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 목사(방관덕) 가족 교역자 세번쩨 줄 좌측으로부터 6번째 필자
송학대 교회는 노량진에 있는 교회로 첫 번째 담임목회를 하던 한빛 교회를 사임하고 졸업 후 첫 번째 목회지였다(77년 12월 부임).
이 교회에서는 심방과 청년 대학부를 전담했다.
그리고 교회학교(유.초등부,중고등부)의
교육 계획, 운영, 행사등을 관리하는 교육위원회 부위원장 직(위원장은 당회장)을 맡았다.
1.신학교 졸업
송학대 교회 부임 한 후
2개월이 되었을 때 신학교 졸업식을 하게 되었다.
당회장을 비롯하여 많은 교인들이 식장에 와서 축하해 주었다.
신학교 졸업
세째 줄 좌측 첫번째 필자
송학대 교회 교인들의 축하(필자의 좌측 어머니)
송학대 교회 청년들
송학대 교회 교역자들 가족 사진
청년 대학부
장년 성경 반
2.교인들의 사랑
교인들 중에는 군 출신들이 많았다.
당시 이 교회에 교인이었던 육군 모 사단의 사단장이었던 김창성(해창 ?) 집사님이 북한 군 한 명이 철조망을 넘어왔다 북으로 돌아간 사건이 있었는데 이 일로 예편되었다.
육사 7기생으로 헌병감이었던 김익순 장로(부인 : 궁명애 권사)와 당시 병무청장이었던 조경학 장로가 당회원으로 시무했다..
이 두 분의 부인들은 필자의 가정에 물심양면으로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잊지 못하고 있다.
이외에 육사 출신이 또 한 분 계셨다.
후에 미국의 산호세 영락교회 시무 시 김장로의 아들(당시 대학생)이 출석했는데 이민와서 사업에 실패하여 어려웠다. 그래서 조금 도움을 주었던 일이 있었다.
김익순장로(궁명애 권사) 가족 사진
조경학 장로 가족
3.아내의 입원
주일 예배 시작 전에 필자는 회중들 앞에서 찬송을 인도했다.
한 번은 주일 예배 시간에 찬송 인도를 하고 있는데 어느 교인이 출입구에서 필자를 나오라고 손짓을 했다. 찬송을 다 부르고 나갔더니 빨리 병원에 가보라는
것이었다.
사모님이 갑자기 병원에 입원했다는 겄이다.
병원 앞에 산부인과(당시 본 교회 이은태 장로님이 운영하는 병원) 병원으로 달려갔다.
장로님이 조금만 늦었다면 위험할 뻔했다고 했다.
복막염이어서 맹장이 터졌다는 것이다.
후에 아내가 병원비 걱정을 하는 것을 아신 이장로님이 병원비 걱정은
하지말고 건강관리나 잘하라고 하셨다.
4.신유 은사
한 번은 66 세 된 여 집사님 한 분이 몹시 아프다고 해서 여 전도사님과 심방을 갔다.
가슴에서부터 목덜미와 머리가지 빨갛게 열꽃이 피었다.
너무 아파서 견디기 한들다고 했다.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은 후 어깨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를 했다.
그리고 돌아왔다.
얼마 후 “김전도사님이 신유은사를 받으셨다”하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왜 이런 소문이 났는지 알아보니 심방 가서 기도해준 여 집사님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도사님의 기도를 받고
깨끗이 낳았다고 간증을 하고 다닌다고 했다.
그 후 어느 교인이 사택으로 찾아와서 자기가 몹시 아프니 기도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봉투 하나를 내 놓았다.
그 당시 기도원이라든지 부흥회 때 강사 목사님들의 안수 기도를 받으려면 봉투를 준비하는 일들이 많았다. 필자는 이 봉투는 주일에 예배 때 헌금하라고
돌려주었다.
그 당시 좀 유명하다는 부흥 강사들은 신문에 “능력의 종 OOO목사 무슨 병도 고치고 무슨 병도 고친다”하고 광고를 하던 시대였다.
그 때 필자는 “아하 ! 목사들이 이래서 시험에 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5.천사 마귀
교회에 천사 마귀라는 한 여자가 있었다.
이 여자는 예배 시간에 장로들만 앉는 자리가 있었는데 항상 뒷 줄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 문제는 설교 도중 –아멘-, -아멘- 하고 크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새벽 기도회 시간에는 제일 앞 자리에 앉아 설교를 듣다가 –아멘- -아멘-하고 외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개인 기도 시간이
되면 방언을 한다고 시끄럽게 했다.
교인들이 수군거렸다. 목사님이 하루는 필자에게 “김전도사 ! 신유 은사 받았다면서.
저 천사 마귀 좀 어떻게 할 수 없겠나
?”하고 물었다.
어느 날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개인 기도 시간이 되어 필자는 그 녀 옆에 앉아서
나도 그녀처럼 방언 기도를 했다.(신학교 재학 시절 일주일 금식 기도할 때 신유은사와 방언 은사를 체험했다. 신유 은사와 방언
은사는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해를 할 수 없다).
기도회가 마친 후 그녀를 뒤따라갔다.
교회 뒷문으로 집으로 갈 때 필자는 따라 들어가 방안에 앉자마자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방언 기도를 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 시간 당신에 말씀하시니 순종하라”고 하면서 주일 예배 시간엔 2층 맨 앞줄에 앉아 예배드리고 새벽 기도회 시간에는 항상 내 옆에 앉으라고 했다.
그후부터 그녀는 필자가 시키는 대로 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남편은 이발사다.
그녀는 동작동 국립 묘지에서 군인에게 강간 당한 후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고 한다.
6.커피 이야기
12월 추운 겨울에 대심방을 하게 되었다. 필자가 담당한 구역은 산동네였다.
가는 집마다 “전도사님 추운데 따끈하게 커피 한 잔 하세요”고 가는 집마다 커피를 내 놓았다. 11잔을 마시고 그날 밤 한 잠도 못 자고 꼬박 샜다.
이튿날 교역자 회의에서 어제 심방 결과를 보고하면서 필자가 지난 밤 한 잠도 못 잤다고 했더니 당회장 목사님이
왜 그랬느냐고 물었다.
“가는 집마다 커피를 주어 주는 대로 다 마셨기 때문이다”고 했더니
목사님이 손뼉을 치면서 기뻐하셨다. 필자가 의아해 하니까 산동네에서 커피 대접하는 것을 보니 생활이 많이 좋아졌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란다.
그 당시 커피가 아주 귀한 때였기 때문이다.
여전도회 군 부대 위문
차 례
(회고록) (16) 목사 안수와 어머님의 별세(광성 교회).
(회고록)(17)꿈을 이루다(영락교회)
첫댓글 방관덕 목사의 둘째 아들,방인성은 유명한
빨갱이라고 알고있습니다! 첫째는 효성이!
나의 모친께서 전도사로 오래 시무하셨지요!
문명갑 전도사.
모친께서는 몇 년도에 시무하셨는지요?
정확한 햇수는 모르겠고! 1980년 앞뒤가
될 것입니다! 오래 시무하셨어요!
우리가 중학생일 때에,장로회신학교가
대광중고 교실을 빌려쓴 적이 있었어요!
그 때에 어머니와 함께 등교하곤 했었지요!
성함을 잊어버렸는데, 우리 국어선생님이셨
던 분과 장신 동기동창이셨지요!
김~~목사님셨는데! 키 작고 목소리 크신!
그리고, 여기, LA영락교회 원로목사님,
박희민 목사님과 동기동창이었어요!
방관덕 목사님은 제주도 피난민교회에서
만났지요! 인연이 꽤 오래됩니다.
본인은 1977.12 월에 부임하여 1979. 2 월 사임하였다오.
아마 모친께서는 제가 사임한 후에 권필향 전도사 후임으로 오신 것 같군요.
내가 상도동에 살때에 대충 10번정도는 방목사님 설교를 들었었지...참으로 맛진 설교였었다고 지금 나는 생각을한다.
본인은 1978년 12월에 부임하여 1980년 초에 사임했는데
혹시 그 때였나 ?
상도동 이야기가 나오니까 옛 생각이 새롭구려.
왜냐하면 상도동을 걸어서 심방을 많이 다녔거든.
정확한 햇수는 모르겠고! 1980년 앞뒤가
될 것입니다! 오래 시무하셨어요!
우리가 중학생일 때에,장로회신학교가
대광중고 교실을 빌려쓴 적이 있었어요!
그 때에 어머니와 함께 등교하곤 했었지요!
성함을 잊어버렸는데, 우리 국어선생님이셨
던 분과 장신 동기동창이셨지요!
김~~목사님셨는데! 키 작고 목소리 크신!
그리고, 여기, LA영락교회 원로목사님,
박희민 목사님과 동기동창이었어요!
방관덕 목사님은 제주도 피난민교회에서
만났지요! 인연이 꽤 오래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