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심천리
광종릉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심천리에 있는 고려 광종의 능.
광종이 975년(광종 26) 5월 나이 51세로 승하하자 송악산 북쪽 기슭에 장례를 지냈다.
능역(陵域)은 장방형으로 너비 48척(尺), 길이 130척으로 그 좌우와 후방의 3면에 돌담장을 두른 흔적이 있다.
능역은 3단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단면은 능의 기역(基域)으로 횡폭(橫幅) 48척, 전방 높이 약 5척의 토류석벽(土留石壁)으로 2단면과 구별하였다.
이 토류석벽 좌우에 돌계단이 하나씩 있다.
1단면에는 능과 석난간(石欄干)·석수(石獸)가 남아 있는데 능의 높이는 10척, 지름은 24척이다.
병석(屛石)의 높이는 2척으로 12각형이며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새겨져 있는데 이 병석은 후대에 수축할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석난간은 방주형(方柱形)의 석주가 약간 남아 있는데 앙면식(仰面式)의 석수 4구가 우아하며 망주석(望柱石)과 석상(石床)이 남아 있다.
2단면에는 장명등(長明燈)과 석인(石人) 한 쌍이 좌우에 있다. 3단면에도 석인이 한 쌍 있었던 듯하며, 두부(頭部) 파편 1개가 발견되었는데 관(冠)의 조각이 정교하다.
3단면에는 1395년에 건립한 능비(陵碑)와 정자각지(丁字閣址)에 있었던 것으로 초석(礎石)·헌석(軒石)이 남아 있다. 헌릉은 능과 석물들의 파손이 심하나 계단섬돌·초석 등이 보존되어 있어 고려 왕릉 구조를 전해주고 있다
광종(光宗, 925년 ~ 975년 7월 4일 (음력 5월 23일[1]))은 고려 제4대 왕(재위: 949년~975년)이다.
휘는 소(昭), 자는 일화(日華), 묘호는 광종(光宗), 시호는 홍도선열평세숙헌의효강혜대성대왕(弘道宣烈平世肅憲懿孝康惠大成大王)이다. 태조의 넷째 아들, 신명순성왕후의 셋째 아들로서 요절한 왕태, 정종(定宗)의 동생이다. 비는 대목왕후 황보씨(大穆王后 皇甫氏)로 태조와 신정왕후 황보씨의 딸로 이복누이이며, 후궁인 경화궁부인 임씨(慶和宮夫人)는 배다른 형 혜종의 딸이다.
949년 3월 동복 형 정종의 선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949년 광덕(光德), 960년 준풍(峻豊[2])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고, 중국 후주로부터 과거제도를 받아들여 처음 과거를 실시하였다. 노비안검법으로 부당하게 노비가 된 양민들을 석방하였고, 민생안정과 백성구휼에 힘을 썼다.
그러나 960년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3] 이 대상(大相) 준홍(俊弘) 등의 역모를 고변한 이후 이를 빌미로 호족들을 대량으로 숙청하였고, 이복형 혜종의 아들 흥화궁군, 동복형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 태조의 서자인 이복동생 효은태자 등을 처형하였고 자신의 장남인 태자 주(胄) 역시 의심하였다. 과거 시험으로 선발된 관료들과 후주에서 귀화한 관료들을 통해 호족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관복 제도를 새로 제정하여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 불교 장려에도 관심을 갖고 사찰의 중건과 중수를 지원하였다
광종 왕소는 925년에 태조의 넷째 아들이자 신명순성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동복형제로는 형 태자 태와 형 정종이 있었고, 동생인 문원대왕 정, 증통국사, 신라 경순왕의 후처가 된 누이 낙랑공주, 여동생 흥방공주 등이 있었다. 위로는 형 태자 무와 태자 태, 태자 요가 있었으므로 그는 왕위계승권에서 멀리 있었다. 그러나 혜종이 병약하고, 동복 형인 태자 태가 일찍 요절하면서 그는 형 요와 함께 유력 왕위계승권자가 되었다.
왕소는 친형인 정종과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성격이 호탕하고 과감하면서도 한편으로 신중하였다. 최승로의 평에 의하면 '정종이 고집이 세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성품인데 반해 광종은 치밀하고 조심스럽지만, 기회를 잡았을 땐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대범한 성격이었다.[4]'한다. 그는 뛰어난 용모와 우수한 자질을 갖고 있어 태조로부터도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4] 한다.
태자 시절에 그는 정종과 더불어 왕실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고, 박수경·박수문 형제와 왕식렴 등의 서경 세력과도 친분이 두터웠다.[5] 그 때문에 왕규와 박술희가 이끄는 개경 세력을 제거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으며, 정종의 즉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왕위를 두고 벌어진 암투극 사이에서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지만 그는 각자 자기 가문의 외손이나 연고자를 왕위로 끌어올리려는 호족들을 보고 제거해야 될 대상 또는 잠재적인 적으로 보고 있었다.
태조는 호족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이복남매들 사이의 족내혼을 시켰는데, 그는 이복 여동생이자 신정왕후 소생인 대목왕후 황보씨와 결혼하였다. 이복 여동생이었지만 그녀는 외가의 성을 따랐고 외할아버지 황보제공의 성을 따라 황보씨라 칭하게 되었다. 대목왕후에게서 2남 3녀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 효화태자는 요절하고 첫째 아들 태자 주가 뒷날의 경종이 된다. 딸은 천추전부인, 보화궁부인, 흥덕원군부인이 있는데 셋째딸인 흥덕원군부인은 흥덕원군 왕규와 결혼하여 딸을 두었으나 다시 성종에게 재가한다.
태조가 자식들을 이복 형제끼리 결혼시킨 것은 신라 왕족의 풍습에 따른 것이었다. 이는 왕실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동시에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배려였다. 왕이 족외혼을 했을 경우 왕권이 외척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 이라는 왕건의 계산이 작용했다. 그는 이복형 혜종과도 친분을 가지면서 서경세력과 혜종 사이에 교량 역할을 하였다.이는 혜종이 서경세력과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을 딸을 왕소의 두 번째 부인으로 시집 보낸 것으로도 확인된다.,... 위키백자료임
첫댓글 아직은 금강산에 가면 정해진 코스로만 다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