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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발견(애지 2011년 봄호에서)
김나영(문학평론가)
삶이 갖고 있는 아이러니를 생활화 한 시들이 있다. 삶을 부정하기보다는 쉽게 긍정하지 않는 시들이 있다.
사소한 생활의 일부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들이 있다.
1.
바퀴살을 잃어버린 바퀴처럼
심지를 태우는 촛불처럼―아름답다, 매순간 신호도 없이 출발선을 떠나는 영원과 함께
하루 내내 매미 울음에 칠하는 색깔놀이
맴맴맴맴 돌 수 있다는 거
명중한 화살처럼 흔들린다는 거
과녁의 눈부신 동그라미 속에서 허리만 남은 태양이 빛나고 있다, 여름이었으므로
다리들이 몸을 찾는 달리기
다리들의 몸에 갇힌 달리기
그 자리 우뚝 박혀 있는 트랙이여 나무여 명중한 화살처럼 흔들린다는 거 흔들려
만드는 거대한 소용돌이 매미 소리여
모두들 그대로 서 있었다 떠나온 시위에 걸었던 사지와 질러온 허공에 부풀던 머리통,
단단하게 박혀 있는 다리가
몸 안에 새기는 발자국으로
돌고 있는 여름의 허리여 사람이여
바퀴살을 잃어버린 바퀴처럼
심지를 태우는 촛불처럼―아름답다, 영원히 박수도 없이 결승선을 지나는 순간과 함께
맴맴맴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색깔놀이
그리고 뽑혀진 화살과 찢겨진 과녁으로
―신용목, 「무지개 훌라후프」 전문(문학동네, 2010 겨울호)
무지개가 주는 느낌은 어떠한가. 무지개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고난 뒤에 예상치 못한 선물처럼 찾아오는 기쁨으로서 무지개는 상투적인 상징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또한 무지개는 문득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지기 때문에 단발적인 환희의 메타포로도 익숙하게 쓰여 왔다. 무지개의 일곱 가지 색깔은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기 일쑤이지만 누구라도 무지개를 보는 순간 눈앞에 현현된 색깔을 헤아리는 데 집중할 것이다. 그러니까 무지개가 아름답다면 그것이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고, 또한 여러 가지 색깔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무지개의 특성을 완전히 뒤집는 일로써 또 다른 아름다움을 모색하는 시선이 이 시에는 있다. 이 시의 화자는 무지개 무늬 혹은 색깔의 훌라후프를 바라본다. 그 뿐만 아니라 그 훌라후프를 돌리는 일, 훌라후프가 돌아가는 일을 바라본다. 훌라후프는 돌리기 위해 존재하는 사물이고, 마땅히 훌라후프가 돌아갈 때 그것의 표면에 새겨진 무지개는 흐려질 수밖에 없다. 무지개의 색깔은, 적어도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눈에 비치기로는 훌라후프가 돌아가는 순간에 뒤섞이고 더 이상 무지개라고 할 수 없는 무늬 혹은 색깔이 된다. 화자의 시선은 우선 훌라후프의 무지개 빛깔에 닿았지만, 그 다음 그의 시선은 무지개 빛깔을 탈색시키는 훌라후프의 움직임으로 옮겨진다. 그렇게 화자는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그 발견은 달리 말해 훌라후프라는 사물의 특성, 즉 알록달록한 색깔보다 그 사물의 역능에 주목할 때 가능해진다. 사물의 역능에는 그 자체의 기능이 함의되어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 사물의 사용 가치를 누리는 인간의 능동적인 역할이 덧대어져 있다. 그리하여 화자가 단순히 훌라후프에 대해 쓰지 않고 ‘무지개’라는 그것의 특성을 덧붙여 말했을 때, 그 고정적인 사물에서 잠재적이고도 유동적인 에너지를 짐작하게 된다.
시를 좀 더 자세히 읽어보자. 화자는 몇 개의 구절을 반복해서 쓰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1연과 8연의 두 행이다. 이 구절의 반복을 통해서 화자가 강조하는 것은 저 “아름답다”는 진술인데, 정작 그 아름다움의 원천은 비유로써 감춰져 있다. 아름다운 것은 “바퀴”도 아니고 “촛불”도 아니다. 아름다운 것은 잃어버린 “바퀴살”도 아니고 타들어가는 “심지”도 아니다. 아름다운 무엇에 대해 화자가 제시한 일말의 단서는 아름답다는 진술 뒤에 쉼표를 적어 덧붙인 아름다움의 한 속성이다. 이 속성은 1연과 8연에서 다르게 제시되는데, 이때 “순간”과 “영원”의 도치야말로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아름다움의 정의에 연관한 암시일 것이다.
계속 읽어보자. 화자는 다음 연에서 하루 종일 들리는 “매미 소리”를 “색깔놀이”와 연관 짓는다. 색깔놀이라니, 애매모호하게 명명된 그 놀이의 이미지는 청각적인 상관물인 매미소리를 통해서 선명해진다. 매미의 “울음”은 온 종일 “맴맴맴맴” 하고 반복되고, 그 소리의 반복은 허리에서 맴도는 훌라후프의 움직임과 연결된다. 한낱 미물일 수 있는, 얼마 남지 않는 생명의 기척은 반복을 통해서 역동성이라는 일종의 에너지가 된다. 그러니까 매미의 울음소리를 색깔놀이에 연관할 때, 화자의 의식 속에서는 이미 반복되는 그 소리와 반복되는 훌라후프의 움직임이 하나로 겹쳐있었을 것이다. 이런 짐작 속에는 또한 이미 한 여름의 뙤약볕 아래에서 숨을 다해 제 존재를 증명하는 것들의, 움직이지 않고도 공간을 변화시키는 힘에 대한 인식이 있다.
그러니까 화자는 매미 소리를 색깔 놀이로, 색깔 놀이를 훌라후프 돌리는 일로 연결시키면서 훌라후프를 돌리는 일이 어째서 매미 소리와 연관하는지를 보여준다. 더불어 그 연관이 색깔놀이라는 명명이 함의하는 알록달록한 무지개 색깔을 환기시키고, 시작과 끝의 구분 없이 제자리에서 맴도는 훌라후프의 운동성에서 망각했던 고유한 무늬 혹은 빛깔을 복원한다. 그러니까 바퀴와 촛불이 아름다움의 비유가 될 수 있다면 그들이 바퀴살과 심지의 미세한 역동성을 정적인 것으로 대체하는 데에서 더욱 거대한 잠재력(“거대한 소용돌이”)을 발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훌라후프를 돌리는 일과 “달리기”를 비교한다. 이 둘의 공통점은 발자국을 새긴다는 것이다. 각각은 좁고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만 다를 뿐, 화자가 보기에 둘 다 다리를 움직이며 발자국을 찍는 일이라는 점에서 같다. 훌라후프를 돌리는 일이 실상 그렇다. 그것을 돌리는 이는 제 자리에 우뚝 서 있는 듯하지만, 조금씩 자리를 옮기며 “흔들린다는 거”다. 화자가 이 시에 “과녁”이라든가 “명중”이라는 단어를 썼을 때 존재는 이미 어떤 자국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국은 고정되고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부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무엇으로 지시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끝내 화자에게 아름다움은 일종의 에너지를 가리키는 말이라 하겠다. 과녁에 명중한 “화살”은 그곳에 붙박여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명중한 그 힘에 의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을 텐데, 화자는 그 흔들리는 힘이 또 다시 과녁을 찢고 그 자리에서 스스로 뽑혀 나오는 데까지 지속되는 일을 상상한다. 아름다움은 확연한 변화에서 찾을 수 없다. 화자는 시작과 끝을 명확히 구별할 수 없는 일에서, 빨강과 보라가 뒤섞여 아무 것도 아닌 빛깔이 되는 일에서, 그 일들이 지속됨으로써 다시 무화되는 일에서, 시도 없이 시도되는 일에서 비가시적일 수밖에 없는 그 힘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 철의 햇살 속을 가득 메우며 맴도는 소리, 혹은 훌라후프 돌리는 이가 저 스스로 중심이 되어 만드는 무수한 동그라미가 갖는 힘을 부디 무시하지 않기를. 그 순간이 영원으로, 영원이 다시 그 순간으로 “맴 돌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발견한 자의 마지막 울음일지도.
2.
태풍 영향으로 구름은 동진하는데,
저곳에 사람이 있다.
저곳에 사람이 있다.
돌아서서 걷는 사이,
탁자 위 먹다 남은 사과에는 초파리 57마리,
그중 13마리가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우유는 먼저 단백질 성분이 부패하고
소년과 소녀들의 세계 역시
금세 붕괴하리라.
오후 3시 27분 45초에서 오후 3시 27분 57초 사이.
네가 사는 서교동 대우미래사랑 건너편 파리바게트 앞,
소녀의 손에서 아이스크림의 일부가 녹고
네 손톱들은 자란다.
이태 전 열두 살이던 너는
이제 열네 살, 곧 하류인생으로
전락하기 좋은 계절이다.
바람이 네 스커트 자락을 부풀린다.
오후 3시 27분 57초에서 오후 3시 27분 59초 사이,
초파리 7마리가 바닥에 떨어진다.
상한 우유의 단백질이 엉기는 사이,
맥주에서 거품과 탄산이 휘발되는 사이,
검은 비닐봉지에서 과일 껍질들이 썩을 때
부패의 향에 꼬인 초파리 327마리,
비닐봉지 안에서 초파리 112마리가 붕붕거린다.
經을 먹는 당나귀들과 함께 한
내 인생은 3할 대,
3할 대 타율이라면 썩 나쁘지 않다.
승리는 없다, 굴욕과 견딤이 있을 뿐.
빈 궤적을 그리는 헛스윙들,
중력장 안에서 무시로 일어나는 실패들.
서울 중계동의 한 반지하방에서
백골 시신 한 구가 나왔다.
3년 동안 시체가 방치된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반지하방들은 망명자들이 숨기에 좋다.
태풍의 영향으로 구름은 동진하고
저곳에 좀비들이 있다.
저곳에 좀비들이 걸어간다.
―장석주, 「좀비들」 전문(애지, 2010 겨울호)
이 시를 흥미롭게 하는 요소 중 하나는 공간과 시간에 관한 특이한 진술이다. 이 시는 “동진”(東進)한다는 진술로써 시작되고 끝난다. 그리하여 마치 이 시는 곧 태풍이 불어 닥칠 것이라는 하나의 예보와, 한바탕 태풍이 불어간 자리에 다시 태풍이 불어올 것이라는 또 하나의 다른 예보 사이에 놓여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시의 미묘한 분위기는 고요하고 아슬아슬한 폭풍전야의 그것과 흡사하다가도, 한 순간 거세게 몰아쳤다가 사라지는 폭풍 이후의 상황을 연상하게도 한다.
그렇게 분위기로써 조성된 상황 혹은 장면은 특이하지만 그 특이함을 특정한 시공간을 지시하는 특성으로 제시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태풍이 몰려오고 몰려가는 자리를 어떻게 한정할 수 있는가. 한정할 수 없는 자리를 어떻게 지시할 수 있는가. 화자는 그 의문을 짐작하듯이 “오후 3시 27분 45초에서 오후 3시 27분 57초 사이,/ 네가 사는 서교동 대우미래사랑 건너편 파리바게트 앞,”이라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 때, 그 12초 동안, 그 동네의, 그 빵집 앞을 서성이는 “소녀”는 또한 누구인가. 소녀의 나이가 “열 두 살”인지 “열네 살”인지, 혹은 어느 정도의 나이를 소녀라 부를 수 있는지 정해진 바는 없다.
결국 저 시는 극사실적인 진술을 가장하여 가상의 시공간을 그려낸다. 반지하방에서 발견된 백골 시체는 한때 인터넷 상을 달구던 화젯거리였지만, 그 사실은 이제껏 또 다른 무수한 사실들에 뒤덮이고 묻혀버렸다. 사건은 더 이상 일회적이지 않고, 다만 일용될 뿐이다. 저 시의 화자는 그러한 사건의 특성을 시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발견한다. 앞서 언급했던 그 특이한 시공간으로서의 “저곳”은 저곳이 되기 위해서 “사람이 있다”는 존재의 존재증명을 전제로 삼는다. 거꾸로 말하면,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람’이, 또한 거기에 ‘있’기 때문에 화자에게 있어서 거기는 “저곳”이 된다. 이렇게 화자가 마련한 저 시적 배경은 극단적으로 ‘특성 없는’ 시공간처럼 보인다. 수식이나 형용이 완전히 배제된, 완전히 무미한 저곳은, 사람이 있는 모든 곳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저곳은, 마치 우주에서 내려다보는 지구의 다른 지명 같기도 하여서 무한히 확장 가능한 동시에 무의미한 장소이다.
이른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저 시적 상황과 같은 일들은 무수히 발생할 수가 있다. 여름에는 아이스크림이 쉬이 녹고, 먹다 남은 사과에 초파리가 꼬이고, 우유가 부패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보존되는 에너지로 인해 공중을 날던 초파리들은 끝내 쇠락하고, 얼었던 것은 녹아내리고, 구름은 비가 되어 바람 속에 흩어진다. 화자는 “중력장 안에서 무시로 일어나는 실패들”을 그렇게 바꿔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주의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시의 화자가 낱낱의 삶을 사소하고 미미한 것이라고, “하류인생”이라고, “망명자”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말 속에 백골 같은 삶의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반지하방”이라는 곳에 사람이 있다. 지상에 부는 바람이 소녀의 스커트 자락을 부풀릴 때, 지하에 머무는 “빈 궤적”처럼 사람이 부패하고 있다. 그리하여 다시, “저곳”은 사람과 좀비의 있음을 동시에 증거로 삼는 자리가 된다. 화자가 “태풍의 영향으로 구름은 동진하”고 있다는 말을 반복함으로써 시적 상황이 태풍이 다가오는 때와 물러가는 때의 ‘사이’에 놓여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을 앞서 했다. ‘저곳’을 그 ‘사이’의 공간화 된 자리라고 할 수 있다면, 저 시의 1연과 2연의 상황은 빈 행간을 사이에 두고 역전된다고도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1연에서의 ‘저곳’과 2연에서의 ‘저곳’을 똑같이 ‘반지하방’이라고 한다면, 1연은 걸어가는 사람의 시선으로, 2연은 누워있는 시신의 시선으로 묘사되고 있다. 사람을 좀비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타인에 의해 방치되는 때, 그 몇 초 사이 혹은 몇 분, 몇 시간, 몇 년 사이에 있다. 끝내 사이라는 말이 갖는 무자비함을 이 시의 화자는 말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3년 동안 시체가 방치된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고 누군가가 진술할 때, 이 말 속에 깃든 아이러니를 화자는 잡아채고 있는 것이다. ‘방치’는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그저 내버려두는 일이고, 그러므로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는 말은 의도적인 외면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 무시된 여지가, 그 사이가 누군가에게는 회생 불가능한 절망으로 쇠락하는 순간일 수도 있다.
3.
미꾸라지를 삼키는 황새의 젓가락질은 부리로 시작한다 다리의 길이만큼 늘어난 부리, 부리가 딱딱해지면서 긴 象嵌 젓가락은 얻었지만 황새의 성대는 퇴화하였다 부리를 부딪쳐 내는 소리, 그게 자음만으로도 환해지고 섬세해졌다 육자배기 젓가락 장단과 비슷해진 황새의 노래를 떠받치는 말들의 숫자를 헤아려보는데 따악, 딱 길고 짧은 장단어조 둘 뿐이다 외침과 노래, 슬픔과 기쁨 따위 마주보는 두 마디, 성조도 음색도 없지만 무리짓고 짝지으며 새끼 키우는데 필요한 두 마디 된소리의 검과 흰 머리 밟고 날아가는 황새의 날개는 십 尺, 그 말마저 생략하고픈 희고 밝은 날개이다
―송재학, 「부리」 전문(애지, 2010 겨울호)
이 시가 아름다운 이유는 “부리”의 일이 마침내 “날개”의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 시의 화자는 “황새”의 부리라는 생김새를 시적 대상으로 삼아 종내에는 황새의 생(生)의 전반을 그려낸다. 그럼으로써 화자에게 있어서 황새는 더 이상 한낱 황샛과의 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되비추는 공평한 삶이 된다. 그리고 화자는 이들 공평한 삶의 조건 위에서 삶을 긍정할 만한 새로운 에너지를 발견한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지난하고 지루한 것이지만 그러한 삶의 지속이야말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갱신하는 생의 원리이자 원천이라는 것을 황새의 부리가 환기한다.
이 시가 흥미로운 이유는 저 부리에 대한 묘사가 “긴 象嵌 젓가락” 같은 생김새로부터 “육자배기 젓가락 장단” 같은 소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로써 ‘젓가락’이라는 단어에 인간과 황새의 역사가 동시에 수렴된다. 화자는 우선 젓가락의 생김새와 황새 부리의 생김새를 겹쳐 놓고, 이어서 황새의 부리가 어째서 젓가락의 생김새를 얻게 되었는지를 진술한다. 황새의 부리가 길어진 이유에 대한 그 진술의 진위 여부를 떠나, 이때 화자에게 중요한 것은 황새의 길고 검은 부리가 다른 무엇도 아닌 인간의 도구를 닮았다는 점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황새의 부리 역시 식사용이자, 식사에 쓰이지 않을 경우 장단을 만드는 도구가 됨으로써 인간의 역사에 황새의 역사가 포개진다. 인간에게 젓가락이 주로 식사를 할 때와 흥을 돋울 때 쓰인다면, 황새에게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부리-젓가락’의 모양과 그것의 용례를 인간(젓가락)의 쓰임새로부터 황새(부리)의 생김새로, 황새(부리)의 쓰임새로부터 인간(젓가락)의 생김새로 이끌며 뒤섞는다.
인간의 삶은 먹는 일과 노래하는 일을 굳이 구분하며 이러한 뒤섞임을 유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때 황새의 부리가 해내는 간단한 일 혹은 소리는 인간이 망각하고 있었던 삶의 근원을 상기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먹고 사는 일이란 놀이와 구별 없는 것임을, 나아가 이는 말이 필요 없이 체득된 것임을 저 부리가 보여주고 들려준다. 화자는 황새의 부리가 부딪혀 내는 소리에서 거듭 환한 느낌을 받는데, 그 느낌이야말로 새삼 깨닫게 되는 삶의 진의가 아니겠는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부리의 일이 날개의 일이 될 때 어떤 아름다움이 엿보인다고 했다. 먹는 입이 말하는 입이 되고, 어느 한 순간 “그 말마저 생략하고” 싶은 때 그것은 노래의 입이 된다. 이 입에서 날아오르는 노래의 느낌이 황새의 “희고 밝은 날개”에 실려 있다고 하면 과언일까.
이어서 읽어보자. 위의 시와 같은 계절에 발표된 같은 제목의 시가 있다.
새의 입을 부리라고 한다
부리는 딱딱하다
너무 딱딱해서 입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새의 혀도 마찬가지다
그가 지닌 부리를 닮아 딱딱하다
사람의 혓바닥처럼 부드럽지 않고
뱀의 혓바닥처럼 차갑지도 않다
자국을 남기는 이빨을 버렸으므로
탐욕도 폭식도 없다
살기도 독기도 없다
다만, 새들은 딱딱한 부리를 움직여 노래한다
부드러운 혀로는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천상의 모든 아름다운 노래는
부드러운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쪼고 또 쪼아 벽돌조각 같은 부리,
닮고 닳아 쇳조각 같은 혀가 저렇게 아름답다
내 단단한 부리 끝에 흐느낌이 물려 있는
저녁 으스름, 쪽창문 나뭇가지에 귀를 걸어두면
누군가 부르다 만 노래 한구절이 이명처럼 울린다.
―임성용, 「부리」 전문(창작과비평, 2010 겨울)
여기서 부리는 곧장 화자의 입을 지시한다. 아니, 이 시에서 모든 입은 부리가 된다. 부리라는 이름으로 공통될 때 인간과 새의 특성이 비교된다. 아니, 인간이 인간이라 불리는 이유가 부리의 특성에 “물려” 있다. 궁극에 이 시의 화자는 단순히 인간과 새를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일부를 새에게서 발견하려 한다. 그리고 그 일부분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유일한 근거처럼 보인다.
구체적으로 읽어보자. 이 시의 화자는 먼저 새의 딱딱한 부리와 혀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사람의 것처럼 부드럽거나 뱀의 것처럼 차갑지 않다. 그리고 새의 부리에는 “자국을 남기는 이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새에게 또한 없는 것은 “폭식”이나 “살기”이며, 그럼으로써 “다만, 새들은 딱딱한 부리를 움직여 노래한다”. 그러나 이렇게 나열된 새의 특성 보다 중요한 것은 화자가 듣기에 그 노래가 “아름답다”는 점이다.
부드러운 혀가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노래가 단단한 부리로부터 나올 때, 화자에게 필요한 것은 입이 아니라 귀이다. 아름다움은 혀를 부드럽게 움직일 때, 즉 말을 할 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말을 하지 못할 때, 혀가 굳어버린 듯 말문이 닫혀서 “흐느낌”만이 새어나오는 그 한 순간에 “탐욕”도 “독기”도 없는 단 하나의 진실로서 엿보이는 무엇이다.
그리하여 이 단순해 보이는 시가 노리는 것은 구절과 구절이 지시하는 바에 있지 않다. 첫 행부터 마지막 행까지 읽어 내렸을 때, 언뜻 이 시 한 편은 부르고 또 불러, 혹은 듣고 또 들어 잊히지 않는 “노래 한구절”처럼 낯설지 않은 느낌을 준다. 바로 그 느낌이야말로 이 시가 소중한 이유이다. “단단한 부리”가 내는 소리처럼 단순한 메시지는 “이명처럼” 오래도록 반복해서 누군가의 귀에 맴돌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또 다시 부드러운 입을 버리고 “닳고 닳은 쇳조각 같은 혀”를 갖게 될 것이다. 그렇게 어떤 이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내지 않고도 서로를 각인하며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저 시가 들려주는 말이 저 뿐이라면 저 말이 아니라 말의 단순함이라는 어감 속에 부리가 내는 노래가 들어있는 게 아닐까 예감해보게 되는 것이다. 저 시에는 눈이 아니라 귀를 내어줘야 하는 게 아닐까.
4.
방은 또 하나의 방으로
방은 또 하나의 방으로
단 한 개의 방들로만 이루어진 우주라는 집
그 한 가운데서
손목을 긋는 직전의 그의 손목 검은 구멍 속으로 떨어지는 핏방울들이 그를 살아 있게 하는 걸까요 죽어가게 하는 것입니까 나는 내가 짜놓은 그물 한 올이 천천히 풀어지듯 나의 방문을 열고 나갑니다 영원히 닫힌 방문은 방문일까요 영원이 열린 창문은 창문입니까 다락에서 오래전부터 소중하게 간직되어온 그것의 먼지를 털어내고 보니 하나도 예쁘지 않은 악세사리였던 것처럼
내가 찾아낸 나에게서 가장 많이 연루되었던 사람이 나였습니까 내일 밤의 파티 꽃무늬 스카프를 두르고 웃고 있는 나의 얼굴이 검은 원피스의 담배 연기 당신이 뱉어내는 뒷모습처럼
끝의 실루엣 또는
실루엣으로만 존재하는 끝에 대해
당신은 가끔
이해할 수 있기라도 하듯
―하재연, 「도망자」 전문(문학과사회, 2010 겨울)
“당신”이라는 말을 “방”이라는 말로 바꿔서 불러 보자. “나의 얼굴”을 바라보는 당신이 있다면 여기에는 두 개의 방이 있는 것과 같다. 누구에게나 ‘나’의 대인 관계를 통해서 “방은 또 하나의 방으로” 그 방은 또 하나의 방으로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렇게 ‘나’의 입장에서라면 “단 한 개의 방들로만 이루어진 우주라는 집”은 정직하고도 실질적인 표현일 것이다.
그런 사정 “한 가운데서” 자신의 손목을 긋는 제 손과, 그 손목의 검은 구멍에서 나오는 검은 핏방울과, 검은 구멍 속으로 떨어지는 검은 핏방울은 마치 서로의 “실루엣”처럼 보인다. 서로가 실루엣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라면 진위나 허상을 가릴 수가 없다. 하물며 떨어지는 핏방울은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그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단순한 말놀이가 아니다. ‘나’가 “내가 짜놓은 그물”이라는 말은 또 어떠한가. 이러한 비유들 속에는 ‘나’를 긍정하거나 부정하지 못하는 화자의 목소리가 들어 있다. 마치 자신의 얼굴이 거울 속에 들어 있는 자신의 뒷모습처럼 여겨질 때의 느낌이 그러할까. 자신이라는 그물이 모두 풀어지면 그물이 되기 전 처음의 상태를 되찾을 수 있을까. 그물이 없어진 상태에서 그물의 올은 더 이상 그물의 일부라고 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화자의 목소리가 단일하게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령 이 시에서 의문문의 서술어형이 ‘~ㄹ까요’와 ‘ㅂ니까’가 혼용되는데, 이는 마치 서로 다른 두 사람의 대화처럼 들린다. “영원히 닫힌 방문은 방문일까요” 하고 누군가가 묻자 “영원히 열린 창문은 창문입니까” 하고 다른 누군가가 대답한다. 질문들로만 이뤄진 대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주제를 향해서 나아간다. ‘방문은 방문’이고 ‘창문은 창문’인 이유는 열림과 닫힘이라는 속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애초에 방문과 창문으로 생겨났기 때문이기도 하지 않은가를 저 대화는 은연중에 노출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소중하게 간직되어온 그것”은 이제와 다시 보니 예쁘지도 않은 “악세사리”일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의 가치가 절감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간직되는 순간부터 이미 소중한 보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화자는 “영원히”라는 말의 모순을 지적하는 듯하면서, 깊숙하게 은폐되어 있었던 자아의 허위나 허상을 고발한다. ‘영원하다’의 형용사격인 ‘영원히’는 모든 용언에 붙어서 그것을 수식하나, 그와 동시에 모든 용언을 위악적인 것으로 변모시킨다. 화자가 보기에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 끝을 명확하게 밝힐 수 없다는 것이, 그리하여 최대한 어떠한 직유로서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유한한 화자의 한계이기도 하므로 이처럼 화자는 처음을 직시하려는 자세로 이해 불가능한 끝을 노려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5.
남자가 청년에게 펜을 빌린 유독 어둔 밤이었다 서툰 필체로, 들고 있던 서류봉투 뒷면에 뭔가를 적어넣는 남자를 청년은 쳐다보았고 그 둘은 잠시 눈이 마주치기도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로 가는 중입니까 청년은 서둘러 펜을 감췄다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늦었군요 청년은 대답하지 않았고 대개의 밤이 그렇듯 사람들은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을 감추려는 듯 아니 빨려 들어가려는 듯
무얼 적은 거지요? 주솝니다 어딘지 모르겠어요 느닷없이 떠올랐어요 어쩌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本迹일 수도 있죠 청년은 웃옷을 추스르며 되물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고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땐 너무 어렸죠 다시 청년은 말이 없고
남자는 무슨 냄새를 맡았지만 그게 무슨 냄새인지, 어디서 나는 건지 알 수 없다는 듯 막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다 창밖에는 주머니에 넣어둔 손처럼 굳어가는 청년이 서 있었다 청년은 밤을 뒤로한 채 버스가 달려온 먼 방향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때, 그들의 표정이 조금 낯익다고 생각했지만 버스는 청년을 두고 사내를 태운 채 떠나가버렸고 나는 봉투 뒷면에 적힌 사내의 출생지를 천천히 소리내어 따라 읽었다 그곳은 가본 적 없는, 골목이 많은 동네였다 다행히도
―유희경, 「11월 4일」 전문(현대문학, 1월호)
검은 밤의 장막이 있고, 두 남자가 있고, 그 프레임 바깥에 서 있는 누군가가 있다. 그렇게 대사가 적은 연극의 일부분을 엿본 것 같은 느낌이 이 시에는 있다. 드문드문, 끊이지 않을 정도로만 이어지는 인물들 간의 대화는 극의 분위기를 팽팽한 긴장감으로 채운다. 관객은 인물들이 느리게 주고받는 대사들을, 대사와 대사 사이의 휴지에서 역시 천천히 곱씹어보게 된다. 그렇게 갖게 되는 특별한 느낌이 있다면 그 느낌은 저마다에게 오늘이 몇 월 몇 일인지를 상기하게 할 수도 있다. 언젠가 막은 내려오고 다시 또 오르겠지만, 그 느낌은 그 날의 것으로 기억 속에 붙박여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모두 다섯 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연과 연 사이의 행간이 침묵의 자리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남자”와 “청년”의 대화는 남자가 청년에게 펜을 빌리면서부터 먼저 버스를 타고 그 자리를 떠날 때까지 느리게 이어지고, 그 간간이 침묵의 순간이 고인다. 이 시는 연의 구분으로써 그 순간에 대한 ‘보여주기’를 시도한다. 그 시도로써 이 시는 한 편의 침묵에 관한 시가 된다고도 할 수 있다. 낯선 두 사내가 우연하게 만나고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다 금세 헤어진다는 이야기는 특별할 것 없는 사연일 수 있다. 하지만 시에서 화자가 그러하듯, 그 사연을 다시금 곱씹어보게 하는 계기는 저 침묵에 있다. 이 침묵에 대해서라면 그러나, 남자와 청년은 왜 “눈이 마주치기도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식의 의문이 중요한 게 아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한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말이 맞다.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쉽게 몸을 돌리지 않는다. 서로를 외면하고, 오히려 “몸을 감추려는 듯” 서로를 경계할 뿐이다. 그 와중에 침묵은 말을 하지 않고 서로 외면하는 데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의식하는 가운데 그 틈을 비집고 생겨나는 어떤 느낌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경우 침묵은 말 없음의 상황이라기보다는 없는 상황에 대한 말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당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전에 없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흔히 비유를 활용할 수 있다면, 이 시에서 화자는 그러한 상황을 그저 침묵으로 채우려는 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남자와 청년이 정류장에서 만나고 헤어진 이야기, 혹은 청년에게 펜을 빌린 남자가 뜬금없이 떠오른 주소를 봉투 뒷면에 적어 넣은 이야기, 그리고 그런 서로의 행동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이야기만으로 전할 수 없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만 침묵은 어떤 느낌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족하다. 그러니 조금 구체적으로, 저 시의 일부를 빌려 말해볼 수 있겠다. “느닷없이 떠올랐어요 어쩌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本迹일 수도 있죠”.
가본 적 없는 본적, 그리고 본적에 대한 근거 없고 느닷없는 직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청년은 갸우뚱 한다. 낯선 남자가 자신의 펜을 빌려 스스로 알지 못하는 본적의 주소를 기록하는 일을 지켜본 일은 꽤 흥미로운 일일 테다. 하지만 여러 번 언급했든 그 헤프닝이 일종의 사건이 될 수 있는 것은 우선 청년이 그 일을 단순히 남자의 일로서 거리를 두고 지켜본 것이 아니라, 그 일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청년은 그 일을 상기하므로 또한 기록한다. 저 시의 화자는 남자도 청년도 아닌, 마지막 연에 등장하는 “나”인 것 같지만, 거꾸로 여기서의 ‘나’는 청년일 수도 있고 청년과 남자의 대화를 지켜본 또 다른 “사내”일 수도 있다. 남자가 정체모를 냄새를 맡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화자의 정체는 마치 전지적 시점을 지닌 작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화자는 남자와 청년을 “그들”이라고 통칭하기도 하므로 제 3자의 누군가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또한 여기서의 화자는 그날(“11월 4일”)을 겪고 시간이 흐른 후 다시 그날의 일을 떠올리는 남자나 청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가본 적 없는 본적이 적힌 봉투는 누구에게나 떠넘겨질 수 있는, 누구의 손에든 들릴 수 있는 느낌으로 떠돈다.
그렇다면 이것은 가본 적 없는 본적에 대한 이야기인가. 하지만 시의 제목에서부터 짐작되듯 이 시는 본적이라는 특정 장소 혹은 공간보다는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온 어떤 시간에 대한 감각을 전면화한다. 마치 무엇을 감추려는 일은 그것에 빨려 들어가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듯, 빌려주었던 펜을 다시 서둘러 감추었던 그때의 일화에 청년은 몰입되어 있다. 청년이 이후 그때의 일을 기록하는 화자(‘나’)라고 가정할 수 있다면, 그들을 모두 바라보고 있는 이후의 화자는 역시 그들 모두에게서 펜을 빌려 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가보지 않은 본적에 대한 느닷없는 떠오름처럼, 화자에게도 그때의 일은 일종의 특별한 경험에 대한 本迹처럼 언제라도 되살아날 가능성이 엿보이는 사건이지 않은가. 남자가 돌연 사내로 기록되듯, 청년과 화자는 경험을 공유하는 또 다른 기록자이다.
6.
두 개의 손목
세 개의 밀감
남쪽의 섬 같은
곡선을 따라 떠오르고 가라앉는
세계의 온갖 것들
섬과 해구, 화산과 현무암,
혀와 욕, 거북이와 모래,
하수구와 머리칼, 자궁과 후레자식
너랑 나,라고 말하면
이미 모든 것
단단한 밀감과 밀감
민감하게 벌어지는 입
회전문을 통과하기 전까지
수없이 많은 겁이 드나들었다
떨어뜨리는 것에 익숙해지면
으깨진 과일에 더이상 미련은 없다
미안의 마음이 머물지 않는 미욱한 발끝
볼 필요 없다 고개를 들고 오직 위를 봐
세계의 균형을 위해서
허공을 돌아 손바닥으로 돌아오는
새벽의 알람시계
다음의 미안이 오기 전에 나는 이만 가야지
너랑 나랑은 만나면 곤란
여진과 마그마, 해녀와 죠스바
녹색당과 포경수술, 민물생선과 설치류
홍어와 싼티아고, 두 손과 두 발
서로를 밀며 완성하는 세계의 온갖 것
두려움 없는 중력의 사이사이
귤 셋
사이좋게 악수하며
저글, 저글 그리고 저글링
손목이 죽기 전까지
―서효인, 「저글링」 전문(창작과비평, 2010 겨울호)
저글링(juggling)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주로 세 개 이상의 공을 두 손으로 돌려서 떨어뜨리지 않고 잡으며 다양한 묘기를 보여주는 곡예 기술을 저글링이라고 한다. 두 개의 손으로 많게는 수 십 개의 공을 위로 던지고 받으며 올라가고 내려오는 공들의 포물선으로 또 하나의 거대한 곡선을 만드는 이 기술을 보는 묘미는 무엇보다도 아슬아슬함이 아닐까. 규칙적으로 회전하는 공들의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질까봐 그리하여 대열이 무너지고 공이 바닥에 떨어질까봐, 저글링을 하는 자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 역시 바짝 긴장을 하게 된다. 저글링이 이뤄지는 사이 그들 모두는 “민감하게 벌어지는 입”을 나눠 갖는다. 대부분의 입들은 이미 시작된 저글링이 무사히 지속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 “곡선을 따라 떠오르고 가라앉는” 공들의 대열이 무너지고 바닥에 떨어진다 한들 무엇이 문제인가. 이 시는 그러한 의문의 의미와 무의미를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공들이 계속해서 두 손 위를 오가며 떠있어야만 한다고 믿는 쪽과 저글링의 상황이 오래 지속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여기는 쪽의 시선이 이 시에는 공존한다. 전자는 “세계의 균형을 위해서” “고개를 들고 오직 위를 보”라고 말한다. 후자는 그러한 일은 “미안의 마음”을 스스로 외면하고 회피하는(“너랑 나랑은 만나면 곤란”) 것이라 말한다. “두 개의 손목”은 변함이 없고 그 손 위를 떠도는 단단한 “세 개의 밀감”만이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고 믿는 쪽이 전자라면, 바닥에 떨어져 “으깨진 과일”에도 미련을 갖는 쪽이 후자이다. 양쪽은 세계가 저글링의 방식으로, 서로 다른 것들이 “서로를 밀며 완성하는” 방식으로 이뤄진 것에 합의한다. 그러므로 “미안”이라는 마음의 자리가 더욱 중요해진다. 전자가 이를 배제하고 있다면 후자는 그러한 태도를 경계하고 있다.
두려움은 미안의 마음과 공존한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또한 미안의 마음을 외면하고 끝내 미안의 마음이 자리할 곳을 제거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세계는 최소한 손목 위에서 무사히(“사이좋게 악수하며”)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 안전한 지속에 대한 믿음은 그 세계를 유지하는 동력원이 무사할 때까지(“손목이 죽기 전까지”)만 유효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의심의 마음이 있다. 완전한 세계에 대한 의심이야말로 미안함을 은폐하지 않고, 두려움을 은닉하지 않는 날 것 그대로의 마음을 열어두는 자리이다. 저글링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 중에 정보나 수치나 돈 등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조직하다’라는 뜻이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마음이라는 것은 자주 효율성을 강조하며 조직된 다수에 의해 훼손되기 마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