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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 敎 理 解 스크랩 단기 선교의 이해와 실제 - 4.
總會神學大學校 추천 0 조회 29 14.07.22 11: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단기 선교의 이해와 실제 - 4.|
푸른초장 조회 2 |추천 0 | 2006.08.01. 22:45

 

 

4. 한국 교회사속의 단기 선교

 가. 한국을 복음으로 섬긴 서양선교사들 (Western Missioanries)

한국교회 역시 세계의 여타교회와 마찬가지로 선교로 시작되었고 선교하는 교회로 성장하였다. 따라서 선교와 교회의 관계는 불가분의 상호관계에 있으며 이 관계가 떨어질 때 선교나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서 그 기능과 목적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한국에 복음이 들어오면서 다양한 단기사역과 전문인 선교가 전략적으로 사용되었다.

이조말기 한국사회와 처음으로 접촉한 프로테스탄트 교인은 네델란드의 벨트브레(John J. Weltvree: 한국명)와 하멜(Hendrick Hamel)이었다. 박연은 한국식의 이름이 보여주는 대로 한국에서 오래 살아서 네델란드 말을 잊어버리고 한국에 동화되었으며 복음을 전하는 일 조차 하지 않았다. 하멜은 한국의 종교와 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그의 표류기에 기록하였지만 선교의 영향력을 남기지는 못했다.

한국에 첫 복음의 씨를 뿌린 선교사는 칼 구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였다. 그는 1826년 네델란드 교회의 파송으로 사이암[태국]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여 현지의 중국인들과 어울리면서 놀라울 정도의 중국어 실력을 닦았다. 의사며 동시에 네델란드 상선의 선목(chaplain)으로 온 그는 리빙스턴과 마찬가지로 복음과 상역을 동시에 추구하였다 (민경배 1982:133-134). 그는 제주도와 한국의 서부해안을 3개월간 항해하면서 한국어를 익혔고 서두르지 않고 ‘언젠가 복음의 문이 열릴 것’을 기다리며 때를 기다렸다 (민경배 1994:135). 하지만 그의 단기방문은 단회적으로 그쳤으며 한문으로 된 성경책을 이곳 저곳에 나누어주며 신앙이 자생하도록 하였다. 구츨라프식 선교의 영향력은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후에 한국인에 의해 복음이 들어오게 되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개종하는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한국선교역사에 있어서 영적인 큰 획을 그은 선교사는 영국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나 런던대학을 졸업한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였다. 그는 당시 많은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상선을 타고 중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중국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는 중 우연히 한국에서 일어난 카톨릭의 수난을 듣게 되었고 그는 세관직을 사임하고 즉시 상선을 타고 1995년 9월 한국의 서해안에 도착하였다. 두 달 반 동안 한국어를 익히고 성경을 나누어주면서 서울에 가려 했으나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중국 만주의 피즈우에 표류하여 결국 북경으로 돌아갔다. 토마스 목사는 1866년 26세의 나이로 제네럴 셔먼호의 성서공회소속 선교사로 탑승하여 한국을 향하였다. 하지만, 병인양요와 프랑스군과의 대치로 긴장한 한국군이 발포한 포에 셔먼호는 침몰하였고 대동강을 헤엄쳐 가까스로 한국 땅을 밟은 토마스 목사는 한국 병사에게 성서를 건네주다가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서구의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 땅을 밟기 전에 이처럼 단기간에 걸친 선교의 노력들이 있었으며, 이러한 단기간의 영적인 충격(spiritual impact)은 한국인들이 복음을 듣고 자생적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장기선교사가 입국하기 시작한 1884년 이전에 한국에는 수 십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토마스에게 성경을 전해 받은 변방의 병사에 의해 개종하였거나 의주 상인으로 복음을 들여온 서상윤 등에 의해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장기선교사가 주재하기 시작한 1885년 이후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단기간 방문하여 한국선교를 위하여 협력하였다. 물론 당시의 단기선교라는 것은 이미 선교에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문이 닫힌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전문적인 일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한국교회사를 기록하는 역사가들은 한국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을 지적하면서 빼놓지 않고 존 네비우스 (John L. Nevius)의 사역을 언급한다. 한국교회 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인들 가운데 하나는 네비우스의 선교정책이었다. 이것은 성경공부를 통해 현지그리스도인을 양육하고 3자 원칙을 실현하는 선교 방법론("자치," "자립," "자전") 이었다. 서양선교사이건 한국교회 지도자이건 간에 대부분 그들의 선교 전략으로서 이 방법론을 사용하였다.

1890년 한국의 젊은 장로교 선교사들은 산동성 주재 선교사 네비우스 박사를 초청하여, 그들이 한국에서 어떻게 선교사역을 시작해야 할 것인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가르쳐 달라고 청하였다. 네비우스는 단지 두 주간 동안만 서울에 머물며 젊은 선교사들을 가르치고 상담을 하여주었다. 그리고 그 젊은 선교사들은 네비우스의 계획을 자기들의 선교 전략으로 채택하였다. 네비우스가 짧은 기간 동안 머물렀지만 그의 영향은 놀라운 것이었다 (Park 1991:88,89).


나. 초기 한국선교사들 (Korean Missionaries)

한국사회가 처음으로 성경을 받아보고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중국을 방문하고 복음을 믿게된 의주 상인들에 의해서였다. 한국인으로 처음 세례를 받은 이응찬, 백홍준, 이승하, 김진기, 서상륜 등은 상인의 신분으로 중국을 드나들면서 성경 번역을 돕고 번역된 성경을 한국으로 가지고 들어와 여러 지역을 돌며 배부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Park 1999a:36-39).

한국교회는 선교운동을 시작한 초기부터 단기선교를 실시하였다. 평양 여선교회가 제주도에서 사역하는 이기풍 선교사를 돕도록 몇 년간 이관선 전도사를 파송하였고 이관선 외에도 많은 단기선교사들이 이기풍 목사와 제주도 선교를 위하여 협력하였다. 풀러 신학교의 박기호 교수는 그의 연구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평양 여선교회는 이관선 전도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여 1908년부터 1913년까지 사역케 하였으며 평신도 선교사 김창문과 평안도 남학교에서 파송된 김현철이 학생선교사로 1909년에 제주도를 방문하였으며, 김홍련이 1915년, 최대진 목사와 최대선 목사가 1916년 일년간 제주도에서 사역했고 장덕상 목사가 1917-1918년까지 김창국 목사가 1917년에서 1923년까지, 이창규 목사가 1923년, 이도종 목사가 1931년에 (제주도에서) 사역하였다 (Park 1999a:55).

대한 예수교 장로회 독노회에서는 1909년 한석진 목사를 3개월 간 일본 동경에 파송하여 일본에 있는 한국인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그곳에 교회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Park 1991:48). 그리고 길선주 목사가 중국 산동성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을 도와 부흥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시베리아 선교초기인 1921년 7월에는 정재덕, 박상우, 서영복 등이 김덕수 선교사와 협력하였으며, 김영학 목사가 1923년부터 3년간 블라디보스톡의 연한촌의 한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였다.

이처럼 한국교회 초기의 단기선교는 주로 본국교단과 선교부에서 해외에 필요한 사역을 위해 파송하였으며 단기선교사들 역시 짧은 기간 사역하면서 분명한 목표와 사역을 가지고 있었다. 근래의 단기선교는 이에 비해 분명한 목적과 사역계획 없이 무작정 선교지를 방문하는 경향이 짙다. 이것은 외국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 동기가 되거나 선교에 대한 무지가 단기선교사의 배경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제 전문적인 연구와 전략을 마련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도래하도록 협력하는 단기선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일제강점기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해외의 그리스도인들과 현지인들을 섬기기 위하여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국토가 초토화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하면서 이러한 선교적인 열정은 식지 않았다. 박기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이후 특히 한국전쟁기간 동안 주춤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그 비전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한국동란이 끝난 후) 1956년에는 태국에 선교사 부부 두 쌍을 보냈다. 또한 계화삼 목사는 1957년에 총회선교부에 의해서 대만에 파송되었다 (Park 1999a:124).

동란이후 본격적으로 타문화권 해외선교사들이 파송되면서 한국교회의 선교에 대한 관심은 증가하였으며 파송교회를 중심으로 선교지를 방문하며 해외선교를 이해하는 수준에서 단기선교가 재개되었다. 그럼에도 동란이후 해외선교 시기에 있어서 단기선교의 침체 이유는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사역의 대상에 따른 협력의 한계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해외의 한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였기 때문에 단기선교사로써 단기간 동역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타문화권 선교가 시작되면서 단일언어와 문화권에서 성장해온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언어와 문화적인 장벽이 단기선교라는 전략에 큰 장애로 놓이게 되었다.

둘째는 사역자체의 한계 때문이다. 타문화권 선교의 경우 실제 복음을 전하고 양육하는 일이 더디게 진행되기 때문에 시급하게 동역자나 함께 사역할 단기선교사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본부와 파송교회에 단기선교사를 요청하는 일 자체가 시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순일 목사는 한국전쟁이후에도 선교현지의 한인교회로부터 지원받거나 자비량으로 선교사역에 동참하는 이민세대 선교사가 활동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다. 한인단기선교운동(Korean Short-Term Missions Movement)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교회에 단기선교의 붐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미 언급한대로 70, 80년대 한국교회의 폭발적인 성장과 80년대 경제적 발전, 88년 서울올림픽 이후의 해외여행 완화조치등 일련의 환경조성과 더불어 ‘선교한국’ (Mission Korea)대회와 같은 학생선교운동(Student Mission Movement)의 영향으로 지역교회와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단기선교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에서 지역교회의 단기선교 프로그램은 주로 교단선교부를 통해 제공되고 있다. 교단의 선교부가 주도적으로 팀을 구성하고 훈련하기보다는 지역교회에서 구성된 팀을 훈련하고 지역교회가 단기선교팀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일을 돕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사역했던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의 경우 1994년 ‘청년학생 선교훈련원’(YMTC)가 설립되기 전까지 지역교회를 중심으로 단발적으로 실시하던 단기선교를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파송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 12개의 지역 선교훈련 센타를 통해 지역교회의 단기선교팀과 선교헌신자들을 훈련하고 있다. 합동측 선교부는 1998년 교단산하 선교국에서 자체적인 총회해외선교회(GMS)로 독립선교부의 형태를 갖추면서 지역교회를 중심으로 한 평신도/단기선교훈련원을 여러 지역에 설립하였다. 이러한 지역교회 선교프로그램의 확장을 통하여 교단산하의 많은 교회에서 단기선교의 붐을 주도하고 있다.

1988년 IVFC의 한국지부에서 어바나 대회를 모델로 시작한 한국형의 학생선교대회인 ‘선교한국’(Mission Korea) 대회는 9개의 대학생 선교단체와 10여개의 선교기관이 선교한국 조직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선교한국은 지난 12년 동안 참가자와 선교헌신자 모두 10배로 성장하면서 많은 한국의 많은 젊은 청년들이 선교하도록 동원하였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학생시절부터 단기선교를 통하여 선교의 비전을 키우고 있다.


   


특히 지난 1998년과 2000년 선교한국대회에는 4천명에 이르는 청년학생 참석자들이 선교사로 헌신하였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이미 단기선교를 통해 선교경험이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실제 필자가 1998년 선교한국대회 기간동안 선교부스를 방문한 120여명의 선교헌신자들을 상담하면서 대부분의 피상담자들이 이미 선교사로 헌신하였으며 단기선교를 통해 선교지를 경험 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라. 결론


한국교회는 새 밀레니움에 선교 2세기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도약의 시점에 서있다. 이미 파송된 9천 여명의 장기선교사 이외에도 이들과 함께 동역하고 방문하는 수 만명의 단기선교의 물결은 이미 한국교회의 설립초기부터 흐르는 선교의 열정이 열매 맺힌 것이다. 1990년대부터 한국교회의 단기선교는 새로운 운동으로 부각되고 있다. 교단을 중심으로 한 지역교회의 단기선교와 대학생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학생선교운동’ 모두가 한국교회로 하여금 선교하는데 집중하도록 자극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접근을 바탕으로 다음 장에서는 교회와 선교의 관계를 다시한번 고찰해보고 ‘선교하는 교회론’ (Missional Ecclesiology)에 대하여 논할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지역교회가 단기선교를 통하여 선교의 의식을 고양하고 선교사를 지원하고 평신도 선교지도자를 양육하는 것이 곧 선교적인 교회를 건축하는 일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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