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 눈
이정선
점화(點化) 시집이 순식간에 점화(點火)되어 사방팔방으로 번질 줄 어찌 알았으랴. 수필집 몇 권을 냈었지만 그 때와는 양상이 전혀 달랐다.
“효녀의 역할이 가슴에 두드러지게 다가옵니다. 조상님께 칭찬 받으실 일을 해내셨네요. 서산에 해 넘어가는 생의 길목에서 다시 동녘에 점화(點火)하시니 그 아니 장엄합니까. 좋은 글 많이 남기시길 바랍니다.”
어느 분이 보내주신 격려의 말씀처럼 ‘해 지는 생의 길목에서 다시 동녘에 불붙이는’ 격이지 않는가. 집안에서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고 꼭 해야 된다는 책임도 없었는데 나에게 이런 용기가 어디서 생겼을까? 우리 집안에 팔 걷고 나서면 이보다 더 큰일도 거뜬히 해낼 남정네들이 넘쳐나기에 출가외인 인 나는 뒤로 물러섰었다. 헌데 타고난 운명이었나. 인간은 이미 손안에 운명을 거머쥐고 태어난다고 하던데, 언젠가 건성으로 들었던 말이 불현 듯 스쳐간다.
지인이 내 손금을 보더니
“조상님을 잘 섬길 손금이군. 엄지에 ‘부처 눈’이 있잖아!”
라고 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손바닥을 펼쳤으나 부처의 눈이라는 그 문양은 놀랍게도 나 혼자 뿐. 당시엔 아들도, 큰 며느리도 아닌 나로선 제사 지낼 일도 없어 그냥 흘려보냈다. 이제금사 문득 되새기며 엄지를 자세히 보니 내가 나서서 스스로 엮게 된 『이정선 點化시집』 그 정답이 내 손안에 있었다.
엄지손가락 첫째 마디에 기다란 눈동자 모양의 섬 문양이 만들어진 것을 ‘부처 눈’ 또는 ‘불심문(佛心紋)이라고 한단다. 이런 손금의 소유자는 조상의 보살핌으로 조상 복이 많은 사람이고 조상이나 집안 어른을 모시거나 조상님의 일을 하는 입장에 서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또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읽어내는 직감력과 신비에 대한 공상 및 예술적 영감이 뛰어난다니. 조상님의 음덕과 부처님의 가피로 받은 ‘부처의 눈’으로 조·부·손 삼대의 시 끈을 잇는 조상님의 일 하나를 이룩한 셈 아닌가.
관세음보살님은 천수천안(千手千眼)으로 중생들의 고통을 살펴 주신다고 한다. 누군가의 마음을 알고 싶었던 처녀시절, 내 손에 눈이 있어 그의 가슴에 손을 얹어 제발이지 나를 향한 그의 마음을 훤히 볼 수 있었으면 간절히 바란 적도 있었다. 이왕 내킨 김에 그 눈으로 영적인 직감력을 발휘하여 타인의 마음을 읽어내는 또 다른 과업을 완성하고도 싶다. 하지만 이건 과욕이다. 우리 인간은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지만 단 한 가지 상대의 마음만은 점령할 수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지 않던가. 하지만 상상해 보라. 가슴이 뛰지 않는가. 사랑하는 이의 가슴팍에 슬며시 손을 얹어 그의 참마음을 훤히 볼 수 있으리라는 부처 눈의 영험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