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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명시 감상 10
엘리엇[T.S. Eliot, (1888~1965)]의 <마리나(Marina)>
김철교(시인, 배재대교수)
<1922년의 엘리엇>
현대시의 분수령이 되고 있는 엘리엇의 시(詩)는 서정시를 읽는 마음이 아니라 극을 보거나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자세를 가지고 대해야 한다. 또한 극적 구성이 단편적이면서 고도의 함축성을 지니고 있어서 독자의 지적이 긴장이 요구된다. 이미지와 이미지, 연과 연사이의 비약이 심해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함께 모이면 어떤 시적 의미를 제시해 준다. 엘리엇에게 있어서 시(詩)란 정서를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감정의 상태에 대한 객관적인 언어의 등가물을 발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 1915)>를 비롯한 엘리엇의 초기 시는 주로 현대의 도시생활을 소재로 삼아 현대인의 공허감을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신적인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렸다. 구원에 대한 염원은 <황무지(The Waste Land, 1920)> 이후의 주요 작품에서 나타나고 있다. <재의 수요일(Ash-Wednesday, 1930)>에서는 신앙의 세계를 함축하여 담고 있으며, 후기 대표작인 <<네 사중주(Four Quarters, 1943)>>에서는 시간과 신의 문제를 두 개의 축으로 하여 심오한 철학적인 명상세계를 보이고 있다.
그의 시는 전기와 후기에 있어 표면상 상당한 변화를 보이고 있으나 단편성과 암시성은 일관되어 있다. 초기시가 보이는 부정적인 시적 태도는 후기시의 긍정적인 그것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 부정과 긍정은 같은 세계관과 신앙을 토대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시인이란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처럼, 엘리엇은 업적 전체가 심오한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 위대한 시인이다(김종길, 현대의 영시, 고려대출판부, 1998).
여기서 감상하고자 하는 시(詩) <마리나(Marina, 1930)>는 그의 시집 <<정령 시편들(Ariel Poems)>에 실려 있는데, 셰익스피어의 로맨스극 <페리클리즈(Pericles, 1608)>에 나오는 페리클리즈의 딸 이름이다. 이 작품은 잃었던 딸을 다시 찾은 페리클리즈의 경이로운 감정을 환기시키면서, 재생 혹은 구원의 느낌을 암시하고 있다.
마리나
- 여기는 어느 곳, 어느 고장, 세상의 어느 지역이란 말인가?
어느 바다 어느 기슭 어느 잿빛 바위 그리고 어느 섬들
뱃머리를 찰싹대는 어느 바닷물
그리고 소나무 향기와 안개 속에서 노래하는 티티새
어떤 모습들이 돌아오는가
오 나의 딸이여
개 이빨을 날카롭게 하는 자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지
벌새의 영광으로 번쩍이는 자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지
만족하는 돼지우리에 앉아 있는 자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지
동물의 황홀경에 빠져있는 자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지
이 모든 것들은 허울뿐인 것이 되는구나, 바람에 의해
소나무 숨결과 숲속노래를 머금은 안개에 의해
제자리에 녹아있는 이 은총에 의해
이것은 무엇인가? 덜 명료한듯 더 명료한 이 얼굴은
덜 힘찬듯 더욱 힘찬 팔뚝의 이 맥박은 --
주어진 것일까 혹은 빌린 것일까? 별들보다 더 멀고, 눈(眼)보다 더 가까운
속삭임과 가냘픈 웃음소리, 잎새들과 서두르는 발길 사이에서 들리는
모든 물결들이 함께 만나는 잠속에서 들리는
얼어서 금이 간 돛대와 더위에 갈라 벗겨진 페인트
내가 이것을 만들었었지, 여태 잊었다가
이제야 생각이 나는구나.
허술한 장비와 썩은 돛폭
어느 6월 그리고 그 다음 해 9월 사이였지.
알지도 못하고 의식이 몽롱한 채, 내 자신의 것을 만들었지.
배의 용골판자는 새고 있구나, 틈을 메워야 겠다.
이 형상, 이 얼굴, 이 삶
나를 넘어선 시간의 세계에 살기위해서 살고 있는; 버려야겠다,
이 새로운 삶을 위해 나의 삶을, 저 아직은 말하지 않은 말을 위해 나의 말을,
깨어나 열려진 입술, 그 희망, 그 새로운 배를 위해.
무슨 바다 무슨 해안 무슨 화강암 섬들이 내 뱃머리에 다가오는가
그리고 안개 속으로 들려오는 티티새 노래
내 딸이여.
Marina
-Quis hic locus, quae regio, quar mundi plaga?
What seas what shores what grey rocks and what islands
What water lapping the bow
And scent of pine and the woodthrush singing through the fog
What images return
O my daughter.
Those who sharpen the tooth of the dog, meaning
Death
Those who glitter with the glory of the hummingbird, meaning
Death
Those who sit in the sty of contentment, meaning
Death
Those who suffer the ecstasy of the animals, meaning
Death
Are become unsubstantial, reduced by a wind,
A breath of pine, and the woodsong fog
By this grace dissolved in place
What is this face less clear and clearer
This pulse in the arm, less strong and stronger ---
Given or lent? more distant than stars and nearer than the eye
Whispers and small laughter between leaves and hurrying feet
Under sleep, where all the waters meet.
Bowsprit cracked with ice and paint cracked with heat.
I made this, I have forgotten
And remember.
The rigging weak and the canvas rotten
Between one June and another September.
Made this unknowing, half conscious, unknown, my own.
The garboard strake leaks, the seams need caulking.
This form, this face, this life
Living to live in a world of time beyond me; let me
Resign my life for this life, my speech for that unspoken,
The awakened, lips parted, the hope, the new ships.
What seas what shores what granite islands towards my timbers
And woodthrush calling through the fog
My daughter.
<작품감상>
셰익스피어의 <페리클리즈>의 내용은, 자신을 돌보고 있던 사람에 의해 살해되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난 마리나(Marina)가, 아버지인 페리클리즈 왕과, 자신을 낳을 때 죽은 것으로 여겨져 바다에 던져졌던 어머니를 기적적으로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페리클리즈>는 셰익스피어가 만년에 새롭게 시도한 로맨스극의 하나이다. 원형의 이야기는 ‘타이어의 아폴로니우스’전설이다. 왕은 딸을 좋아하다가 마침내는 근친상간이라는 불의의 관계를 맺게 된다. 왕은 딸의 결혼을 막기 위해 구혼자들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이를 풀지 못할 경우 목숨을 잃게 되는 조건을 제시한다. 타이어의 영주 페리클리즈는 수수께끼의 내막을 알게 되어 왕과 공주의 근친상간을 눈치채게 된다. 왕도 자신의 비밀이 탄로난 것을 알고 페리클리즈를 회유하지만 페리클리즈는 왕궁을 탈출한다. 페리클리즈는 도피 항해 중 폭풍우를 만나 난파당한다. 펜터펄리스 해안으로 혼자 떠밀려온 페리클리즈는, 그 나라 테이서 공주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창 시합에 참가하여 승리하게 됨으로써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페리클리즈는 부인과 함께 타이어를 향해 떠나지만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테이서는 아기(Marina)를 낳은 후 죽게 된다. 페리클리즈는 어부들의 말에 따라 시체를 바다에 던져 버리지만, 그 시체는 에페소 해안에 떠올라 의사 세리몬경에 의해 살아난다. 살아난 테이서는 남편과의 만남을 체념하고 수녀가 된다. 한편 왕비가 살아있는 것을 모르는 페리클리즈는 다이어나이저 부부에게 딸 마리나를 맡긴다. 마리나는 지성과 미모가 탁월한 아가씨여서, 다이어나이저의 친딸이 마리나의 명성으로 빛을 가리게 되자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마리나가 살해당하려는 찰나 해적들이 나타나 마리나를 납치하여 사창가에 팔지만 마리나는 고객들을 설득시키고 고객들은 마리나에게 감동을 받아 그냥 돌아가는 상황이 발생한다. 페리클리즈는 마리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해하던 중 풍랑을 만나 우연히 딸 마리나와 재회하게 되며 왕비 테이서도 만나게 되어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된다.
극의 내용은 운명과 우연이 지배하고 있지만 페리클리즈가 온갖 시련과 역경 속에서 자신의 인생의 끈을 놓지 않고 인내하여 결국에는 사랑하는 사람들(부인과 딸)과 재회한다는 내용이다.
엘리엇의 시 <Marina>의 제명(題銘, epigraph)에 세네카(Lucius Seneca)의 <미친 헤라클레스(Hercules Furens)>에 나오는 문구 “Quis hic locus, quae regio, quar mundi plaga? (What place is this, what country, what region of the world?)"는 미쳐서 처와 자식들을 죽이고 깊은 잠에 빠진 후 제 정신으로 돌아온 헤라클레스의 외침이다. 엘리엇의 모든 작품의 인용문들은 화자(話者)들 내지 주인공들의 상태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셰익스피어의 <페리클리즈>와 세네카의 <미친 헤라클레스>, 그리고 엘리엇의 시 <마리나> 사이에는 무슨 연관성이 있는가.
“여기는 어느 곳, 어느 고장, 세상의 어느 지역이란 말인가?”라는 외침은, 자신의 과거 비기독교적인 삶을 광기에 사로잡혀 살았던 삶으로 생각하고, 이제 기독교 안에서 올바른 삶을 회복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이 작품의 제목으로 사용된 페리클리즈(Pericles)의 딸인 마리나(Marina) 역시 구원의 희망, 재생의 기쁨을 나타내고 있다. 자신의 불임으로 아기를 갖지 못한 엘리엇이 자식(딸)에 대한 동경과도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해석도 그럴 듯 해보인다.
안개 속을 통해 흘러나오는 새의 노래소리, 소나무의 향기, 나뭇잎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속삭임, 뱃머리에 출렁대는 파도, 물 위로 미끄러지는 수리한 새로운 배 등 지상낙원을 방불케 하는 풍경들은 재생의 기쁨을 맛보고 있는 화자의 상태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화자는 새로운 탄생의 희망과 가능성을 얻기 위해서, 과거에 만들었던 배에 금이 가고 벗겨진 부분을 때우고 칠하고 물이 새는 곳을 틀어막아 과감히 수선한다. 이제 새로운 구원의 배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제1연은 어느 장소인지 분명히 지적할 수 없는, 물결이 뱃전을 치고 소나무 향기가 풍겨오는 곳에서 안개를 뚫고 새소리와 함께 돌아오는 화자의 딸의 귀환으로 시작된다. 딸이 돌아오는 것은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이 비치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제2연에서 화자는 물질적, 세속적 욕망만을 추구하는 삶을 죽음과 동등한 것으로 본다. 개의 이빨은 탐욕, 벌새의 영광은 오만, 만족의 돼지우리는 나태, 동물의 황홀은 욕정을 각각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죄성(罪性)은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 생겨나는데 영혼에게는 죽음이 된다. <황무지>의 주민은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는 이런 삶에 만족하며 영적 실체를 추구하지 않는다.
1927년 6월 엘리엇은 세례를 받고 영국국교도가 된다. 이 시 <마리나>는 1930년에 발표되었다. 시인이 종교생활을 통해 신과의 합일의 상태를 경험한 후, 역시 죄에 물든 현대인을 볼 때 여전히 정신적으로 죽어 있다.
제3연에서 이제 이런 죄성들은 ‘제자리에 녹아든 은총’에 의하여 실체가 없이 허울뿐인 것이 된다. ‘은총(grace)'은 이 작품에서 사용된 유일한 종교적인 어휘로 신의 은총을 뜻한다. 바람과 소나무 숨결과 숲속노래를 머금은 안개, 이 모든 것들이 은총이 스며든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제4연과 제5연에서 화자가 이처럼 세속적인 삶을 죽음과 동등한 것으로 인식할 때 잃어버렸던 딸이 돌아온다. 딸의 모습은 영적인 삶과 세속적인 삶의 중간에 위치해 있는 화자에게, 때로는 보다 분명하게 보이고 때로는 불분명하게 보인다. 그가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순간에는, 구원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딸의 모습이 명백하게 나타나지만 그가 세속적인 삶에 머물러 있으면, 그 가능성은 ‘별보다 더 먼’ 것이 되어 사라진다. 화자는 이같은 딸의 모습이 영원히 주어진 것인지 아니면 잠시 후에 반납해야 할 상태로 빌려진 것인지를 궁금히 여긴다. 이러한 회의는 종교인이면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때는 신이 아득히 멀게 느껴지며 어떤 때는 신이 마음속에 있는 듯이 느껴지는 것이다.
제6연에서 화자는 늙었으나 신과의 합일을 이루기 위해, 젊었을 때의 감각적인 삶을 포기하고 영적인 세계를 추구한다. 화자가 젊었을 때 만들었던 배는 낡았지만 새로운 희망으로 인하여 새로운 배가 된다. 세속적인 삶을 포기하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새로 수리한 그 배를 타고 나아가려 한다.
마지막 연에서 낡은 배가 새로운 배로 변하고 화자는 재생의 기쁨에 젖게 된다. 이것은 새로운 삶으로의 탄생 즉 부활을 뜻하는 것이다. 딸과 늙은 왕의 재회는 아버지 자신의 재생과도 같다. 화자는 수리한 새로운 배를 타고 지금까지 절망해왔던 삶으로부터 희망찬 구원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최희섭, 영어영문학 제18호, 1995 일부 참조).
<엘리엇이 재혼 신혼 여행 때 머문 럿셀호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시인코너>
<작가소개>
엘리엇은 1888년 9월 미국의 세인트루이스에서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하버드 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어 유니테리언교(Unitarian)를 세우고 워싱턴대학을 설립하여 2대 총장을 역임한바 있다. 아버지는 성공한 사업가로 벽돌공장 사장이었으며 어머니는 교사출신으로 시와 시극을 썼으나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한 작가였다.
엘리엇은 1906년 하버드대학에 들어갔으며 철학을 공부하였고 1910년 석사학위를 받은 후 소르본느대학에서 1년간 불문학과 철학을 연구하였다. 하버드로 돌아가 인도철학과 불교를 접하게 되었으며 브래들리(Bradley) 철학에 관한 박사논문을 썼으나, 논문심사때에 전쟁으로 인해 미국으로 갈 수 없어서 생전에 학위논문으로는 통과되지 못하였으나 죽기 1년전인 1964년에 출판되었다.
평생 스승인 에즈라 파운드를 1914년에 만났다. 파운드의 추천으로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가 당시 가장 권위있는 문예지 <<Poetry>>의 1915년 6월호에 실리게 되었다.
하버드 대학에 다닐 때에 접한 상징파 시인 라포르그(Jules Laforgue) 등으로부터 구어체리듬, 아이러니한 어조, 자유시형 등 시의 기교상 문제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엘리엇은 라포르그를 ‘나에게 표현법과 나 자신의 시어의 가능성을 가르쳐 준 최초의 사람’이라고 말한바 있다.
엘리엇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인물은 에즈라 파운드와 흄(T.E. Hume)이다. 특히 흄과 엘리엇은 문학에서는 고전주의자, 정치에서는 왕당파, 종교에서는 국교도라는 공통적인 입장을 취했다.
“엘리엇은 밀턴과 낭만파시인들을 평가절하하였고 형이상학파 시인들을 예찬하였다. 또한 신화적 방법이 문학작품의 창작에 있어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엘리엇은 자신의 <황무지>나 조이스의 <율리시즈>가 표면상으로는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워보여도 그 밑에는 질서와 구조의 원리로 신화적 서사체계를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조이스에게 <오딧세이아>라는 밑그림이 있다면 엘리엇에게는 프레이저(Fraser)와 웨스턴(Weston)의 인류학적 서사가 있는 것이다”(봉준수, 엘리엇의 흄, 현대영미시연구, 2010 가을).
1915년 6월 영국에서 화가의 딸이며 발레 무희인 비비엔(Vivian Haigh-Wood)과 결혼하였으나 그녀는 항상 정신병으로 시달리는 등 병약하여 가정은 우울했다. 그는 결혼하자마자 아내의 병을 치료하고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중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1917년에는 로이드 은행에 들어가 8년동안 성실하게 근무하였다. 근무하는 중 <황무지>를 비롯한 중요한 몇 편의 시와 문학비평을 쓰고, 1917-19년에 <<에고이스트(The Egoist)>>지의 편집인, 1922년부터는 <<크라이테이언(The Criterion)>>지의 편집인이 되었다.
1921년 은행업무와 집필업무 그리고 아내의 병수발로 건강이 악화되어 3개월간 유급휴가를 얻어 스위스 로잔으로 가서 치료와 휴양을 하면서 <황무지>를 완성하였다. 휴양지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파리에 머물던 파운드를 만나 원고를 보여 682행의 시가 434행으로 크게 수정을 받은 후 1922년 자신이 창간한 <<크라이테리언>>지 창간호인 10월호에 발표를 하였다. 11월에는 뉴욕에서 발행되는 <<다이얼(The Dial)>>지에 게재하였으며, 12월에 이 잡지사에서 각주를 붙여 단행본으로 출간하여 엘리엇의 명성도 높여 주었고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었다.
그 이후 발표된 중요한 작품으로는 1930년 <재의 수요일>이 발간되었는데 그의 시세계가 종교시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1927년 6월 옥스퍼드셔의 핀스톡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영국으로 귀화하면서 영국국교회의 교도가 된 것과 연관이 있다. 1928년 발간한 소책자 <<랜슬럿 앤드루스를 위하여(For Lancelot Andrews)>>의 서문을 통해 자신은 “문학에서는 고전주의자, 정치에서는 왕권주의자, 종교에서는 영국국교”라는 것을 밝힌다. <재의 수요일>은 자기가 단테의 철학을 최초로 적용하여 쓴 시임을 자인하고 있다. 이 시는 생에 대한 환멸과 체념이 밑바탕에 짙게 깔려 있다. 엘리엇과 단테의 시(詩)의 공통된 특질은 명료한 시각적인 이미지와 빛을 쏟는 듯한 찬란한 언어의 사용이다. 이는 흄과 에즈라 파운드 이래 모더니스트들이 추구한 현대시의 공통적 특질이라 할 수 있다(김현옥, Bright Poems, 학문출판(주), 2003).
1925년 로이드 은행에서 페이버사(Faber and Gwyer, 나중에는 Faber and Faber로 변경)로 옮긴이래 한평생 이 출판사에 몸담고 있었다. <<크라이테리언>>지는 17년동안 발간해오다 1939년 폐간하였다.
30년대 엘리엇의 중요한 문학활동은 시극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특히 1935년 캔터베리 종교제에 공연할 연극의 제작을 위촉받고 1170년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살해당한 토마스 베켓(Thomas Becket) 대주교의 순교를 다룬 <대성당의 살인(Murder in the Cathedral)>을 썼다.
시인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비평가들이 엘리엇의 대표작으로 꼽는 <<네 사중주(Four Quarters)>>는 그의 나이 47세부터 쓰기 사작하여 55세까지 8년간에 걸쳐 완성하였다.
1935년이래 이혼상태에 있었던 첫째부인은 1947년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1957년 1월 페이버사에서 비서로 일하던 발레리 플레처(Valeri Fletcher, 1926-)와 결혼을 했는데 38세나 어린 여자였다. 엘리엇은 재혼으로 비로소 가정의 행복을 찾게 된다.
1965년 1월 77세를 일기로 ‘살아서 그만한 영광을 누린 사람이 일찍이 없었다’는 말을 들었던 엘리엇은 세상을 떠났다. <<타임>>지는 시인의 공식 사망보도에서 엘리엇을 ‘당대의 최고로 영향력이 있는 영국 시인’이라고 말했다. 유언에 따라 화장한 재는 선조들의 고향인 이스트 코커(East Coker)의 성 미카엘 교회(St. Michael's Church)에 안장되었다.
그의 무덤이 있는 교회의 추모비에는 ‘나의 시작에 곧 나의 최후가 있다. 나의 최후에 곧 나의 시작이 있다. (In my beginning is my end. In my end is my beginning.)’이라는 두 문구가 적혀 있다. 웨스트민스터 대 수도원(Westminster Abbey)의 시인의 구역(Poet's Corner) 바닥에 있는 엘리엇 기념비에는 ‘죽은 자의 소통은 산 자의 언어를 초월한 불꽃으로 이루어진다. (The communication of the dead is tongued with fire beyond the language of the living.)'는 <리틀 기딩(Little Gidding, 1942)>에 있는 싯귀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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