退溪學과 儒敎文化 第57號 - 고을 사람 중에 나이가 많고 학행과 덕의를 갖춘 한 분을 추대하여 山長으로 삼는다. 또 한 사람을 뽑아 有司로 삼고, 또 돌아가면서 한 사람을 뽑아서 直月로 삼는다. 산장과 유사는 뚜렷한 이유가 없이는 교체하지 않고, 직월은 한 달마다 교체한다. 선사재의 모든 의논은 산장이 주관하고, 모든 일은 반드시 산장에게 물어서 정한다. - 산장이 강당에 들어오면 제생들은 앞으로 나아가 배례를 하고, 이 에 산장은 자리에서 답례한다. 그리고 제생들은 동서로 나누어 선 뒤 서로 향하여 읍을 한다. 무릇 책을읽을 때는 반드시 단정하게 팔짱을 끼고 정좌하며, 마음과 뜻을 다하여 글의 뜻을 힘써 궁리해야 하며, 서로 돌아 보면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 식후에 혹 鳶魚臺와 爛柯臺에 노닐되, 모두 사물을 보고 궁리하여 서로 의리를 묻고 강구하여야 하며, 유희하며 잡담해서는 안 된다. - 직월은 선악을 기록하는 문서를 관장하는데, 제생들이 서재 또는 집에서 하는 행위를 상세히 관찰하여 언행이 이치에 합당한 것이나 또는 학규를 위반한 것 같은 모든 것을 기록한다. 기록한 것을 매달 초하루에 산장에게 드리면, 산장이 선한 사람은 장려하고 악한 사람은 꾸지람을 하며, 가르쳐도 수용하지 않으면 내쫓는다. - 성현의 글이나 성리의 설이 아니면 재실에서 읽지 못한다. 역사책 의 경우는 허락한다. - 여러 생도들은 비록 정기적으로 모이는 때가 아니라 하더라도 한 달에 한번은 정사에 모인다. 대체로 매월 초하루에 모이는데, 초하루 날 이유가 있으면 늦추어 정하되 3~4일을 지나지 않게 한다.
모여서는 의리를 강론하고 직월을 바꾸어 뽑는다. 이러한 학규는 사림들이 향촌의 현장에서 교육의 강학활동을 통해 어떻게 변화를 이끌려고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이의 학규를 그대로 가져 왔다고 하더라도 이는 당시 사족들이 그만큼 공동의 문제의식과 해결방 법에 동의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士族과 庶人을 막론하고 학문에 뜻이 있는 사람에게 모두 문호를 개방한 점은, 조선초에 향교의 교육이 양인 모두에게 개방된 것과 동일하며, 정형화된 향교 교육을 넘어서 私學에서 이를 감당하게 됨을 보여준다. 또한 산장이 강학 활동과 선악의 활동에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산장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산장에는 당시 향촌에서 가장 존경받았던 사족들이 추천되었을 것임은 역시 충분히 예 상 가능한 일이다. 선사재에서의 강학만이 아니라 연경서원에서의 강학 역시 비슷하게 이루어졌다. 연경서원은 원래 퇴계의 제자이면서 聾巖 李賢輔(1467~1555) 의 아들인 李叔樑(1519~1592)이 지은 서원으로 임진왜란에 소실되었다. 이를 1602년 정구와 그 제자 장현광, 손처눌과 서사원 등이 주축이 되어 중건하였던 것이다.21) 이후 이 곳은 대구 지역의 강학 장소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므로 대구 교육의 핵심장소가 되었다. 통강 규약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한 달에 한 번 이상 이곳에 모여 강학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21) 연경서원에 대해서는 구본욱, 2014 연경서원의 경영과 유현들 참조. 한국학논집57
정구 역시 이 서원의 중창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기에 초하ㅅ루와 보름에 열리는 강학회에 반드시 참여하지는 않아도 고문의 역할을 하였으며 자주 왕래하였다. 1613년 연경서원에서의 일화는 강학에 대한 손처눌의 입장을 잘 보여 준다. 연경서원에서 손처눌이 山長이 되어 여러 생도들과 강학할 때 관찰사가 와서 정치와 관한 잡담을 하였다. 이에 손처눌은 관찰사에게 전일에 비록 소학을 강학하기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강학도 없으 니 말만 하고 실천은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22) 4. 교육의 내용 손처눌이 교육에 사용한 교재는 다음과 같다.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주역, 춘추, 역학계몽, 심경, 근사록, 태극 도설, 안씨가훈, 이정전서, 朱子書, 이락연원록, 주문공행장, 가례, 예설, 漢 書, 심경후설, 퇴계집 이 교재들은 다양하지만 대체로 사서오경 등 성리학 관련 서적이 대 부분을 차지한다. <연보>나 모당일기를 통해 살펴보면 이들 교재를 사 용하여 강학한 기간을 알 수 있다.23) 22) 慕堂日記 上, 485쪽 23) 표는 손처눌의 연보와 모당일기 및 황위주, 송희준의 연구를 참조하였다. 黃渭 周, 2003 慕堂 孫處訥의 文學活動과 作品世界 慕堂 孫處訥先生의 生涯와 學問(
그 가운데 손처눌은 소학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모당일기를 살펴 보면 소학을 읽었다는 기록이 148회나 보일 정도로 여러 번에 걸쳐 소학을 강독하였다. 이것은 소학이 학문적으로나 실제 과거에 응시 에서나 모두 중요한 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곧 과거의 시험에서 소학 은 照訖講에서 강독을 하여 평가의 소재가 되는 등 반드시 익혀야 할 교재였다. 그러나 소학이 중요시되었던 데는 과거에 필요해서만은 아니었다. 주지하다시피 소학은 근사록과 함께 사림들이 가장 중요한 책으로 여긴 대상이다. 조선 초기에 형식이나 제도에 치우친 것이 아니라 실천 으로서의 성리학을 염두에 둘때 소학의 중요성은 충분히 인정되는 바였다. 소학을 강조한 대표적인 사림이었던 김굉필이 玄風에 세거하였던 것은 대구지역에도 충분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김굉필은 주지하다 시피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 는 죄목으로 杖 80대와 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서 2년 동안 유배살이를 하였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힘썼는데, 특히 조광조와의 만남은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당시 조광조는 17세로 魚川察訪(어천은 지금의 평안북도 영변)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왔다가, 인근에서 유배 중이던 김굉필을 찾아가 수학함으로써 학문을 전수받았다. 이후 김굉필은 순천으로 유배지가 옮겨지고 갑자사화로 인해 참형되었지만그의 영향은 무시될수 없었을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어느쪽으로나 소학의 중요성 때문에 손처눌은 강학에서 이를 가장 열심히 공부한 것 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