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
(고전1:18-24)
시작하는 말
십자가의 도란 무엇을 말하는가? “십자가에 관한 말씀”(쉬운 성경), “십지가의 이치”(공동번역성경), “십자가에 대한 메시지”(The message of the cross NLT),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메시지”(the message about Christ's death on the cross, GNT)를 일컬어 말한다.
십자가의 도가 ?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표적을 많이 체험한 민족이다. ❶아브라함의 가족사, ❷야곱의 가족사, ❸요셉의 가족사, ❹출엡굽의 민족사, ❺시나이 광야의 이동 민족사, ❻가나안 정복의 민족사에 표적이 일어나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 ❼물론 가나안 정착시대나, ❽이방의 포로생활에서도 고비, 고비마다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고전1:22)라고 말했다. 유대인들은 표적(signs)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민족이다. 유대인들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표적을 체험하면서 살아왔다. 그들은 표적을 보지않으면 믿질 않을 정도였다.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흉악한 죄인들이 매달리는 사형형틀에 불과했다. 표적의 민족인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치욕스러운 저주에 불과했다. 그들은 당연히 십자가를 꺼려 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일종의 “스캔들,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a stumbling block), 비위에 거슬리는 것, 반표적적인 것(an anti-miracle)”으로 밖에 보이질 않았다. 그들의 눈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그리스도는 “민족적인 반역자, 극악무도한 흉악범”에 불과했다.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스라엘 안에 이슬람교는 약20% 되자만 기독교는 극소수 몇%에 불과하다고 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다(마16:1). 우리 주님은 “요나의 표적”((마16:4)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예 표하는 표적이었다.
우리 주님은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막8:12)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힌 십자가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기를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27:40).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율법학자들)과 장로들(원로들)과 함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27:42)고 희롱했다.
유대인들에게 표적과 정반대되는 십자가는 “기분 나쁜 것, 불쾌한 것, 성질나게 하는 것, 성가시게 하는 것”에 불과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고 말씀하셨다.
이방인에겐
미련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고전1:23)라고 말했다. 이방인이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즉 불신자들을 말한다. 불신자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 터무니없는 것, 허튼소리, nonsense)”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교회와 교회의 모든 행위를 “미련한 짓, 터무니없는 짓”, 강단에서 외치는 설교를 “허튼소리”로 치부한다. 불신자들의 눈에 교회는 “허튼짓 하는 집단, 사회악을 조장하는 무익한 집단, 분쟁을 일삼는 싸움과 투쟁의 집단”으로 보일뿐이다.
불신자들에게 교회는 구미가 당기는 맛집이 아니라 버려진 인적이 끊긴 폐점, 폐가에 불과할 뿐이다. 한때는 로망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인걸(人傑)이 끊긴 한적한 곳의 전원주택 마을과 다를바가 없다.
믿는 자들에겐
하나님의 능력이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3-24)고 말했다.
십자가의 도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표적이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지혜”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는 “표적중의 표적이요, 지혜중의 지혜”라는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에서 뛰어 내리는 표적을 구했지 십자가에 매달린 후 3일 만에 부활하는 표적을 알지 못했다. 헬라인들은 십자가를 묘면하는 철학적인 지혜를 구했지 십자가를 지고 난후 영원히 죽음을 모면하는 영원한 지혜를 알지 못했다.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길을 걷다가 돌을 보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 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한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십자가는 천국가는 디딤돌(stepping stone)이 분명하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5)고 말했다.
끝맺는 말
우리 주님은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셨다.
시므온 애쉬는 “자기 부인이 이루어진 성화된 사람과 하나님을 높이는 성숙한 사람의 마음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중심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우리 주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말씀하셨다.
세상은 십자가의 도의 가치를 애써 부인한다. 유대인들은 거리끼는 것으로 보아 배설물보다 더 꺼려하고 싫어하고 회피했다. 헬라인들은 지혜롭지 못한 미련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가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로마인이건, 어떤 민족이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 그 자체였다.
현실교회가 십자가의 도(the message about Christ's death on the cross )에서 많이 이탈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늦지 않았다. 비관할 것도 없다. 신앙생활에는 지름길이 없다. 공자의 길, 석가모니의 길, 마호메트의 길, 단군의 길, 기타 그 어떤 종교의 길도 지름길이 될 수는 없다. 십자가의 정도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욕하던 한편강도가 회개한 후 “예수여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23:42)라고 절규하여 외칠때에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고 선언하셨다. 이게 바로 십자가의 도요 길이다. 우리 주님은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23:46)고 십자가의 길의 마지막을 소개하고 있다.
“십자가의 도”를 설교하기는 쉽지만 몸소 그 길을 걸어가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자기 희생과 옛 자아의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가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이 말씀이 곧 십자가의 정신이다.
고난 주간에 우리는 사도 바울의 “내가(My old self)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My ego is no longer central.)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