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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조란 무엇인가? -문무학| 창작 이론 자료실
새벽하늘 | 조회 27 |추천 0 | 2004.09.16. 17:47
2. 시조란 무엇인가?
시조사 절요(時調史 節要)
소나기 개인 하늘 무지개가 아니로다
옛 선비 풍월(風月) 읊어 띄운 잎이 아니로다
이웃 집 빌려온 접시는 더더구나 아니로다.
가야금 삼기시고 동활자(銅活字) 짓던 그 슬기로
천년 이은 손 때 입김 쐬고 다듬은 것
천하의 어느 구슬이 이다지도 옹골지랴.
치마끈 곱매듯이 지킬 것 매몰차도
흐르는 물결에는 거스르지 않는 여유
우리네 온갖 사연을 다 거두고 남느니.
만수산(萬壽山) 드렁칡도 얽지 못한 일편단심(一片丹心)
만월대(滿月臺) 저녁답에 목동의 피리소리
다정(多情)도 병(病)되는 삼경 소쩍새가 울었다.
삭풍(朔風) 부는 장백산(長白山) 달 밝은 한산섬
동창(東窓)엔 노고지리 강호(江湖)엔 해오라비
동짓달 기나긴 밤에 귀 세우는 신발소리.
벚나무 길길이 자라던 날의 아픔
가시울의 그믐달 사월에 진 꽃망울들
이 겨레 밟아온 자취 거울하여 뵈도다.
장순하(張諄河) : 1928년 전북 정읍 출생, 1957년 개천절 경축, 제1회 전국 백일장 시조 장원. 『백색부』,『묵계』등의 시조집이 있다.
작품 <시조사 절요>에 부분 인용된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긔 어떠하리 / 우리도 이 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
이 몸이 죽어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야. -정몽주-
흥망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석양에 홀로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원천석-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이조년-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 만리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 긴 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것이 없어라. -김종서-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겨 /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야 / 어떻다 인각화상(麟角畵像)을 누가 먼저 하리오. -김종서- <인각화상, 중국 한나라때 공신의 초상을 걸어놓는 사당)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 소칠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남구만-
강호에 노는 고기 즐긴다 부러마라 / 어부 돌아간 후 엿 듣는 이 백로로다 / 종일을 뜨락 잠기락 한가한 때 없어라. - 이정보-
동짓달 기니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 어른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황진이-
설월이 만창한데 바람아 불지 마라 / 예리성(曳履聲) 아닌 줄은 판연히 알건마는 / 그립고 아쉬운 적이면 나도 몰라 하노라. -무명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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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한 장순하의 ꡐ시조사 절요ꡑ는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조의 흐름을 한 편의 작품에 담은 것이다. 첫째 수는 시조가 우리의 고유한 문학 형식이라는 것을, 둘째 수는 시조 형식이 조상의 슬기로 옹골지게 창조된 것이라는 것을, 셋째 수는 시조의 형식에 담을 수 없는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넷째 수, 다섯째 수는 우리 시조사에 빛나는 작품들을 구로 중심으로 해서 시대별로, 주제별로 연결, 작품화했으며, 마지막 수는 일제강점기와 4.19 등 시조 작품 속에 우리 겨레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만으로도 시조가 갖는 의미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시조가 우리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 흘러오고 있다는 것을…….
시조는 한국의 고유한 정형시다. 시조의 형식은 고려 말에 정제되어 현재까지 한국인의 사상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 양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시조의 기원에 대해서는 크게 외래연원설(外來淵源說)과 재래연원설(在來淵源說) 로 나뉜다. 외래연원설에는 불가기원설과 한시기원설이 있으며, 재래연원설에서도 신가기원설, 향가기원설, 민요기원설, 속요기원설, 별곡기원설, 음악기원설 등의 여러 학설이 있다. 그러나 재래기원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고, 재래기원설 중에서도 민요기원설과 속요기원설에 동조하는 학자들이 많다.
ꡐ시조ꡑ라는 명칭은 조선 영조 때 신광수(1712~1775)의 『석북집(石北集』「관서악부(關西樂府)에 기록된ꡐ一般時調排長短 來自長安李世春」(일반적으로 시조는 장단을 배열해서 부르는데, 그것은 장안에 사는 이세춘으로부터 비롯되었다)에서 처음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시절가조(時節歌調)로도 불렸으며, 이는 시절가 또는 새로 유행하는 노래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처음은 문학 형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음악 곡조의 명칭이었다. 조선 후기까지도 문학 형식의 시조라는 명칭이 통일되지 않아서 단가(短歌), 시여(詩餘), 신번(新飜), 장단가(長短歌), 신조(新調) 등이 혼용되었지만, 20세기 초부터 문학 형식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문학적으로는 시조시형, 음악적으로는 시조창이라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시조의 형식은 3장 6구다. 시조의 형식이 3장 6구란 것은 3 . 4 음절을 기준으로 해서 두 개의 숨 묶음(音步)으로 이루어진 것이 한 구인데, 이 구와 구가 합쳐져서 한 장을 이루며, 이 장이 초. 중. 종장으로 구성되어 시조 1 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장의 첫 음보는 3음절이어야 하고, 둘째 음보는 5음절 이상이어야 한다. 초, 중장의 다른 음보는 우리 글이 소리글자인 특성을 살려 한 두 음절의 가감이 허용된다. 이런 시적 장치는 초, 중장에서 평면적으로 전개되어 오던 음보가 평면성을 탈피하여 역동적으로 전개되게 하여 시적 생동감을 깃들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형식이 시조의 기본형이고, 이를 단형시조(단시조)라 한다. 기본 형식에서 종장의 첫 음보, 즉 고정된 3음절을 제외한 어느 한 구가 길어진 것을 중형시조, 2구 이상 길어진 것을 장형시조라고 한다. 이를 음악적으로는 평시조, 엇시조, 사설시조라고 하였다.
갑오경장(1894년) 이전의 시조는 제목도 없이 쓰여지는 단형시조가 대부분이었으나 근대 이후는 제목을 달고, 한 제목 아래 단형시조를 거듭하여 한 편의 작품을 이루는 연형시조(연시조)가 창작되었으며, 현대시조는 대부분, 이 형식을 취하고 있다.
문학의 형식은 어느 나라에서나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이 많은데, 시조는 발생 초기의 형식을 깨뜨리지 않고 지금까지 창작되고 있다. 이는 시조라는 문학의 형식이 한국인의 삶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가장 이상적이라는 사실을 잘 증명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조의 단아(端雅)한 형식은 문학상의 한 천재가 나타나 시형을 개발한 것이 아니라 민족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듬어져 왔다는 것도 중요한 특성이다.
발생 초기인 고려 말의 시조로는 우탁(禹倬 1262-1342)의 탄로가(嘆老歌), 2편,
春山에 눈 녹인 바람 건 듯 불고 간데 없다
저근덧 빌어다가 불리고자 머리 위에
귀 밑에 해 묵은 서리를 녹여볼가 하노라.
한 손에 가시를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렀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이조년(李兆年1269-1343)의
梨花에 月白하고 銀漢이 三更인제
一枝春心을 子規야 알랴마는
多情도 병인양 하여 잠못 일워 하노라.
이존오(李存吾1341-1371)의
구름이 무심탄 말이 아마도 허랑하다
중천에 떠 있어 임의로 다니면서
구태여 광명한 날빛을 따라가며 덮나니.
등의 시조가 있다. 이상의 시조 발생 초기의 작품들의 형태가 그대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성리학을 신봉하는 유학자들에 의해 절의가(節義歌: 임금이나 나라에 대한 절개와 의리를 주제로 한 시조)와 회고가(懷古歌: 옛 자취나 지나간 일을 생각하여 지은 노래, 주로 고려가 망한 후, 그 유신들이 고려를 회상하며 부르는 노래를 말하는데 길재와 원천석의 시조가 유명하다)가 주로 쓰여졌다.
조선 전기에는 한가롭고 평화스러운 경치를 읊은 서경시가 많이 쓰였지만, 이들 작품이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유교적인 충의사상(忠義思想)이었다. 성삼문(成三問1418-1456)의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蓬萊山 第一峰에 落落長松 되었다가
白雪이 滿乾坤할제 獨也靑靑하리라.
는 충절의 시와 주세붕(周世鵬,1495-1554)의 오륜가에서 나타난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지아비 밭갈러 간데 밥고리 이고 가
반상을 들오되 눈썹에 맞추이다
친코도 고마우시니 손이시나 다르실까.
조선 후기에는 실학사상(實學思想)이 싹터 시조 창작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형식적으로는 장형시조가 많아졌고, 시조의 내용적인 면에서도 인간의 내면을 표출하는 것으로 변화하고, 시조 창작 계층이 유학자들뿐만 아니라 서민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장형시조의 창작은 시대 흐름을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표현도 매우 대담해져서 오늘날에 보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작품들이 생산되었다. 이정보(李鼎輔 1693-1766)의 다음과 같은 작품을 예로 들 수 있다.
간 밤에 자고 간 그 놈 아마도 못잊어라 /와얏놈의 아들인지 진흙에 뽐내듯이/ 사공놈의 정녕인지 사엇대로 지르듯이 두더쥐 영식인지 곳곳이 뒤지듯이 평생에 처음이요 흉증이도 야롯제라/ 전후에 나도 무던히 겪었으되 참 맹세하지 간밤 그놈은 차마 못잊어 하노라.
이 작품에 대해 시인 고은은 ꡒ시인가, 음담패설인가, 오랫동안 점잔 빼온 양반시조에 지겨운 나머지 민중의 사설시조가 나와 인간의 성정(性情)을 대담하게 노래한다. 바로 여기에서 한국 근대의 전야가 있게 된다. 숙종․영조 연간의 중인시인 이정보의 작품이다. 화자는 물론 농익은 여인이겠다.ꡓ(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99년 6월 2일)고 했다.
갑오경장 이후의 근대시조는 1876년 박효관․안민영이 편찬한 『가곡원류(歌曲源流)』이후 1906년까지 동면에 들었고, 1906년 7월 21일「대한매일신보」<사림(詞林)>란에 「혈죽가(血竹歌)」가 발표된 이후 국민 계몽과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역할을 해 왔다.
협실의 솟은 대는 충정공 혈적이라
우로를 불식하고 방즁의 풀은 뜻은
지금의 위국충심을 진각세계
충정의 굳은 절개 피를 맺았다가도
여누상의 홀로소 사만민을 경동키는
인생이 비여잡촉키로 독야청청
충정공 곧은 절개 포은선생 우희로다
석교에 솟은 대는 션죽이라 유전커든
허물며 방즁에난 대야 일어무삼
-寺洞寓 大丘女史-
이 작품은 근대시조의 효시가 되는 작품인데, 충정공 민영환이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반대하여 자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종장 끝 음보가 생략되고 있는데, 이는 종장 셋째 음보의 의미를 강하게 새기기 위한 장치로 해석한다. 이 작품 뿐 아니라 이 시기 대부분의 작품들은 국권 회복을 위한 국민적 단결의 호소, 독립운동의 궐기 촉구, 매국노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야유로 등으로 자주독립과 개화사상을 고취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1926년 최남선은 『백팔번뇌』라는 시조집을 내놓는다. 108편의 시조를 담고 있는데 작품집의 맨 마지막 작품으로「깨진 벼루의 명」을 실었다.
다 부서 지는 때에
혼자 성키 바랄소냐
금이야 갓슬망정
벼루는 벼루로다.
물은 듯 단단한 속은
알이알가 하노라.
-깨진 벼루의 명-
이 작품의 경우 한 구를 일행으로 기사하여 시조 기사법의 새로움을 보여주었다. 이후 현대시조는 현대인의 삶과 관계되는 모든 문제를 소재로 하여 이 시대를 노래하고 있다. 이렇게 시조는 단순히 문학 형식의 하나가 아니라, 백의민족(白衣民族)의 뜨거운 숨결 그 자체다. 그리고 우리 민족 최대의 자랑거리다.
그러나 시조가 역사의 짙은 그늘로만 행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민족의 자랑거리인 이 형식을 현재는 물론이고 다음 세대에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시조를 창작하는 시인들이 좋은 작품을 빚어야 한다. 좋은 작품이란 시대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시조는 형식이 있다. 그리고 오래되었다. 내용 면에서도 보수성이 강하다는 등등의 말은 사실 시조에 대한 오해다. 이런 일반적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시조는 더욱 시대에 밀착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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