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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시선ㆍ27 아버지의 낫 심동석 시집 2021.3.5.도서출판 해가 |
작품의 기저에 내재된 시의 근원들
-심동석 시집 ^아버지의 낫^ 작품론
조 관 선 소설가·시인
늦깎이로 지방의 문학판에 합류한 심동석 시인의 첫인상은 실례되는 표현이지만 내게 한마디로 순둥이 그 자체였다. 동향이라지만 그때까지 일면식도 없었던 시인에게서 뜬금없는 친근감이 나타났던 까닭은 첫인상에서 뿜어진 사람 좋음의 표정 때문이었을 터. 때문이었는지 심동석 시인의 시적 근원을 잠시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의 낫”을 처음 만났던 때 였으리라. 아버지의 낫은 코발트 빛 바다 한가운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윤슬 같은 작은 섬광이었고 독자의 뇌리에 각인될 나름대로의 이미지론적 개체였다. 그리고 뒤이어 조우하게 되는 시인의 시편들 또한 문학 이력이 아닌 연륜의 이력으로 내게 다가왔지만 오래지 않아 연륜과 시력의 무게를 동시에 담아낼 것이라는 기대감이 컷었다고 회억되는 바, 작금 그 기대가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면 필자의 오만일까?
경동광업소 소장, 경동건설 사장 등, 소위 누림의 자리에서 마지막 직장생활을 영위하다가 정년이라는 고리에 걸려 퇴임 후 향리의 두타문학회에 회원으로 입회하여 종종 시편들을 발표함에 일천한 시의 이력에 비해 작품에 내재된 시의 무게감과 부피의 남다름을 느낄 수 있었기에 관심이 많았었다. 필자는 심동석 시인의 시편의 이력보다 시의 무게감에 매료되어 등단을 권유한 적이 있었는 바, 시인은 한마디로 손사래를 치며 겸양을 나타냈다. 시인의 일천한 문학판의 이력이 이유였다. 그러나 심동석 시인이 옹기쟁이의 자세가 아닌 도공의 자세로 시를 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읽었기에 등단을 늦출 이유가 존재하지 않다 판단하고 등단을 채근한 바, 등단작품을 준비중에 있다며 추후에 말씀 드릴 터이니 그 때 도와주시라는 말을 듣고 내심 기뻤었다. 그리고 약속처럼 오래지 않아서 심동석 시인의 등단의뢰작품들을 만나게 되었다. 필자의 기대 대로 “아버지의 낫”을 포함한 여러 시편들이 필자의 눈길 끌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확신하고 문학세계 발행인 성춘복 선생님께 등단을 부탁드리고자 송고를 타진했던 것이다. 더하여서 보람됨은 성춘복 선생님께서 심동석 시인의 원고들을 받아보시고 “좋은 시인을 소개해줘서 고맙다.”는 전화인사를 주시던 날이 회억된다. 작품을 보는 안목의 동질성에 기인한 찬사였으리라.
“아버지의 낫”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고 아버지의 낫으로 인해 필자는 부친의 유택을 한 번 더 찾아 뵙게 했던 것이다. 내 아버지의 유택에서야 낫은 물론 그 어떤 물건들이 출토될 리 만무였지만 필자에게도 아버지를 회억하는 편도성 향수의 남다름이 존재했던 것이다.
심동석 시인은 지금도 시간이 허락할 때면 집 부근의 밭을 텃밭처럼 가꾸고 있음을 알고 있다. 좁지 않은 면적의 밭을 가꾸면서 시인은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유품 같은 쟁기들이 종종 얼굴을 내밀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 나에게 의문을 남긴다.
밭머리에서 칡을 캐다가 낫을 하나 찾았다
자루는 흙 속의 길로 숨었고
잠들었던 물음표의 머리는
아직 낫이 필요하냐고 묻고 있다.
― 『아버지의 낫』 1연 전부
심동석 시인은 “아버지의 낫”을 시집의 얼굴인 표제작으로 선정하고 있다. 시인이 아버지의 낫에 얼마나의 애정을 담고 있는지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정황이다.
시인은 밭에서 칡을 캐다가 흙 속에서 나온 낫을 줏은 것이라 아니라 찾았다는 표현으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보여준다. 줏었다로 설정된 관계가 아닌 찾았다는 관계! 칡이 있는 밭이라면 집 부근에 있는 텃밭이 아니라 모르긴 해도 집에서 한참을 떨어진 위치에 자리한 산 인근의 밭이리라. 시인이 오랜 세월 저쪽에서 마치 아버지로부터 낫을 잃은 얘기를 들었던 것처럼, 아버지가 어찌어찌 일을 하시다가 순식간에 낫을 잃고 잃은 낫에 대한 애정과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던 때를 상기한 듯, 아버지의 잃은 낫을 흙 속에서 발견했을 때의 모습을 유추하게 하는 작품을 읽으며 심동석 시인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던 서정적 자아를 빨리 발견한 것에 나역시 반가움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디어진 낫을 가만히 만지자
햇살의 이마가 눈부신 듯
녹슨 조각들이
아버지의 굳은 땀처럼 뚝뚝 떨어진다
― 『아버지의 낫』 2연 전부
땅 속에 묻혀 낫의 철분이 산화되어 부식되기까지의 세월을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 마치 영화나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는 느낌을 자아내는 시각성이 이 시의 맛이다. 누구에게나 아버지는 흔들림 없는 성城이었겠지만 시인이 밭에 묻혀 있던 낫을 발견함은 곧 아버지와의 조우였으리라. 아버지의 굳은 땀처럼 뚝뚝 떨어진다는 표현 속에서 시인의 부자관계를 유추할 수 있음은 물론 필자는 심동석 시인의 시적 표현 속에서 그 부친의 산화된 찐득찐득한 땀방울을 상상하는 것이다.
보릿고개의 시퍼런 허기
이 땅의 철 띠마저 벨 수 있다고
고개를 꼿꼿이 세우는
아버지의 낫
― 『아버지의 낫』 종연 전부
이미 산화된, 그리하여 하등 쓸모없는, 쟁기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낫을 발견했을 때의 소회를 작품으로 승화한 화자로서의 낫이 『아버지의 낫』이라는 명제를 달고 필자에게 등단추천 작품으로 간택되었을 때, 심동석 시인이 추천작품으로 수락했던 건 산화된 낫에 내재된 아버지의 고단했던 일생이 환기되었기 때문은 아니었을지…….
― 생략
니는 오늘부터 에미 방으로 들지 말거라!
문을 닫는 목소리 늦가을 서리빛이었다
그날 밤 건너 방 섬돌 위 고무신 두 켤레 달빛에 젖고 안방
문이 가만가만 열릴 때마다 달빛 묻은 박꽃 웃음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 『고무신 두 켤레 달빛에 젖고』 일부
민며느리로 출가한 젊은 아낙의 시집살이를 해학적으로 풀어담았으나 그 시절을 겪어본 사람들에게는 원망의 순간순간이 내재됐을 것이리라. 그러나 나이 어린 신랑이어도 어여쁜 아내가 있는 향기로운 방을 어이 생각에 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어린 남편은 부모들이 잠든 틈을 기다려 아내가 있는 방으로 건너 갈밖에……. 누구이든 신혼시절을 회억하게 하는 작품 끝자락에 미소를 담아본다.
심동석 시인의 시적 근원을 대변하라면 아마도 아버지가 아닐는지? 또 한 편의 작품을 이루고 있는 『지게』 또한 아버지와의 일화에 기인한 역사가 재편된 것이라 생각해 본다.
장터에서 알루미늄 지게를 사 왔습니다
어깨에 묻은 나무지게의
아릿한 냄새 때문일까요
어제 이사 온 이웃처럼 낯설었지요
숨었던 달이 풍선처럼 부푸는 저녁
나뭇가리의 지게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 생략
아버지가 몰래 방앗간을 돌아돌고 있습니다 ― 생략
아버지는 박달나무 지게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 생략
늘 아버지를 기다렸던 길/지게를 진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 ― 생략
― 『지게』 일부
나무지게에 배어 있는 아릿한 냄새와 지게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의 주인은 누구인가? 제백사하고 시인의 아버지리라. 이처럼 시인은 작품에서 아버지를 언급하거나 종종 드러내고 있지만 반면 살펴보노라니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조우가 아주 빈약함의 연유가 궁금했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보편성의 결여를 채우고자 주어진 시편 안에서 깊이 살펴보았지만 끝내 시인의 어머니는 등장을 하락하지 않았다. 언제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바라건대 다음 시편들에서는 시인이 어머니와의 조우도 종종 보여주시길 기대해 본다.
― 전략
부지깽이 든 부뚜막 귀신에 쫓기다가/얼굴없이 뒷걸음 치는 엄마/지는 노을 속에 엄마를 만나다가 ― 생략
― 『발목으로 집 지키기』 일부
심동석 시인이 유일하게 어머니 또는 엄마를 차용한 작품이다. 시인의 몇 살 적 엄마인지? 엄마는 조왕귀신에 놀라 겁먹은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엄마의 얼굴이 없다. 관찰컨대 이 시집의 편편에서 더 이상은 시인의 어머니가 등장을 불허하고 있다. 필자는 이 부분을 보편성의 결여로 진단한다. 유수의 시집을 살펴보노라면 엄마 또는 어머니를 차용하는 시편들이 많이 보였는데 이러한 보편성의 결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필자에게 퀘션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 전략
내일은 출근해야 한다고
사위와 딸아이가
어둠이 내리는 마당을 돌아나간다
강아지 같은 손자
태랑이 앞세우고
어디쯤 갔을까?
무더운 새벽
가슴엔 찬바람 소리
애들,
애들이 뭘 놓고 갔나?
마당에 목백일홍 향기
그대로인데……
― 『분실』 전부
우리 속담에 든 것은 몰라도 난 것은 안다고 했다. 백년 손님인 사위와 출가외인인 딸 가족이 잠시 다년간 자리를 둘러 보는 장면이 영화나 드라마나의 한 장면인 양 눈에 선하다. 금방 시인의 집을 떠난 딸 가족이 눈에 밟히는 듯 “애들이 뭘 놓고 갔나?”라는 가슴에 담긴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우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이겠지만 유독 글쟁이들에게는 표현방법으로서 특이한 것이리라. 자식은 영원한 근심걱정의 대상이라 했든가? 부모의 가슴에서 자식걱정을 놓는 순간이 세상과의 이별이라고 어른들로부터 들은 말이 있다. 그러나 자식의 마음은 제 자식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것으로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딸과 사위와 외손자가 잠시 머물다 떠난 자리를 둘러보는 시인의 심정은 딸과 사위와 외손자가 먼 길을 달려 집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도달하는 순간까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자식이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고 이해한다면 차를 달려 가는 도중에라도 거의 도착하고 있다는, 거짓으로라도 안부전화를 해 준다면 마음졸이며 기다리는 밤새움의 고통을 겪지 않을 것을…….
아득한 벼랑
생채기진 가슴으로
헤매어도
끝내 찾지 못하는
마음자리 하나
차가운 암벽 어디에
그 어디에
꽃다운 말씀은 숨어 있는가?
시월
가슴 홍역 꽃
또 도지고 있다
― 『담쟁이』 전문
시인의 시선에 잡힌 당쟁이의 생명력을 마치 모니터를 통해 보고 있는 듯하다. 제2연, “차가운 암벽 어디에/그 어디에/꽃다운 말씀은 숨어 있는가”에서는 살아 있음에 끊임없는 운동력의 수반을 거부할 수 없음과 아울러 생명력의 존재성 차원에서 담보되지 않은 희망성마저도 외면하지 못함을 노래한 것이라 추측된다. 생명체 스스로를 유지하는 힘의 원천을 종종 담쟁이를 통하여 비유하는 바, 도종환의 담쟁이와도 비교되는 작품이다.
“저것은 벽/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그때/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로 시작하여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결국 그 벽을 넘는다”로 끝나는 도종환의 담쟁이는 어떠한 고난상황에서도 포기를 모르고 자라다가 종내엔 한계를 극복하는, 생명력 유지를 담보하는 것이라면 심동석의 담쟁이는 생명에 대한 존재론적 가치와 존재하는 것들의 종말론을 아름다움으로 치환한 것은 아닐지? 문학적 유명성에서라면 근접을 허용치 않는 도종환의 담쟁이를 능가하는 작품이라고 감히 언급해 본다.
마지막 연 “시월/가슴 홍역 꽃/또 도지고 있다”는 모든 초목의 엽록색 상실이 담쟁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닐진데 시적 화자로서의 시월 담쟁이는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내재된 것이기에 광의로는 인간의 평생을 종래적으로 아름다움이라 표현한 것은 아닌지.
― 생략
누가 숨겨놓았나
서남쪽 바다 한 곳
푸른 파도소리 배고 누운 여인
― 『홍도紅島』 일부
서해 먼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을 숨겼다고 표현하는 시인! 더하여서 작은 무인도를 여인으로 묘사한 시적 관찰력은 심동석의 시적 자아를 위해 끊임없이 끌어올리고자 노력하는 시인으로 부를 수밖에……. 만약 그가 학과선택에서 문학을 전공했다면 과연 현재의 심동석이 어디쯤에 위치해 있을까?를 나는 상상해 본다. 살펴보면 시인은 문학판과는 거리가 상당히 먼 위치에서 세월의 많은 부분을 보냈다고 사료되지만 시인의 가슴 깊이에 내재된 시적 자양분은 부피를 가늠할 수 없는 질량을 보유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봄 아침/은빛 햇살 쏟아지는 창가/아내는 눈을 감는다//찻잔의 온기를 두 손으로 감싼 채//아내의 얼굴에/반짝이는 햇살의 날개들을/커튼으로 가만히 쓸어내리자//늘어가는 주름도 지워버리는/웃음꽃/눈이 부시다
― 『웃음꽃』 전부
항아리를 닦는다/백년의 바람을 마신 된장 빛 항아리//아내의 손이 크고 작은 동그라미를 그린다/손길 따라 푸른 이야기가 돋아난다 ― 생략
― 『항아리를 닦는 손』 일부
― 전략
어디서 숨겨 왔는지/유채꽃 몰래 키우던 아내가/큰 처형에게 노란 꽃가루를 날리자 ― 생략
― 『단디이 바아라』 일부
― 전략
그 길을 함께 걸어오며/숯이 되었을 가슴 같은 오디 한 줌//고깔에 담아/아내에게/가만히 건네 주었다//초록 고깔 속에/또 하나의 아침 해가 숨어 있었나/아내의 얼굴이/은빛 여울로 빛나고 있다
― 『고깔 속의 해』 일부
― 전략
이마에 땀을 딲아주던 아내는 물음표를 남기고 방을 나간다 ― 생략
아내의 목소리가 꿈결에서 망치처럼 내 가슴을 때리고 있었다 ― 생략
― 『못대가리들』 일부
잠시, 모난 숨결을 다듬던 아내는/병아리처럼 종알대는/여울 속으로 들어간다 ― 생략
― 『맨손으로 황어黃魚 잡기』 일부
시인의 아내 사랑이 깊은 침묵과 함께 드러난 작품들이다. 평소 시인의 아내 사랑을 목도해온 터라 아내를 기저基底에 둔 시편들을 심심찮게 보게될 것이라 생각했던 터다. 환한 햇살 속에 여과 없이 드러난 아내의 주름살의 원인이 마치 자신에게 있다는 듯 고해성사와 같은 어떤 회한이 드러난 작품을 읽으며 평생을 동고동락하는 동지자적 입장에서 해도해도 끝나지 않는, 집안 일에 지친 아내의 노고를 한 줄의 시어로 위무하고 있는 시인의 깊은 속내들이 돋보인다. 반면 나는 언제 한 번 아내의 주름살에 마음 아려한 적이 있는지를 돌아보았다. 아마도 이러한 류의 시편들을 앞으로도 종종 만나게 될 것이란 예감이 드는 건 필자만의 생각일지…….
너의 전화를 받는다/지금쯤은 풋보리 바심하던 마당/꾹-죽, 꾹-죽 보리개떡/중략//유년의 시간이 기울도록 전화를 받는다/봄 깊은 무쇠 솥 풀뿌리 익는 냄새/절름대던 옛 봄은 돌아갈 줄 모른다/꾹-죽, 꾹-죽 보리개떡
― 『뻐꾸기』 일부
경운기를 강냉이 밭에 눕혀버린/뒷집 할아버지/경운기가 부서지고 강냉이 밭이 망가져도/팔순 몸 멀쩡한 건 조상님 덕이라고/허허허~/강냉이 속 알같이 웃으신다
― 『말씀』 일부
로컬리즘이 배경으로 깔린 작품이다. 어머님의 품 속 같은 포근함이 도사리고 있다. 시인은 보릿고개를 경험한 세대다. 아침끼니를 건너뛰며 등교하던 옛시절은 아무에게나 담겨 있는 추억담이 아니지만 시인 역시 지난 시절 다중의 범주 안에서 체험했던 일상중의 하나가 아닐는지. 자랑스러울 수 없는 빈한했던 시절의 먹거리에의 욕구가 꾹죽으로 치환된 것은 그나마 그 시절에는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부족한 식량을 늘리기 위한 방법론적 레시피인 국과 죽을 꾹죽이라 했는데 꾹죽은 국어사전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은, 더러는 국어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은 낱말인 것이다.
시인은 오래지 않은 저쪽 시절로 돌아가 지금은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보리개떡까지도 그리움의 대상에 끼워넣고 있다. 뻐꾸기 울음소리를 먹거리였던 꾹죽으로 의성화하여 추억담으로 대신하고 있음은 시인의 지난 시간들이 로컬리티에 기인한 것이리라. 꾹죽은 이름하여 잡탕죽에 다름아닌데 그것이나마 풍족했다면 보릿고개를 체험한 세대들에게는 추억이 아니리라. 그리고 보리개떡까지를 추억담으로 승화시켜 오늘날의 6~70대들에게 지난 시간들을 더듬게 하는 시인의 시적 마력이 돋보이는 것이다.
보리개떡!
필자에게는 외할머니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하는 소중한 추억의 언어이기에 한번 더 음미하며 입맛을 다셔본다.
좌판에서 꿈꾸는 작은 배/짙푸른 바다를 그리는 눈동자에/두고 온 수평선이 그네를 탄다/등허리에 화인 찍힌 물결무늬는/한 생애로 출렁이는 파도소리다/머리가 잘리고/꼬리가 잘리고/둥근 밥상에 오를 바다의 냄새다
― 『고등어』 일부
고등어는 꽁치, 명태, 도루묵 등과 함께 서민들의 밥상에 가장 빈번하게 오를 수 있는 생선이었다. 특히 고등어는 개체가 크고 살집이 깊고 두툼하여 고등어 한 마리로도 여러 식구가 섭섭찮게 먹을 수 있는 생선이지만 우리네가 밥상에서 자주 마주치던 생선은 아니었다. 시인은 밥상에 오른 고등어 한 마리에서 지구의 ⅔를 차지하는 바다의 냄새를 끌어올리고 있다. 문학론적 확장성의 일부분이지만 심동석 시인의 새로운 이력에 서광을 담보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닷새만에 갱구로 돌아왔다
마스크 자국이 일그러진 낮달처럼 찍히고
검게 부어오른 얼굴로
작업복에서 아직 막장의 열기가
마지막 숨결처럼 하얗게 피어올랐다.
동료들은 탄식과 웅성대는 울타리를
맨발로 달려온 아내의 울음이 허물기 시작하자
하늘만을 고집하던 그의 이마가
아내의 무릎으로 천천히 돌아 누웠다
가슴에 참아온 말을 조심스럽게 건네듯
아직도 출구를 찾는
살점이 떨어저 나간 손을 펴자
가쁘게 몰아쉰 호흡처럼 꼬리 잘린
메모지 한 장
여보잘사라딸아이는 간호사
작은 놈 - 으, ㄴ……
― 『化石』일부
산업전사라며 팔둑에 힘주어/불을 캐던 때가 있었고/불을 가져온 죄로/간 대신 폐를 내어준 사람들이 있다 ― 생략
― 『죄와 벌』 일부
사회부 기자의 사건수첩 속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막장 밖의 기록이나 다름없는 작품을 읽으며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생사를 걱정하기 앞서 자식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소리 아닌 신음이 천지간으로 퍼져나가는 문자는 살아있는 가족들의 아픔과 시인의 안타까움이 동시성을 형성하고 있지만 이 시의 창작노트는 상상에 기인한 것이 아닌 목격담의 일부라 짐작된다. 지하 막장이 붕괴돼 생사를 다투던 갱 속의 광부들을 걱정하고 염려하던 위치에서의 심동석 시인은 붕괴사고가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자신의 책임인 양 안타까움 이상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시기가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시간 이전부터 심동석 씨는 이미 시인으로서의 준비가 완성됐던 것이리라 생각된다. 시적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화석의 마지막 연 2행은 모든 인간이 가슴 깊이에 담고 있는 자식에 대한 숙명이리라.
아버지의 낫에 전제된 보릿고개가 존재하던 시절, 대한민국의 천지간은 호구지책 마련에 아비규환이었다. 지금과 달리 일자리가 귀하던 시절이다 보니 건강하고 힘이 있는 젊은이들은 후일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취직이 용이한 탄광촌으로 모여들었었다. 삶을 누리던 사람들이야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날 온돌 아궁이에 연탄불을 피워놓고 편히 지냈지만 가난한 젊은 광부들은 지하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석탄 채광으로 삶을 여위하다가 탄광매몰로 아름다운 생을 마감하기 일쑤였다. 이름하여 산업역군이라 불리어지던 무렵의 삶의 편편들이 시적 고뇌로 생산된 작품에서 지난한 삶의 애환을 보게 된다.
그렇듯 인간이란 부모의 위치에 다다르면 아들딸의 미래가치에 희망을 담는 법인데 담보되지 않은 희망사항을 엠뷸런스에 실려가면서까지 각혈처럼 뱉어내는 사고자인 광부를 시인은 동료 이상의 위치에서 목격하고 아파했던 것이 아닐지? 탄광지역에서 딸은 간호사, 아들을 지칭하는 듯한 작으, ㄴ……은 과연 무엇을 시키고 싶었는지? 호흡의 끝자락에 담아낸 화석 그 뒷시간의 결과론에 씁쓸함을 음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전략
천형天刑 보다 무서운 건 아이들/청무같이 자라야할 아이들이라며/아직, 불을 캐는 사람들이 있다
― 『죄와 벌』 일부
경동탄광 소장으로 재직하며 목도했던 일상 『죄와 벌』의 일부를 체험론적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탄광지역 광부들의 일상을 목도하며 지켜낸 시인은 자칭 광부시인 제1호라는 수식어를 소유한 정일남 시인과는 또다른 유형의 작품을 빚어내고 있다. 유려한 시적 이력의 정일남 시인과는 동향이며 많은 부분 동질성이 내재돼 있지만 자리했던 위치의 상이함에서 시각성의 차이를 드러냄을 볼 수 있다.
준경묘 소나무 숲에 매미들이 역사서를 읽네/그날, 압록강에서 말발굽소리 시작되었고/만월대는 아침을 홰 올리는 깃발 가득했다 하네
― 『하루』 부분
고려장군으로 요동벌 정벌을 나섰다가 여타한 악조건과 담보되지 않은 자신의 미래가치에 의문을 품은 나머지 고려조정의 뜻에 반하여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결국 조선창업의 대업을 이룬 태조 이성계의 5대 조부 양무장군을 모신 묘역에서의 하루를 시사화한 작품이다. 조선 최고의 명당이라고 소문난 양무장군 묘역은 수많은 풍수들과 지리학자들이 탐방을 오가는 명소중의 하나다. 이 지역은 금강송 자생지로서 년전, 화제로 소실된 숭례문을 복원하면서 대들보로 사용하고자 우수형질의 금강송 20 그루를 벌목하여 숭례문 복원에 사용한 역사적 사실이 있거니와 충남 보은의 정2품송과 사돈을 맺은 금강송이 군락으로 자라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작금 정이품송과 준경묘역 인근 금강송의 자목 수백 그루가 잘 자라서 대한민국 국토의 요소요소에 기증되어 그 위용을 뽐내고 있는 것도 시인에게는 시적 자산이 된 것이다. 부언하노라면 특이할 것도 없는, 탄광지역이라는 지역성과 심동석 시인의 오랜 직장생활 등으로 인한 한계성 탈피가 용이하지 않을 터임에도 시선의 다양성을 잃지 않음이 나타난 것이라 추후의 작품들도 기대하는 바가 크다할 것이다.
아흐레 동안 제 키를 아홉자 부풀리고 또 뒤꿈치 드는 눈꽃들 티브이는 전선으로 제 혀를 묶었고 버스는 길을 잃었다고 매운 바람에 기별을 전한다 언덕이 더욱 둥글어지고 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두타산頭陀山이 신음하는 소리를 안고 천천히 골짜기를 돌아 나오는 애저녁이 눈 속에 묻힌 창문을 기웃거리자 솜사탕 모자를 눌러 쓴 언덕의 집들이 하나 둘 주황색 불빛을 풀어놓고 있다
불빛의 올 하나를 팽팽하게 잡고 눈길을 가면 만날 수 있을까 인적 끊긴 역 마당에 서성이는 너를 아직도 떠나지 못한 목쉰 기차의 기적이 눈 속에 새파랗게 떨고 있는데……
푸른 너를 찾으려면 지나간 빛의 속도를 앞질러야 한다 네게로 가는 나의 숨찬 발걸음에 온몸이 까맣게 타버리면 너는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가슴으로 꽁꽁 묶어줄 수 있을까?
밤새 쌓이는 눈이 재를 넘는 소문처럼 부풀고 너와 나의 거리가 푸른 강물 소리로 풀리면 새벽 네 발자국 속에 숨은 말들이 폭설이 쌓인 언덕으로 걸어 나와 동백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 『폭설』 전문
폭설은 강원도 영동지방의 기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흐레 동안 내린 폭설은 평지와 언덕의 경계를 지우고도 부족하여 때로는 산과 마을을 하나로 묶어놓는 마법사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시인은 외부와의 통신이 두절된 극한 상황에서도 무엇인가를 찾겠다는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 이미지 속에는 잃어버린 시인의 사랑도 있을 터, 또한 시인이 성장하기까지 외부로의 드나들기를 가장 많이 이용한 폐역 하나쯤 향수로 깊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지? 그리고 시의 끝장을 장식하고 있는 “……동백꽃으로 피어나고 있다”가 세상사에 대한 시인의 해피엔딩이라면 조용한 갈채를 보내고 싶다.
수백 명이 타고 가던 배 한 척
남해바다 뱅골수도에 침몰하였다
몰래 배의 심장을 누르며 빠리빨리
바다만 건너면 된다던 이들은
기울어가는 배보다 더 빨리 제 혀를 묶었다
거리의 꾼들은 네 탓이라는 배에 올라
제 울대의 높이와 길이만 재단한다
여의호의 선원들과 선주는
물구나무를 선 채 휴식중이라
이 땅의 일기예보나
잡풀의 탄식은 들을 수 없다고 한다
정말, 이상이 없는가?
칠천만이 타고 가는 배
배 한 척
― 『배 한 척』 전문
2014년 4월 15일 오후 9시, 인천항을 출발하여 밤새 제주도로 향행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다음날 오전 10시 30분, 진도 땅이 바라다 보이는 뱅골수도 해역에서 선채가 한쪽으로 기운 채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대한민국 재해역사에서 이러한 대 참사는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세월호의 침몰원인을 구명하지 못한 채 현재까지 정치분쟁화중인 것은 안타가운 일이다. 가족을 잃은 유가족 입장이야 형언불가하겠지만 당시 국가를 이끌던 박근혜 정부는 정치적 존립기반마저 상실한 채 곧이어 이양된 진보정권과의 정쟁에서 회생력을 찾지 못함을 볼 수 있다. 보수와 진보 또는 진보와 보수 간의 진영싸움의 중심에는 지지세력으로 갈라진 국민들만 있을 뿐인데 시인은 그 이전의 사건, 즉 분단국가에서의 통일 이후까지를 걱정하고 염려함을 보여주고 있다.
삼척 바닷가 다 돌아도 내 발자국 따라와 출렁일 바다는 없고 파도마저 숨어버려 무심코 찾아간 클라치
― 생략
바람난 바다/봄 바다가 주는 짙푸른 문장들을 메모지에 받아 적으며
― 『바다 한 조각』 일부
클라치는 삼척의 예술인들 중 일부가 종종 들려서 파돗소리를 들으며 문학과 예술을 논하는 삼척해수욕장 내에 자리 잡고 있는 커피샾이다. 대개의 예술인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커피값에 끌려 작정하고 클라치를 찾아가는데 심동석 시인은 무심코 찾아가서 서둘러 찾아온 바람난 봄바람을 시작노트에 담았다고 실토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옹기가 아닌, 도자기를 대하는 시인의 자세가 아닐지.
우체국 지날 때/깊고 시린 눈동자가 발걸음을 묶는다/내 몸에 흐르는 피의 빛깔/살 냄새를 기억하는 듯/온몸 쓸며 지나는 그/이마에는/시간의 잔물결이 짙게 고여 있다//걸어가며, 천천히 걸어가며/돌아보다 마주친 눈빛/가슴으로 쿵쿵 북소리 울리고/잠겼던 그리움의 빗장이 덜컹덜컹대는데/굽은 등의 그녀는 아무 일 없다는 듯/천천히 길 모퉁이를 돌아서 간다//발자국만 남은 길 위에 꽃이 핀다/봄, 가을 가슴에 홀로 피던/한 송이 붉은 꽃
― 『붉은 꽃』 전부
시인이기를 자처한 일상의 흔적들이 『바다 한 조각』을 분만하고 있다. 시인의 시작 노트를 보는 듯 하다. 시인은 상상이 아닌 목격자론적 입장에서의 시적화자를 찾아내고 있으며 나아가 우체국 정문 앞에 망부석처럼 서 있는 우체통을 일별하며 끌어올린 『붉은 꽃』은 심동석 시인의 시적 자아인 것이다.
시인은 우체국 정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붉은 색의 우체통을 일별하며 그 부근을 지나간다. 앞이든, 옆이든, 차를 타고 지나가든, 보행중이든 관계가 없다. 그 순간 시인의 시선에 잡힌 무엇이 있다. 서술에 내재된 물상은 아픈 그 무엇이다. 시의 그림자가, 실루엣이 반증하는 것은 무엇인가? 혹여 필자가 지나치며 무심코 놓친 등 굽은 여자의 희미한 실루엣은 아닌지?
한 시절 호황을 누린 붉은 편지통! 가정집의 전화기가 일상화 되고 손전화기가 개개인의 손을 차지하기 시작하자 편지라는 명사는 차츰차츰 국어사전에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다. 먼 훗날 우체통이라는 낱말마저도 국어사전에서 빠져나가면 그 언어는 어느 곳에서 존치할지? 그야말로 박제될 시간이 목전에 와닿은 우체통은 한결같이 붉은 색이었다. 더하여서 사라지는 것이 어찌 우체통에 한정된 것일까만 마음을 담아내느라 밤새움을 마다하고 고생하며 편지를 쓰던 시절이 세삼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직도 누군가는 자신의 마음을 편지지에 담아내고자 밤을 지새고 있지는 않은지? 사랑이 전제된 마음앓이의 시절을 회억하게 하는 우체통이 붉은 꽃으로 환생한 작품은 시인이 아니라면 언급할 수 없음의 저변에 존재하는 지금은 무가치한 물상일 뿐이리라.
누가
앞산을 빨래방망이로 두드리고 있나
쿵, 쿵, 쿵
물레방아에 감기는 치렁 달빛
늦도록 바라보고 있나
누가 수구재를 내려오고 있나
자박, 자박, 자박
달빛에 젖은 외나무 다리
건너오고 있나
돌아보고
또 돌아봐도
가마소 돌아가는
오십천 물소리 뿐인데……
― 『메아리』 전부
산촌 생활의 체험을 방증하는 작품이다. 일회성 소풍객처럼 한두 번 스쳐 지난 눈길이라면 “물레방아에 감기는 달빛”이나 “달빛에 젖은 외나무다리”를 만날 수가 없다. 이러한 작품을 일컬어 로칼리즘이라 하리라. 로컬리티의 전형을 담고 있는 물레방아간은 문학인이라면 우선하여 이효석을 떠올리고 동시에 메밀꽃을 떠올릴 것이다. 이러한 작품의 소재가 흔재한다지만 많은 시간 우리네는 잊고 지내는 것이 사실이다. 이 작품 속 지역이 심동석 시인의 향리인지는 알 바 없다. 다만 작품 속의 산촌이 두메산골은 아닐지언정 저기압이 심한 날이면 기차의 기적소리가 더욱 큰 울림과 긴 여운의 메아리를 던져놓고 사라지는 그런 곳은 아닌지?
서정성과 시사성을 동시에 적절히 담아놓은 “아버지의 낫”의 편편들이 아름다움으로 빚으져 한결 반가웠다.
제백사하고 등하교를 위해 십여리 길을 뛰거나 걷는 등의 지난 세월을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종종 그리움으로 남아지는 지역이리라. 이렇듯 산촌에서의 유년시절을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그곳이 그리움의 순위에서 대부분 앞순위를 차지할 것인 바, 작품의 기저에 내재된 심동석 시인의 詩의 근원根源들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알게 하는 시간이었기에 반가웠다. 심동석 시인의 시력을 가일층 끌어올리는 작업에 “아버지의 낫”의 상재를 거듭거듭 축하하며 시집 『아버지의 낫』 이 크다란 메아리를 울리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길 기대해 본다.
첫댓글 두타문학 카페에 심동석 시인의 시집 '아버지의 낫' 전재가
21.02.28 에 올렀는데 오늘(2022,1,3) 현재 637명이 시집을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