는 매우 오래된 일이다.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기원전 486년 양자강과 회수(淮水)을 연결한 「간구」를 개착해 곡물을 수송했다.
이 간구는 후대 수(隋)나라 때 대운하(大運河)의 일부로 이용되어 산양독(山陽瀆)이라고도 불렀다. 특히 운하는 나라의 통제 하에 나라 재물(주로 租稅)들을 배로 수송하는 데 이용되어 이를 조운(漕運)이라고 했다. 운하는 주로 북방의 정치도시와 동남의 경제지대를 연결해 주는 큰 역할을 해왔다.
중국 황제의 전제권력을 상징하는 2대 공사로 만리장성과 대운하를 꼽는다. 일반적으로 「대운하」라고 하면 대개 수나라 때 개착한 하도(河道)를 이야기 하지만 사실 시대에 따라 여러 번 변해 왔다. 한(漢)·남북조 이래 지금의 운하를 따라 부분적으로 개착해 왔는데, 수(隋)가 남북을 통일하자 적극적으로 개수했다. 관중평야의 중심 장안을 서울을 정하고 보니 많은 인구의 증가로 식량난에 봉착하게 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기근이 들기라도 하면 장안의 식량난은 극에 달하였다. 문제(文帝)가 동도 낙양(洛陽)에 가서(584년) 직접 식량을 구한 일도 있었다. 이러고 보니 수는 관중의 식량문제를 근본적으로 타개할 방도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당시 최대의 쌀 생산지라 할 수 있는 강회(江淮)의 곡물에 주목하게 됐다. 이것이 곧 수의 대운하 건설의 동기 중의 동기다.
584년(開皇 4)엔 황하와 장안을 잇는 광통거(廣通渠), 587년엔 회안(淮安)과 양주(揚州)를 거쳐 양자강과 회하를 연결하는 산양독, 605년에는 황하와 회하를 잇는 통제거(通濟渠), 608년 황하에서 천진 방면에 이르는 영제거(永濟渠), 610년 단양군(丹陽郡·鎭江市)에서 여항군(余杭郡·杭州市)에 이르러 양자강과 전당강(錢唐江)을 잇는 강남하(江南河)가 잇따라 개수됐다. 이와 같은 대역사를 벌인 수(隋)는 이를 제대로 활용도 못한 채 617년 멸망하고 만다. 그러나 당과 송은 운하의 혜택을 톡톡히 보았다. 강남이 개발됨에 따라 상업이 크게 일어났고, 이에 따라 운하는 남북 교통운수의 대동맥이 됐다. 특히 현종(玄宗)때는 강남강회 재물의 운송이 극성하여 운하 변에는 큰 성시가 형성됐다.
강남하의 진강·양주를 비롯해 통제거의 초주·연수현·서주·변주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송이 변하변의 개봉부(開封府·하남성 개봉시)에 서울을 정한 것도 바로 운하 때문이었다.
양주와 신라인
양주는 대운하와 장강 하류의 요충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였다. 무덕 9년(626) 여기에다 대도독부를 두고 대도독으로 친왕이 취임하였고, 지덕 원년(756)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가 설치되어 11개 주를 관장하였다. 이래 강남재부의 집산지로, 국제통상의 심장부로 발전하여 천하에 으뜸가는 부유한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신라인을 비롯하여 서방세계의 파사국(波斯國, 페르시아)·점파국(占婆國, 林巴, 인도차이나의 나라)·대식국(大食國, 아랍제국) 상인들도 이곳에 거류하였던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이들의 거주지인 파사장(波斯莊)과 신라방 그리고 화물집하장인 저(邸) 등이 집중적으로 생겨났다. 그리고 화물의 거래소인 점(店)을 개설하였을 뿐만 아니라 십리장가(十里長街)라는 야시장의 거리까지 생겨났다.
엔닌은 양주부에 체류하는 동안 신라인 무역상 왕정(王靖)을 만났다. 그는 819년(원화14, 헌덕왕 11) 당나라 무역상 장각제(張覺濟)와 함께 교역을 목적으로 바다를 건너가 악풍으로 표류하여 일본의 데와(出羽, 山形 秋田縣)국에 유착한 뒤 나가토(長門, 山口縣 北西)를 거쳐 당으로 귀환한 양주에 거주하는 신라국제무역상이다. 또 엔닌은 회창 6년(846)에는 일본정부가 파견한 ‘엔닌수색대’의 한 사람인 성해(性海) 스님의 서신도 역시 양주의 신라 무역상 왕종(王宗)을 통하여 접수하였다. 이 밖에도 주경현(朱景玄)의 『당조명화록』(唐朝名畵錄)에는 정원 말(804) 신라 상인이 양주에서 수십 점의 그림을 비싼 가격으로 구입해 간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이러한 소식은 곧 양주 신라인들의 활동이 어떠하였던가를 전하고 있는 좋은 예이다.
강도현지』(江都縣志 권16)에 보면 북송 원풍 7년(1084) 이곳에 고려관(高麗館)이 설치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고려관은 당대 신라관 또는 신라방(新羅坊)의 후신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양주의 당대 나성지(羅城址)에서 수점의 신라의 것이라 생각되는 도기와 고려청자의 파편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그 인근에서 아랍의 유리그릇, 페르시아인의 녹유(綠釉)도기, 일본의 수우각료(水牛角料) 등도 출토되었다. 이 사실은 나성지 주변 일대가 신라인들의 주거지였을 뿐만 아니라 서방세계의 무역상인들의 집락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로써 동서를 대표하는 상인들이 양주에서도 교역을 했으리라는 짐작은 결코 억측이 아니다. 『삼국사기』 잡지에 보이는 수많은 외래 사치품들은 이들 이국상인을 통한 교역에서 얻어진 물품임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소주와 신라무역상
당나라 시대의 소주(강소성)는 7현을 관장하였다. 송강 유역의 곤산현과 화정현도 여기에 예속되어 있었다. 송강은 태호(太湖)에서 발원하여 곤산현을 거쳐 상해(上海) 북쪽을 흘러 황포강과 합류하여 바다에 들어간다. 강구를 오송해구(吳松海口)라고도 한다. 무역선은 이 뱃길을 따라 남중국으로 항해한다.
대중 원년(847) 6월 초 엔닌은 귀국을 서둘러 신라 무역상인 김자백·흠량휘·김진 등을 찾아 적산촌에서 초주를 방문한다. 그곳 신라방 총관 유신언으로부터 김 등의 서신을 전해 받는다. 그 내용인 즉, 이들은 이미 5월 21일에 소주(蘇州)의 송강구를 출발하여 일본으로 가니 산동의 노산으로 오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배를 타고 갈 일본인 슌타로(春太郞)와 신이찌로(神一郞)는 계약을 위반하고 명주의 당나라 사람(신라인이라 생각됨) 장우신(張友信)의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는 내용과 슌타로의 광주 왕래를 기록하고 있다
명주(明州, 寧波)
신라가 통일 이전에 당은포를 출발하여 중국에 이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비단 고구려나 백제의 방해라는 정치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서울인 경주가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하여 당과는 교통이 매우 불편하였다. 가담이 『도리기』에서 언급한 것처럼 당에서 남양만에 이르러 다시 왕도 경주까지 가려면 ‘육행 칠백 리’라는 노정에다 험준한 추풍령도 넘어야 하는 고통이 따랐다. 적지 않은 ‘국신물(國信物)을 지닌 사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교역을 주업으로 하는 상인들도 험한 육로를 통한 수송에는 적지 않은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나·당 양국간의 교통 불편을 해결하는 방편으로 육로보다 편한 해로와 수송능력면에서 월등히 나은 선편이 자연스럽게 이용될 수 밖에 없었다. 경주에서 가까운 감포·영일만이나 울산만에서 출발하여 남해안을 지나 흑산도 부근에서 뱃길을 서북방으로 돌려 산동반도쪽으로 가거나 서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양자강구나 남중국으로 직항하는 해로가 이용되었다. 이 항로의 중국 측 중심 해항은 명주 정해현(定海縣)·대주 황암현·양주·천주·광주 등이며 우리 나라 측에서는 무주(광주)·나주·전주·강주(진주)가 이용되었다.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과 『송사』 고려전에 나오는 노정이 곧 이해로 이용된다. 명주 정해현을 출발하여 매잠(창국현)에서 백수양(白水洋, 절강성 연안 해중)·황수양(黃水洋, 장강구의 탁수바다)·흑수양(黑水洋, 흑조해역)을 지나 협계산(소흑산도)·배도(진도 동쪽바다 섬)·흑산도에 도착하여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나주·군산·인천·강화도를 지나 예성강에서 개경에 이르는 항로를 말한다.
서긍 일행은 음력 5월 28일에 매잠을 출발하여 3일 뒤인 6월 2일에 ‘화이’의 경계라던 협계산에 도착하였고, 3일 후에는 흑산도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계절풍을 이용하면 명주에서 불과 5일 만에 흑산도에 도달한다.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에도 고려 사행로를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명주를 출발하여 4일만에 흑산도에 이르고 있다. 고려 인종 36년(건염 2년, 1128) 양응성(梁應誠) 등의 사행길은 5일째 되던 날 명주 정해현에 도착하고 있다. 『송사』고려전에도 명주 정해를 출발하여 순풍을 만나면 5일만에 흑산도에 이르며, 7일째에는 예성강에 도착한다고 하였다.
『남제서』(권 58 동이전)에 보면 가라국왕(伽羅國王) 하지(荷知, 감지)가 건원 원년(479) 남제(479-501)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김해 지방의 나라가 백제에 앞서(484) 단독으로 남제와 통교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동중국해를 직접 횡단한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승 각덕(覺德)이 양(502-556)으로 건너갔을 때나 또 그가 진흥왕 10년(549)에 양의 사신과 함께 불사리를 가지고 왔을 때도 이 남방해로를 이용하였음이 분명하다(『해동고승전』 권2). 진흥왕 26년(565)에 남조 진(557-589)의 사신 유사(劉思)와 함께 경론 1,700여권을 가지고 온 ‘입학승’ 명관(明觀)도 필경 이 항로를 따라 왔을 것이다. ·
신라가 중국 제왕조에 대한 이른바 ‘조공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한 것이 남조 이전부터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시기의 신라는 남방해로를 보다 많이 활용하였을 것이다. 진과의 교역을 진흥왕 대에만 해도 전후 4차례나 되었으며 진지왕(576-578)·진평왕(579-631)대에 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다. 진평왕 7년(585) 고승 지명의 입진이나 (『삼국사기』 권4) 동왕 9년(587)조에 나오는 대세(大世)와 구칠(仇柒)의 이야기도 신라 사람들이 남방 해로로 남중국의 오월에 이르렀던 당시의 정황을 반증한 좋은 예라 하겠다. 이 밖에도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선편으로 금능(남경)에 직항한 기록 등은(『속고승전』 권 13 석원광) 신라가 통일 이전에 이미 남방해로를 통하여 남조와 왕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통일 이후에도 이 뱃길이 활발히 이용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것은 조선술과 계철풍을 이용한 항해술의 발달에서 온 결과이기도 하지만, 안사의 난(755-563) 이후 강남 지역의 경제 성장과 양주를 비롯한 남중국의 광주·복주·항주·명주·천주 등 여러 항구가 국제항으로 크게 번창한 까닭이기도 하다. 중세기의 이슬람·아라비아 상인들이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거쳐 남중국의 양주까지 무역 시장을 개척하고 서방의 문물을 다량으로 전래한 데서도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여파는 당나라와 정치·경제·문화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신라에 미쳤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이 지역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헌덕왕 8년(816) 흉년이 들자 신라 사람 170명이 당의 절동(남중국 절강 동쪽)에 건너가 먹을 것을 구하엿던 사실(『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 제 10)은 이의 반증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남방해로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당회요』에는 망해진(명주 정해현)이 일찍부터 신라 원항 선박의 중요한 발착항구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지기승』(권 11 양절동로 경원부 명주 물경 하)에는 명주 창국현의 매잠산은 고려·신라·발해·일본 등의 선박이 바람을 기다리던 곳이라고 하고 있다. 앞장에서 본 바와 같이 이 항선상의 보타산 조음동의 ‘불긍거관음원’에는 ‘신라고인’이 오대산에서 모셔온 그 관세음상이 중국 관음신앙의 시원이 된다. 신라 무역상인들이 배를 타고 가다 좌초한 그 해암에 관음신앙을 모시고 먼 해로의 안전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신라 선박의 왕래가 얼마나 많았기에 항로상에 있는 위험한 해암에 ‘신라초’라는 이름이 붙여졌을까 놀랄 만 하다. 이렇게 라도 하여 왕래 선원들의 안전을 도모하려던 그 당시 신라 해상 상인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기 신라 선원들의 항해술은 매우 우수하여 여타 나라의 선원과는 비길 바가 못되었다. 845년 동남해상에 표류한 일본 선원 50여명을 광주에서 일본으로 데리고 간 것도 신라 선원들이다. 물론 남방해로를 이용하였을 것이다. 출발할 때에는 이미 역풍이 불고 있었던 계절이라 생각되므로 그들의 항해술의 수준을 짐작케 한다.
신라 말에 오면 이 남방해로는 더 많이 이용되었다. 그 이유는 북중국에 거란족의 세력이 등장한 데에도 한 원인이 있었겠지만, 이 항로를 이용하는 선원들은 이미 계절풍과 해류의 흐름을 잘 알고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많은 신라승의 입당과 귀국의 기록을 보면 서북풍이 부는 10-2월에 중국으로 출발하여 서남풍이 부는 3-8월에 귀국하고 있다. 여주의 고달사 원종대사(元宗大師)도 진성왕 6년(892) 늦겨울에 상선편으로 서주(舒州) 동성현(안휘성 동성현)에 도착하였다. 그러다가 경명왕 5년(921) 7월에 강주(진주) 덕안포를 거쳐 귀국하였다(『조선금석총람』 상). 항해 기간도 놀라울 정도로 단축되었다. 앞에서 본 『고려도경』이나 『송사』 고려전의 기록처럼 5-6일 이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 866-932)의 탑비에는(『조선금석총람』 상, 『해동금석원』 권3) 그가 진성왕 10년(896) 입절사(入浙使) 최운희와 함께 ‘불과수일’만에 영파에 도착하였고 효공왕 15년(911)에 나주 회진으로 환국하였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계절풍을 잘 이용한 항해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문경 봉암사의 정진대사(靜眞大師)도 효공왕 4년(900)에 상선을 타고 강회부근에 도착하였고 경명왕 8년(924) 7월에 전주 희안현 포구로 귀환하였다(『조선금석총람』상, 『해동금석원』 권 4). 광양의 옥룡사 통진대사(同眞大師)는 진성왕 6년(892) 늦은 겨울에 출항하여 경명왕 5년(921) 여름(7월)에 전주 임해군에 귀착하였다(같은 책). 오룡사의 법경대사(法鏡大師)는 효공왕 12년(908) 7월에, 지평 보리사의 대경대사(大鏡大師)는 같은 해 13년(909) 7월에 무주(광주)의 회진과 승평에 귀환하고 있다.
많은 승려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늦겨울에 중국으로 가서 여름철(7월)에 무주·전주·강주(진주)·나주 방면으로 돌아오고 있다. 물론 계절풍과 관계 있는 항해의 결과이다. 후백제 견훤과 오월 등 여러 나라와의 빈번한 왕래는 이 항로의 지속적인 이용을 웅변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예라 하겠다.
당회요』에는 망해진(명주 정해현)이 일찍부터 신라 원양선박의 중요한 발착항포였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여지기승』(輿地紀勝 권11 양절동로 경원부 명주 경물하)에도 명주 창국현(昌國縣)의 매잠산(梅岑山)은 고구려·신라·발해·일본 등의 선박이 바람을 기다리던 곳이라 하고 있다.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과 『송사』(宋史)고려전에도 명주 정해현을 출발하여 매잠에서 바다 항해를 시작하여 소흑산도(흑산도) 진도에 도착하여 서해안을 따라 북상한다고 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자치통감』(권 250, 함통 원년, 860, 권252, 건부 3·4년, 876~7)에는 명주가 강남의 군사·교통·무역의 중요한 항구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대·송대에 오면 남해제국은 물론 동북 여러 나라의 해상무역의 일대 중심항으로 번창하여 ‘시박사’(市舶司)가 설치되었던 일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외국상인들은 명주의 동도문(東渡門) 안팎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신라상인들은 진명령(鎭明嶺) 일대에서, 페르시아인은 동도문 안에서 많이 거주하여 페르시아 거리를 형성하기도 했다. 지금도 영파 항구로부터 10여분 거리에 있는 ‘고려관지’(高麗館址, 鎭明路 ?奎巷 57)는 그 때의 사정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상림호 월주요지
‘고려청자’는 그 양식에서부터 중국의 월주(越州)요 청자의 영향 하에 제작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중국 청자의 본격적인 제작은 8세기 중반부터 이루어졌으며, 그 중심지는 절강성 여요현(余姚縣) 상림호의 요라고 한다. 지금 당·오대·송에 이르는 가마터가 230여 곳이나 발견된다. 중국의 도자학자들은 완도 장좌리 장도에서 출토된 자기의 파편을 바탕으로 사발·병·두레박 등으로 유별하면서 월주요의 생산품과 일치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그릇의 조형은 물론이고 유약의 색, 굽는 방법에 있어서도 완전히 일치한다고 설명하였다. 중국에서의 옥벽사발 등의 생산 시기는 대략 정원(785~805)에서 대중(847~859)년간에 이르는 기간이라고 한다. 이 시기는 장보고의 활동기이며 완도와 그 인근 대구면 해남 연암 등 유적지에서 출토된 초기 청자기 연대와도 그 때를 같이 한다. 월주요 청자의 중요한 적출항은 인근의 명주 지금의 영파(寧波)였다. 이에 따라 ‘고려청자’의 기원도 당시 동아시아의 해상교역을 독점하고 있던 장보고 선단의 교역활동 시기와 견주어 재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보타산 관음도량과 불긍거관음원
『고려도경』에 나오는 항로 가운데 매잠(梅岑)조를 보면 신라무역상인들의 해상활동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내용인 즉, 이러하다.
산록에는 양 무제(502~549)가 세운 보타원이 있고 그 원중 전각에는 영감스런 관음상이 모셔져 있다. 옛날 신라상인이 오대산(五台山, 산서성)에 가서 그 관음상을 조상하여 배에 싣고 신라로 돌아가려 했다. 출항하자 곧 좌초하여 배가 나아가지 못함에 그 관음상을 암초에 안치했다. 상원의 스님 종악(宗岳)이 관음상을 전각으로 모셨다. 이 뒤로 바다를 왕래하는 사람은 반드시 가서 참배하여 복을 비니 감응하지 않음이 없었다. 오월국(吳越, 907~978) 전씨는 그 상을 성중의 개원사에 옮겼다. 지금 매잠에서 봉안되는 상은 그 뒤에 새로 조상된 것이다.
지금 주산시(舟山市) 보타구 보타산 조음동에 있는 ‘불긍거관음원’(不肯去觀音院) 기원을 전해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중국 4대 불교성지 가운데 하나이며 관음신앙의 본산인 이 곳의 개산조사가 일본승 에가쿠(惠?)인양 알고 있다. 에가쿠의 불긍거관음과의 연기는 『고려도경』(북송 선화 6년, 1124 간행)보다 145년이나 뒤에 편찬된 지반(志盤)의 『불조통기』(佛祖統紀 권42, 남송 함순 5년, 1269 간행)의 기록에서 연유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중 12년(858) 일본국 사문 에가쿠는 오대산을 순례하여 관음상을 얻고 사명(四明, 절강성 영파)길을 거쳐 귀국하려 했다. 배가 보타산을 지날 때, 돌에 걸려 나아가지 못했다. 무리들이 두려워하여 기도하기를 “만약 존상이 해동에 (가는) 인연이 무르익지 않았다면 청컨대 이 산에 머물게 하소서”라 했다. 배는 곧 떠서 움직였다. 에가쿠는 슬퍼하여 떠날 수 없었다. 이에 해변에 초려를 짓고 관음상을 모셨다. (지금 산 쪽에 신라초(新羅礁)가 있다.) 은인(?人, 절강성 영파)들이 이를 듣고, 청하여 그 상을 개원사에 안치케 하였다.(지금 사람들은 혹 오대사라고도 하고 불긍거관음이라고도 한다.) … 산은 대해 가운데에 있고 은성으로부터 동남 물길로 600리나 떨어져 있다. 산 이름은 보단락가(補?落迦)이며 관음보살이 거기에 머물며 곧 대비경(大悲經)에서 말하는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 관세음궁전이다. … 그 산에 조음동이 있고 바닷물이 밤낮으로 들락거리며 큰소리를 내고 있다. … (조음)동에서 6~7리 떨어진 곳에 큰 난야(蘭若)가 있고 난야는 해동 여러 나라(사신)의 조관과 상고(商賈)의 왕래를 위함이다. 경건함과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면) 건너지 못함이 없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에가쿠는 839년 신라선에 편승하여 입당하고 초주 신라방을 거쳐 오대산과 천태산까지 왕래한 스님이다. 생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전후 3~4차에 걸쳐 입당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보타산 관음신앙의 개기전설이 『불조통기』·『원형석서』(元亨釋書)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858년경에 형성되었다고 믿고 있지만 『두타친왕입당략기』(頭陀親王入唐略記) 등을 참고하여 함통 4년(863)으로 비정하는 학자도 있다. 어쨌든 보타산 관음신앙의 개기전설의 기원을 에가쿠로 보는 견해에는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고려도경』의 내용 가운데 ‘신라고인’(新羅賈人)을 에가쿠로 바꾸어 보면 바로 『불조통기』의 내용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
에가쿠는 당시 삼국간을 종횡무진 왕래하던 신라인들의 배를 타고 입당하여 그것도 신라방을 거쳐 오대산으로 갔다. 명주에서 가까운 태주(台州)를 포함하여 신라로 가는 항선변에는 보타산의 ‘신라초’와 같은 ‘신라’의 이름을 딴 지명이 허다하다. 이는 곧 이 지역에서 신라인의 활동이 빈번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은 항해선원에 있어서는 해난사고를 막아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부를 가져다주는 보살로 신봉되어 무역상인들을 중심으로 크게 신봉되어 왔다. 신라 무역상인이 배를 타고 가다 좌초한 그 암초는 지금도 ‘신라초’로 부르고 있다.
‘신라고인’이 처음 관음보살을 봉안한 곳이 그들이 좌초한 해암인 ‘신라초’이다. 전후 사정이 이러하니 보타산 관세음보살 신앙은 ‘신라고인’이 ‘신라초’에 모신 오대산에서 장래한 그 관음보살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선문구산(禪門九山)과 장보고선단
송나라 도원(道原)이 저술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는 과거 7불에서 법안문익(法眼門益, 885~958)에 이르는 선승 1,700여의 전등법계를 상세히 기술하고 외국 승려 43명도 함께 등재하고 있다. 그 가운데 42명이 신라승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특히 『전등록』에 기재된 초기 승려들의 사승은 사실과 다른 점이 많지만 신라승의 경우는 대부분 당말·오대의 일이라 믿을 만 하다. 이 가운데 35~36명이 강남 각지에서 선을 익혔다. 그러므로 신라 구산선문의 개산조는 단 두 분 즉, 경조(京兆) 장경사 회운법계의 현욱(玄昱, 787~868, 봉림산)과 포주(蒲州) 마곡사 보철법계의 무염(無染, 800~888, 성주산)을 제외하고는 모두 장강 유역에서 구법한 승려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에다 회양산 일산만이 사조(四祖) 도신(道信)의 법계이고 나머지는 모두 조계법계이다. 그리고 또 조계법계 팔산 가운데 수미(須?) 일산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강서마조(江西馬祖)의 법계를 잇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구산선문의 조사들은 대개 820년대 초에 입당하여 늦어도 840년대 중반까지는 모두 귀국하고 있다. 그리고 거의 모두 전라도의 항포를 통하여 돌아왔다. 영산강의 나주 회진포를 비롯하여 화순·장흥·곡성·강진·남원 등지이다. 이와 같이 선문구산의 개산조사들이 장보고의 전성기에 그것도 그가 자리 잡고 있는 전라도 일원에서 초창기 절터를 잡고 있다. 필시 우연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은 장보고 선단을 이용하여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의 신앙심과 희사 덕분으로 선승들은 홍법활동에 큰 도움을 받았을 것만 같다. 장보고는 우리나라 선종 발달과 깊은 인연을 맺은 인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임해(臨海)의 신라방과 신라산
『가정적성지』(嘉定赤城志 권2) 산수문(山水門) 임해조에 ‘현의 서쪽 30리에 신라산이 있었다’는 사실과 ‘현의 동남쪽 30리에 신라서(新羅嶼 )가 있어 옛날 신라선원들이 정박했던 곳’이라 하고 있다. 외국 무역에 종사하던 상인들은 멀리서 이 신라산을 길잡이로 삼아 신라서 쪽으로 배를 착안시켰으리라 믿어진다. 신라산의 위치는 지금의 임해시(臨海市) 성밖 뒷산으로 보고 30리는 3리의 오기라하고 있다. 당시 신라 상인들의 취락지는 임해현 성내의 통원방(通遠坊)이며 이 산과는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 지금 이 산에 옛 무덤이 많아 객사한 신라 사람들의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국청사(國淸寺)의 신라원과 오공(悟空)
『천태전지』(天台全誌, 권6 사원)에 보면 천태종의 본산 국청사(國淸寺) 앞에 신라승 오공(悟空)이 세운 ‘신라원’(新羅園)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 『가정적성지』(권14, 사원 황암현)에는 밭 84무(畝), 땅(地) 6무, 산 18무를 소유한 제법 큰 사찰 오공원(悟空院)이 있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필경 이 오공스님이 국청사에서 구법한 뒤 황암의 신라방에 이르는 길목에 ‘오공원’을 세워 상주한 바로 그 스님이라 믿어본다. 『가정적성지』(권28 선원)에 의하면 오공원은 황암현 동산진(東山鎭, 동남 300리 해중)에 있는 선원이다. 후진 천복 6년(941)에 건립되어 송 영종 치평 3년(1066)에 사액된 사찰이다.
이 동진산은 당 무후(武后) 영창 원년(689) 이후 해상교통로의 중요한 길목으로 부각되었다. 태주에서 명주를 거쳐 신라·고려로 가는 항해선상의 요충이었던 것이다. 『가정적성지』(권20)에는 ‘현의 동쪽 240리에 위치한다.’고 되어 있어 앞의 내용과 거리상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산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큰 돌이 솟아 있어 고려로 가는 배는 반드시 이것을 보고 길잡이로 삼았다’고 하고 있다.
오공원과 신라방 그리고 신라·고려에 이르는 항선을 고려한다면 동진산 오공원과 국청사 신라원을 세운 스님은 같은 스님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천태현청(天台縣廳)에서 동쪽으로 20여 km 떨어진 해안에는 신용촌(新龍村)이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김(金)씨들의 집성촌이다. 그곳 향토사가 허상추(許尙樞)씨의 말에 의하면 월래 이 신용촌은 민국(民國)초 인근 승용촌(昇龍村)과 병합되기 전에는 ‘신라촌’(新蘿村)이라 불렀다고 한다. 국청사의 ‘신라원’과 김씨가 모여 사는 ‘신라촌’이 어쩌면 서로 연관 있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평전사의 도육(道育)과 천태종 16대 조사 의통(義通)
『천태전지』(권7 석)에는 당 경복 원년(892) 천태산 평전사(平田寺)에 留席한 신라승 도육(道育)에 관한 흥미 있는 기사도 남기고 있다. 『불조통기』에서 신라승으로 중국에 유학하여 천태교의를 학습한 고승들을 찾아보면 7명이나 된다. 그 가운데 놀라운 일은 후진(後晋) 천복년간(936~941)에 국청사에 와서 높은 학덕을 닦아 천태종 16대의 조사가 된 고려 승려 보운존자(?雲尊者, 義通)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국의 승려로 중국의 천태법통을 계승하였으니 그의 학문의 심오함을 족히 짐작할 수 있겠다.
조당집(祖堂集)과 신라선승
선종 조사들의 전기인 『조당집』(祖堂集 20권)의 판본(386매)이 경남 합천 해인사 장경각에서 장외보판 15종의 판본과 함께 발견되었다. 이곳에 심장된 채 근년까지도 광전의 기회를 얻지 못한 이유는 그것이 정장이나 속장 또는 잡판도 아닌 보판의 하나로 처리되어 온 까닭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조당집』은 서기 1231년 구 고려대장경의 판본이 몽골군의 병화로 소실되자 고려 고종이 1245년에 ‘분사대장도감’을 두고 다시 새겨 만든 것에 연유한다. 원래 『조당집』의 편집은 952년 중국 복건성 천주(泉州)에서 이루어 졌다. 이 귀중한 문헌은 당시 중국의 정치적 분쟁이 화근이 되어서인지 편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 땅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증거로 이보다 52년 뒤에 진표된(宋 景德원년, 1004) 도원의 『경덕전등록』에도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실로 『조당집』은 보림전(寶林傳)의 완본이 전해지지 않는 오늘날(전 10권 중 6권이 남아 있다.) 선종사 가운데 최고의 귀중본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조당집』은 연대론적으로 보아 지거(智炬)의 『보림전』(801), 현위(玄偉)의 『성주집』(聖胄集, 898~900), 유경(惟勁)의 『속보림전』(907~910) 등의 계통본과 『경덕전등록』과의 사이에 위치한다.
『조당집』편자 두 사람은 천주 초경사내에 거주한 선승 ‘정’(靜)과 ‘균’(筠)이다. 천주는 완심지(王審知)의 칭왕(907) 이래 연조(延釣)의 칭제(933)로 세운 민(?, 907~945)의 지배를 받는다. 왕씨 일족은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지만 불교에 귀의하고 선승과의 교유도 깊었다. 주지사 왕연빈(王延彬)은 일찍이 906년에 초경원(招慶院)을 세운다. 945년 천주는 이웃나라 남당(南唐, 937~975)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니 『조당집』의 편찬은 남당 치하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952년 이 등사(燈史)가 편찬될 무렵의 초경사 주지는 문징이며 이곳에 상주하기 이전 아마도 당시 장강 하류의 절강·강서를 중심으로 하남등지를 편력하면서 『조당집』의 자료를 수집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천주를 둘러싼 복잡한 정변이 『조당집』을 중국에서 자취를 감추게 한 하나의 원인이 아니었던가 추측해 본다. 그리고 더 큰 원인은 간행된 지 3년, 후주(後周, 951~960)의 불교 대탄압으로 멸법의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때 중국 천주에 유학하고 있던 신라승에 의하여 한국으로 장래된 것이 아닌가 싶다. 『조당집』 가운데는 몇 신라승의 전기가 비교적 상세히 등재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편자는 신라 출신 유학승일 가능성이 높다.
신라하대 불교의 뿌리를 깊이 생각해 보면 무엇보다도 강남에 유학하여 선을 익혔던 많은 승려들의 역할에 생각이 미친다. 선문구산의 근원지이며 『조당집』의 편찬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는 곳도 바로 이 강남지역이다. 그리고 이들의 귀국과 신라에서의 수행생활에는 장보고와 그 휘하에 있었던 상인들의 도움도 컸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것은 장보고 생존시는 물론 그가 죽은 뒤에도 이 상인들은 여전히 중국의 연해교역과 국제무역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廣州)와 신라상인
『전당문』(全唐文) 권556 한유(韓愈)의 송정상서 서(送鄭尙書 序)에 ‘해외의 여러 나라-탐부라(耽浮羅 탐라) 류큐(流求) 임업(林邑) 부남(扶南) 진랍(眞臘) 등 조공 온 오랑캐 상인들의 큰 배가 바다를 가고 있다…’라고 있다. 당 목종 장경 3년(823)의 일이다. 이 때 탐라상인들이 광주에도 발길을 미쳐 많은 동남아시아 무역상인들과 교역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같은 책 권75 질유덕음(疾愈德音) 태화(太和) 8년(834) 칙문에도 수많은 ‘남해번박’과 번객이 영남의 복건과 양주에 집거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당대화상동정전』(唐大和上東征傳)에 보면 광주(廣州)항의 풍경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강중(江中)의 파라문(婆羅門) 파사(波斯) 곤륜(崑崙) 등의 배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없이 많았고 향약진보(香藥珍寶)를 山積(산적)하여 배의 깊이는 6~7장이나 되었다. 사자국(師子國) 대석국(大石國) 등 왕래(往來) 거주하는 자는 매우 많다.
아랍의 역사가 아브 자이드(Abu Zayd, 9~10세기)와 알 마소디(Al-Masoudi, 10세기)는 당(唐)말 황소(黃巢)의 난(875~884)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전자는 황소의 농민군은 복주(福州)를 거쳐 광주(廣州)로 진출하여 이를 함락하고 이슬람교도 유태교도 기독교도 배화교도 등 이곳에 살면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실로 12만명이나 죽였다고 하였으며 후자는 성시를 공략하고 무수한 주민을 학살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칼을 무서워하여 물에 빠져 죽은 이슬람교도 기독교도 유태교도 배화교도의 수는 20만 명을 헤아린다고 하였다. 수에 과장된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광주에 거주하던 대식인(大食人) 파사인(波斯人)들의 수를 짐작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같이 거류민만도 십수만을 헤아리게 되니 당 정부는 일찍부터 이들의 거주구에 ‘번방’(蕃坊)을 설치하고 그들 중에서 ‘도번장’(都蕃長)을 뽑아 자치케 하였다. 뿐만 아니라 현종(玄宗) 개원2년(714)에는 ‘시박사’(市舶使)를 설치하여 외국무역을 관리하게 하였다.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 승화(承和)12년(845) 12월 5일조에 보면 신라인이 강주(康州, 廣州)에 표류한 일본인 50여명을 데리고 왔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짤막한 글 내용으로서는 여기에 나오는 강주(康州)가 지금의 광주(廣州)인지 또는 한국의 진주(晉州, 康州)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앞에서 인용한 탐라인(신라인)의 진출로 보아 광주(廣州)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신라는 이 시기에 오면 오(吳), 오월(吳越), 민 등과도 활발한 무역활동을 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9세기 중엽과 10세기 초의 이슬람 쪽의 몇몇 문헌, 가령 슈라이만(sulaiman)의 『중국과 인도소식』(851), 알·마소디(Al-masoudi, ?~965)의 『황금초원과 보석광』(10세기 중엽) 등에는 아랍 무슬림 상인들의 신라 내왕이나 신라 견문에 관한 기록과 함께 신라로부터 수입한 상품에 관한 기사도 실려 있다.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dhibah, 820~912)는 그의 저서 『제도로 및 제왕국지』에서 신라의 위치와 황금의 산출, 그리고 무슬림들의 신라내왕에 관하여 서술하고 있다.
아라비아 사람들이 신라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퍽 중요한 일이다. 신라무역상들은 번상(蕃商)과의 접촉에서 이들에 의하여 남중국으로 전래되던 여러 가지 진귀한 상품들을 일본, 신라 등에 운반했던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잡지에 보이는 수많은 남방 상품 이름이나, 일본귀족들의 ‘당국화물’(唐國貨物)에 대한 구매경쟁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