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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중엔 이탈리아 이민자 후손으로, 뉴욕에서 손꼽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밥보’의 운영자이자 ‘몰토 마리오’라는 요리 프로를 진행하는 유명 인사 마리오 바탈리가 끼어 있었다. 직접 요리한 음식을 대접하겠다는 의욕에 찬 주인을 단호히 밀어내고 마리오는 돼지 비계로 만든 ‘라르도’로 좌중을 맛의 황홀경에 빠뜨린다. 한 중년 기자의 안정된 생활이 밑바닥부터 금이 가는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이 남자, 홀린 듯 직장을 내팽개치고 어린 고참들의 온갖 구박을 견뎌가며 밥보에서 프로 요리사의 세계에 본격 입문한다. 계시 같은 회심의 사건 이후론 시간의 경과를 명시하지 않은 채 서술되는 이 책은 주방의 애물단지가 당당한 요리사로 거듭나는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논픽션이다.
감탄할 만큼 자세하게 묘사된 정경이나 곳곳에 스민 위트만으로도 읽는 맛이 훌륭하건만 저자의 필력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요리의 마에스트로에 한걸음씩 다가서는 이야기의 큰 줄기에 저자는 두 가지의 매혹적 풍미(風味)를 버무린다.
하나는 반쯤은 미치광이요, 반쯤은 고매한 철학자인 요리 고수들의 독특한 캐릭터와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우정과 반목에 관한 내용이다. 사업이든 음주든 폭식이든 도전을 두려워 않는 통 큰 인간이다가도, 아직 쓸 만한 재료가 쓰레기통에서 뒹굴라치면 정색하며 주방으로 되던지는 저자의 요리 스승 마리오는 그나마 양반이다.
주방 초년병 시절 마리오와 함께 일했던 마르코는 글을 못 읽지만 한번 본 것은 사진 찍듯 기억하는 비상한 능력의 소유자인 한편, 불도 안 끈 담배꽁초를 딸의 유모차로 던지거나 맘에 들지 않는 사냥꾼들에게 서슴없이 엽총을 겨누는 ‘미치광이 천재 주방장’이다. 물론 이 정도 기행으로는 저자의 푸주 스승 다리오의 엽기 행각에 턱없이 못 미치지만 말이다.
이 양반이 이탈리아의 작은 동네 판자노에서 최고의 푸주한 자리를 놓고 조반니와 벌이는 일촉즉발의 신경전을 보고 있노라면 손에서 땀이 제법 배어나올 정도다.
이야기의 맛을 돋우는 또 한 겹의 화제는 알록달록 고명처럼 곳곳에 얹혀 있는 이탈리아 요리 레시피(recipe)와 그 진미다. 밥보에서 주방 밑바닥인 재료준비팀을 벗어나 라인쿡(실제 요리를 담당하는 파트)에 올라선 저자는, 자기 스승이 그랬듯, 제대로 된 파스타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일념에 이탈리아행을 감행-아내의 버젓한 직장마저 포기시킨 채-한다.
마리오를 상업적 계산과 타협해 본토의 맛을 훼손시킨 무뢰한으로 여기는 이탈리아의 요리 스승들은 소박함이 맛의 진리에 이르는 길임을 끊임없이 일깨우며 다채로운 파스타의 향연을 펼쳐 보인다.
배꼽을 닮은, 세상에서 제일 작은 파스타 ‘토르텔리니’, 나비넥타이 모양의 ‘스트리케티’, 공기처럼 얇게 민 밀가루 반죽에 속을 채우는 이탈리아식 만두 ‘라비올리’…. 알프스 넘어 프랑스 왕세자에게 시집 간 이탈리아 귀족 카테리나 데 메디치가 섭정왕후로 권력을 쥐자마자 8,000마리 말을 동원한 대부대를 이끌고 2년간 미식 여행을 떠난 것은 오직 그녀의 조국 사람들만이 이해해줄 일이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저자에게 마리오는 레스토랑을 직접 운영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그렇게도 칭찬에 인색하던 스승에게 인정받고야만 감격이란! 하지만 저자는 들뜬 마음이 읊조리는 진심에 귀기울인다. “나는 (처음부터) 레스토랑을 할 생각이 없었다”.
안정되고 화려한 뉴욕 생활을 팽개치고 찾아간, 요리마저도 쇠락해가는 이탈리아의 시골 마을에서 저자는 “그저 좀더 인간적이 되고 싶을 뿐”이란 소망이 자신을 이끌어 왔음을 깨달았다.
저자에게 요리는 정복이 아닌 정화(淨化)의 여정이었고, 이를 통해 그는 자본과 결탁한 탐욕을 뛰어넘어 진정한 자유인으로 다가간 듯하다. 원(願)대로 그가 ‘요리의 여왕’ 카테리나의 족적을 밟아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로 갈 날은 있을까. 2007년 2월 현재 그는 저널리스트로 복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