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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문학》2020년 여름호 계간평(2020.4.18.)
리듬의 힘, 또는 문학의 따돌림을 극복하는 시원(始原)에로 하이 킥
노 창 수
(시인·문학평론가)
그는 아이들 무리를 바라보았다. 가운데 소년은 팔을 뻗고 비행기처럼 빙글빙글 돌았고 나머지 아이들은 노래했다.
“솔로몬의 외아들 제이, 이리 와 부바 얄래, 이리 와 부바 탬비
빙글빙글 돌며 태양을 만지자, 이리 와 부바 얄래, 이리 와 부바 탬비.”
그는 어렸을 때도 노래를 부르며 놀이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왜 날 수 없을까를 생각하며 창턱에 앉았다 벌떡 일어나 학교로 가곤 했다. 백인과 흑인 아이들은 온갖 방법으로 그를 조롱하고 점심도 못 먹게 하거나 크레용을 쓰지 못하게도 했다.
-토니 모리슨의 『솔로몬의 노래』 중에서 재구성
1.
〈1.1.〉 근래 우리가 깨달았던 ‘양심문학’의 수난사는 실로 험난하다. 일제강점기에 각반화(脚絆靴)가 짓밟은 자주독립의 허리와 군화발이 깔아뭉갠 정신대의 목줄은 화마가 휩쓴 산맥처럼 처참했다. 일제는 ‘억압·멸시·구속·고문’ 등의 총검으로 우리의 살가죽에 ‘황국신민’과 ‘욱일기(旭日旗)’의 수를 새겼다. 헌데, 그걸 칭송하거나 그들보다 앞장서 자행한 문인과 권력인사가 놀랍게도 4,776명이다. 그게 『친일인명사전』(2009)에 등재되어 있다. 생존해 있는 전·현직 국회의원과 유명인사가 700여 명이고 문인은 80여 명이다. 뿐인가. 외세가 아닌 우리의 독재 권력에 의해 인권을 침탈한 70·80년대에 문학은 더욱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문인에 대한 직·간접적인 탄압과 아울러 정의(正義)와 비판 매체를 폐간시키거나 편집 방향을 바꾸게 하는 등 기형과 변형을강제로 집행했다. 반면 때를 맞춘 어용문인과 검불논객들은 득세를 했다. 그때의 인사나 문인 후예들이 지금도 보수진영의 마당에서 굿판을 벌이기도 한다. 광주에도 그런 인사가 상당수 활동한다.
〈1.2.〉 90년대 이후, ‘소통·복지·자유’를 위한 문예부흥 같은 확대의 시대를 지나, 지금은 ‘방임·소외·개성’으로 대변되는 2000년대를 지나는 중이다. 특히 오늘의 시는 사조적(思潮的) 경향을 논의할 수 없을 정도로 다기다단(多技多端)해졌다.
〈1.3.〉 이제, 시는 비대(肥大)하지만 비참(悲慘)해지고 비루(鄙陋)한 당신 삶을 비결(秘訣)처럼 치유하는 비방(秘方)이 되지 못한다. 어느새 문단은 중앙의 권위에 줄 서 있다. 예컨대 ‘좋은 시’라는 선정은 ‘끼리끼리의 반열’을 타고 명부에 오르고, 정의를 위장한 문학권력들이 잘난 체 떠든다. 일부 수도권 비평가들은 광주적 경험이 전혀 없으면서도 쥐뿔 비평판에선 광주항쟁을 운위함으로써 진보적 비평그룹에 진입했다고 자임한다. 그들의 글에서 ‘광주’를 옛 혁명의 ‘낭만’으로 치부하는 그 용서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낀다. 이른바 메이져 지(誌)에 실린 이 같은 비평 글은 내용이 놀랍기도 하지만 긴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비문들에게서 받는 충격은 더 심하다. 광주를 방문한 인상을 무슨 인증 샷처럼 쓰거나 단편적 항쟁 정보를 가지고 아는 것처럼 위선을 떠는 양태 또한 가관이다. 그렇듯 핵심이 모호해진 글은 평균 5종당 2종이다.
〈1.4.〉 정치란 라디오는 소통채널이 고장이 나 잡음으로 지지직거린다. ‘양심문학’이란 모(벼싹)는 꼬들꼬들 말라죽는 중이다. 함에도 국민을 대변한다는 의원들은 잘 먹게 하고 혜택을 누리게 한다는 복지 공약을 내놓기에 바쁘다. 하지만 그들은 문학을 지원한다는 공약(空約)일망정 이렇다 할 공약(公約) 한 번 제대로 세운 적이 없다. 문학은 위에 든 「솔로몬의 노래」의 ‘밀크맨’처럼 매양 따돌림을 당해 왔으니까. 그럼에도 문학행사장에 어떻게 알고 오는지 뻔질나게 찾아온다. 그리고는 〈문인을 ‘존경한다’고 반복한다→잠시 머문다→‘바쁘니’ 양해하란다→모이 다 먹은 ‘철새’처럼 자리 뜬다〉. 그 수순이 이젠 익숙하게도 프로그램화 되었다. 문인을 기만하는 그들을 상석(上席)에 앉히고 거들먹거리는 축사를 들어야 하는지 고민할 때가 있다. 권력이 문학을 왕따 시키고 기만의 도구로 삼는 예는 이외에도 수 없이 많다. 선출직이라 해서 문학상 상금을 떼먹는 일, 쥐꼬리 지원금에 정산처리를 까다롭게 하는 이른바 ‘아니면말고식’ 차별도 개선할 일이다. 문단 내 권력과 권위에 저항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중앙의 문창과 중심의 문학권력(위)자는 원고청탁, 심사의뢰에 지역문단을 은근 제한한다. 정치의 퍼소나로 시의 얼굴은 가려지고, 고액권 지폐처럼 빳빳한 권위의 목은 불끈댄다. 선거 전에는 문학 판에 읍소하다 선거 후면 일으켜지는 용수철 의원이 대다수다. 사실 그동안 우리 문단이 비대해지기는 했다. 그래 정치인들이 입맛과 표맛을 다시기에 좋을 마당이 된 거니까 우리도 반성은 해야 겠다.
〈1.5.〉 이번엔 아이러니로 가는 문학사회를 들여다본다. 일상의 식상한 정치에, 그리고 먹고사는 노동에 시는 맥없이 스러지고 만다. 신인장사 덕에 시인들은 넘쳐 1만 2천여 명이나 되지만 진정한 시의 독자는 200명도 되지 못한다. 하니, ‘빛 좋은 개살구’ 격이다. 아이러니는 또 있다. 자기가 쓴 시를 자신이 읽지 않음이다. 하면, 한국 시단의 작금엔 어떤 류의 시가 많은가. 여기엔 주체가 불분명한 ‘횡설수설시’와 뽕짝조의 ‘사랑가(歌)’와 아웃도어 입힌 ‘등산가’와 자녀가 보내준 ‘여행담가’ 등이 근대의 〈개화시가〉처럼 만발해 있다. 내친 김에 하나 더 들겠다. 그건 문인의 부끄러운 자화상, 끔찍한 표절이다. 문단에 있어오던 표절의 역사를 쓰려면 양복저고리를 벗어재끼는 용기가 좀 있어야 한다. 해서, 아직은 이르다고 여긴다.
〈1.6.〉 ‘탈고’라는 말로 시의 필을 놓을 수는 없다. 시인이면 누구나 겪듯이 시는 거듭한 ‘퇴고’로도 다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남의 시든 자기의 시든, 읽어서 좋은 점을 새기고 서툰 부분을 바로 잡을 일이다. 하지만 귀찮다 여기는지 진정한 퇴고의 작품은 적어 보인다. 시를 믹스커피나 컵라면 같은 일회용으로 여기는 건 아닌지. 시의 착상과 기술(記述)이 ‘갓난아이’라면 퇴고하는 건 이 아이를 자라도록 보살피는 ‘육아(育兒)’일 법하다. 아기의 체위에 맞는 옷을 입히는 건 물론, 고른 음식을 먹이고, 질병으로부터 지켜주기 위한 예방접종도 때맞춰 하는 그 절차 말이다. 헌데, 한 번 낳은 ‘아기 시’를 다시 보지 않겠다고 구석에 미루어둔다. 하여 기아(棄兒)는 나의 시적 기아(飢餓)를 부르기도 한다. 내 시가 독자의 관심 밖에 놓이지 않도록 관리하기 위해선, 지금 쓴 시가 낡은 방식은 아닌지, 시의 문법과는 다르지 않는지, 나아가 독자의 호기심을 살 수 있는지의 정도는 살필 여유가 필요하다. 시를 진정으로 검토할 의욕과 작심이 선다면 자기 시에 대한 양심은 최소한 작동시키고 있다고 본다. 생각나는 대로 쓰는, 아니 써 갈기는 시는 시가 아니다. 그렇다고 산문은 더욱 아니다. 평론가 엄경희가 지적한 바, ‘시인은 한 관념에 고정시키려 하는 모든 것에 물음표를 찍고 그것에 저항하는 자’이다. 시인은 넘치지만 시가 없는 문단, 시는 메가톤급으로 쏟아지지만 가려볼 시가 없는 시단, 문학을 지원한다는 정치인이 돌아가 금뱃지를 광내는 일에 함몰하는 것들은 오늘 우리가 만나는 각자의 자화상들이다. 이 같은 지적과 비판은 필자라고 예외는 아니겠다. 반성 차원에서 쓴 소리를 나 스스로를 비롯한 광주시단에 이리 던져도 본다. 속이 좀 후련해질까 해서다.
2.
〈2.1.〉 오늘날 시가 ‘정서의 등가물’이라고 학습했던 ‘시론’은 바뀌었다. 그를 전범(典範)으로 삼았던 시학노트도 잊은 지 오래 된 것 같다, 시에서 운율의 문법과 함축의 의미, 구조의 미학은 필수라고 여긴다. ‘서사·재미’를 구성해 보는 스토리텔링의 시학도 곁두리로 놓으면 입맛을 더 잡을 수 있겠다. 정서유동과 현실자각을 겸상에 차리는 건 시의 기술적 포인트다. 화자의 역할을 대리 구현하는 ‘세타이어(satire) 법’, 원격 또는 근접의 ‘자동기술법’, ‘화자역할 바꾸기’ 등이 요즘 시의 클리세(cliche)를 극복하는 대세라 한다. 그 맥락을 뚫어가는 데에 시의 반동형성적 송곳발이 와 있음이다. 필자는 시의 초심자나 시의 위의(威儀)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를 위해 작품의 이랑에 콩을 심듯, ‘간이 시작법’ 같은 종자를 넣어 둔다. 읽는 도중 참고가 된다면 좋겠지만, 이마저 지나쳐버린다 해도 그를 지적할 권한이 내겐 없다. 뭐, 고담준론인 척하는 말은 그만하고 이제 시를 읽자.
〈2.2.〉 강대선 「아버지의 폐타이어」 전문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눈을 맞고 계셨다
많이도 달려왔구나
시꺼멓게 탄 자신의 속내를 보이며 담배 한 모금을 빠신다
서울로 부산으로 광주로 제주까지…
왕복으로 오가는 날도 있었지
폐 깊숙이 파고드는 열기와 한기를 피할 수는 없었지
대못에 찔려 한 순간 주저앉고 싶기도 했지
돌멩이를 가슴에 박고 가슴 한쪽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살기도 했어
겨우 겨우 폐를 때우고 다시 달렸지
닳아지고 닳아지던 날들이 오고 또 오고
그러는 사이
함께 달리던 친구들도 하나 둘 폐병으로 떠나갔지
정신을 차려보니 내 차례더구나
아버지는 담배 한 모금에 쿨럭이시며 몸을 구부리신다
나도 주저앉아
폐타이어 곁에서 눈물 한 대를 태웠다
이 시는 서사구조를 배면에 깔아 읽는 속도를 높인다. 서사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스토리텔링하는 그 과정이다. 말하자면 소설적 구성을 차용한 ‘이야기 시’라고 보겠다. 처음 “너덜너덜해진 모습”부터 “담배 한 모금을 빠신다”까지가 〈발단〉이다. 눈을 맞고 있는 아버지로부터 풍기는 모습에 화자는 폐타이어를 연상한다. 아버지의 망가져가는 폐를 거기 연몌한다. “서울로”부터 “피할 수는 없었지”까지는 〈전개〉 부분이다. “대못에 찔려”에서부터 “폐를 때우고 다시 달렸지”까지가 〈절정〉이고, 이후, “그러는 사이 함께 달리던 친구들도 하나 둘 폐병으로 떠나갔지”라고 남의 일로만 여겼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이제 “내 차례”라며 그 위협을 자식 앞에 담담히 서술한다. 그게 〈위기〉다. 그리고 “아버지는”부터 “눈물 한 대를 태웠다”까지는 〈결말〉에 해당한다. 중심구로 드러난 “담배 한 모금”, “대못에 찔”리는 순간, “돌멩이를 가슴에 박”는 일, “한쪽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등은 서사에 진정성과 박진감을 갖도록 장치된 〈복선〉이다. “돌멩이를 가슴에 박고 가슴 한쪽이 찢어지는 고통”을 참는 건 아버지의 중병 또는 죽음을 예고한 2차적 ‘복선’이겠다. 다른 장점을 놔두고라도 이 시는 결구가 돋보인다. 아버지가 “담배 한 모금에 쿨럭이시며 몸을 구부리신”데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응대하는 화자가 “눈물 한 대를 태웠다”는 것이 그러하다. ‘담배 한 대’와 ‘눈물 한 모금’의 연결은 쉽게 연상할 수 있겠지만, ‘담배 한 모금’과 ‘눈물 한 대’라고 대칭어로 연결하는 건 착상의 전환과 이미지의 교집합이겠다. 하여, 시가 데칼코마니나 바둑판과 같은 병치미를 이룬다. 오래 써본 이력이 아니고선 이런 정서의 논리와 이이러니적 대구를 한 자리에 놓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2.3.〉 금별뫼 「바람개비」 전문
바람을 만나야 살아나는 바람개비
바람은 누군가 우울할 때
한바탕 불어주지만
내게는 아직 기척이 없다
너는 바람에 쏠려
뒤집히는 놀이를 좋아하는 바람개비
나는 더 이상 뒤집히지 않으려고
숨차게 뒷걸음쳤는데도 도착한 곳은
너와 나의 원점이었다
그 빈자리는 빈자리가 아니고
마음이 빈자리였나 보다
저절로 가는 길은
다시 돌아가는 길이라는 걸
바람개비를 보고 알았다
바람개비란 오롯 바람을 만나야 살아나는 짝이다. 유년 시절의 놀이를 반추해 보는 어른이 돼서야 이를 알아차린다. 이 바람개비를 통하여 주위엔 남의 도움이 없이 살아가기 힘든 존재가 많다는 걸 터득한다. 바람개비가 도는 이치, 그러니까 “저절로 가는 길은 다시 돌아가는 길”임을 아는 건 오래 걸려 예까지 온 덕이다. 이즈음 ‘코로나19’ 같은 우울함을 한바탕에 날려버릴 바람이 일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화자는 “기척이 없다”고 전언한다. 사실 말하자면, 너라는 바람개비는 “뒤집히는 놀이를 좋아”한다. 하지만 “더 이상 뒤집히지 않으려”고 한다. 참스키(Noam Chomsky,1928~)가 말한 이른바 의미의 [가역적(可逆的) 의도]를 시는 너와 나의 도착점을 통해 확인해 보인다. 즉 그건 ‘안으로부터의 내용’을 ‘숙고’할 때의 비로소 도달하는 내 ‘허락’과 같은 의식이다. 그는 숨이 차도록 뒤로뒤로 달려간다. 너와 원점이 되기 위한 결심의 보행이리라. 역리의 그 가역은 순리의 역학보다 강한 법이다. 모름지기 질주의 힘으로 그(바람개비)를 살려야(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너와 나의 원점”에 이르게 하는 보법일 수 있다. 여기서 빈자리란 그냥 가시적으로 드러난 빈자리가 아니다. 빈자리를 채우려는 마음부터 이미 “빈자리”이던 걸 깨닫기 때문이다. 시는 바람개비를 통하여 ‘성장’으로 향하는 자아성찰을 다룬다. 그래 ‘성장시’다. 하지만 제목을 상징적, 풍자적으로 달리 선택했더라면 독자 호기심을 더 샀을 것이다.
〈2.4.〉 권준영 「호두를 깨다가」 전문
분내 나는 물건 부럼이나 깨라지.
아버지가 호두알을 굴려대면
어머니는 속을 끓였다.
지난가을 문경 친구가 보내 준
잘생긴 호두 한 쌍을
아버지처럼 손에 넣고 굴려대는데
정월 대보름 전날 밤
휘영청 밝은 달님이
부럼이나 깨라 하신다.
윤이 나는 호두알을
다듬잇돌 위에 올리다가
골통들 삭발하는 꼬라지를 보았다.
어머니 손때 묻은 방망이로
잘 생긴 호두 한 쌍
박살내고 말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갈등은 호두알로부터 시작한다. 가난한 아버지였지만 멋진 한량인 척 손안에 호두를 굴리시던 여유 있는 모습을 화자는 부러워했다. 하지만 “분내”를 풍길 정도로 오래된 호두알에 대하여 어머니는 늘 못마땅해 했다. ‘저놈의 호두 소리’ 하고 “속을 끓”여온 “물건”이다. 차라리 “부럼이나 깨라”라며 아버지 쪽으로 아니꼬운 눈길을 보내던 그것이다. 짐작컨대, 바쁜 농사철에 호두알이나 따그락거리며 선비 폼을 잡는 아버지에 대하여 갖는 미운털일 게다. 헌데, 이제 세대가 바뀌어, 화자는 친구가 보내준 “호두 한 쌍”을 “아버지처럼 손에 굴려”대는 나이가 된다. 대보름 전날 밤 “달님이 부럼이나 깨라” 하는데 실은 어머니의 옛말이 떠올라서 달님에 붙이는 말이다. 그는 어머니 말대로 그걸 다듬잇돌에 올리며 깰까 말까 망설이는데, 그때 마침 보수 “골통들 삭발하는 꼬라지”가 TV에 나온다. ‘에라잇’, 순간 화자에겐 아버지를 흰 눈으로 흘겨보던 어머니와 마주친다. 평생을 두고 쓰시던 방망이로 그 “꼬라지”를 박살낸다. 해서 “잘 생긴 호두 한 쌍”을 잃게 된다. 하지만, 꼬라지에 대한 스트레스는 좀 해소된 듯도 하다. 사리판단이 명확한 어머니의 명령이니 어쩔 것인가. 시는 기승전결로 풍자와 위트를 적소에 배치했다. 아버지를 상징하는 호두 알과 이에 부럼 깨기를 종용하는 어머니 사이에, 오늘의 늙은 아들은 잘생긴 ‘호두 알’(아버지)을 현실에 대한 비판 즉 ‘깨뜨림’(어머니)으로서 골통(보수꼴통)들의 삼류정치에 혼자 저항하기를 자청한다. 아버지의 ‘권위적 골통주의’와 어머니의 ‘현실적 진보주의’가 호두알을 깨는 맥락에 감춰져 있다면, 필이 너무 나아간 것인가도 모르겠다.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시는 잘 읽혀 이런 즐거움을 다 준다.
〈2.5.〉 이문평 「옷걸이」 전문
드러내지 않아야 값지고
아름다운 게 있다
벽, 그것을 절망이 아니라
든든한 반려자로 삼는다
화려하고 그럴듯한 맵시로
뽐내려 안달이지만
갈지자로 걸어온
내평개쳐진 옷가지들
언제든 찾아가도
늘 기껍게 반겨주지만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회초리처럼
뭇별들의 중심인 북극성처럼
흐트러지지 말라는 지엄한 눈빛
환청으로 듣는다
첫 연 “드러내지 않아야 값지고 아름다운” 것이란 구절을 겉으로만 읽어보면, 곧 ‘인품’을 지칭하는 걸로 알기 쉽다. 헌데, 시는 일반적인 상식을 깬다. 각 연은 옷걸이의 당위성을 말하지만 시의 본문엔 옷걸이란 단어를 제시하지 않는다. 해서 독자의 궁금증을 산다. 화자는 옷을 내려 입을 때마다 깔끔하지 못한 자신을 반성한다. 스스로 차림에 대해 “한 구석”의 후회가 “회초리처럼” 다가온다고 말한다. 그는 매무시와 중심을 잡아주는 옷걸이가 늘 “기껍게 반겨 주”는 것에 감사한다. 그리고 흐트러지지 말라는 “지엄한 눈빛”에도 점차 순응해 간다. 시에 〈기승전결〉의 짜임, 그리고 위트와 여유가 담겼다. 다만 결구가 교훈적으로 마무리된 게 약점이다. 벽에 걸린 옷걸이의 자세를 자신의 “든든한 반려자”로 진술한 점, 사물에 서정적 분위기를 감돌게 하는 그 우정의 알레고리 등을 통하여 화자는 사물에 대한 휴머니티를 보여준다.
일상의 물건을 대상으로 시를 쓸 때 흔히 ‘예찬류의 시’가 되기 쉽다. 그걸 예방하기 위해서는, 먼저 ‘낯설게 하기’로 시작하거나, 본문에 사물의 이름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겠다.
〈2.6.〉 이창민 「양지」 전문
이른 봄 한 구석에
따사로움이 두어 평 누워 있다
돗자리 깔고 가까이 가니
이불까지 덮어 준다
손자놈들이 곁에 오니
덤으로 우수리까지 준다
이놈이 뺑덕엄씨 안 닮고
오지랖이 태평양이네
한참 있으려니
이쪽저쪽 너스레를 떨다가
때가 되니 즈그 집으로 가는구나
아주 자연스럽게 자연이 되는구나
이 시는 [처음→가운데→끝]의 삼단으로 구성한다. 화자는 자신의 스토리를 여유있게 객관화한다. 그는 이른 봄 햇볕이 잘 드는 “한 구석에” 해바라기를 즐기려 평소 보아둔 “따사로움이 두어 평” 정도 된 양지에 자릴 잡는다. 거기 돗자리를 깔고 앉으니 슬슬 찾아든 졸음에 몸을 뉘게 된다. 화자는 “이불까지 덮어” 주는 양지의 호사를 누리는데, 마침 손자들이 그에게 ‘할아버지’를 부르며 “덤으로” 안겨 온다. 손자들은 제 아빠 쪽을 닮았는지 오지랖이 넓다. 할아버지 비위를 제법 맞출 줄도 아는 것 또한 대견스럽다. “양지”에 말동무가 되는 건 그래서 쉽다. “이쪽저쪽”에 앉은 아이들이 “너스레를” 떤다. 그러다 “때가 되”었는지 아이들은 “즈그 집으로” 돌아간다. 어쩜 할아버지와 노는 게 이제 싫증이 났는지 모른다. 그래, 화자는 양지를 다시 독차지하게 된다. 전개에 이야기를 끌어오는 느긋한 여유를 부리는 묘미가 시에 가득하다. 화자가 자신만의 양지인 자연을 “자연스럽게” 찾기까지의 이미지가 이동하는 것 역시 볼만한 대목이다. 그건 [따뜻한 한구석→돗자리→손자놈들→즈그 집→양지]로의 유유자적하는 귀소(歸巢)이다.
〈2.7.〉 임해원 「텅 빈 고요」 전문
딴전 부리듯
와불님 귓속에 들어앉아 가부좌를 틀 것
절간 녹 슬은 구리종이 기억하는 벽력일 것
가슴이 온통
아무것도 아닌 것일 것
막무가내로 번지는 노을일 것
눈개승마가 기억하는 아지랑이일 것
그리하여
꽉 다문 입
무슨 말도 깜깜 들리지 않는
꼭두서니 빛
먼 밤하늘까지 덮어씌울 것
형태가 다양한 건 현대시의 주 특징이다. 시는 종결형을 “-것”으로 제한하는 지시적 명사형을 취한다. 해서, 이미지의 감각이 끝까지 살아있어 보인다. 참고로 이런 시의 종결형은 이 외에도 부사형, 명사형, 관형사형, 현재형, 미래형 등 많다. 시를 다채롭게 하는 종결 방식 중에 하나이다. 시는 익심형(益甚形)으로 반복율을 보이데, 이는 화자의 의지가 깊어지게 하는 효과를 준다. 이때 유의해야 할 일은, 매 시행이 파탄되지 않아야 하고 더불어서 제시하는 명사, 또는 명사형 어미의 이음이 극적이어야 한다. 그러면 다채로운 시형을 부릴 수 있다. 두 기준에 비추어 비교적 효과를 거둔 시다. 예컨대, ①“귓속에 들어앉다”와 “가부좌를 틀 것”이란 구절은, 가부좌가 귓속에 있으니 “고요”의 이미지와 문법적 논리가 통한다. 마찬가지로 ②“구리종이 기억하다”와 “벽력일 것”, ③“가슴이 온통 비다”와 “아무것도 아닌 것일 것”, ④“막무가내로 번지다”와 “노을일 것”, ⑤“눈개승마가 기억하다”와 “아지랑이일 것”, ⑥“무슨 말도 깜깜 들리지 않다”와 “꼭두서니 빛” 등도 같은 이치겠다. 시를 쓸 때 생각나는 대로 물흐르듯 쓰는 일은 많다. 그러나 구도를 잡은 문장으로 재배치하면 좀더 나은 시를 빚을 수 있다. 그래, 극적 효과를 높이는 시가 되기도 한다.
〈2.8.〉 한장춘 「초승달」 전문
밤에 깎으면
귀신 나오고
서생원이 먹어
나로 둔갑한다 믿었더니만.
손톱
튀어
서녘
하늘에 걸리다.
쓸모없다 함부로 버리면
버린 자가 쓸모없어지지.
밝혀
내려다 보고 있으니
버려져 되레 곱다.
우리는 어린 시절에 어른들로부터 금기어(禁忌語)를 들으며 훈육되어 왔다. 가령 이 시에 나오는바 ‘밤에 손톱을 깎지 마라, 쥐가 먹고 귀신으로 둔갑한다’, ‘베개를 높이 베지 마라, 명이 짧아진다’. ‘밥먹고 금방 눕지 마라, 소가 된다’, ‘밤에 휘파람을 불지마라, 뱀이 나온다’ 등이다. 이런 ‘금기어’의 특징은 ‘-하지마라’, ‘-하면 나쁘다’, ‘-한단다’로 이루어진 관용구들이다. 이는 어떤 행위나 말이 자신과 타인에게 해가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 민간에 형성된 말이다. 두 소절로 된 이 말에는 대개 부정적인 뜻이 강하다. 어떤 행위에 대해 그걸 못하게 막으면, 그땐 당연히 ‘왜 그러냐’고 묻게 된다. 그러면 시에서처럼 ‘귀신이 나온다’, ‘쥐로 둔갑한다’의 답을 듣게 되는데 철부지가 겁을 먹도록 강조하는 게 보통이다. 화자는 금기를 지키지 않고 모르게 깎은 “손톱”이 “튀어”가 하늘에 박혀 “내려다보고” 있다고 여긴다. 즉 버려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헌데 그게 “되레” 요염하고 고운 초승달로 “둔갑”한다. ‘기승전결’의 4단에 비약과 함축의 언어경제를 도모한 작품이다.
〈2.9.〉 허갑순 「아버지 허리에 무지하게 꽂힌 이른 봄」 전문
햇빛 한 알 톡 떨어지자 나무들 숨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모로 돌아누운 아버지의 등이 들썩였다. 봄이거나 이른 봄이라며 뒤척이는 소리 귀밑까지 차오른다. 햇빛 알레르기를 앓는 아버지는 자주 얼굴색이 붉어지거나 부풀어 올랐다. 좁쌀만한 사연들이 얼굴과 목 전체를 덮었다. 자꾸 비벼대는 손바닥도 이제는 헐어서 지문이 지워진지 오래다. 그러나 아버지는 강고한 집념의 소유자이듯 새롭게 역사를 쓴다며 도수 없는 안경에 지문을 새겨 넣는다. 보이지도 또한 볼 수도 없는 어머니는 벌써 아버지의 독설이 수북이 쌓여 봄인데도 아직도 겨울을 맛있게 빨아먹고 있는 어머니 씨부럴 왜 이렇게 춥지 문고리에 수저를 꼽고 온 세상을 다잡아 잠그고 불어라 바람아 봄바람아 바람난 아버지 허리에 무지하게 꽂힌 이른 봄
이 시는 스토리가 연계되고 동기에 따라 유지되도록 이어 쓴다. 가름하면 ‘기승전결’로 된 산문시다. 그건 ‘햇빛~들썩였다〈起〉, 봄이거나~새겨 넣는다〈承〉, 보이지도~잠그고〈轉〉, 불어라~이른 봄〈結〉’로 나눌 수 있음에서다. 4단락에 나타난 바, 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립항(對立項)으로 설정해 보인다.
첫째, 아버지는 “햇빛 알레르기를 앓는 사내”다. “자주 얼굴색이 붉어지거나 부풀어” 오르고, “좁쌀만 한 사연들이 얼굴과 목 전체”를 덮을 정도로 심하다. 그리고 그가 “자꾸 비벼대는 손바닥” 또한 헐게 되고 심지어 “지문”조차 닳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안경을 고쳐 쓰면서 당신의 새 역사(예, 자서전)를 쓰겠다고 벼른다. 무리한 아버지는 ‘열꽃’이 낭자한 채 봄을 맞는다. 그는 가려움증에 온몸을 들썩이지만 반하여 집필 욕구는 더 강해진다.
둘째, 아버지와는 다른 어머니는, “봄인데도 아직 겨울을 빨아먹는” 중이다. 즉 봄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해서 어머니는 매양 “왜 이렇게 춥지”라고 하며, 문을 열지 못하도록 “문고리에 수저를 꼽”아 둘 만큼 “온 세상을 다 잡아 잠가”도 그냥 춥다춥다 한다. 열이 많은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오한증에 시달리며 봄을 지난다. 발열증과 오한증의 착종(錯綜)으로 두 사람의 병은 상반되는 것이다. 봄을 맞이하지만 이 ‘온기’와 ‘추위’는 모순처럼 극명하게 대립한다. “아버지 허리에 무지하게 꽂힌” 열꽃이란 이른 봄의 알레르기다. 하지만 정작 그것은 집필 욕이 강한 아버지 투혼으로 화한다. 그러니까 이제 “새롭게 역사를 쓰”려는 욕구, 그 ‘바람’[望]을 ‘바람’[風]으로 화자는 반전시킨다.
3.
〈3.1.〉 거듭 고쳐 써서 닳아진 시, 개인사적인 진실규명을 위해 억압을 뚫고 나오는 시, 화자 자신에게 진솔한 시, 깊이 있는 삶의 시는 요즘 보기가 귀하다. 모두 ‘예쁜 시’, ‘아름다운 시’에 눌려 있음이다. 그렇듯 ‘쉬운 시’, ‘노래 시’로 카페 등을 무단 점거하며 권위를 만들어내는 시인들은 적반하장으로 ‘깊은 시’를 욕한다. 그래 다양해야 할 시의 범주를 그만 좁혀 버린다. 더 큰 문제는 그게 시의 참모습이라고 가르치는 데 있다. 만일 시에 어떤 임무를 부여한다면, 자본과 권력에 집착된 세상을 극복해나가는 서정의 한 대안인 인문학일 듯도 하다. 사실 그게 또다른 교조주의이기도 하겠지만…. 앞의 소설 속 「솔로몬의 노래」와 ‘밀크맨’은 〈시〉이며, ‘황금’에 정신이 팔린 ‘기타’는 자본과 권력의 산물, 즉 〈극복할 환경〉일 법하다. 그 사유적 대안, 그러니까 ‘뿌리 찾기’, ‘길잡이별’, ‘샬리마의 길’로 나아가는 길이란 〈시적 의도〉일 듯하다. 결국 〈시〉가 나아갈 〈의도〉는 〈환경 극복〉이란 험한 절차를 거쳐야 된다는 걸 일러준다.
〈3.2.〉 시조는 리듬과 운율의 성곽으로 둘러선 속에 시인이 바라는 대상 그 서정의 봉우리가 있다. 해서 간단히 도달할 수 있는 장르는 아니다. 절차와 형식이란 안전장비를 꼼꼼히 장착한 후에 온갖 신난(辛難)을 겪으며 가야 하는 곳이다. ‘샬리마’를 향한 인문학으로서의 시조는, 시인의 창작 용기가 초·중·종의 각 장(章)에서 규칙적이어야 하고 서정의 대상에서 멀리 에돌아 다가갈 필요가 있다. 그래, 단계적 음보로 바라는 바 대상이 상징적으로 현시되도록 하는 일이다. 그래서 시조가 어렵다고들 한다. 이 자리엔 김옥중과 문제완의 두 편 시조를 올린다.
〈3.3.〉 김옥중 「우포늪 가시연꽃」 전문
네 미모 탐이 나서 보쌈 할까 두려워서
꽃대를 가시로 둘러 견고한 성을 쌓고
내궁에 홀로 앉아서 전설을 읽고 있다
“보쌈”은 보자기 싸듯 야채 잎으로 밥이나 고기를 싸 먹는 일이다. 또다른 ‘보쌈’이란 밤에 몰래 자루나 보자기에 여인을 싸 데려와 아내나 첩으로 삼는 일을 말하기도 한다. 즉 전통적 강혼제(强婚制)이다. “미모”에 “탐이 난” 사람이 저지르는 유혹적 범죄이기도 하다. 그 일이 옛날엔 상당히 있었지만 처벌은 무겁지 않았나 보다. 시조는 출중한 꽃대를 가진 가시연꽃에게 보쌈의 대상임을 명료화한다. “가시연꽃” 그녀는 보쌈질을 당하는 게 두려워 견고한 가시로 성을 둘러치게 된다. 그녀는 “내궁에 홀로 앉아서 전설을 읽”으며 나날을 보낸다. 그녀가 접한 ‘전설’이란 무엇일까. 부처님께서 사악한 뱀에게 한 연꽃을 지키게 했는데, 사람들에게 못된 짓을 하는 뱀이 물 밖으로 못나오도록 한 조치였다. 그런데 악마가 뱀을 유혹했다. 연꽃을 먹어버리면 지킬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이 된다고, 하지만 그걸 안 부처님은 이미 가시를 심어두었고, 뱀은 가시를 두른 연꽃을 먹게 되었다. 결국 뱀은 가시에 걸려 연꽃을 넘기지 못하고 어둠 속을 헤매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시조는 ‘가시연꽃’을 보는 화자의 시선을 함축해 쓴 단수이다. 다만, 초·중장에 연이은 종장, 그게 의미적으로 좀 거리를 두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중·종장이 열거법 ‘-고’로 연결되어 있음에서이다. 또 종장을 보면 연시조와 같이 어떤 연이 계속될 듯도 보이기 때문이다.
〈3.4.〉 문제완 「자전거 타고」 전문
담양 가는 백 리 길
되돌아 이백 리 길
은륜의 흔적마다
궤적이 길을 냈다
귀갓길
어스름 내리면
말을 건다, 외진 길
진정한 시의 소통은 자신의 내면과의 마주함에서 비롯된다. 자전거 타는 일도 그러하다. 타는 게 목적은 아니라 타기를 통해 자아와 자연과의 소통을 누리기 위해서다. 그래 화자는 소통을 즐기며 자전거 타기를 한다. 그는 “백 리 길”이나 “이백 리 길”을 달리며 “은륜의 흔적”으로 궤적을 내곤 한다. 그리고 곧 그 궤적을 따라가는 매력에 빠진다. 그의 “귀갓길”에는 어느새 어스름이 내리곤 하지만, 무렵의 풍경을 좇는 “외진 길”은 더없이 좋다고 느낀다. 은륜을 따라 “말을 거는” 자전거 여행, 그 길과의 진솔한 관계가 내밀하게 전해 오는 작품이다. 대체로 길을 맞이하는 이야기는 화자 중심적인 시에 많다. 이 시조도 그런 류이지만 서정적 단수시조답게 말의 정련을 위해 췌사를 줄인다.
4.
〈4.1.〉 머리글에 올린 「솔로몬의 노래」라는 ‘노래’(시)를 통해 오늘의 시인들이 얻을 감상 노트는 길지 않다. 토니 모리슨의 『솔로몬의 노래』에 등장하는 주인공 ‘밀크맨’은 여정의 마지막 그 솔로몬 바위에 도착한다. 헌데, 고난의 여정을 숨어서 뒤쫓아 자행했던 친구이지만 적(그를 죽이고 황금을 찾으려던)인 ‘기타’와 여지없이 맞닥뜨린다. ‘기타’는 그가 그토록 탐내던 황금단지를 위해, 그리고 ‘밀크맨’은 오로지 자신의 조상 ‘샬리마’에게 나아가기 위해 맞서게 되는 것이다. 밀크맨은 그를 향해 순간 날아오른다. 그가 학교 다닐 때 따돌림을 당하던, 그래서 ‘왜 날 수 없을까’를 생각하며 창턱에 앉았다 일어나던 것처럼. 순간, 그의 비상은 「솔로몬의 노래」(시)가 들린다는 그 생각에 힘을 얻는다. 결국 밀크맨은 ‘황금’이란 권력적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조상의 뿌리’로 향한 인문적 서정에 ‘비상하기’를 감행하는 것이다. 자본이 생의 방법일 수 있으나 인문의 궁극적 목적은 될 수 없음을 그가 최후에 깨달은 결과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소설에서 생략된다.
〈4.2.〉 70년대, 흑인 여류작가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1931~)은 『솔로몬의 노래』(1977)를 내놓아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주인공 ‘밀크맨 데드’는 소년시절의 아픔, 그 따돌림의 상처를 극복하고, 청년이 되면서 조상의 가문을 추적하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는 자력(自力)과 자존(自存)의 힘으로 스스로를 일으킨다. 왕따의 기억이 있지만 이제 활달한 청년으로 거듭나 그는 기만적인 현재의 ‘생강 향내의 안락’을 벗어버리고 진정한 자아정체성을 찾아 나선다. 그는 곧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마을을 향해 긴 여행길에 나선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살았던 솔로몬 산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로 땅과 목숨을 빼앗긴 ‘메이컨 데드1세’와 자수성가한 아버지(‘메이컨 데드2세’)의 족적을 찾게 된다. 바야흐로 밀크맨은 그들의 세계에로 비상을 준비한다.
〈4.3.〉 시가 [대상]과 [운율]과 [서정]으로 [시적 의도]에 도달하는 길이란 건, 『솔로몬의 노래』에 비유될 수 있겠다. 험한 여행에 사투를 겪고 조상의 동산에서 듣게 되는 최후 ‘노래’(시)가 그러하다. 그게 잠재된 용기를 주었듯, 시인이 얻어야 할 바는 시 자체가 아니고 시를 찾아나서는 과정이란 점이다. 여행 배낭을 꾸리고 지도를 마련하고 위험에 대비한 무기를 비장(秘藏)하면서 또다른 세상을 꿈꾸는 게 시인이다. 말하자면 시로 향하는 [고민→구성→집필→퇴고→정리]를 통해 서정의 위의(威儀)에 이르려는 게 곧 시인의 작업이다. 권력의 사회로부터의 따돌림을 극복하고 오직 자존감으로 솟아오르기 위하여 극기정신으로 성장해온 그 ‘밀크맨 데드’처럼 말이다.
〈4.4.〉 문장 하나하나가 고통의 밧줄로 이어간 이 소설은 1977년 출간되자마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고, 1990년 ‘오프라윈프리북클럽’에 선정된다. 그리고 1993년 노벨상 수상에 거명된 후, 뜸들인 일 없이 바로 지명되기에 이른다. 소설은 문학성과 흡인력을 동시에 갖춘 매력으로 재미라는 정글에 아무 두려움 없이 들게 만든다. 이 소설을 통해, 시란 다시 쓰기와 새로 쓰기의 연속성, 그 내밀한 리듬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걸 배운다. 아니, 그 리듬을 타며 솟아오르는 궁극이 진실과 진리의 세상임을 안다. 그러므로 문학이란 내외적 투쟁을 통하여 빚는 정신의 형상화이다.
5.
〈5.1.〉 사람은 기쁜 일, 슬픈 일, 화난 일, 괴로운 일을 쌓으며 일상을 지난다. 그것을 배설하는 자리가 곧 시의 마당이다. 그래, 시인의 욕구는 시로 배설된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를 사랑한다고 쓴다. 싫으면 싫다고 진술한다. 그걸 참고 있으면 변비증이 오는 건 당연하다. 머리에, 가슴에, 서랍에, 장롱에 숨기는 게 없어야 진솔한 시, 정직한 시가 나온다. 시집살이를 고되게 해온 과거를 감추고 시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만을 시에 표현한다면 위선이다. 물론 그 스트레스는 해소되지 않고 병이 될 수도 있다. 속으론 매질한 선생을 미워하면서도 ‘친절한 우리 선생님’이란 글쓰기를 한 아이는 이중인격자다. 권위주의 시대에 자유를 뺏긴 시인이 그걸 외면하고 농경시대 서정과 낭만을 회억하는 시만 쓰는 건 회피의 심리기제이다. 고통의 개인사가 있으면서도 막연히 관념적인 시를 즐겨 쓰는 시인은 글에 체면을 두르고 색깔 돋우기를 좋아한다. 아름다운 꽃을 보고 그냥 아름답다고 쓰는 건 시가 아니다. 그건 누구나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꽃 속에서 발견하는 자기만의 체험적 감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낼 때 시가 된다. 내가 발설하고 싶은 속내 이야기, 친구인 내 시에게 아픔을 털어놓는 사연, 거기 풍자와 알레고리를 입히는 게 ‘시’라 할 수 있다. 이제, 시인이라면 체면과 위선과 가식으로부터 좀 벗어나야 할 때도 되었다.
〈5.2.〉 시의 정서는 위선의 누적이나 권력의 층위가 될 수 없다. 시는 자유와 양심과 정의, 그리고 시인의 사상과 창조력과 의지가 솟아내는 어떤 싹이다. 싹은 자라 풀과 나무, 꽃과 열매의 시기를 지난다. 해서 시의 역사가, 땅의 퇴적이 이루어진다. 시의 보행은 끊임없는 여정에 도전할 때 건강해지고, 그 여정은 시의 창조적 동기나 의도로부터 연유된다. 이제, 당신이 바라는 ‘솔로몬의 노래’(시)는 자본·권력(황금)으로 피폐된 지금의 정신을 극복하고 시의 서정과 깊이에 올인 하는 일이다. ‘샬리마’ 같은 인문주의의 고향(시적 의도)으로 거침없이 날아오르는 힘의 그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게 한낱 고고한 상상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해보자는 게 나와 당신의 시를 위해서다. 가능한 원대하고 둥글게, 때론 모나고 날카롭게, 그리고 진실하고 정의롭게 솟아오르자. 그래, 이렇게 하이 킥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