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창현(道昌峴) 무극도(无極道) 창도하시다
1925년(乙丑) 전북 구태인 도창현에서 무극도(无極道)를 창도하신 후 구천상제님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로 봉안하시고 종지, 신조, 목적을 정하셨다.
당시 도주님께서는 「태인(泰仁) 도창현이 마땅한 곳이다.
그러나 그곳에 치마바위 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며 실제 무극도장 근처에는 치마바위가 있다.
치마바위 의미는 상제님께서 고판례 수부공사에서 「내 세상에는 여자치마 밑에서 도통이 나오느니라.」는 말씀과도 관련이 있는데, 상제님께서 하루는 성도들을 데리고 태인 도창현 성황산(城隍山)에 올라 치마바위에서 여러 공사를 행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치마 밑에서 대도통(大道通) 난다." 하시니라.(무극도 창건공사)
여자치마를 말씀하신 것은 고수부공사에서 고수부 즉 며느리를 지칭한다.
상제님께서 고판례 수부공사에서 「내 세상에는 여자치마 밑에서 도통이 나오느니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를 빙자하여 실제 여자가 도통을 준다며 대두목행세를 하는 자가 있다.
모 단체의 선감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그 첩노릇을 하던 여자들 몇몇이 자기들이 대두목이라며 종통을 이었다고 한다. 허령 밭에서 허령이 싹트고 자라는 꼴이다.
상제님께서는 행하신 모든것이 공사이시다. 그러므로 여자치마 밑에서 도통이 나온다 하심은 실제 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음의 이치로 고수부 며느리의 역할을 하실 분을 말씀하신 것이다.
무극도의 해산
1935년 일제에 의해 자행된 민족종교 탄압을 보시고 도주께서는 전국 각지의 종도들을 모아 인덕도수와 잠복도수를 말씀하시며 「그대들은 포덕하여 제민하였도다. 각자는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처자를 공양하되 찾을 날을 기다리라.」고 하시며 무극도의 해산을 명하셨다.
1936년 새해 치성을 마치신 후 홀연히 떠나시어 전주 및 마산 교방동에 계시다.
1936년 4월 조선총독부는 민족종교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갖는 증산종교운동이 민중에 널리 확산되는 것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모든 증산교단 및 민족종교에 대한 해산령을 선포했다.
이 선포 후 무극도 도장건물은 일본 총독부에 강제로 빼앗기듯 기증되어 경매를 통해서 철거되었다.
1939년 가을에 회문리로 가셔서 회룡재(廻龍齋)에 설석(設席)하시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시며 공부(工夫)하시었다.
* 회문리 옛집 공지에 아담한 정사(精舍)를 짓고 이는 후일을 예비하는 도수니라 하시고 회룡재(廻龍齋)라고 하시다.
이후 이곳에 자리를 잡으시고 공부하셨다.
부산에서 태극도(太極道)
1945년 조국 광복을 맞이하여 10년간의 잠룡도수를 거치신 후 우리 도명이 태극도(太極道)라 밝히시고 아직 일반에게는 공개발표하지 말라. 하시었다.
1948년 9월(도기 40년) 태극도(太極道) 본부를 부산 보수동에서 새로 여시다.
1956년 감천동으로 태극도 본부 도장을 옮기셨으며,
1957년 4월 감천동 도장 영대에 15신위를 봉안하시고 11월 시학과 시법 공부를 시작하셨다.
마하사 49일 공부
1949년(기축) 겨울에 도주께서 동래 마하사(摩訶寺)의 방 한간에서 정화수 스물네 그릇을 받들고 사십구일을 한 도수로 정하시고 공부를 하셨도다.
四十九일이 거의 될 무렵에 도주께서 승녀와 시종자에게 「법당의 불상을 자세히 보았느냐」고 물으시므로 그들이 달려가 보니 불상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도다.
도주께서 四十九일을 다 채우신 새벽에 공부실 위에 학이 울며 날아가고 시종자에게 그동안 모아놓은 글씨 종이를 태우고 그 재를 시냇물에 띄우라고 이르시므로 시종자가 그대로 하니 시냇물에 무지개가 서는도다. (교운 2장 47절)
“도주께서 마하사에서 도수를 마치고 도장에 돌아오시니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느니라. 도주께서 그 자리에서
소년재기발천마(少年才氣拔天摩) 수파용천기세마(手把龍泉幾歲磨)
세계유이차산출(世界有而此山出) 기운금천장물화(紀運金天藏物華)
응수조종태호복(應須祖宗太昊伏) 도인하사다불가(道人何事多佛歌) 의 상제의 글귀를 외우시고
「상제께서 짜 놓으신 도수를 내가 풀어나가노라」고 말씀하셨도다.”(교운 2장 48절)고 말씀하셨다.
사진주(四眞主) https://cafe.daum.net/gncjsroqu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