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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치명적 농담 / 한형조 / 문학동네 / 2011
불교와 첫 인연은 태어나면서 시작되었다. 새벽녘에 태어나 아침의 여명이 밝아올 무렵 탯줄을 목어 걸고 나왔던 아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지나가던 선승이 불가에 귀의하면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당시 부모님은 불교 신자였지만 돌아가실 때, 기독교의 세례를 받고 성도로 생을 마감하셨다. 나 역시 교회는 다녀보았지만 절은 등산갈 때나 가는 코스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2009년 성남문화재단에서 주관한 커뮤니티 인문학 강좌에 참여하면서 한형조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고 그는 당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전한학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당시의 강의 주제가 <21세기, 실학 너머의 유교 이야기를...>였으니 한형조 교수는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에도 정통한 사람이었다. 2009년 인문학 강좌를 계기로 그의 글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본격적인 인문학 공부에 매진하다가 판교에 있는 가온누리라는 작은 도서관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게 되었다. 황광우씨가 집필한 <철학콘서트>를 매개로 한 강의에서 붓다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불교에 대한 공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역시 공부는 강의를 준비할 때 더욱 집중하게 되고 열심히 공부하게 된다. 이 때 강의 준비를 위해 <하룻밤에 읽는 불교> <인도불교사상사> <숫타니파타> <금강경> <반야심경> <법구경> <화엄경> 등 불교에 대한 서적을 집중적으로 탐독하게 되었다. 교양으로서의 불교에서 공부의 대상으로서의 불교로 전환하면서 느끼는 벽은 언어라는 장벽이었다. 단순히 해설서만으로 이해하기에는 불교에 대한 이해의 폭은 비좁았다. 최소한 한자를 알아야 했다. 그것도 불경은 번역한 한자의 이해는 기본이다. 그리고 더 욕심을 부리려면 불경의 원전이 기록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범어(梵語))와 빨리어 등이 보완되어야 한다. 2,500년 전 인도 전역을 주유한 고타마 붓다의 행적을 보면 그가 언어의 천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인도는 수 백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이다.
산스크리트어에 대해 공부하면서 이 언어가 영어 등 인도유럽어의 뿌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우리말에도 영향을 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쌀’이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알고 있지만 이것은 산스크리트어에 ‘Sahr’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우리말의 쌀로 바뀐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는 산스크리트어에 ‘agni’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우리말 ‘아궁이’로 바뀌게 되었다. 이렇듯 언어는 공부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우리 문화가 여러 문화와 융합된 것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올 한 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큰 수확이라고 볼 수 있는 책이 한형조 교수의 <붓다의 치명적 농담>입니다. 이 책의 출간은 이미 알게 되었는데 늦게나마 읽게 되어 다행입니다. 다음은 이 책의 내용을 전문 모두 수록한 것입니다. 타이핑을 하다가 인터넷 서핑 중 <기살림 연구소>라는 다음 카페에서 원문을 그대로 수록한 것이 있어 드래그를 통해 복사했습니다. 이 글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을 주신 그분께 감사드립니다. 다음은 그 중에서 마음에 와 닫는 말들이나 혹은 중요한 정보를 올립니다.
19p.
“그 뜻을 얻으면 거리의 잡담도 다 진리의 가르침이요, 말에서 헤매면 용궁의 보배곳간도 한바탕 잠꼬대일 뿐이다(得其志也, 街中閑談 常轉法輪, 失於言也, 龍宮寶藏 一場寐語).”
24p.
가르침이란 본시 내 속에 있던 어떤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시켜 주는, 선가의 말을 빌면 지시(指示)일 뿐입니다. 그래서 옛 선지식들이 하나같이 “나는 네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의발을 찾아 천리 먼 길을 쫓아온 혜명에게 육조 혜능 스님은 분명히 일렀습니다. “비밀은 이미 너에게 있다.”
43p.
저 또한 원효 스님이 <대승기신론소>에서 지적하듯, ‘잎을 따느라 줄기를 놓치는(把葉而亡幹)’ 우를 범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62~63p.
그러나, 우리에게는 정말 죄가 없을까요. 혹시 우리 자신이 우리가 늘 문제 삼는 그 혼란과 분열, 비참과 부조리를 몰고 온 장본인은 아닐까요.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합니다. “우리 각자는 모든 형태의 전쟁에 대해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전쟁은 우리가 지닌 삶의 공격성, 그리고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편견과 관념으로 인해 발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이 세계에 기여했으며, 전쟁, 분열, 추악함, 그리고 탐욕으로 얼룩진 이 기괴한 사회의 일부이다.” (크리슈나무르티, 정현종 역,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21쪽)
불교는 “그 모든 것이 내탓”이라는 작지만 위대한 각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참회게>를 한번 독송해 봅니다.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嗔痴)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그동안 내가 지어온 그 수많은 악업은 나도 모르게 뿌리박힌 삼독, 그 탐욕과 질투와 어리석음 때문이었어라. 몸으로, 입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낳은 그 모든 잘못을 나 이제 깊이 참회하나이다.”
74~75p.
지금은 영어가 한문보다 더 가깝습니다.
이 말은 영어권의 학자들이 특별히 학문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뛰어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접성’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어가 한문이나 중국어보다 더 우리말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가 쓰는 말’은 한문이나 중국어보다, 그리고 우리네 조상들이 19세기 이전까지 오랫동안 써오던 말보다 훨씬 더, 영어에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학생들이 전통식 훈고나 언해보다도 영어 번역이 ‘이해’하기 쉽다고 말들 하는 것입니다.
우리말은 19세기 후반에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말과 글은 이전의 한자어나 우리 고유어가 아니라, 일본이 서구의 근대적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새로 창안한 ‘번안어’들과, 거기 걸맞은 ‘어법’을 주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믿기지 않는다고 하실 분들이 많겠습니다. 지금 당장 신문의 기사나 칼럼, 학교의 교과서 한 꼭지를 펼쳐 보십시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의 단락에서부터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기’ ‘후반’ ‘근본적’ ‘변화’ ‘이전’ ‘고유’ ‘서구’ ‘근대적’ ‘문물’ ‘창안’ ‘번안어’ ‘어법’ ‘형성’ ‘신문’ ‘기사’ ‘칼럼’ ‘학교’ ‘교과서’ ‘단락’ ‘점’ ‘확인’ …… 이 말들은 한자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쓰던 한자말이 전혀 아닙니다. 원효나 지눌, 퇴계나 율곡에게 이 한자어를 들이댄다면, 다들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혀를 끌끌 찰 것입니다. 그들은 이들 한자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한자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전통 한자가 아닌 근대적 ‘신조어’들을 통해 대화하고 소통하고 있습니다. 위의 말은 거의 의미의 손실 없이 서구어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 말들이 원래 서구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겼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위의 말들을 영어로 대체하면 이렇습니다. century, latter, fundamental, change, earlier, unique, western, modern, civilization, creation, … etc. 한문공부를 하시는 분 가운데는 위의 목록에서 가령 ‘고유(固有)’라는 한자어를 끌어내 이 말이 <맹자>에서 쓰이고 있다고 반론을 제기할 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이 말은 맹자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쓴 개념입니다. 그러나 그때의 의미는 ‘본질적인’이라는 뜻이지, ‘독특한’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옛적 한자어 가운데 상당수가 현대적 번안어로 재활용되기는 했지만, 그 둘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의미의 편차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용법의 차이를 넘어, 전통과 현대 사이의, 동양과 서양 사이의 서로 다른 세계관과 엇갈리는 가치관까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연(自然)이 세계관의 차이를, 권리(權利)가 엇갈리는 가치관을 보여주는데, 이 문제 또한 본격 논할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78p.
일본은 18·19세기에 걸쳐 서구문명과 문물을 이해하고 수용하기 위해 번역청을 설치하여 대규모 인력을 투입했습니다. 그 어휘들은 지금 우리가 쓰는 한자말의 적어도 80% 이상을 상회하고 있고, 전통식 개념이지만 의미가 달라진 것들을 포함하면 이 신조어들은 거의 9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두 언어체계를 구분해 주는 사전이 없습니다.
96p.
보이는 억압은 줄어들었으되, 미셀 푸코의 팬옵티콘(Panopticon·‘모든 것을 본다’는 뜻)이 예시하고 있듯이, 보이지 않는 감시가 삶의 전 영역에 침투해 있고, 더구나 인간은 자신의 욕망마저 자신이 선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개인의 의지와 행동이 권력과 산업, 매스컴에 의해 조장되고 조정되는 시절이 있었던가요.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곳곳에 감시카메라와 곳곳에 광고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환상의 비현실 속에서 추상적으로 타율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러면서도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105~106p.
어느날, 우루벨라의 해질 무렵, 붓다께서는 불을 섬기던 가섭 형제들을 데리고 산에 올랐습니다. 저녁 노을로 불타는 하늘을 보고 붓다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사람도 저와 같이 불타고 있다. 사람의 무엇이 불타고 있는가. 1) 눈이 타고 있고, 눈이 보는 물질이 타고 있다. 귀가 타고 있고, 귀가 듣는 소리가 타고 있다. 코가 타고 있고, 코가 맡는 냄새가 타고 있다. 혀가 타고 있고, 혀가 느끼는 맛이 타고 있다. 몸이 타고 있고, 몸이 접촉하는 감촉이 타고 있다. 의식이 타고 있고, 의식이 소비하는 대상인 생각이 타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불타고 있는가.
2) 다름 아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때문에 불타는 것이다. 그로 인해 3) 태어남과 늙음과 병듬과 죽음이 불타고 있고, 또한 근심과 슬픔과 번뇌와 괴로움(愁悲惱苦)이 불타고 있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이 모든 불타는 것과 그 원인에 대해 싫어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일체에 대해 싫어하는 생각을 가질 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불꽃이 꺼지고, 그때 근심과 슬픔과 번뇌와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게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우루벨라의 산상수훈입니다. 붓다는 “온 세상이 불길에 싸여 있다!”고 말합니다. 그저 보면 온 세상은 평온한 것 같지만, 정말, 시쳇말로 ‘불꽃 튀기고’ 있지 않습니까. 무성한 탐욕과, 그 탐욕으로 인한 경쟁의 칼 부딛치는 소리로 어지러운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모두 ‘눈에 불을 켜고,’ 노리는 것에 ‘혈안이 돼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불길을 잡거나 끌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불이 난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붓다는 우뚝 이 사태를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108p.
붓다는 이 어려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화살을 열 번 날려 과녁에 맞추기는 어렵다. 백번 날려 다 맞추기는 정말 어렵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우리 삶의 비참한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붓다는, 놀랍게도, 사성제 가운데 처음의 고(苦)의 진리를 깨닫기가 가장 어렵다고 했습니다.
115p.
지난해 저는 어느 스님으로부터 느닷없는 전화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전화기 저편에서 굵은 톤의 목소리가 다짜고짜 물어 왔습니다. "생사(生死)란 있는 거요, 없는 거요?" 지금도 절집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화두 가운데 하나가 이거지요. 여러분들은 이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저는 그때 "당신이 알겠지!"하고 불퉁스레 전화를 끊었는데, 좀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생들이란 본시 쥐꼬리만큼 아는 것 가지고 잘난 척을 하다가도, 모르는 질문이 나오면 괜히 신경질을 내는 좁쌀들이니까요.
116p.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 <대승기신론>도 이를 따라 "마음이 일어나면 수많은 세계가 생겨나고, 마음이 꺼지면 수많은 세계가 사라진다(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고 했습니다.
125p.
그래서 붓다는 말합니다. “인간은 수백 개의 화살이 꽂힌 상처 입은 짐승이다!” 여기 ‘화살들’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향해 시시각각 무수히 날아와 꽂히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129p.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가 김춘수 시인의 <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런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생판 모르는 도시나 나라인데, 누군가가 거기 있거나 살았다는 기억으로 하여 아주 가깝게 다가오는 그런 경험 말입니다. 역시 세계는 주관적으로 <의미화>되어서만 존재하는 무엇입니다.
쇼펜하우어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우리가 눈이 있어 사물을 보게 되었고, 귀가 있어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보려는 <욕망>이 눈을 만들었고, 들으려는 <의지>가 귀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보려는 욕망이 없으면 사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코 앞에 두고도 언제 있었더냐 싶지요, 보려는 욕망이 없으면 눈도 또한 없습니다. 귀도, 코도, 혀도, 몸도, 의식도 다 그렇습니다. <반야심경>을 기억할 것입니다. 공중(空中)에는 본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도 없고,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도 없습니다. 당연히 이 둘이 교접한 결과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식(識)도 없겠지요.
134p.
“어떤 분리된 법(法,다르마)도 주체적 지각의 활동이 없이는 지각될 수 없다. 지금, 아비다르마는, 특정한 지각 활동이 대상을 <집어들고>, <주의하고>, 그것을 <확인하고>, 그것을 <꽉 거머쥐는데> 있다고 가르친다! 영어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데, 지각(perception)이라는 말은 per-CAP(*머리, 덮어씌운다)에서 왔고, capio는 <잡는다>, <붙든다>, <꼭 잡아쥔다>는 뜻이다... 역시 어떤 것을 <붙든다>는 것에는, 그게 법(法)이든, 비법(非法)이든, 자동적으로 무엇인가를 향해 <선호>하는 행동이 포함되어 있고, 자기 이해와 자기 주장, 그리고 자기 강화와 자기 확대와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이기적이지 않기(無我)가 어렵다.”
No separate dharma can possibly be perceived without a subjective act of "perception" taking place. Now the Abhidharma teaches that the specific function of perception consists in 'taking up' an object, 'noting and recognizing' it, 'seizing upon' it. Similarly, in our own language, 'perception' comes from per-CAP, and capio means 'to take hold of, seize, grasp'. But to seize on anything, either a dharma or a no-dharma, automatically involves an act of preference, bound up with self-interest, self-assertion, and self-aggrandizement, and therefore, unbecoming to the selfless. (Conze, The Diamond Sutra, p. 34)
138p.
<세계>를 만든 것도 <마음>이고,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것도 마음입니다. 혁명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시작하는 것. <법구경(法句經)>의 첫 머리를 정대 공양(頂戴 供養)합니다.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맑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그 주인을 따르듯이“
(법정 역, 『진리의 말씀』, 나무심는사람, 1999, 14쪽)
141~146p.
불교적인 너무나 불교적인 영화
구로자와 아키라(黑澤明)는 1951년에 <라쇼오몽(羅生門)>이라는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 대상과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동시에 수상하여, 일본 영화를 세계에 과시했습니다. 소문만 듣던 그 영화를 미국에서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흑백의 낡은 필름이 일반 극장 상영관 한편에서 상영되었습니다. 관객은 영화를 배우는 학생들과 교수, 그리고 관심 있는 일반인 몇 명뿐이었습니다.
저는 상영이 끝나고, 그들이 하는 토론까지 다 듣고 나서, 손을 들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영화는 근본적으로 ‘불교적’이며, 인간 인식의 영원한 딜레마를 다루고 있다.”
영화의 스토리를 개관해 주는 것이 필요할 듯합니다.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 출시되지 않은 듯합니다. 귀국 후 서울예대 영화과 강한섭 교수께 부탁하여 일본 NHK에서 방영된 것을 녹화한 테이프를 빌려 본 적이 있고, 저번 대만의 학회에 들렀다가 덤핑가로 팔고 있는 이 영화의 DVD판을 사올 수 있었습니다.
첫 장면은 폭우가 쏟아지는데, ‘승려’와 ‘나무꾼’과 ‘걸인’이 쇠락한 절터의 라쇼오몽(羅生門) 아래에 모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나무꾼은 자신이 목격한 기이한 사태를 탄식을 섞어 들려줍니다.
서로 다른 증언들
나무꾼의 보고: 숲 속을 걷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여자 모자가 떨어져 있었고, 좀 더 가다보니, 남자의 모자, 밧줄과 부적이…. 이들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 사무라이의 시체가 있었다. 나는 놀라서 관청에 신고했다.
장면이 바뀌어, 악명 높은 ‘산적’ 다조마루가 밧줄에 묶여 관청에 잡혀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무라이’를 죽였다고 순순히 시인합니다. 여기까지가 서곡입니다. 문제는 이 살해를 둘러싼 진실입니다. 그 사건에 개입한 사람들의 증언이 서로 너무나 달랐던 것입니다.
산적 다조마루의 증언: “그때 산들바람만 불어오지 않았어도…. 사무라이와 그 아내가 길을 가고 있었다. 사내는 걷고 여자는 말을 타고 있었는데, 산들바람이 베일을 살짝 들추었다. 거기 드러난 여자의 얼굴은 천사 같았다. 나는 여자를 가지겠다고 작심했다. 길을 막아서서 사내에게 조선산 검을 싸게 팔겠다고 유혹, 숲 속으로 끌고 가 밧줄로 묶어버렸다. 그녀는 남편이 당한 꼴을 보고, 단도를 빼들고 달려들었고, 나는 간단히 그녀를 제압하여 키스를 퍼부었는데, 놀랍게도 그녀가 나를 받아들였다. 일을 마치고 갈 길을 가려 하자, 여자가 막아섰다. ‘이리된 마당에, 두 남자를 섬길 수 없으니,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사내를 풀어주고, 정정당당히 칼까지 쥐어주고 결투를 벌였다. 격한 싸움 끝에 사내를 찌르고 나서 둘러보니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절간에 숨어 있다 발견된 여인의 이야기는 전혀 달랐습니다.
사무라이의 아내 마사코: “산적은 나를 범한 다음, 남편에게 조롱을 퍼붓고 나서, 숲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남편에게 다가갔으나, 남편은 몸을 버린 나를 차가운 증오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절망적 심정으로,‘그런 시선을 못 견디겠어요. 차라리 나를 죽이세요’라며 단도를 꺼내들고 남편에게 다가가다가, 격한 마음에 실신해 버렸다. 깨어나 보니, 남편은 이미 죽어 있었고, 나는 정신없이 강가로 달려가 몸을 던졌으나, 목숨이 모질어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걸인’은 짜증을 내며, 들을수록 헷갈린다면서 투덜댑니다. 그러나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승려’는 이번에는 살해당한 남자, 그 ‘사무라이’의 증언을 들려줍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말을 하느냐고요. 걱정 마십시오. 무당의 도움을 빌렸습니다.
사무라이 다케히로: “산적이 아내를 범할 때, 나는 질투를 느꼈다. 아내는 아름다웠다. 그런데, 일이 끝나자, 아내는 놀랍게도 산적에게, 나를 죽이고 자기와 함께 달아나자고 유혹했다. 이 제안에, 산적조차 놀랍고 불쾌해 하면서 부정한 아내를 벌주라면서 오히려 나를 풀어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아내는 도망가 버렸다. 나는 수치와 회한에 떨다가 아내의 단도로 가슴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잊지 못한다. 앞서가는 산적의 허리를 붙들고,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가리키며, ‘아노 히토오 코로시테 쿠다사이, (저 남자를 죽여주세요) 하고 외치던 아내의 얼굴을….”
과연 진실은 어디 있는가
그런데 이 죽은 자의 독백에도 나무꾼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듭니다. “내가 본 시체에는 단도가 아니라 칼이 꽂혀 있었어!” ‘나무꾼’의 증언은 또 다른 것이었습니다.
나뭇군의 고백: “땅바닥에 있는 여인의 모자를 줍고 나서 숲 사이로 훔쳐보니, 산적은 여인에게 사랑을 맹세하며, 결혼해 달라고 애걸하고 있었다. 산적의 제안에 난감해진 여자는, 두 남자가 결투로 해결하라면서 남편의 밧줄을 끊어주었다. 그러나 남편은 ‘너 같은 년 때문에 내 목숨을 걸고 결투할 생각은 없다’면서 ‘네 년이 죽어라’라고 퍼붓는다. 산적도 겁이 나서 주춤했다. 그러자 여인은 둘 다에게 ‘사내답지 못하게시리’하고 비웃었고, 이 비웃음에 두 남자는 마지못해 결투를 벌였다. 그러나 그것은 당당하고 늠름한 결투가 아니라, 잔뜩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빙빙 도는 꼴이 측은할 지경이었다.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어쩌다 산적의 칼이 남편의 가슴에 찔렸다. 그 사이에 여자는 도망갔다.”
이쯤에서 우리는 드디어 ‘객관적 진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안도합니다. 그러나 안도는 아직 이릅니다. ‘걸인’은 ‘나무꾼’에게, “아직 숨기는 것이 있지? 다 털어놓지 그래”라고 다그칩니다.
그때 어디선가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라쇼오몽의 뒤편에 버려진 아기가 있었습니다. 걸인이 아기의 옷을 벗기려 하자, ‘나무꾼’은 부끄러운 줄 알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자, 걸인은 “단검을 훔쳐간 도둑 주제에…”라면서 나무꾼에게 대들지요.
걸인이 기어코 아기의 옷을 벗겨내 챙겨 떠나자, 승려는 인간 존재의 ‘거짓’에 대한 깊은 환멸에 젖습니다. 나무꾼이 아기를 데려가려고 손을 내밀자, 승려는 “아직 더 훔칠 것이 있느냐”라고 화를 냈고, 나무꾼은 자식 하나쯤 더 있어도 별 부담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이 아기를 돌보고 키우겠노라고 말합니다. 승려는 이 말에 인간에 대한 희망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면서 나무꾼에게 아기를 건네줍니다.
이것이 영화의 스토리, 그 대강입니다.
155p.
우리가 보는 세계는 자아의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관심과 시선이 다르다면 세계는 전혀 다르게 보이겠지요. <법화경>은 이런 예를 들고 있습니다. “여기 물이 있다. 이 물은 모든 사람에게, 나아가 모든 지각 있는 생명체에게 꼭 같이 보일 것인가. 아니다. 물고기에게는 ‘집’으로 보일 것이고, 지옥에서는 ‘고름’으로 보일 것이며, 천상에서는 ‘감로수’로 보일 것이다.” 물은 목마른 사람에게는 마실 것으로 보이겠지만, 화학자에게는 ‘H2O’로 보일 것이고, 경제학자에게는 공짜라는 뜻에서 ‘비경제재’의 이름을 붙일 것입니다.
163p.
소승 아비달마의 지혜부터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아비달마는 “나의 것, 나에게 속한 것”이라는 ‘소유’의 환상부터 깨기 시작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속한다’가 객관 세계의 자연스런 속성이라고 했습니다만, 불교는 이런 말에 터무니없어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닭이나 소는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지요. 그리고 국가를 지배하는 군주가 있다고 해서, 우주를 지배하는 특정한 인격이 꼭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스피노자는 만일 삼각형이 생각할 줄 안다면, 그는 틀림없이 신을 삼각형으로 그릴 것이라고 시니컬하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195p.
부처님은 다만 그 얼굴을 ‘단 하나의 고정된 가면’으로 여기고, 그 역할을 종신 철밥통처럼 ‘단 하나의 고정된 지위’로 간주하는 상견(常見)을 부정할 뿐입니다. 그 사이에 적절한 이해로서의 중도(中道)가 있습니다. <능가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 생기고 이어지는 것인 까닭에 ‘사물’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원인과 조건들과 ‘상대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211p.
저는 시인 정현종의 시보다는 산문을 더 좋아합니다. 오래전 <숨과 꿈>이라는 산문집을 읽다가 감전된 적이 있습니다. “숲 속에서 새 소리를 듣는다.… 그때 이 숲에서 나는 돌 하나를 던진 적이 있다. 숲 위쪽에서 던진 돌은 저 아래 어디엔가 떨어졌다.
돌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지구 무게만한 어떤 느낌이 마치 지진처럼 내 속으로 지나가는 걸 느꼈다. 즉 내가 방금 던진 돌에 의해, 나에 의해 여기서 저기로 옮겨진 돌 하나에 의해 우주의 균형이 달라졌다는 느낌이 그것이었다. 내가 던진 돌 하나가 우주의 균형을 바꾼다!”
215p.
조금 까다롭습니다. 내 식대로 의역해 보겠습니다. “또 수보리야, 객관적 세계(法)는 평등하니, 아래 위나 혹은 선악의 가치를 매길 수 없다. 이 소식을 아는 것이 바로 최고의 지혜이다. 의식 무의식적 자아의 점착과 흔적을 다 지우고 ‘깨끗한 삶’을 살아갈 때, 그때 최고의 지혜가 성취될 것이다. 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수보리야, 내가 지금 ‘깨끗한 삶’이라 말한 것은 자아에 물든 더러운 삶으로부터 벗어나라는 뜻에서 말한 것이지, 실제로 그런 삶이 자체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은 천만 아니다. 객관적 세계에는 더럽고 깨끗한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237p.
퇴계 어르신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 몸에는 정신(理)과 신체(氣)가 있다. 정신은 귀하고, 몸은 천하다. 정신을 존중하면(踐理) 몸이 자연스럽게 길러지나(養氣), 몸만들기에 치중하면, 정신이 황폐해진다.” 요컨대, 음식만 줄인다고 살이 빠지는 것이 아니고, 헬스를 열심히 다닌다고 정말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243p.
노자가 말했듯이, “진실은 늘 상식과 어긋나 보이는 법(正言若反)”이고, “진정 똑똑한 사람은 어리석어 보이는 법(大巧若拙)”입니다. 그래도 아니 믿을 사람이 많겠습니다.
257p.
하나 더 유의할 것은, 이 소식을 가르치는 불교의 가르침 또한 실제 우리가 빈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고, 유희의 마음으로 세상을 누리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 가르침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더 없이 위대한 지혜이고, 말후구(末後句), 즉 최종적인 한 마디인 만큼, 더 위태롭고 더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금강경>은 이 독성을 스스로 해독하고 나섭니다. “내가 말하는 지혜는 그러나 지혜가 아니다(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이 자기부정이야말로 불교가 진정 최상의 지혜임을 일러주는 증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66p.
“수미산이 개자씨 속으로 들어가고, 티끌 속에 우주가 들어찬다!”
304p.
“너와 내가 차를 마시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다.”
306p.
“바람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다만 너희들 마음이 흔들린 것일 뿐.”
첫댓글 음..... 뭐라 댓글을 달아야할지....
확실한건 제가 알지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던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책을 통해 ,글을 통해 소통하고 있고,,
소통하려고 노력하고있다는 느낌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