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人間革命 27卷
第2章 正義 (63~66)
<정의 63>
야마모토 신이치를 둘러싸고 열린 ‘좌담회’는 1시간이나 달했다.
신이치는 미사와 미쓰나리와 가쓰코 부부에게 배웅을 받으며 미사와의 집을 뒤로했다.
신이치는 이날 저녁에 쓰시에 있는 미에문화회관에서 현 대표와 간담하고 미에지부 결성 18주년 기념 간부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자동차가 쓰시를 향해 달리기 시작하자 신이치는 동승한 미에현 간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연수원이 있는 지역의 지부부인부장 댁을 아십니까? 만일 실례가 안 된다면 잠깐이라도 인사하러 찾아뵙고 싶습니다.”
현 간부는 손목시계를 보며 대답했다.
“미에문화회관에서 간담회도 있어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만….”
“5분이라도 10분이라도 좋습니다. 상대방 상황도 있으니 현관 앞에서라도, 함께 제목 삼창만 해도 괜찮습니다.
오늘을 놓치면 방문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온 힘을 다해 하고 싶습니다.
실패하거나 패배하는 모든 일에 공통되는 원인은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극작가 세익스피어는 “좋은 기회를 헛되이 놓치는 것은 그 사람의 태만함이다”하고 썼다. 신이치도 정말이지 그렇게 느꼈다.
동행한 현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지부부인부장님은 다키가와 무쓰미 씨라고 합니다. 댁은 이 국도 도로변에 있는데 바로 근처입니다. 오랫동안 자택을 회합장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 자택을 최근에 신축했는데 선생님이 방문하신다면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신이치 일행이 무쓰미의 집을 방문하자 무쓰미의 시어머니와 초등학생인 딸이 집을 보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어머나, 선생님!” 하고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신이치 일행을 맞아 불단(佛壇)이 놓인 방으로 안내했다.
“그럼 신축기념 근행을 합시다.”
신이치를 중심으로 근행을 시작했다.
<정의 64>
무쓰미 지인부장은 방금 전까지 신이치가 방문한 미사와의 집에 있었다. 무쓰미도 미사와의 집에서 열린 ‘좌담회’에 참석했다가 끝난 뒤에도 모두와 함께 신이치의 지도를 서로 확인하며 결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곳에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신이치와 동행한 현 간부가 한 전화였다.
“무쓰미 씨 댁에 야마모토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바로 집에 와 주십시오!”
무쓰미는 놀란 나머지 수화기를 든 손이 떨렸다. 자택에 도착하자 시어머니와 딸이 신이치와 함께 한참 근행하는 중이었다.
근행이 끝나자마자 무쓰미가 신이치에게 말했다.
“오늘 일부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훌륭한 집이군요. 근대적인데다 시대의 최첨단을 걷는 인기 작가의 집 같습니다.
오늘은 갑작스럽지만 지부부인부장님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는데 집을 신축하셨다기에 신축기념 근행을 했습니다.
이제 바로 미에문화회관에 가야해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하지만 늘 제목을 보내겠습니다. 아무쪼록 건강에 유의하십시오.”
무쓰미의 집을 뒤로한 신이치는 차 안에서 현의 간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간부는 촌음을 아껴 모두를 격려하러 다녀야 합니다. ‘한집 더, 한집 더’라는 마음으로 힘을 쥐어 짜듯 묵묵히 개인지도를 거듭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의 꽃이 피고 조직이 강화되며 창가성(創價城)이 반석같이 구축됩니다.
달리 어떤 특별한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농작물을 재배하려면 괭이와 가래로 공들여 토지를 갈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몇 번이고 끈질기게 개인지도를 거듭해야만 인재의 대지가 일구어집니다.”
모두가 광포의 주역이다. 따라서 한 사람 한사람에게 조명을 비춰야 한다. 벗의 마음을 고무하는 격려의 대화를 거듭해야 한다.
<정의 65>
24일 오후 2시 반, 미에문화회관에 도착한 신이치는 마침 회관에 있던 인근의 회원과 기념촬영을 하고 함께 근행했다.
이어서 현의 대표간부와 간담하며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질문에 진지하게 답했다. 또 이동하는 차 안에서 단가 등을 지어 참석자에게 증정했다. 그리고 미에지부 결성 18주년 기념간부회에 참석했다.
신이치는 이 자리에서도 개인지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은 시조깅고나 난조 도키미쓰를 비롯해 많은 제자에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그 수는 어서에 수록된 것 만해도 매우 방대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광선유포를 위해 살아가는 제자 한 사람 한사람이 ‘어떤 일이 있어도 일생성불의 길을 단연코 끝까지 걷기 바란다. 그를 위해 최대로 격려해야 한다.’는 어본불의 대자대비의 발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혼자 있으면 신심의 촉발이나 동지의 격려가 없기 때문에 크게 성장하기도, 시련을 이겨내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가 개인지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격려의 대화 운동을 지속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또 세이쿄신문 등의 기관지와 잡지를 읽고 공부하는 것도 신앙을 계발하기 위함이고 신심의 정도(正道)를 걸으며 꿋꿋이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혼자만의 신앙으로는 진보도 향상도 부족합니다. 아견(我見)에 빠져 공전하는 신심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광선유포를 위한 화합의 조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하고 싶습니다.”
신이치에게는 매 회합이, 동지를 만나는 매 순간이 생명을 촉발하는 ‘전장(戰場)’이었다. 목숨을 건 승부였다.
왜냐하면 광포를 파괴하려는 악승들이 차츰 수를 늘려 어금니를 드러내고 사랑하는 동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이치는 다음날인 25일에는 무대를 간사이로 옮겨 이곳에서도 전 생명을 쏟아 동지를 격려했다.
마(魔)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치려면 끊임없이 정의를 사자후(師子吼)할수 밖에 없다.
<정의 66>
신이치는 간사이에서 창립자로서 소카(創價)여자학원을 방문하고 간사이 마키구치기념관과 효고문화회관 등을 차례로 방문했다.
가는 곳마다 동지와 기념촬영을 하고 간담회 등을 열어 심혈을 쏟아 철저히 격려했다.
4월 28일는 간사이센터에서 열린 입종기념 근행회에 참석해 풍설이 몰아치는 겨울과도 같던 창가의 역사는 법화경에서 설하는 “유다원질 황멸도후(猶多怨嫉 況滅度後, 원질이 많거늘 하물며 멸도한 후임에 있어서랴)”라는 글월 그대로이기에 학회가 바로 여설수행(如說修行)의 교단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또 29일은 간사이도다기념강당에서 열린 오사카여자부가 주최하는 합창제에 참석한 뒤, 이날 초대된 미나미킨키포교구 승려들과 간담했다.
이날 밤, 도쿄로 돌아온 신이치는 이튿날 30일, ‘78지바문화제’에 참석했다. 이곳에서도 문화제에 초대된 현내 승려와 대화했다.
신이치는 승려들이 참언에 속지 않고, 종문을 외호하고 일심으로 광선유포를 지향하는 학회의 마음을 이해하기 바랐다. 불자인 회원을 소중히 하기 바랐다.
신이치는 회장 취임 18주년이 도는 5월 3일을 향해 쉼 없이 열심히 달렸다. 거센 바람과 성난 파도가 이는 속에서 스스로 방패가 되어 동지를 지키고 ‘정의’의 깃발을 엄연히 내걸었다.
학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군부정부의 탄압이라는 대법난을 당했다. 전쟁 뒤에도 유바리탄광노동조합이나 오사카부경찰과 지검의 부당한 탄압과 싸웠다.
그리고 마키구치(牧口)와 도다(戶田) 두 회장이 니치렌불법에 귀의한 지 만 50년을 맞이하려는 지금, 본디라면 창가학회를 가장 찬탄해야 하는 승려 속에서 사신홍법(死身弘法)의 결의로 광선유포를 추진하는 학회를 악구(惡口)하고 그 불의불칙(佛意佛勅)의 조직을 교란하려는 악승들이 나왔다.
신이치는 때의 불가사의함을 느꼈다. 그리고 “외도 악인은 여래의 정법을 파하기 어려우나 불제자 등이 반드시 불법을 파하느니라”(어서 957쪽)는 성훈을 마음 속 깊이 새겼다.
‘모두 경문에, 대성인의 어서에 나온 그대로가 아닌가!
폭풍우가 몰아치는 기나긴 밤이 이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저편에는 밝은 해가 빛나는 비상의 아침이 기다릴 것이다.’