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開港(개항) 인천의 '한국최초'
인천개항(1883년)은 부산(1876년)과 원산(1881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다.
흥미로운 건 부산항보다 7년, 그리고 원산항보다 2년 늦게 개항한 인천항 주변 유적들에서 유독 ´최초´라는 수식어가 눈에 많이 띈다는 점이다. 인천이 한양으로 통하는 관문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인천에는 당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많은 근대문화유적이 제법 많이 남아있다.
<인천의 최초 기록들...>
최초의 철도 경인선
뿐만아니라 인천과 노량진을 오가던 경인선이 우리나라에 개설된 최초의 철도이다.
현재 경인전철(국철) 1호선 인천역이 당시 경인선 출발역이며, 노량진역이 종착역이다.
즉,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는 1897년 3월 22일 인천에서 착공하여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인천역간 33.8Km가 개통되었다.
이후 1900년에 한강철교가 개통되어 경인선은 비로소 한양중심부까지 연결된다.
경인선은 도보로 12시간 걸리던 서울과 인천간을 1시간 30분으로 줄이면서 서울과 인천을 1일생활권으로 변화하게 하였다.
철도개통시 최초로 사용되었던 증기기관차는 미국 브룩스회사에서 총 4대가 제작되어 반제품으로 인천으로 후송후, 조립한 모갈 1호로써 현재 인천역앞에 상징물로 세워져 있다.
현재 인천역과 동인천역 사이에는 답동성당과 내동교회 그리고 자유공원과 일본은행거리 등 인천의 근대문화유적 대부분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며, 차이나 타운을 포함하여 인천의 개항을 전후한 역사문화 현장을 걸으면서 돌아 볼 수 있다.
<인천역 앞에 세워진 한국철도 탄생역 기념물... 최초의 기관차 모갈 1호 모형이다.>
최초, 유일의 차이나타운
인천의 차이나타운은 다른 나라에 있는 차이나타운과는 근본적으로 형성 구조가 다르다.
다른 나라의 경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최초 노동자부터 근대 중국의 불안한 정국을 피해 이주한 중산층까지 포함하여 중국인 거리가 형성된 것에 비하여, 우리나라는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근대화 과정에서 가까운 거리의 이점을 살려 주로 상업을 위해 이곳에 안주를 한 사람들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인천 화교는 약 130년 전인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인과 함께 온 40여명의 군역상인들이 이 땅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주로 푸젠성, 저장성 등 남방인들로 청나라 군대에 물자를 공급하면서 조선 상인들과 무역도 하였다. 그 후 1884년 4월 "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商租界章程)"이 체결되면서 지금의 인천시 선린동 일대 5천평 토지에 중국 조계지가 세워졌고 그해 10월 청국 영사관도 이곳에 세워졌다. 중국의 조계지가 생긴 후 중국의 건축 방식을 본뜬 건물이 많이 세워졌기에 이곳이 오늘날 "차이나타운"의 최초 형태이다.
그리고 이후 원세개가 조선 통상 사무를 맡아 1887년에는 부산, 1889년에는 원산에 조계지역에 대한 담판을 성공시켜 중국 조계지역은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인천에 조계 지역이 설립되면서 화교의 수는 급증하여 1883년 48명이던 화교가 1년 후에는 5배에 가까운 235명으로 늘어났고 1890년에는 화교가 약 1천명에 이르렀다. 이처럼 중국인들이 증가하면서 당시의 청나라 관청(청국 영사관)이 이곳에 설립되고, 이를 청관이라고 불렀는데, 일본인들은 이곳을 중국을 비하하는 명칭인 지나정이라고 불렀다.
당시 화교의 대부분은 인천을 상업 활동의 중심으로 삼고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중국에서 수입한 식료 잡화를 팔고 다시 조선의 사금 등을 중국에 보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의 전반적인 상권을 장악하였다. 특히 인천 조계지의 화상들은 한국 전역에 퍼져 있는 화상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사업은 날로 흥성하게 되었다. 1898년 의화단(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으로 산동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이 일대 중국인들이 피난 차 가까운 한국으로 대거 건너오기 시작하였는데, 이들도 주로 인천을 자신들의 집결지로 삼았기 때문에 인천은 부지불식간에 화교들의 근거지가 되어 서울과 함께 화교들의 양대 세력권이 되었다.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1884년 35척의 청조 선박이 인천과 마포항을 왕래하였으며 1만 3천톤의 화물을 운반하였다고 한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생각 하고 있는 청나라 사람들은 청나라 정부의 후원을 받으며 당시 조선에서는 귀한 물품인 비단, 광목, 농수산품 및 경공업품을 수입하여 엄청난 이익을 획득하였다. 따라서 장기 거주를 목적으로 인천에 상가 건물이나 주거할 집을 지을 필요가 생겨 중국식 건축에 필요한 목수, 기와공, 미장공들도 한국으로 오게 된다. 특히, 인천과 뱃길이 트인 산동성에서는 조선의 인천은 돈벌이가 잘되는 곳으로 소문이 번져 많은 산동인들이 서해를 건너 왔다.
한편 1887년에는 산동 연태지방에 살던 왕씨, 강씨가 종자를 들여와 채소 농사를 시작하니 당시 조선에서는 볼 수 없던 양파, 당근, 토마토 등이 모두 이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특히 중국의 상해, 청도, 연태, 석도 등에서 왕래하는 화물선이 기항하는 인천은 일본인 및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화교의 숫자도 많아 그들이 조차한 지금의 차이나타운이 좁아 경동, 신포동 일대, 용현동, 주안, 부평지역에 모여 살며 상업 활동 외에 채소 시장까지도 그들에 의해 성업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에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패배한 후, 한국의 화교들의 생활도 그리 안정적 일 수는 없었다. 그래도 한국인에게는 대국인으로 행세하며 거들대던 세월도 한국 전쟁과 인천상륙작전으로 거의 파괴되고 만다. 영흥도 앞바다에 정박하여 인천을 향한 함포사격을 정면으로 받은 곳이 지금의 차이나타운이다. 사진을 보면 당시 청관 거리는 2층으로 된 중국식 건물이 즐비하게 보이건만 지금 남아있는 곳은 아주 드물다.
전쟁 후 화교 사회는 한국에서 외면을 당하기 시작한다. 화폐개혁으로 장롱 속 돈을 모두 신고해야 했고, 외국인 부동산 소유제한으로 그들이 반세기 이상 가꾸어온 주안, 용현동, 부평 일대의 황금 농장이 헐값에 판매되거나 남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니 거의 반수 이상의 화교들이 이 땅을 떠난다. 더군다나 화교들만이 경영하던 중국 음식업계에 한국인들도 경영허가를 내주니 그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움을 겪는다.
6·25전쟁 이후 급속도로 위축되었던 차이나 타운은 인천이 대중국 교류의 중심도시로 성장하고, 21세기 지구촌의 세계화 바람에 힘입어 이 지역의 역사성과 문화성이 재조명되면서 인천의 새로운 문화와 관광 명소로 부상함에 따라 재도약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차이나 타운 牌樓(패루)... 비슷한 업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인 坊(방)의 입구에 세웠던 대문
오래되어 낡고 태풍피해로 넘어진 것을 2000년 인천시와 우호도시인 중국 웨이하이(威海)시가 기증한 제1패루 中華街(중화가)...
150톤의 돌을 들여 11m로 만들었다. 그 외에도 제2패루 仁華門(인화문), 석재패루인 제3패루 善隣門(선린문) 이 있다.>
<이전에 세워져 있던 목제 패루.... 단청으로 더 화려해보인다.>
<패루를 지나면 오르막길... 차이나타운 중앙도로이다.>
<오르막길 오른쪽에 위치한.... 중국식 요릿집이 아니다. 관할구역인 북성동 주민센타.... 중국식으로 지었다.>
<오르막길 끝에 위치한 共和春(공화춘)... 짜장면을 처음 시작했다는 전설의 그 집은 아니다.
그 집은 3대를 이어 장사하다가 1983년 폐업을 하였으며, 이후 상표권을 정식 등록한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곳이다.
상표사용권은 CJ가 구매하였다가 GS25에 넘겼다고 하며, 최초의 원조 창업주 외손녀부부가 신승반점을 운영하고 있다.>
<공화춘에서 왼편으로 접어들면 오른쪽으로 급한 경사길, 계단이 이어지는곳 스카이-힐이다. 멀리 2패루 선린문 지붕이 보인다.>
<왼편으로 계속 이어지는 길... 차이나 타운의 왼쪽 끝쯤이다.>
<다시 오른쪽으로는 층층1길.... 지형이 경사겨 높다보니 계단이 급하게 이어진다.>
<층층1길 맞은편, 그러니까 도로 왼쪽으로는 유일한 중국식 사찰, 義善堂(의선당)이 있다.
개항후 산동성을 중심으로 한 중국인들이 이국땅에서 잘 적응하며 살자고 1893년경에 세웠다고 하는데 70년대 화교들의 위축으로 거의 폐쇄되었다가 중국정부 지원으로 2006년에 수리, 복원하였다.>
<안으로 들어가면 마당에는 7층석탑이 세워져 있고, 전면에 본당과 왼쪽으로는 경로청이 있다.
본당에는 관음상을 비롯한 흙으로 만든 5개의 土像(토상)이 모셔져 있고, 敬老廳(경로청)이라고 하는것이 색다르다.>
<우리가 점심을 먹은 萬多福(만다복)... 이집은 초기 짜장면을 재현 한다고해서 관심을 끌었던 곳이다.
일명 하얀짜장이라고 하는데 국수와 짜장이 별도로 나오고 닭육수를 적셔서 함께 비벼먹는식이다. 제법 짜다.>
패루를 지나 차이나타운의 왼쪽편을 둘러보고 점심까지 먹은 우리는 이젠 오른쪽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그곳에는 그 전설의 중국집, 共和春(공화춘)이 있었는데 지금은 짜장면 박물관이 되어 있었다.
짜장면 박물관 (구 共和春) (등록문화재 246호)
국내 1호 중국음식점, 짜장면을 처음 만든 곳으로 알려진 곳이 ‘공화춘’이다.
1908년 무렵 건축된 중국 음식점 건물로 중국 산동지방의 장인이 참여하여 지은 中庭型(중정형)의 건물로 외부는 벽돌로 마감하고 내부는 다양한 문양과 붉은색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처음에는 무역상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으로 이용되었다가 중화요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면서부터는 음식점의 공간이 확대되어, 대형연회장을 갖춘 유명한 중국 음식점으로 1980년대까지 그 명성을 날렸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1912년 중화민국이 건립되자 공화춘 창립자 산동성 화교 우희광씨가 이를 기념하여 ‘공화국 원년의 봄’이라는 뜻으로 共和春(공화춘)이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1983년 폐업을 하였으며 공화춘 건물은 인천광역시 중구청에서 건물을 매입하고 보수하여 2012년부터 지금의 짜장면 박물관으로 개관한 것이다. 입장료가 1000원, 제법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짜장면 박물관... 철가방을 든 배달원 모습이 눈에 띤다.>
<외벽 모습... 당시 현판을 걸어놓았다.>
<공화춘 현판들... 가게이름인 공화춘(共和春)과 特等料理(특등요리), 包辦會席(포판회석 : 연회석완비)의 간판이다.>
<내부는 2층 구조로 1층은 공화춘 창업주 이야기를.... 2층은 시대별 짜장면 먹는 모습들을 재현해 놓았다.>
<짜장면을 먹는 노동자 쿨리(苦力).... 짜장면 전성기 70년대 모습등이다...>
짜장면
하루 700만그릇이 팔린다는 '국민음식' 짜장면은 개항기 인천에서 처음 태동했다.
1883년 인천 개항과 더불어 중국 산동에서 건너온 화교들이 삶은 국수에 된장과 야채를 얹어 비벼먹는 고향의 음식을 소개하면서 부터 우리나라 짜장면의 역사가 비롯된것이다. 짜장면은 조리법이 간단해 된장문화에 익숙한 한국인에게도 점차 인기를 끌게되었고, 중화요리가 번성하던 일제강점기에는 중국음식점의 메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45년 해방 후 산동식 짜장면은 카라멜이 첨가되어 달콤하고 검은 빛이 나는 춘장의 보급과 더불어 한국식 짜장면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에 1960~1970년대 쌀 부족에 따른 한국 정부의 혼.분식 장려정책과 값싼 밀가루 가격 덕분에 짜장면은 더욱 인기있는 외식메뉴가 되었다.
<차이나타운의 동쪽편 거리.... 많은 중국집에 관광객들이 넘쳐난다.>
<韓中園(한중원)... 작지만 한국과 중국의 우호적인 모습이다. 한중문화관 뒤에 있다.>
<중국문화 체험관....>
이상으로 차이나타운을 간단히 둘러보았는데 차이나 타운 오른쪽으로는 청-일 조계지역을 포함, 근대문화유적이 많이 보인다.
답사는 계속 이어진다.
< 계 속 >
ㅇ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cafe.daum.net/sm-acade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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