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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위치
4. 새 예루살렘으로 완성된 교회 (다)
이현래 목사님 주일 말씀 2014. 6. 1.
[계시록 21:18~21]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다. 유리 같이 맑은 정금성(교회)
우리는 지금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창세전에 예정된 교회, 역사 안에 실현되었던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지금 이 땅위에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 그리고 이 교회의 장래가 될 새 예루살렘으로 완성될 교회에 대한 최후의 이상을 보고 있다.
오늘은 유리같이 맑은 정금성! 성을 중점적으로 말씀을 하겠다. 이 성은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구약성경을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는 성막이 있었다. 그 성막은 하나님의 형상이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였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건물로 형상화 시켜놓은 것이 성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안에 그리스도의 모든 요소가 다 들어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를 다시 형상화 시킬 때 그것이 교회가 되고 성전이 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새예루살렘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원래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창세전에 어떤 교회를 예정했던가? 어떤 교회를 생각하고 만물을 창조했던가 하는 이것을 알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 형상으로서의 교회를 위해서 그 완성으로서의 새 예루살렘을 위해서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과학적인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에 관한 문제다. 하나님은 뭣 때문에 일을 하시는가? 뭣 때문에 역사하시는가 하는 그 이유가 전부 교회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자기가 몸이 필요하신 분이고 그 몸은 개인으로서 완성될 수 없기 때문에 단체적인 몸이 필요하다. 그 단체적인 몸이 교회이고 그것이 확대되면 나라이고 그렇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를 위해서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그 말은 모든 것을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창조했고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계시는가? 뭣 때문에 우리를 불렀는가? 이 이유를 분명하게 알지 않으면 내가 하나님을 뭣 때문에 믿는 것인지 잘 모르는 것이다. 인간의 필요가 많기 때문에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시작된 것을 종교(宗敎)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약하다. 연약하다. 부족하다. 불완전하다. 그러니까 강한 자가 필요하고 완전한 자가 필요하고 나를 도울 자가 필요하다.’이런 이유를 필요로 시작한 것이 종교다. 그래서 처음에는 해를 숭배한 사람들도 있고 달을 숭배한 사람들도 있고 큰 물을 숭배한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는 다리를 숭배한 사람들도 있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연약하니까 인간보다 강한 어떤 것을 의지해야한다는 이런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 원시종교(原始宗敎)다. 이 종교가 발전해서 지금도 그렇게 종교를 해오고 있다. 결국 종교는 사람의 필요를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종교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쇠퇴해가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필요는 인간 스르로 노력해서 채워가고 있기 때문에 점점 하나님이 필요 없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하나님이 많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교회들이 왕성하다. 그런데 하나님이 필요 없는 시대가 온다. 지금 2만불이 넘어가는 시대에 있는데 국민소득이 5만불이 된다든지 10만불이 된다든지 하면 모든 인생의 문제가 정부로부터 해결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든 문제를 정부가 책음을 지게 된다. 그러니까 돈 때문에 걱정할 일도 없고 병이 나서 걱정할 일도 없고 문제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니까 유럽의 교회는 텅텅 비고 있다. 왜 그런가? 문제가 다 해결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도할 일이 없어진다. 아파서 병원에 못 가니까 기도를 했고, 밥이 없어서 굶고 있으니까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다 해결되니까 하나님께 구할 것이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 구할 것이 있어서 갔던 사람들이 구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교회를 안 가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점점 시들어져 가고 있다. 우리나라도 경제력이 발전해가면 점점 그렇게 되어간다. 왜냐하면 아직은 못 사는 사람도 많고 문제도 많으니까 애걸복걸 하고 있는데, 다 살만하면 애걸복걸할 일이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저절로 교회가 없어지게 된다. 이것은 종교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것은 우리 인생을 해결하기 위한 해답서가 아니고 하늘에서 내려온 교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원한 계획,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인생,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세상,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추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 그래서 이것을 보고 계시라고 한다. 하나님이 위에서부터 보여주시고 하나님이 위에서부터 내려오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했다. 누가 천지를 창조해달라고 했나! 우리는 창조해달라고 한 일이 없다. 하나님이 창조했다라고 시작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이 되셨다.”고 말한다. 누가 말씀이 육체가 되어달라고 했나? 성경의 원칙이 전부 이렇다.
그런데 사람들이 종교적인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보니까 아~ 하나님이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더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는 하나님이 언제든지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면 얼마나 좋겠나. 그러면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같이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는 분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분명히 전에는 내가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셔서 이렇게 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건이 있었는데, 어느 날 내가 곤고한 입장에 처했는데 하나님을 부르짖었는데 대답이 없었다면 그때 나를 도와주신 하나님은 어디로 가셨냐는 의문이 생긴다. 그때는 허상이었는가? 환상이었는가? 이렇게 생각되어진다. 왜냐하면 응답이 없기 때문이다. 늘 응답을 하시던 하나님이 응답을 하지 않으면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다.
갓바위에 간 사람들은 참 교묘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늘 들어준다고 하면 사람들이 안 가지 싶다. 기도하는 것마다 갓바위 부처님은 다 들어준다면 아무도 안 간다. 왜냐하면 갓바위 부처님이라도 늘 기도하는 것을 들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주 묘한 말이 있다. 1년에 한 번은 들어준다고 한다. 그러니까 희망을 가지고 간다. 사람의 생각이 늘 ‘뭘 더 해야겠다. 더 채워야겠다. 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언제부터 그랬냐면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 때부터 그랬다. 지금까지 그렇게 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가 흥왕해있는 것이다. 세계 어느 곳, 어느 민족을 봐도 종교가 없는 곳, 종교가 없는 민족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그 원점이 다 같기 때문이다. 형태는 모두 다르지만 목적은 똑같다. 예배당에 가는 사람의 목적이나 갓바위에 가는 사람의 목적은 같다. 가는 길은 다른데 목적이 같다. 수능시험 때가 돌아오면 예배당에서는 고3학생들을 위한 기도회를 연다. 또 법당에서는 고3학생을 위한 특별법회를 연다. 갓바위 부처님은 아무 것도 안하고 계속 수입만 들이고 있다. 가만히 있는 데도 돈이 계속 들어온다. 그러니까 기독교하고 불교하고 갓바위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목적지가 같으니까 내용이 같다. 방법만 다르게 하는 것일 뿐이다. 법회를 하느냐 기도회를 하느냐 시주를 하느냐는 방법만 다를 뿐이지 목적은 다 똑 같다. 이것을 우리는 종교라고 말한다.
사람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시작한 것을 종교라고 하고 하나님의 소원과 목적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을 계시라고 한다. 이 계시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모르는 일이다. 인간의 필요는 생각하면 알 수가 있다. 내가 뭐가 부족한지 알 수 있다. 내가 뭣이 부족한지 알게 되면 다른 사람도 뭣이 부족한지 알게 된다. 그래서 사람 속에는 뭣이 필요한지를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이것을 사람들이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적과 필요는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다. 우리 속에는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누가 가르쳐줘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누가 내게 알려줘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계시를 해줘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이다. 우리 속에서 깨달을 것 같으면 성경이 필요 없다. 내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내 자신 속에 있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 내 자신 속에 없는 것은 깨달을 수 없다. 그러니까 성경에 있는 말씀은 내 속에 있는 것을 깨달아서 쓴 것이 아니고 밖에서 어떤 메시지가 와서 그것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알 것 같지만, 정작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른다. 내가 어떤 부모로부터 태어난다. 그러면 내가 태어났으니까 부모를 알아야 하는데, 전혀 부모를 모른다. 부모가 갓난아기를 낳아서 놔두고 가버렸다면, 그 아이를 다른 사람이 키우면 낳은 부모는 모르는 것이다. 어떻게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는가 하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끊임없이 나에게 계시를 해주었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부모는 메시지를 계속 보내는 것이다. ‘나는 네 엄마다. 나는 네 아빠다.’이렇게 계속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젖을 주는 것도, 안아 주는 것도 전부 하나의 메시지다. 이렇게 계속해서 말씀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 엄마!’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어느 날 가면 자연스럽게 아기는 ‘엄마’이렇게 부르게 된다. 그러니까 사람이 뭘 아는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모른다. 밖에서 가르쳐주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필요하다. 밖에서 들려오는 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뭘 하시는지 우리는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뭘 하시는가는 우리가 들어야 알지 안 듣고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믿음은 들으면서 난다”(롬10:17)고 했다. 불교와 다른 것은 불교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자기 속에서 뭣을 깨닫는 것이다. 그 깨닫는 것은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깨닫는데 무슨 믿음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은 들으면서 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하는 자가 없으면 어찌 듣겠으며~”(롬10:14)한다. 전하는 자가 없이 듣겠냐는 것이다. 내가 깨달으면 되지 왜 모르겠냐는 것이다. 이것은 전해 와야 아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듣고 왔지 스스로 깨달아서 온 사람은 없다. 혹시 내가 ‘스스로 교회를 가야겠다.’하고 오신 분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오라고 해서 왔는지 내가 가고 싶어서 온 것인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자기 속에서 깨달아서 온 것은 아니다. 그 이전에 뭐가 있어서 온 것이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 가다가 예수를 만났다. 그런데 자기가 예수를 만나려고 간 것은 아니다. 이런 것과 전혀 상관없이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결박해오려고 가다가 예수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모세가 자기를 여호와를 찾았던 것이 아니다. 그는 80이 되어서 인생을 포기한 때였다. 그런데 호렙산에서 부르시는 분이 있었다. “이리 오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 불꽃이 있었다는 것은 모세를 불렀다는 말이다. 그래서 찾아갔더니 “나는 여호와다.”이렇게 알려 준 것이다. “나는 ~이다.”이렇게 알려줬다. 그러면 “나는 너희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나는~이다.”이니까 그렇다. 모세는 그 말을 듣고 애굽에 내려간 것이다.
그리스도의 형상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때 내가 스스로 깨달아서 만나 것이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을 깨달으려고 하면 절대로 안 되고 하나님을 스스로 알려고 해서도 안 되고, 나는 밖에서 오는 메시지를 들어야 한다. 사람을 통해서든지 누구를 통해서든지 뭐를 통해서든지 밖에서 나에게 와야 하는 것이지 절대로 나 스스로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깨달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그 세계가 아니다. 단지 자기가 생각하는 세계일뿐이다.
그러니까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했을 때 우리는 도대체가 그 형상이 뭔지를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아담을 보고 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인가? 또 만물을 보면서 저것이 하나님의 형상인가? 이렇게 우리는 더듬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아담을 보고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하고 그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였다. 그러니까 그 성막은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의 형상은 성막이다. 이 그리스도의 형상이 오늘날은 교회가 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확대 재생산된 것이 새 예루살렘이다.
하나님은 원래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고 모든 것을 시작하였다는 말이다. 만물을 창조했다는 말은 바위도 만들고 돌도 만들고 했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그 모든 것은 보이는 것도 있고 안 보이는 것도 있고 다 있다. 이것은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지었는가?’ 이것이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다 모른다. 모르지만 나는 그 모든 것 속에 들어 있다. 하나님이 창조한 그 모든 것 속에 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왜 지었는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지었다. 자신의 형상을 위해서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그분의 형상을 따라서 지어진 사람들이다. 그냥 있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하다 보니까 코도 생기고 눈도 생긴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을 두고 사람을 만들었으니까 창조의 중심이 사람이다. 창조의 중심은 사람인데 그 경륜의 중심은 하와란 말이다. 하나님은 배필을 지어서 아담에게 주면서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고 했다. 이 말은 경륜의 중심은 하와라는 뜻이다. 이 하와는 오늘날 교회의 형상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창조의 중심은 사람이고 하나님 경륜의 중심은 교회이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신다는 그 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일하셨다. 오늘날은 교회를 통해서 일하신다.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은 알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저 멀리 아프리카에 저런 문제가 있고 이렇게 어려운 문제가 있고 중동에는 매일 폭탄이 터지고 하는 데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은, 평화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뭘 하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일하셨고 오늘날에는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니까 이것도 다 알기 어려운 데 우리가 어디 우주 구석에 있는 일을 다 알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것도 다 모른다.
나는 왜 있는가? 우리는 왜 있는가? 이 문제가 바로 하나님 창조의 중심은 사람이고 그 사람을 지으신 목표요 경륜의 중심은 교회란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 없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귀퉁이만 아는 것이지 전체를 알 수는 도저히 없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다.
요한이 본 어린양의 아내인 새 예루살렘의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는데 성은 유리 같은 정금이고,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으며, 열두 문은 열두 진주인데,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었다.
요한이 어린 양의 아내를 봤다고 한다.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내가 보이겠다.’ 이렇게 해서 봤는데 이 새 예루살렘이라고 이름이 붙은 어린 양의 아내는 어떻게 생겼는가? 오늘은 이것을 이야기 했다.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다. 성곽은 성벽이라는 말이다. 성벽은 벽옥으로 쌓였는데 성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너무 맑아서 그것이 투명하게 유리 같이 보이더라는 말이다. 이것을 요약하면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으며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인데 문 마다 한 진주라는 것이다.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 길이더라.’이렇게 되어 있다.
도성 전체가 정금과 보석과 진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금은 불변하는 것으로서 생명과 영원을 상징하므로 하나님의 신성을 상징하고, 보석은 연단의 과정을 거쳐 나온 영광의 상징이며, 진주는 생명으로 이물질을 이겨낸 승리를 상징한다.
이것을 다시 추려보면 도성 전체가 정금과 보석과 진주로 되어 있더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도성은 물질적으로 말하는 이런 성곽이 아니라 ‘대구시’라고 하면 땅도 있어야 되고 사람도 있어야 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사람을 이야기 한다. 그러니까 도성 전체가 정금과 보석과 진주로 되어 있다는 말은 거기 있는 사람들 전체가 정금과 보석과 진주로 되어 있더라는 말이다. 영어 성경에는 ‘city’로 변역했다. 우리는 도성이라고 하면 성곽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데 그것은 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금은 무엇인가? 불변하는 것이고 안 변하는 것이다. 생명과 영원을 상징하기 때문에 신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석은 연단의 과정을 거쳐서 나온 영광의 상징이다. 진주는 생명으로 이물질을 이겨낸 승리를 상징한다. 그러니까 생명과 영광과 승리, 이것이 그 성 전체를 이루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 사회 전체를 이루고 있더라. 그 인간들 전체를 이루고 있더라 그 말이다.
주 예수님은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정금)을 받은 아들로서 불의 연단을 거쳐 영광(보석)에 이르렀고, 마침내 모든 부정을 이겨내는 승리(진주)에 이르렀는데 그의 신부, 그의 아내인 이 도성도 그러하더라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대로 지어진 것임을 타나낸다.
이것을 어디서 볼 수 있는가 하면 주 예수님은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을 받은 아들이다. 여기서 ‘신성한 생명을 받은 아들이다.’ 이것이 정금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불의 연단을 거쳐서 보석에 이르렀다. 영광에 이르신 분이 예수님이 아닌가? 그리고 마침내 모든 부정을 이겨내는 승리자가 누군가? 바로 예수님이 아닌가?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을 보면 정금과 보석과 진주로 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 자체가, 인격이 그런 사람이다.
그의 신부, 그의 아내인 이 도성,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이 사회는 그렇더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러했는데 그의 아내도 그렇더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도들이 봤는데 그는 정금과 보석과 진주였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을 봤는데 새 예루살렘도 그렇더라는 것이다.
남편의 수준이 아내의 수준이 된다. 에베소서 5장에서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이런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기 수준에 맞도록 만드신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같이 살려면 수준이 맞아야 되기 때문이다. 수준이 너무 안 맞으면 살기가 어렵다. 하나님의 자비는 죄인을 용서하고 죄인을 불러들인다. 그렇지만 자비만으로 안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무리 내가 길거리에 있는 거지를 불쌍해서 집으로 데리고 왔다고 하더라도 이 거지가 계속해서 누더기를 입고 있고 이가 드글드글 끓고 있으면 같이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옷을 벗기고 목욕을 시켜주고 이발을 시켜주고 깨끗하게 해 주는 이유는 어느 정도 수준이 자기와 맞게 하려고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우리가 자기의 신부가 되게 하고 아내가 되게 하려면 우리가 갈고 닦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깨끗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나보고 ‘너 내 신부가 되려면 갈고 닦아라.’ 이러면 멸망이다.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수준에 이르도록 갈고 닦겠는가? 그러면 그것은 바로 멸망이다.
히말라야 꼭대기에 등산을 하고 온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보고 ‘너 히말라야 꼭대기에 올라갔다 와!’ 그러면 그것은 복음인가, 멸망인가? 멸망이다. 서울대학교를 간 사람이 다른 학생을 보고 ‘너 이 수준만큼 공부해!’ 그러면 그 수준에 이르도록 공부를 할 사람에게는 좋지만 공부를 못할 사람에게는 복음이 아니고 멸망이다. 복음이라는 말이 그 말이다. 복음이라는 말은 내가 해도 되는 것이 복음이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신다는 것이 복음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신다. 내가 돈이 전혀 없어서 구할 데도 전혀 없다. 그런데 누가 돈을 나에게 주었다. 이것이 복음이다. 안 그런가? 지금 빚에 쪼들려서 숨어 다니면서 살고 있는 판에 로또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이 왔다면 복음이다. 왜냐하면 내가 못하는 것을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신성과 그 다음에 연단과 전쟁을 통해서 승리하여 진주가 되셨는데 예수님만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항상 거지가 될게 아니겠는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경배도 하고 찬양도 하며 기도도 할 수 있지만 같이 살 수는 없다. 부부가 될 수는 없다. 항상 불쌍히 여김을 받는 사람밖에는 안 된다. 그런데 요한이 보니까 그렇지 않고 ‘교회가 바로 저분과 같아 졌네.’ 이런 말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대로 지어졌다는 것을 증거했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아직 어수선하지만 어느 날인가 가면 바로 요한이 본 것처럼 ‘아! 우리가 봤던 주님 그대로네!’, 이렇게 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날이 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입증해준 것이 새 예루살렘이다.
교회는 새 생명으로 거듭났다. 아까 예수님은 신성한 생명을 가졌다고 했는데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새 생명으로 거듭나서 세상으로 인한 연단을 거친 후에 승리자가 된다.
그러면 우리가 거듭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것이다. 이것은 내 공로가 아니란 말이다.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데 연단의 과정을 거칠 때는 내가 거치는 것이지 예수님이 대신 거쳐 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연단의 과정에서 시험을 많이 받는 것이다. ‘전에는 그냥 기도만하면 척척 응답을 하시더니 지금은 기도를 해도 응답을 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왜 내 사정을 모르시는가? 내 사정을 모르시는 하나님이 내게 무슨 필요가 있는가?’ 이렇게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연단의 과정이다. 연단의 과정은 내가 겪어야 되는 것이다. 연금술이라는 것이 금을 가져다가 불에다 달궈서 두드리고 달궈서 두드리고 계속 그렇게 한다. 벌겋게 달궈서 망치로 두드리고 또 벌겋게 달궈서 망치로 두들기고 이렇게 계속 두드려서 펴는 것인데 요즘은 기계적으로 얇게 펴서 우리가 보는 금박지는 금이다. 그냥 종이가 아니고 금이다. 그런데 그것은 기계적으로 금을 얇게 펼 수가 있다. 심지어 금은 액체로 만들어서 바를 수도 있다. 그런데 옛날에는 순전히 두들겨서 손으로 펴는데 될 수 있는 대로 얇게 펴야 될 게 아닌가? 그것을 바르는 것이다. 싸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많이 두들겨 맞아서 그렇게 되겠는가? 법궤 하나를 만들려면 금이 얼마 필요한데 그 금이 얼마나 많은 매를 맞아서 조각 목에 입혀졌겠는가? 잘못 때리면 구멍이 나버리면 안 된다. 그러면 다시 녹여야 되는 것이다. 그런 연단을 통해서 나왔기 때문에 영광스럽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서 연단이 올 때 ‘이것이 보석이 되기 위한 연단이구나.’ 이렇게 알아야 된다. ‘하나님이 이것도 안 해주시는가?’ 이렇게 해 버리면 이것은 아주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아니 지금 좋은 보석을 만들려고 두드리고 있는데 ‘나를 왜 때립니까, 나를 왜 때립니까?’ 이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항상 금 덩어리로 있어야 된다. 쓸모없는 금덩어리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단을 귀하게 생각해야 된다.
야곱이 바로 왕 앞에 갔다. 바로가 누군가? 애굽의 왕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자루를 가지고 양식을 구하러 온 영감이 나이가 130세다. 눈이 잘 안 보이고 지팡이를 짚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바로를 축복하겠는가? 그 자리에서 떨다가 죽을 사람인데 아이스크림 통에 들어간 사람처럼 떨다가 죽을 사람인데 담대하게 바로를 두 번이나 축복했다고 나온다. 축복하는 것은 내가 저 사람 보다 나아야 축복을 할 수 있다. 내가 더 나아야, 줄 것이 있어야 축복할 게 아닌가? 그런데 두 번이나 축복을 했다고 한다. 그게 공연히 된 것이 아니고 한 없이 두들겨 맞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자기 외삼촌을 통해서 두들겨 맞고, 마누라들을 통해서 두들겨 맞고, 자식들을 통해서도 두들겨 맞고...
그러니까 나를 두들기는 사람이 있으면 ‘아! 나를 연단하고 있구나! 내가 연단을 받아야 할 것이 있어서 그렇구나.’ 이렇게 알아야지 ‘평생 원수야, 평생 웬수. 너는 내 평생 원수야!’ 이렇게 해 버리면 안 된단 말이다. ‘평생 원수’가 아니라 ‘평생 연금술사’로 바꿔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얼마나 좋은가!
연단을 받은 것이 보석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깎일 수 없도록 만들어진 것이 보석이다. 여러분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샀는데 팔려고 보석상에 가면 대부분의 보석상에서는 ‘아이구, 이거 한 번 끼면 기스가 나서 값이 제대로 안 나갑니다.’ 한다. 살 때는 100만원 주고 샀는데 팔려고 하니까 30만원도 안 주려고 한다. 그러면 너무너무 억울하다. 그런데 기스가 나서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양심적인 보석상에 따르면 보석은 뭔가? 다이아몬드는 무엇인가? 기스가 안 나는 것이 다이아몬드라고 한다. 기스가 나면 다이아몬드를 왜 끼겠는가? 아무리 써도 기스가 안 나는 것이 다이아몬드라고 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하는가 하면 100만을 주고 산 것을 30만원 밖에 안 주고 사려고 하면 도둑놈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왜 30만원을 주고 사냐면 그렇게 사야 다시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 팔릴지 모르는 것이 보석이다. 보석은 다시 상처를 받지 않도록 연단 받은 것이다. 교회생활 속에서도 이런 저런 일로 상처가 자꾸 난다. 그 상처가 날만큼 다 나야 다시는 상처가 나지 않는다. 금강석은 더 이상 상처가 나지 않는다. 금강석은 오히려 쇠를 파고 잘라낸다. 이렇게 연단을 받는 이유는 쓸 데가 있어서이다. 연단 받지 않는 것은 쓸모가 없다. 연단은 귀중한 것이다. 이 연단을 거쳐야 승리자가 된다.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심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하기 위하여 지어진 에덴에는 아직 부정이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갈취하려는 마귀가 있었고, 지식으로 하나님 같이 되려는 아담이 있었다. 마귀는 기회만 찾고 있었고(벧전5:8참),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도 동일하다.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하기 위해서 지어진 에덴에서는 부정도 함께 있었다. 에덴동산은 굉장히 좋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부정이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갈취하려는 마귀가 그 곳에 있었다. 그리고 지식으로 하나님 같이 되려는 아담이 그 곳에 있었다. 마귀는 기회만 찾고 있었고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에 불만을 가지고 능력 있는 완전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것이 부정이다. 모든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인 인격 이상의 능력을 얻으려고 하면 마귀의 노예가 된다. 이상한 일이다. 세상은 능력이 있어야 산다. 능력이 없으면 세상을 살기 힘들다. 세상은 뭐니 뭐니 해도 힘이다. 세상은 힘이라는 사실을 꼭 알아야 한다. 세상은 정의라고 하는 사람은 꽤 고생을 한다. 세상은 정의가 아니고 힘이다. 정의는 강자들이 자기들을 위해서 부르짖는 것이지 실제는 힘이다. 어디를 가보더라도 힘이 지배한다. 사람이 세상을 사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격 이상을 힘을 원하면 나는 자동적으로 마귀에게 종이 되고 만다. 바로나 느부갓네살은 세상에서 가장 힘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마귀의 일을 하고 있었다. 사람은 능력을 가지려고 하면 마귀에게 종이 되어 버린다. 이것은 오늘날도 동일하다. 종교도 세상을 지배하려고 하면 변질되고 만다. 로마 가톨릭이 그랬다. 세상을 지배했지만 총칼로 사람을 죽였다. 완전히 마귀 노릇을 했다.
사람이 힘이 생기면 권력이 생기면 못할 것이 없다. 지금 선거철이 돌아왔는데 적당히 권력을 가지면 괜찮지만 너무 많이 가지면 사람을 죽인다. 현대 국가는 한 사람에 집중되는 권력을 점점 줄이려고 하고 있다. 민주화가 된다는 것은 권력을 골고루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국민들이 권리가 없었다. 지금은 국민이 권리를 갖고 투표를 한다. 권력자들이 투표를 통해서 당선이 되어야 권한이 생기기 때문에 우리도 권리가 좀 있게 되었다. 권리가 있다 보니 어떤 생각이 들게 되었다. 선거공보지가 왔는데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전혀 권리가 없으면 이러나저러나 찍으라면 찍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권리가 있으니까 아무도 모르는 사람을 내가 왜 찍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한 쪽에서는 국민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찍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고민 중이다. 나는 찍을 사람이 없는 데 안 찍으면 국민의 의무를 다 한 것이 아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게 되었다.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하는가? 내가 권리가 좀 있기 때문에 그렇다. 전혀 권리가 없으면 나오라고 하면 나와야 한다. 내가 만일 북한에 산다면 김정은이 나와서 투표하라고 하면 해야 하는 것이고 동그라미 치리고 하면 해야 하는 것이지 안 할 수 없다.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지금 나는 권리가 있다. 민주국민이기 때문에 권리가 있어 갈등을 하고 있다. 이건 조그만 권리다.
그런데 내게 만약 큰 권리, 권력이 있다고 생각해 보라. 권력을 갖고 있으면서 쓰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내 주먹이 번개처럼 빠른 데 옆에서 깐죽거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라. 손보고 싶은 사람이 많다. 우리야 힘이 없어 할 수 없지만 힘 있는 사람들은 도저히 볼 수가 없다. 한 방 쳐서 ‘빵’소리가 나야지 저 놈이 정신 차리지 라는 생각이 든다. 인격이상의 능력을 가지려고 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구에게 넘어가 버리게 된다. 마귀가 하는 짓을 내가 하게 된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동일하다. 교회도 그렇고 세상도 다 똑같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는 인생의 위치에 서서 완전하게 이 모든 부정을 일소하고 새로운 세계를 가져오셨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정해주신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우리보다 더 가지신 것이 없으셨다. 그러나 아담이 이기지 못했던 마귀를 이기시고 마귀로 말미암은 모든 부정을 일소하셨다(마4장 & 계21장 참). 하나님께서는 인생으로 넉넉하게 모든 부정을 이기도록 정해 놓으신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는 인생의 위치에서 완전하게 이 모든 부정을 일소하고 새로운 세계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부정을 자신이 지금 가진 능력보다 더 큰 능력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큰 능력으로 해결한 것이 아니고 인생의 위치에서 누구나 있는 그 위치에서 완전하게 그 부정을 소멸시켰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문제이고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생에서 주신 것 외에 어떤 것도 더 가지신 것이 없었다. 그 전에는 물 위로 걷기도 하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기도 하는 것을 보니까 우리하고 완전히 씨가 다른 사람으로 알았다. 그런데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보니까 우리보다 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와 똑 같았다. 그런데 모든 부정이 일소되었다. 이것이 비밀이다. 세상의 상식은 힘은 힘으로 이겨야 된다.
지금 동북아 정세가 불안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일본이 동북아의 최강자로 있었는데 중국이 떠오르고 있다. 그래서 일본이 불안해지고 있다. 자기 권리를 찾으려고 하고 있다. 일본은 동양에서 패권을 한 번 가졌던 나라였기 때문에 중국에게 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북한하고 수교를 맺으려한 것도 틈새를 공격해 들어 온 것이다. 세상은 힘은 더 큰 힘으로 이겨야 되기 때문에 군비경쟁에 들어가 더 나은 무기를 개발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능력도 가지지 않고 인생에게 오는 모든 부정을 일소했다. 아담이 이기지 못했던 마귀를 이기고 마귀로 말미암은 모든 부정을 일소했다.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을 읽어보고 계시록 21장을 참조해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을 모든 부정을 일소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으로 넉넉하게 모든 부정을 이기도록 정해놓으셨다. 부정을 이기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고 이기도록 만들어 놓으셨다. 만일에 사람을 이기지 못하도록 만들어 놨으면 하나님이 잘못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이 모든 부정을 다 이기도록 만들어 놓으셨다. 우리는 우리 방법으로 하려니까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 방법으로 하면 다 되도록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으신 만유에게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위치와 격을 주셨는데, 인간에게 정해진 위치는 인격이다. 그러므로 인격으로 온전할 수 있도록 하셨고 하나님은 이것을 보시고 심히 좋다고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만유에게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위치와 격을 주었다. 각자에게 소는 소에게 맞는 것을, 개는 개에게 맞는 것을 다 주었다. 인간에게 준 위치는 인격이다. 인격이 내 자리이다. 그러므로 인격으로 온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인격으로 온전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잘못한 것이다. 사람에게 격이 있는데 그 격으로 할수 없는 것을 하라고 하면 하나님이 잘못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격을 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다고 하셨다.
우리가 아담의 세계 안에서 보면 뭘 보고 심히 좋다고 했을까? 하나님이 뭘 보고 사람을 보고 심히 좋다고 했을까? 아담의 세계 안에서는 좋다고 할 것이 없다. 맨날 한쪽에서는 배고파 죽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엄청난 돈을 들여서 군비 경쟁을 하고 살상무기를 만들고 있는데 무엇을 보고 좋다고 했는가?
물고기에게는 지느러미를 주시고 보기에 좋다 하셨고, 사람에게는 인격을 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다 하셨다. 그러므로 물고기는 물속에서 살 때 보기에 좋고, 사람은 인격으로 살 때 보기에 심히 좋은 것이다.
물고기에게는 지느러미를 좋다. 그래서 사람은 물속에서 살 수 없는데 물고기는 물속에서 잘 산다. 그러니까 지느러미를 주고 보시기에 좋다고 했다. 사람에게는 인격을 주고 보시기에 좋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물고기가 지느러미가 있어서 산다면 사람은 인격이 있어 살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러니까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버리고 다른 것으로 잘 살려고 한다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고기는 지느러미로 만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전혀 원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도 인격으로 만족하면 하나님을 원망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우리의 필요를 찾으려고 하면 우리는 끝없이 하나님을 원망해야 한다. 그 역사가 우리가 출애굽의 역사에서 잘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왔다. 처음에는 해방되어 나왔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우리도 815 해방이 되었을 때는 얼마나 좋았는가. 그 날이 오면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어 광화문 네거리에서 둥둥 울릴 것이라고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 모두 자기가 뭐 해먹겠다고 싸웠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처음에 광야에 나왔을 때는 좋았는데 ‘밥이 없다, 물이 없다. 덥고 춥다.’고 불만하기 시작을 했는데 끝이 없다. 사람은 자기 필요를 찾으려고 하면 끝이 없다. 자기 필요를 찾아 살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물고기가 지느러미가 있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고 사람에게는 인격이 있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그런데 사람만 인격을 버렸다. 그러니까 살기가 어려워 진 것이다. 그러므로 물고기는 물에서 살 때 보기 좋고 사람은 인격으로 살 때 보기가 좋은 것이다. 그리고 승리이다.
인격은 홀로 있으면 연약하다. 그러나 연합하면 완전하다. 그러므로 누구와, 혹은 무엇과 연합하느냐가 중요하다. 마귀와 연합하면 마귀의 몸이 되고, 하나님과 연합하면 하나님의 몸이 된다. 이보다 완전할 수가 없다.
그런데 왜 그러면 아담은 인격을 버렸을까? 홀로 있으면 연약하다. 인격이라는 것이 홀로 있으면 연약하다. 사람의 위치는 홀로 서면 연약하다. 이래서 비관하게 된 것이다. 홀로 섰으니까 그렇다. 하나님은 홀로 있으라는 것이 아니고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고 만들어 놓았는데 홀로 있으니까 연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합하면 완전하도록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므로 ‘나는 불완전하다, 인생은 불완전하다.’고 하는 것은 희랍계통의 사람들이 한 말이다. 그런데 그 세계에서 그 양식으로 완전해지려면 인간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초월의 세계를 찾게 된 것이다. 이 땅에서는 불가능하다. 육신을 가진 이 인생 상태에서는 완전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저 세계, 피안의 세계, 이데아의 세계, 초월의 세계, 그 다른 세계를 찾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세상에 살아보니까 끝이 없다. 아무래도 안 된다.
그러면 하나님은 뭐하려고 세상에다 사람을 만들어 놓았겠는가. 불완전한 것을 만들어 놓고 어떻게 잘 살라고 하는가? 그런데 홀로서는 약하지만 연합하면 완전하다. 이것이 완전한 것이다. 완전한 것이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가 사람이 온전하면 잘 간다고 하면 완전한 것이다. 사람이 온전하지 않으면 쓸데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과 둘이 잘 연합을 하면 유용한 것이다. 자전거 타기보다 쉽다. 아직도 운전면허를 받지 못한 분이 있으면 두려워말고 가라. 나도 65세에 받았는데 자전거 타기보다 훨씬 쉽다. 자전거는 두발로 서기 때문에 선다는 것 자체가 어렵다.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다. 자동차는 네발이니까 내가 가만히 있어도 그냥 서있다.
내가 무엇과 연합을 하는가, 누구와 연합을 하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문제이다. 연합하지 않고 완전할 방법은 없다. 그러니까 무엇과 연합을 해야 하는가? 누구와 연합을 하느냐 이것이 중요하다. 마귀와 연합을 하면 마귀와 한 몸이 돼 버린다. 이것이 사람이다. 개는 마귀와 연합을 하지 않고 하나님과도 연합하지 않고 아무와도 연합을 하지 않는다. 자기 혼자 잘 산다. 그놈은 연합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사람은 연합한데에 따라서 한 몸이 된다.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 마귀와 연합을 하면 마귀와 한 몸이고 하나님과 연합하면 하나님과 한 몸이다. 이것이 비밀이다. 그러니까 이보다 완전할 수가 없다. 하나님과 연합한다면 이보다 완전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잘 못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진짜로 완전하게 만들어 놓았다. 하나님과 연합하면 완전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아담은 자신이 연약하다 하여 마귀와 연합함으로써 마귀의 몸을 나타냈으며, 주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연약함을 가지셨으나 아버지와 연합하심으로써(요10:30)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나타내셨다(요1:14참). 신비롭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어린양의 신부는 어린양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아름다웠다. 우리 모두는 비밀을 가진 존재들인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자신이 연약하다는 것에 매이고, 무능력하다는 것에 매여서 능력을 얻기 위해서 마귀와 연합했다. 그래서 마귀의 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사람은 자기 멋대로 산다. 원하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사는데 마귀의 몸으로 산다. 사탄의 몸으로 산다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우리와 똑같이 연약함을 가졌다. 우리보다 특별한 몸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연합함으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가졌다. 누구와 연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고 하는데 여자가 누구와 결혼했느냐에 따라 팔자가 달라진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연합이 문제이지 내가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까 연합하기에 좋은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다. 연합하기에 좋은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이런 사람이다. 연합하기에 좋은 사람이 별 사람이 아니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이런 사람이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애통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말을 들어야 한다. 그러면 애통하는 자가 왜 복이 있겠는가. 애통하는 자가 하나님과 연합하면 복이 된다는 말이다. 다르게는 해석을 할 수가 없다. 애통을 하지 않는 것이 복이 되지 애통하는 자가 왜 복이 되겠는가. 예수는 우리와 같은 연약함을 가졌지만 아버지와 연합했기 때문에 독생자의 영광을 얻었다.
인격은 능력과 연합하면 마귀의 몸이 되고 능력과 연합하면 할수록 나는 마귀의 특성을 드러내고 생명과 연합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신기한 비밀이다. 사람 자체만 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진짜 연약하고 아무것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연합하기에 따라서 팔자가 달라진다. 아담은 왜 실패했는가. 그것은 자기에게 주신 인격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시하고 능력만 찾았다. 그래서 실패했다. 예수는 어떻게 성취했는가. 인격으로 성취했다. 그 인격을 가지고 어떻게 성취했는가? 그 연약한 인격을 가지고 어떻게 성취했는가? 연합하기 때문이다.
아담은 스스로 강해져서 자기가 승리자가 되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아버지와 연합함으로 승리자가 되었다. 백제가 망할 때 백제는 연합군이 없었고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함락시켰다. 연합군은 이길 수가 없다. 일차세계대전은 연합군이 승리를 했고 이차대전도 연합군이 승리했다. 우리나라에 상륙했던 것도 연합군이다. 6.25에 우리를 구해졌던 것도 연합군이다. 그러니까 혼자서 잘난 것이 아니라 연합해서 잘난 것이다. 연합이 중요하다. 어디에 연합을 하느냐 이것이 중요하다. 참 신기한 비밀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으로 자신의 형상을 이루신 분이다. 자신으로 자신의 형상을 나타내서 자신의 형상을 이루신 분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 누구인지 몰랐는데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했던 그 사람이구나. 그 사람을 자신으로 성취했다.
사도들의 기초석이 됨
성곽은 하나님의 신성을 상징하는 유리 같이 맑은 정금으로 쌓였는데, 그 기초석은 각색 열두 보석들이다. 구약의 때에는 열두 족장들이 백성의 기초가 되었으며, 신약의 때에는 열두 사도들이 교회의 기초석으로 길잡이가 되었다.(계21:14) 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들이다(엡2:20). 교회는 그들의 간증과 고백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도들의 간증과 고백을 따라야 한다.
사도들은 기초석이 되었다. 확대 재생산은 사도들의 몫이다. 확대 재생산은 그리스도가 승리한 그 승리를 확대 재생산 하는 것은 사도들에게 달려있다, 사도들의 몫이다. 그러니까 여기 보니까 기초석이 있는데 거기에는 열두 사도들의 이름이 있더라는 것이다.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십이사도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도들이 기초석이 되었다.
성곽은 신성을 상징하는 유리같이 맑은 정금이었는데 생명이라는 말이다. 그 기초석은 각색 열두 보석이었다. 이 기초석, 왜 사도들이 기초석이 되는가? 구약의 때는 열두 족장들이 백성의 기초가 되었다. 신약의 때는 열 두 사도들이 교회의 기초가 된다. 그래서 길잡이가 된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한다. 예배소서 2장 10절에 보면 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 터, 그 터라는 말이 인격이다. 그러니까 기초석이라는 뜻이다.
이 열두 사도들의 간증과 고백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 교회이다. 신약 성경 전체는 사도들의 간증과 고백이다. 교과서로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고 교리서도 아니다. 배워서 익히라고 만들어놓은 신조가 아니다. 그들의 간증과 고백이다. 편지이니까 그들의 간증과 고백의 세우심을 받은 자들이 교회이다. 오늘 우리는 그들의 간증과 고백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들의 간증과 고백을 따라야한다. 그러니까 교회는 사도들을 따라야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 사도들의 시대가 지나면서 다른 사람들을 따르다가 교회는 실패했다. 다른 사람들 또 다른 것, 지식을 따르고 교리를 따르다가 실패한 것이다. 사도들의 시대가 지나면서 아마도 바로 신조가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신경이라는 것이 있는데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하는 것이 있는데 이런 것이 하나의 신조다. 그런데 이것을 사도 신경이라고 했기 때문에 사도들이 한 말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이 아니고 후에 10세기쯤 지나서 완성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12개에 신조 중에 하나다.
그런 신조가 많다. 니케아 신조니 아타나시우스 신조니 하는 이런 신조들이 많은데 사도신경은 그중에 하나중 대표적인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교리가 총 망라되어 있다. 죽은 후까지 다 보장되어 있다. 천당까지 다 보장되어 있는 신조다. 이런 것 만드느냐고 교회가 변질이 되어 버렸다. 사도들의 고백과 간증을 따라야 할 것인데 그것을 보다 더 지식적으로 구체화 시킨다고 해놓은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교회에 기초석은 사도들의 간증과 고백이다. 오늘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교회가 있는 것도 기초석이 있다. 그 기초석은 간증과 고백이다. 그 간증과 고백위에 세워진 것이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 간증과 고백을 존중하고 따라야 한다. 그러면 그 성곽이 쌓여진다는 것이다. 그 터 위에 세워진 것이니까 터가 어떻게 생겼냐에 따라서 집이 이렇게 지어질 수도 있고 저렇게 지어질 수도 있다. 여의도에 63층 빌딩을 지었다. 왜 이렇게 높은 빌딩을 짓기기 쉬웠냐면 기초가 되는 지반이 암반이었다. 그러니까 100층도 지을 수 있는 곳이다. 그냥 흙인 곳에는 그런 높은 빌딩을 지을 수 없다. 그러니까 기초가 뭐냐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진주 문-개선문
당시에 진주는 가장 값비싼 보석이었다고 한다. 주님의 승리는 진주 장사가 모든 것을 팔아서 사는 값비싼 진주와 같다(마13:46참). 조개는 자신의 생명으로 승리하여 진주를 만들어내고, 주님께서는 인격으로 승리하시고 만민을 구속하신다. 과연 이 값을 얼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다음에 문이 있는데, 진주 문이라고 한다. 진주 문이라는 말은 개선문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만든 문이 개선문이다. 우리나라에는 개선문이 없지만 나폴레옹의 개선문이 있다
주님의 승리는 진주 장사가 모든 것을 팔아서 사는 값비싼 진주와 같다는 말이다. 당시는 진주가 가장 값비싼 보석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렇게 진주가 비싸지 않다. 지금은 조개를 키워서 진주를 생산하지만 옛날에는 가장 값비싼 보석이었다고 한다.
마태복음 13장 48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는 말이 나온다. 그런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조개는 왜 그런가? 조개는 자신의 생명으로 승리하여 진주를 만들어낸 것이다. 자기 몸에 들어온 모래나 이물질을 자기 생명으로 계속 싸워서 이겨서 싸고 싸고 또 싸서 진주를 만들어낸다.
주님께서는 인격으로 승리하시고 만민을 구속하여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개선문이 되셨다. 인격으로 승리했기 때문에 만민이 들어갈 수 있는 개선문이 되는 것이다. 만일 인격 아닌 다른 능력으로 승리했다면 그 이하의 사람은 못 들어간다. 서울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문이 있고, 그 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요즘 말로 커트라인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인격으로 승리한 것은 커트라인이 없다. 우리 모든 인간이 똑같이 갖고 있다. 인격으로 승리한 이 승리에만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하나님께로 인도되는 것이다.
유대인의 회당만 하더라도 이방인은 못 들어간다. 왜냐하면 유대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회당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도 어떤 교리를 가지면 못 들어간다. 요즘 교회 앞에 이러이러한 교파 사람들은 들어오지 마시오, 라고 써 붙여 놓았다. 이것은 인격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격으로 승리한 진주 문 같으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 그런데 인격이 아닌 어떤 교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교리에 맞지 않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다. 제도나 교회마다 있는 어떤 것들로,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으로 만들어진 문에는 다 들어갈 수가 없다. 누군가는 거기서 배척받아야 되고, 누군가는 거기서 오히려 죽임을 당해야 된다. 인격으로 승리한 그 문에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이 완전한 개선문이다.
과연 이 값을 얼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진주 장사가 모든 것을 팔아서 진주를 샀다. 여기서 값은 나와 있지 않고 ‘모든 것을 팔아서’라고 했다.
그리고 교회는 이 인격의 연합으로 그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교회는 연합으로 승리한다. 주님은 아버지와 연합함으로 마귀와 세상을 이기셨고, 교회는 주님과 연합함으로 주님의 승리를 거두어들인다. 주님의 승리는 연합으로서만 거둘 수 있다.
교회는 이 인격의 연합으로 그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주님은 인격으로 승리하셨다. 이 승리를 거두려면 연합체라야 승리를 거둘 수가 있다. 맥아더가 일본천황에게 항복을 받았다. 그런데 그 항복을 받은 것을 실제로 거두어들이려면 군대가 있어야 된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승리하신 이 승리를 거두어들이려면 인격의 연합체가 있어야 된다.
교회는 연합으로만 승리한다. 기독교인이 개인으로 승리한다는 것은 아주 불안한 일일 뿐만 아니라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아주 작은 승리라고 할 수밖에 없다. 교회로 승리해야 된다. 교회는 연합으로 승리한다. 주님은 아버지와의 연합으로 마귀와 세상을 이겼다. 교회는 주님과 연합함으로 주님의 승리를 거두어들인다.
우리는 누구와 연합해야 된다. 한국의 운명이 이런 입장에서 보면 좋은 운명인 것 같다. 우리나라는 어차피 누구와 연합(동맹)을 해야 한다. 지금은 미국과 동맹을 하고 있어, 전쟁을 하면 미군이 들어와서 우리를 위해 싸워주게 되어있다. 우리는 혼자 할 수가 없다. 중국과 같이 큰 나라는 누구와 동맹을 맺을 필요가 없다. 누가 감히 중국에 와서 찝쩍대겠는가? 우리는 누구하고라도 연합을 해야 된다. 연합을 하지 않으면 살지 못할 민족이다. 조선 말기를 보면 참 비참하다. 연합할 데가 없었다. 일본 놈은 와서 자리 잡고 앉아있고, 청국과 연합했는데 청국이 졌다. 러시아와 연합했는데 또 러시아가 졌다. 할 수 없이 당한 것이다. 정말 그때 강력한 연합군을 만났다면 그렇게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때 미국은 필리핀으로 가버렸다. 우리와 연합하여 일본을 이겨줄 수 있는 연합체가 없었다.
우리는 어차피 누구와 연합해야 할 그런 운명을 가졌다. 여자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여자는 남자와 연합을 해야 자식을 낳는다. 자식은 알고 보면 원래 여자 것이다. 여자가 낳아서 여자가 기르는 것이다. 원시사회를 보면 여성사회다. 남자는 씨만 뿌리고 가버리니까 아무 것도 아니다.
연합체가 세상을 지배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지배하고 다스리라. 이것은 연합으로만 가능하다. 연합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우리는 주님과 연합하여 주님의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 주님의 승리는 연합으로서만 거둘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가장 귀한 것은 연합이다. 바벨은 모든 것이 있는 것 같으나 연합이 없다. 모래는 많으나 시멘트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교회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주님의 생명, 즉 연합하는 생명이 있음으로 승리를 거둔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가장 귀한 것은 연합이다. 바벨은 모든 것이 있었으나 연합이 없었다. 모래는 많으나 시멘트가 없는 것과 똑같다. 모래가 많으면 바람에 날리기나 하지 시멘트가 없으니까 벽돌이 안 된다. 교회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주님의 생명, 하나님과 연합하는 생명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승리를 거둘 수가 있다. 연합만이 우리의 자랑이 될 수 있다. 개인 개인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연합체가 될 수 있는 자랑이 우리에게 있다.
한 진주(연합)로 된 열두 문
열두 문은 진주로 되었는데 문마다 한 진주라고 했다. 문은 개선문을 연상케 하는데 문마다 한 진주라는 것은 한 개의 진주라는 것인지, 아니면 같은 진주라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한 개”의 진주로 문 하나를 만들 수는 없는 것임으로 “같은” 것으로 해석해본다.
한 진주로 된 문이 있다고 했다. 열두 문이 있는데 진주마다 한 문, 한 진주라고 되어있다. 문은 개선문을 연상케 한다. 한 진주라는 것은 한 개의 진주라는 것인지, 아니면 같은 진주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새로 번역한 성경(개역성경)에는 일부러 한 개의 진주라고 번역했다. 문자대로 번역하면 한 개의 진주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을 수 있다. 그런데 한 개라는 뜻이 숫자적으로 한 개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고, 같은 것을 말할 때도 쓴다.
우리가 한 마음이라고 할 때 그 뜻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이 된다(빌1:27참). 그리고 헤이스라는 단어가 “연합한” 하나라는 뜻으로도 사용 된다면 한 개의 진주라고 하기 보다는 여러 개의 진주가 연합하여 한 진주가 되어 문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한 마음이라고 할 때, 그 한 마음은 한 개의 마음이 아니라 같은 마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헤이스’라는 단어가 숫자적으로는 1이라는 단어인데, 이것이“연합한”이라는 뜻이 있다. 개별적인 하나도 있지만 연합한 하나도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사용 된다면 한 개의 진주라고 하기 보다는 여러 개의 진주가 연합하여 한 진주가 되었다. 그래야 문이 됐다는 말이 맞다. 내가 그렇게 해석을 해 본 것이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한 개라고 해석했다. 한 개라고 해석하면 해석이 안 된다. 진주 하나로 어떻게 문이 만들어지겠는가? 틀릴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해 본 것이다. 그래야 말이 된다.
교회는 연합된 하나다. 주님께서는 최후의 기도에서 우리가 다 연합하여 하나 되기를 소원하셨다(요17:11,21,22참). 연합하면 하나이고 하나이면 승리다. 만유는 연합으로 산다. 특별히 사람은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하고 그를 대신하여 만유를 지배하고 다스릴 자다.
교회는 연합된 하나다. 우리가 하나라고 할 때, 우리가 어떻게 하나인가? 연합된 하나이다. 주님께서는 최후의 기도에서 우리가 다 연합하여 하나 되기를 소원하셨다. 저들이 다 하나되게 하옵소서. 아버지와 내가 연합하여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다 우리 안에서 하나되게 하옵소서. 최후의 기도에서 여러 번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다.
연합하면 하나이고 하나면 승리한다. 만유는 연합으로 살게 되어 있다. 특별히 사람은 원래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하고 그를 대신하여 만유를 지배하고 다스릴 자로 만들어졌다.
어린양의 신부는 인격의 연합으로 승리한 사방에 문이 있는 성이다. 인격의 연합으로 승리한 곳에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판자를 연하여 지은 노아의 방주에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들어갔던 것 같이(창7:13~16참) 인격으로 승리한 교회는 모든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어린 양의 신부는 인격의 연합으로 승리한 사방에 문이 있는 성이라는 뜻이다. 어린 양의 신부를 보니까 사방에 문이 세 개와 동서남북이 있어서 문이 열 두 개다. 인격의 연합으로 승리하는 곳에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다. 사방에 있다는 말은 어디서든지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다.
판자를 연하여 지은 방주에는 모든 것이 종류대로 들어갔다고 되어있다. 정한 것도 들어가고 부정한 것도 들어갔다고 되어있다. 우리 생각 같으면 방주에는 좋은 것만 들여왔을 것 같다. 코브라는 안 넣었을 것 같다. 코브라를 왜 방주에 넣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뜻을 알 수가 없다. 종류대로 다 들어갔다고 되어있다. 정한 것도 있고 부정한 것도 있다고 일부러 해놓았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함에 있어서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인격으로 승리한 교회는 모든 사람이 들어올 수 있다. 교리로 승리했다고 해도 아니고, 어떤 좋은 제도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아니고, 어떤 신앙적인 열심이나 아주 훌륭한 실행으로 세워진 교회라고 해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가령 유명한 신자도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빛을 남긴 사람들이 있다. 놀라운 사람도 있다. 조지 뮬러 같은 사람은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한다. 기도할 때마다 응답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것으로 교회의 기초석을 삼았다고 하면, 누구나 다 들어갈 수 있는가? 못 들어간다. 좋기는 좋지만 문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가로막는 것이 될 수 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분리가 돼버린다. 그렇게 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분리가 돼버린다. 그런데 인격으로 승리한 것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
문은 동서남북에 각각 세문씩으로서 이스라엘 12지파가 성막을 호위했던 것을 연상케 한다. 그때는 적이 있었음으로 호위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적이 다 사라졌다. 사방에 문이 있다는 것은 모든 방면에서 모든 적을 다 이겼음으로 사방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문은 동서남북에 각각 세문씩으로서 이스라엘 12지파가 성막을 호위했던 것을 생각나게 한다. 그때는 적이 있었기 때문에 성막을 사방에서 호위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적이 다 사라졌다. 인격 앞에 다 사라졌다. 사방이 문이 있다는 것은 모든 방면에서 모든 적을 다 이겼다는 말이다.
모든 방면에서 모든 적을 다 이겼으면, 우리 인생에서 모든 방면의 모든 적이 다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지 못하게 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는데, 그 문제들이 어떤 사람들은 동쪽에 있고, 어떤 사람들은 서쪽에 있고, 어떤 사람들은 남쪽에 있고, 어떤 사람들은 북쪽에 있다.
어떤 사람은 돈만 걸리면 인생 전체가 걸리는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할 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에도 완전히 걸려 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에게는 인생에서 그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시한 것에는 걸리지 않는다. 자기가 관심 없는 것에는 걸리지 않는다. 사람은 자기가 관심 있는 것에 걸리는 법이다. 동쪽 문에는 걸리지 않았는데, 서쪽 문에는 걸린다. 서쪽 문에는 걸리지 않았는데, 또 남쪽 문에는 걸린다. 그러다보니까 걸리지 않을 수가 없다. 사방에 문이 있는데 완벽하게 걸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여기는 동서남북에 있는 모든 적이 다 소멸되었다. 인격으로 서게 된다면 모든 적이 다 없어진다. 병들어 죽게 됐다는 것도 적이다. 배고프다는 것도 적이다. 가난하다는 것도 적이다. 너무 부자라는 것도 적이다. 온갖 것에 적이 다 있다.
말세에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삼킬 자를 찾고 있다고 한다. 사자가 돌아다니겠는가? 사람 속에 그 늑대와 사자가 다 있다. 사방에서 잡아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다. 그 사방에 있는 적을 어떻게 다 물리치겠는가? 한 가지 물리치면 한 가지가 안 되고, 또 한 가지를 물리치면 또 한 가지가 안 된다.
그런데 인격으로 승리한 자리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물러간다. 마귀는 3가지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유혹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로지 인격으로만 대답하시니까 마귀는 다 떠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천사들이 와서 수종 들었다고 했다.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무엇을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인격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정해주신 그 자리로 생각한다면 시험들 일이 없다는 말이다. 시험이 오기는 오겠지만 시험들 일이 없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없는 사람은 동쪽에서 밀리면 서쪽으로 가고, 서쪽에서 밀리면 남쪽으로 가고, 남쪽에서 밀리면 북쪽으로 가는 식이다. 인생 내내 살면서 계속해서 걸리고 시험에 들게 된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원망할 일이 생기게 된다.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는데 왜 그랬는가? 항상 그런 것이 많으니까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가 되는가? 안 된다. 잘 될 때는 되지만 안 될 때는 감사가 안 된다. 억지로 감사를 하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감사를 해야 되니까.
항상 기뻐하라. 어떻게 항상 기뻐해지는가? 안 된다. 기뻐할 때는 기뻐했는데 기뻐하지 않을 일이 생겨 기뻐하지 않는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다. 또 어떤 사람은 기쁠 때는 항상 슬픈 일이 생각나고, 슬플 때는 기쁜 일이 생각나는 사람도 있다. 이러면 항상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 아예 화끈하게 기쁠 때는 기쁘고, 슬플 때는 슬프면 좋다. 초상집에 가면 항상 결혼식이 생각나고, 결혼식에 가면 항상 초장집이 생각나면 골치가 아프다.
나도 옛날 젊었을 때는 이것이 지성인의 태도라고 생각했다. 웃는 사람들과 괜히 껄껄껄 웃고 있는 것은 천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웃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는 침착해야 되고, 침착한 사람들 속에서는 웃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어려서 그런 생각을 했다. 어려서 책을 봤는데 인생은 광대로 살면 안 되겠고, 나는 영원히 관객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관객으로서 구경해야지 내가 그 속으로 뛰어들면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살다 보니까 왜 미친놈 짓을 못했는가, 이런 생각이 든다. 한 번이라도 춤도 춰보고 했어야 하는 건데, 항상 구경만 하고 있었으니까 재미가 없었다. 나도 참 재미없는 사람이었던 같다.
사람이 웃을 때 웃고, 울 때 울어야지 웃을 때는 울 때가 생각나서 웃지 못하면 안 된다. 목사들은 참 어렵다. 왜냐하면 오전에는 장례식을 하고, 오후에는 결혼식을 해야 한다. 장례식을 하던 사람이 옷만 갈아입고 결혼식을 해야 한다. 장례식을 할 때는 같이 울어야 되고, 결혼식을 할 때는 같이 웃어야 된다. 장례식 하던 사람이 가서 갑자기 웃으면 저 사람은 이중인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참 곤란하다. 사실 이중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결혼식 하는 데 가서는 장례식 생각하고, 장례식 하는 데 가서는 결혼식 생각하는 사람이다. 미치더라도 한 군데 가서, 웃을 때 가서는 웃고 슬플 때는 슬프면 괜찮은데 항상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이 이중적이다.
모든 방면에서 적을 이기는 방법은 인격밖에 없다. 이런 문제는 특수한 문제다. 내 문제만은 다른 사람과 다른 문제다, 다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동서남북 12개 문 어디에 해당되어도 해당된다.
여러 개가 아니고 한 진주라고 한다. 한 진주이신 그리스도로 승리하면 다 승리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들어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승리다. 인격은 모든 방면의 대적을 다 이길 수 있다.
교회는 연합된 인격 사회이기 때문에 모든 방면의 적을 물리칠 수 있다. 인격이 중심이 되면. 다른 것이 중심이 되면 안 된다. 순모임도 잘 하다가도 또 어떤 다른 것이 중심이 되면 깨질 수도 있다. 오로지 인격만 중심이 되어야 되지 다른 것이 중심이 되면 깨져버린다. 왜냐하면 이해관계가 갈라져 버린다. 생각이 달라지고 취미가 달라지고 취향이 달라지면 또 갈라지게 된다. 오로지 한 가지만, 한 진주로 되어있는 문이 우리에게 지금 열려있다. 누구나 들어오도록 열려있다. 누구든지 나는 문이 없어서 못 들어가겠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문이 없어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다른 문을 찾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인격으로 된 진주 문은 항상 열려있다. 성경을 보니까 이 문은 닫지 않는다고 한다. 왜? 다시는 밤이 없으니까. 닫지 않는 문이다. 개선문을 보면 아치로 되어있지 문이 없다. 남대문도 문이 있고 경복궁도 문이 있다. 그런데 개선문은 문이 없다. 왜냐하면 승리자가 들어가야 되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도 마찬가지로 더 이상 문이 필요 없는 그런 문이다. 우리가 지금이라도 나만은 특수한 문제가 있어서 도저히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 진주 문을 찾아야 된다. 그 문은 우리를 위해서 항상 열려져있는 문이니까. 물론 어려울 수도 있고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가장 쉬운 일이 가장 쉬운 일일 수 있다. 가장 어려운 것이 가장 쉽다. 가장 꼴찌로 가던 사람이 가장 일등으로 갈 수도 있다.
인생이란 묘하다. 절대로 안 되던 것이 100% 해결될 수 한다. 문둥병은 절대로 고치지 못하던 병이었다. 그런데 알약 하나로 완전하게 해결되었다. 감기는 옛날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항상 약 먹어야 되고 재채기해야 되고 기침해야 된다. 문둥병은 절대로 고치지 못하는 병이었는데 알약 하나로 완전히 치료하게 되었으므로 얼마나 달라졌는가. 우리도 절대로 안 된다는 거였다. 그것도 진주 문으로 들어오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 인격으로 승리한 진주 문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이렇게 귀한 것을 주시고 물고기에 지느러미를 주신 것보다 더 귀한 것을 주셨는데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불신하고 그래서 무시하고 우리는 능력을 찾아서 바벨을 향해서 가던 사람들입니다. 내 필요를 찾아서 바벨로 가던 사람들인데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이렇게 불러주시고 당신의 개선문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이 승리하신 승리 안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승리를 거두고 누릴 수 있도록 주께서 더 축복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